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풍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덜 읽힌다는 『태풍』 은 1907년 1월에 발표된 그의 네 번째 작품이다. 과연 이렇다 할 큰 서사가 없어서 밋밋한 느낌도 들었지만 나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러 작품이 제목과 큰 관계가 없듯이 이 작품도 태풍과는 관계가 없었다. 굳이 들자면 ‘신자유주의라는 태풍’(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 속에서 ‘(인)문학이라는 나비’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나카노의 애인이 부르는 노래 속에만 ‘태풍’이 언급될 정도다. 여기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시라이 도야라는 가난한 지식인, 부유한 계층의 나카노와 대학 동기 다카야나기다. 시라이 도야는 문학자로서 중학교 선생을 하다가 세 번이나 옮기다가 결국 쫓겨 나온다. 나쁜 선생들이 학생들을 선동해서 도야 선생을 괴롭혀서 쫓아낸 것이었다. 시골에서 도쿄로 온 도야는 아내에게 이제 교사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시골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궁색한 살림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아내는 불만이 가득하다.
나카노는 부잣집에서 잘 자란 수재에 얼굴도 잘 생기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 줄도 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다카야나기는 그런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는 나카노가 부럽다. 가난하고 병약한 다카야나기와 나카노가 친구가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비백 무늬의 오시마 비단과 질이 떨어지는 지치부 비단’(P33)이 하나로 꿰매어 졌다고.
마치 어떤 운명적인 사건이 연결된 건 아닐까 상상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나카노는 부자 계층이지만 특별히 두드러져 보이지 않고 온화한 캐릭터로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에다 착하기까지 하다. 시라이 도야와 나카노는 자신의 세계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도야 선생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다카야나기 군이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을 위한 세상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도 원한을 갖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을 개의치 않는 세상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P126)
이 문장은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의 삶에 대한 태도가 확실히 드러난다. 가난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아내는 그런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한다. 결혼 생활이 이런 거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다면 시집을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든 남편이 자기 말대로 따라 주었으면 싶은데 쉽지 않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 몹시 아픈 다카야나기는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도야 선생을 만난다. 서로 같은 처지의 외톨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야 선생을 보면 왠지 힘이 솟는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조금씩 매료된다.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지 자신의 개인사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일곱 살 때 우체국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해서 구속되고 폐병으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자신은 죄인의 아들인데 죄악도 유전이 되는 거냐고, 숨이 막힐 지경이라며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워진 도야 선생은 과거는 잊어야 한다면서 당신은 앞으로 꽃을 피울 사람이라고 한다. 다카야나기는 꽃이 피기 전에 시들어버릴 거라고 하자 도야는 시들기 전에 일을 하면 된다고 한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외톨이고, 외톨이는 숭고한 것이라고.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고 창작을 하라고 권한다. 선생의 이 말을 들으며 다카야나기는 외톨이 선생의 얼굴에서 어떤 후광을 본다. 이보다 앞서 도야 선생의 집에 찾아갔는데 문학자에 대한 태도 등의 이야기를 듣다가 중학교 시절의 잘못을 사죄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친다. 도야 선생이 고코 잡지에 쓴 ‘해탈과 구애’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자 다카야나기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한편 생활이 곤란한 도야는 형님 댁에서 백 엔을 빌려 썼는데, 갚아야 할 기한이 되자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져온다. 그 바로 전에 그 형이 와서 도야의 아내에게 어떻게든 도야를 다른 일에 한 눈 팔지 못하게 하겠다고 작전을 짰지만 자신은 연설 약속이 있어서 형에게 갈 수 없다고 한다. 3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현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이 타는 아내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도야, 그 아내를 보는 마음이 답답해진다. 여기서 도야는 계몽적, 지사적 인문학자의 역할을 한다. 소세키의 육성이 많이 느껴졌다. 도야와 나카노라는 두 계층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 속에서도 부자는 학자를 존중해야 한다고 도야를 통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인격)의 본질을 성찰하고 이것을 수호해야 할 인문학의 투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야 선생의 연설이 인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모아 보았다.
