눈을 감고눈을 감고 앓다보면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 P82
어지러운 저녁들이제가 모르는 기척들을오래된 동네의 창마다새겨넣고 있었습니다 - P83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 P66
별의 평야군장(軍)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 P70
고분처럼 뚱뚱한 동네 엄마들이 깨어날 시간입니다 저는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 P73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 P49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P55
나는 혼잣말을 할 때면꼭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 P30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 P41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 P25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