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여자들의 삶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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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고 평가되고 있는 단편의 명수 엘리스 먼로의 작품을 두 권을 읽었는데 특히 디어 라이프를 읽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서 유일한 장편이며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작품이 무척 궁금했었다. 역시 단편과는 다른 느낌이다.디어 라이프에 나오는 단편들은 짧은 이야기 속에 절제된 감정 표현과 단호함에서 깔끔한 글이 느껴졌었다. 이 작품은 보통의 장편소설과 달리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플롯의 힘이 별로 강하지 않고 밋밋하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고, 어느 만큼이 허구일까 하는 것이다. 화자를 통해서 비춰지는 말이나 태도에서 작가가 세상을 읽어나가는 관점이나 성격을 가늠하고 추측해보는 은밀한 기쁨을 충족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여러 편의 단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웃 사람들, 가족, 친척, 친구들의 관계의 얽힘 속에서 바라본 욕망과 상실,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첫 이야기는 이웃사람 베니 아저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물고기를 잡는 아저씨를 도우며 와와나시강에서 개구리를 잡으며 야생의 자연을 즐긴다. 아저씨 전해주는 이야기, 그가 사는 공간은 물건으로 넘쳐나는 고물상을 연상케 하지만 거기서 아주 쓸모 있는 물건을 찾아낸다. 바로 신문이다. ‘가장 좋아하고 절대 지겨워하지 않았던놀이도구였던 것이다. 그것도 부모님이 보는 흔한 전쟁과 선거 이야기가 아닌,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 냄새가 나는 사건 사고들, 그야말로 델이 찾던 이야기의 소재였던 것이다. 어린 아이였음에도 작가의 꿈을 꾸고 나아가는 야무진 결심이 보여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주변의 어떤 것에도 어떤 소리에도-특히 어머니에게는 더욱 더- 고분고분하게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결코 순진하지 않은 꼬마 악당이라고 할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듯이 세세하고 솔직한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의 분위기도 감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 당돌함이 웃음 짓게도 한다.


 ‘젠킨스 벤드라는 친척 크레이그 종조부 집에서 놀다가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어느 날, 그 종조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는다.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을 배웅하던 종조부를 떠올리며 혼란에 빠진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면서도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두려워서 그랬을까. 보통 그 정도의 어린 나이에는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하기 마련인데. 역시 자의식이 싹튼 영악한 어른 아이를 떠올리게 된다. 이에 어머니의 입을 빌어 죽음을 이야기한다.


, 그보다 먼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상당한 비율이 물로 이루어져 있어. 순수한 물로. 사람을 구성한 물질 중에서 그리 대단한 건 없어. 탄소, 아주 단순한 원소들이야. 이런 걸 뭐라고 하지? 값으로 따지면 98센트나 할까? 그게 다야. 놀라운 건 그게 조합되는 방식이야. 조합된 방식에 따라 심장도, 폐도 있는 거야. 간도. 췌장도. 위도. 뇌도. 이게 뭐라고? 원소들의 조합! 이 조합을 조합하고-그 조합을 또 조합하고-그러면 인간이 되는 거야! 우린 그걸 크레이그 종조부, 네 아빠 혹은 나라고 불러. 하지만 다 이런 조합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런 부분들이 하나로 합쳐져 한동안 특정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거야. 그러다 한 부분이 기능을 멈추거나 고장 나는 거지. 크레이그 종조부의 경우에는 심장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크레이그 종조부가 죽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은 죽었다, 이렇게. 하지만 그게 우리가 그 현상을 보는 방식이야. 우리 인간의 방식. 우리가 늘 인간의 방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연의 방식으로도 생각한다면, 자연은 계속 흘러갈 뿐이고 죽어가는 건 그 일부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죽는 건 아니고 변하는 거. 변한다, 이게 내가 쓰고 싶은 단어야.(후략)(P90~91)



