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살아가기 위해 폭력이나무감각으로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는 것을 정당화하고 삶의 실패를 변명하기 위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이야기이자 무너뜨리는 이야기, 익사시킨 이야기, 정당화하는 이야기, 고발하는 이 - P13

•야기, 행운의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이야기 혹은 냉•소로 뒤덮인 이야기이다. 이때 냉소는 꽤나 우아해 보이기도 한다. - P14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술탄에게 죽임당한 숫처녀들은 술탄의 이야기 안에 있었다. 셰에라자드는 노동자들의 영웅처럼, 생산수단의 통제권을 쟁취한 다음,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길을 열었다. - P15

사람들은 알츠하이머병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왕성한 정신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반면, 인생의 반대쪽 끝에 있는 이 단계에서는 그 지식들이 해체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인 만큼, 두 단계는 다르다.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 - P24

하며, 텅 빈 자리만 남았다. - P25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에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문제 상황은 무언가 되어 가는 여정에서 꼭 거쳐야만하는 단계인 듯하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선택 사항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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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던 패주를, 기구치는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귀환 후에도 전쟁의 기억을 거의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환해서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의 생활이 시작되자,
그는 이따금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길 없었다.  - P134

예전의 온순했던 기구치를 알고 있는 아내는 너•무도 변해 버린 남편을 그저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 P134

그 자신도 어쩔 줄을 몰라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신음하며 울었다. 눈꺼풀 위에는 시체가 즐비한 그
‘죽음의 거리‘와 구더기가 코와 입 언저리를 스멀스멀 기어 다나는 아직 살아 있는 병사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는 그러한고통을 완전히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재판하려는 일본의 ‘민주주의‘나 ‘평화운동‘을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 P135

"난 말이제, 전쟁에서 돌아온 뒤로, 기구치 씨처럼 사회생활도 변변히 꾸려 나갈 수 없었다니께. 술이라도 안 마시면 속이갑갑한 기라. 내 맘 이해하겠지?"
이런 대답을 들으면, 그 처참한 지옥을 함께 체험한 기구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 P137

암담한 심정으로 진료실 창문을 응시했다. 그 ‘죽음의 거리‘
에서 구더기한테 파먹히면서 죽어 간 동료 병사들을 생각하면, 기구치는 자신과 쓰카다의 지금 인생은 여생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렇듯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전•우인 쓰카다가, 체력이 다한 자신을 버리지 않은 덕분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쓰카다를 도와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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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 하, 하."
구관조가 웃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겁쟁이인 그를 조소하는 웃음 같기도 하고, 격려하는 웃음 같기도 했다. 누마다는병실의 전등을 끄고, 지나온 인생에서 진정으로 대화를 나눈것은 결국 개나 새뿐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神)이 무언지알 수는 없지만, 만약 인간이 진심으로 이야기 나누는 대상을신이라 한다면, 누마다에게 신은 때때로 검둥이이거나 코뿔소새이거나 이 구조였다. - P121

그 깃털을 보고 있으려니, 매일 밤 그의 불평올, 힘겨움을 들어 준 새가 죽었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돌연 누마다는 그 구관조에게 "어떡하면 좋으니?" 하고 소리쳤을 때의 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 녀석………… 내 몸을 대신해 준 건가.)거의 확신에 찬 심정이 수술한 가슴에서 뜨거운 물처럼 솟구쳤다. 자신의 인생에서, 개와 새나 그 밖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얼마나 그를 지탱해 주었는가를 느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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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다는 검둥이한테만 말을 걸었다.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집안 사정을 털어놓지 못하는 그에게, 울적하고 괴로운 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상대는 검둥이뿐이었다.
"이젠 싫어. 밤이 되는 게 싫어.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릴듣는 게 싫어" - P108

검둥이는 가만히 누마다의 얼굴을 보고, 당혹스러운 듯 꼬리를 살포시 흔들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산다는 게 다 그렇습니다.) - P109

검둥이는 그때 대답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누마다는 당시일을 떠올리고, 검둥이가 분명히 소년인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빠 엄마랑 따로따로 살자고 말씀하셨어. 난 어떡하지?"
(어쩔 수 없습니다.)

검둥이는 그 무렵의 그에게는 슬픔의 이해자이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단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 P109

검둥이는 큰길을 돌고서도 여전히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이것이 누마다와 자신의 마지막 이별인 줄 아는 듯했다. 그런데 이윽고 지친 검둥이는 걸음을 멈추고, 떠나가는 누마다를 체념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조금씩 자그마해져 갔다. 그 검둥이의 눈길 역시, 누마다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그가 이별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리와 이 개를 통해서였다. - P110

(만약 그 무렵 검둥이가 없었다면...) 후일에 누마다는 생각한다. (내가 동화를 쓰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검둥이는 동물이 인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걸 그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개였다. 아니, 이야기를 나눌 뿐만 아•니라 슬픔을 이해해 주는 동반자라는 사실도 알게 해 주었다. - P110

누마다는 생명을 지닌 만물과의 유대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소년 시절, 검둥이의 존재가•부여해 준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워, 그에게 동화 속에서만그려 낼 수 있는 이상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동화 속에 - P114

서 소년은 꽃이 속삭이는 소리를 알아듣고, 나무와 나무의 대화도 이해하고, 꿀벌이나 개미가 저마다 동료들과 나누는 신호를 읽어 낼 줄도 안다. 한 마리 개와 한 마리 코뿔소새가 어른이 된 그의 어찌할 도리 없는 쓸쓸함을 서로 나눠 가져 주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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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코는 테레즈를 어둠의 숲속으로 데려가는 소설 속기차가 모리아크의 창작임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테레즈는 현•실 속 어둠의 숲을 지나간 게 아니라, 마음 깊숙이 어둠을 더듬은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고 깨달은 미쓰코는 파리에 남편을 남겨 둔 채이런 시골을 애써 찾아온 것도, 실은 자신의 마음속 어둠을더듬어 찾기 위해서였음을 알아차렸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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