‘자신은 과거와 미래의 연쇄입니다.’(P175)
“자기 속에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자기 속에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자기 속에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입장은 이런 점에서 명료합니다. 난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가? 난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의 생존의 의미는 이 셋 중의 하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P176)
바람이 강하게 부는 추운 날 무명옷 차림을 한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야유를 하다가도 열중하는 청중들의 모습이 보인다. 셋 중 하나에 생존의 의미가 있다는 거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는 삶이라면 만족스러운 삶이 되지 않을까. 도야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다.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출판을 할 수가 없다. 글이 도로 빚이 되는 셈이었다.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타락입니다. 현대의 청년은 도도하게 날로 타락하고 있습니다.“(P183)
“서양의 이상에 압도되어 눈이 먼 일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노예입니다. 노예로 만족할 뿐 아니라 앞 다투어 노예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이상이 발효할 수 있겠습니까?”(P183)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길을 걸어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과는 달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걸어냅니다. 방황하고 싶어도 방황할 수 없습니다. 혼이 이쪽, 이쪽 하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디까지 걸어갈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후략)”(P184)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 하는 길을 알고 있고,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 길을 걷는다는 말에 왠지 힘이 난다. 방황하지 않고 혼이 알려주는 데로 갈 수 있다는 이상의 길. 이것이 청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 이상의 길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여겨진다.
“어떻게 하면 학문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지를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물음은 없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학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학문을 통해 돈을 벌 궁리를 하는 것은 북극에 가서 호랑이를 사냥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P187)
“돈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학자와 언쟁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품격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좀 생각해 보는 게 좋아요.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병이 들었을 때는 의사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금화를 달여 마실 수는 없습니다.……”(P190~P191)
“학문적 능력이 있는 사람, 이치를 이해한 사람은 부자들이 돈의 힘으로 세상에 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통해, 학문을 통해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사회에 행복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장은 다르지만, 그들은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지위에 확고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후략)”(P191)
청중 속에 있던 다카야나기도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다카야나기 군은 폐병에 걸려 아픈 상황임에도 가장 크게 함성을 질렀다. 태어나서 이런 통쾌함은 처음이었다. 도야 선생은 학문이란 돈에서 멀어지는 기계라고 말하고 있었다. 돈을 벌고 싶으면 실업가나 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학자가 돈을 기대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상인이 학문을 목적으로 견습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돈과 학문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온 다카야나기는 각혈을 한다. 의사도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엄두도 못 낸다. 나카노는 그가 요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도 받는 것도 싫다면서 거절을 한다. 다카야나기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 나카노는 요양을 가서 그 작품을 완성하는 조건으로 돈을 쓴다면 미안한 일도 아니라고 제안을 하자 그것을 수락한다. 백 엔을 받은 다카야나기는 저잣거리로 뛰어 가다가 도야 선생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하려고 찾아간다. 거기엔 빌려준 돈 백 엔을 받으러 온 손님이 와 있었다.
다카야나기가 가진 돈이 딱 백 엔이고, 오늘 밤까지 갚기로 약속한 돈 백 엔을 어서 달라고 추궁하는 손님이 있다. 그런데도 도야 선생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다카야나기는 선생에게 쓴 원고를 보여 달라고 하더니 그 ‘인격론’을 백 엔에 넘겨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생을 괴롭혀서 쫓아냈던 제자였고 잘못했으니, 그 원고를 넘겨달라고. 이로써 요양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보다 더 위대한 인격론을 품에 넣고 나카노와 그 부인이 베풀어준 호의를 갚고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다카야나기가 선생의 원고를 넘겨받음으로써 돈의 힘으로 인간사를 결정하면 안 된다는 시라이 도야 선생의 가르침을 배반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해야겠다는 결심이 실현되었고 선행의 결말과 함께 인간성(인격)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가 언급되고 있었다. 꼭 읽어봐야겠다 싶어 검색해 보니 절판된 작품으로 나온다. 아쉽다. 일본작가인 팬이 지은 책 같은데. 나중에 원서로라도 볼 수 있으려나.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문학자란 원고지를 앞에 두고 숙어사전을 참조해가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그런 여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학문이 가능한 한 연구를 방해하는 것을 피해서 점점 인간 세상과 멀어지는 것과 달리 문학자는 자진해서 이 장애 속에 뛰어드는 것입니다."(P100)
병약하고 가난한 다카야나기는 그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도야 선생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문학자라는 두 외톨이가 열심히 창작열을 불태우게 되었을까. 도야의 입을 빌어 문학자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듯이 가난과 고독과 궁핍을 즐기며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을까. 그래도 둘이어서 덜 외롭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