 나아가 미래의 죽음까지도 아우른다. 장기의 이식을 통해 누군가의 일부로서 계속 살아있게 된다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살아있는 몸의 상속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된다. 무거운 죽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그것을 가볍게 해준다. 그저 자연의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흔히 엄마와 딸의 사이는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여기서도 델과 엄마의 관계가 그랬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모르는 사이에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래서 제목이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오빠의 흔적이 별로 없던 집에서 종교에 빠진 어머니가 물려받은 약간의 돈을 모두 탕진하고 그로 인해 고생을 하고,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몰래 집을 나가 학교에 다니게 된 이야기, 어둠 속의 감금과 고통으로 시작해서 용기, 저항, 탈출로 이어지는 벅찬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과 현실 사이의 갭은 컸고... 아빠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이야기. 그럼에도 엄마는 자기만족이 되지 않았다. 신문사에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백과사전을 팔면서 자신의 지식을 표현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엄마가 싫었다. 그러한 엄마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은근하고 헷갈리는 비웃음을 보내는 늙은 대고모들의 표정을 엄마는 눈치도 못 채는 것일까. 델은 엄마의 괴짜 같고 무모하고 당혹스러운 면을 아주 조금씩 꼬집어 이야기하는 대고모들과 엄마 사이에서 부끄러움과 측은함으로 갈등한다.


 엄마는 자의식이 좀 강하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눈치다.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보였지만 술에 빠져 살거나 성적인 방탕, 욕설, 무계획적이고 무지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엄마의 삶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에겐 숨 막히는 삶일 수도 있을까. 엄마를 바라보는 델이 그랬다. 그래도 유일한 공감대가 있었으니 바로 지식욕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영리한 델과 함께라면 엄마의 백과사전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하여 동행을 하다가 델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자의식 때문에 중단이 되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내 생각엔 처녀들, 여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분명히 그래. 하지만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우리 손에 달려 있어. 지금까지 여자들이 한 건 모두 남자들과 관계된 것뿐이었어. 우리한테는 여태 그게 전부였어. 정말로, 집에서 기르는 짐승만큼이나 우리 삶이라는 게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머리를 쓰는 삶을 살면 좋겠어. 머리를 써야지. 마음을 딴 데 빼앗기지 말고. 남자 때문에-마음을 빼앗겨서-실수를 하게 되면 네 삶은 네 것이 아니게 될 거야. 모든 여자들이 늘 그래왔듯 너도 짐을 짊어지게 될 거야.”(P318)


 엄마의 걱정과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델의 속마음은 다르다. 여자가 피해를 입기 쉬운 존재이니까 자기보호가 필요하다는 충고임을 이해하지만 남자들과 똑같이 세상을 경험할거라고 결심한다. 못하게 말리면 왠지 더 하고 싶고, 거기서 벗어나 일탈하면서 느끼는 쾌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델이 보였다. 성적인 호기심을 누르려고 하지 않고 조금씩 알고 싶어 하고 조금씩 대담해진다. 엄마가 싫어하는 부분인데 들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가지지 않는다. 여린 듯 느껴지면서도 용감무쌍하게 나아가는 행동에 놀랍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실험정신을 충실히 경험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단짝 나오미와 비밀이 없을 정도로 친하지만 삶의 방향에 있어서는 관점이 다르다. 평범하게 살아가겠다는 나오미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결심한다. 한 쪽의 삶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삶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 삶이란 양쪽을 취하고 모두에게 익숙한 결혼이라는 것. 델은 그러느니 샬럿 브론테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오미와의 여태까지의 우정은 희미해지고 남자친구 제리 스토리와 모험 같은 사랑을 거쳐 또다시 가닛 프렌치와의 사랑에 이끌려간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가닛의 말과 태도에서 폭력을 느낀다. 어느 날,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서 빠져 나온다. 엄마의 엄마가 종교에 빠져 엄마에게 떠넘겨진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 떠올랐을까.


나는 마침내 지난날의 실수와 혼란을 끊어내고 마침내 환상이나 자기기만 없이, 비장하고 단순하게, 집을 떠나고 수녀원을 떠나고 애인을 떠나는 영화 속 여자들처럼 작은 짐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타면서, 내 진정한 삶이 시작되려 한다고 생각했다.

가닛 프렌치, 가닛 프렌치, 가닛 프렌치.

진정한 삶.

(P434)


 이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아련하고 싸한 느낌이 들었다. 멋지고 비장한 느낌과 더불어 희망이 보였다고 할까. 결국 델은 늪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한다. 오랫동안 성장통을 겪고 나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 없다고 한다.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못해 본 것을 후회하는 삶도 있고 용감하게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상처받고 깨지면서 멀리 돌아간 것을 후회하는 삶도 있을 것이다. 델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으며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지만 결국은 엄마의 말대로 언젠가는 정면에서 부딪치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과정에서 깨닫고 얻은 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고 정신은 강해지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10대나 20대 시절에만 방황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방황은 한 시절로 마감하고 안정된 채 살아가고 싶지만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삶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사랑과 욕망, 죽음도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자연스런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도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사람은 특히 여자는 작은 희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어떤 희망으로 채워가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정답이 없다는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일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때로는 소설을 읽지 않을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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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 농부 가브리엘과 그의 정원 - 우리가 몰랐던 조지아 소설집 우리가 몰랐던 세계문학
이라클리 삼소나제 지음, 김석희.임정희 옮김 / 마음이음(한국문학번역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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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소한 이름의 조지아는 들어본 적 있는 옛 이름 그루지야로 캅카스산맥에 위치한 오랜 역사 속에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켜 온 나라로서, 전쟁이 없던 세기가 없을 정도로 핍박을 받던 나라였음을 알았다. 지난 세기 70년 동안 소비에트 치하에서 살았음에도 그들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혼을 바쳤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압하지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 책의 작품들은 그러한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를 잘 살려낸 작품으로 보인다. 이 소설집은 조지아 현대 작가들 열 명의 작품이 실려 있고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와 닮은 힘들었던 과거 역사를 떠올리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문학의 역할이란 한 나라 역사의 증언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여행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게 다르지만 나는 잠을 제일 좋아한다. 음식도 좋다. 예를 들면 따끈한 수프나 스테이트, 으깬 감자 같은, 하지만 잠이 더 좋다. 특히 날이 추울 때 따뜻하고 아늑한 침대에 누워 평화롭게 자는 아침잠이 최고다.’(P19)


  첫 문장은 아직 어린 아이인 화자의 작은 소망이다. 그렇게 커다란 꿈도 아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열두 살 아이의 평범한 소망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늑하고 따뜻한 침대에서의 아침잠을 그리워하는 이 소년은 지금은 몰래 찾아든 지하실에서 골판지 상자 속에서 잠을 잔다.


 전쟁은 일상의 소박한 행복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심장발작으로 입원한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엄마는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떠밀려서 피난을 가게 된다. 모든 것은 엉망이 된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게 마련이다. 다정했던 엄마가 술에 찌들고 아이를 손찌검을 하고 급기야는 보고 싶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증오에 차서 아버지의 선물인 엄마의 결혼반지와 돈을 훔쳐서 달아난다. 생각해보면 수치스러움으로 진땀이 쏟아지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얼어붙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단짝 친구 추파카와 본드를 흡입하고 아프리카의 낙원을 지나는 얼룩말, 코끼리, 코뿔소, 수많은 영양들의 무리를 본다. 그러다 추파카는 죽어가고... 엄마의 반지가 눈에 띄어 아버지를 떠올리고 소년은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영악한 친구 고슈카의 도움을 받아 트크바르첼리로 아버지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아버지의 냄새를 추억하며 한껏 희망에 부푼 마음이다. 오직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소년의 여정을 따라가며 어느새 손에 땀이 밴다. 과연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소년의 도전과 모험이 담긴 짧은 성장소설 같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수상을 했고 작가에겐 최우수 각본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라 한다.


양계 농부 가브리엘과 그의 정원


 이 작품은 이라클리 삼소나제가 쓴 것으로 1990년대 조지아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가브리엘이 맞닥뜨린 삶에서 새로운 생활방식과 생존의 조건에 적응하려는 내면의 분투를 작가의 특색인 의식흐름의 기법을 바탕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래 관공서의 구내식당 수석 요리사였던 가브리엘이 양계 농부로 불리게 된 것은 나라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한 상황에서 희생양으로 몰렸고, 아내 굴리코의 권유로 닭을 키우게 되면서 부터다. 짧고 둥글둥글한 체격과 바지런한 성품의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었고 요리사를 택한 것도 음식을 직접 다루는 일이 그의 삶의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국의 상황으로 인해 그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일을 맞는 상황이 된다. 모든 시골 사람들의 꿈인 아파트 일층에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고 온갖 종류의 나무를 심고 어느덧 12년이 흘러 울창한 동산을 이루고 새들과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일구어낸 낙원에서 다른 사람들이 양계 농부라고 조롱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활에 만족하는 듯이 보인다. 나무들과 새들과 빛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정취와 풍광의 묘사가 나른하게 이어지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계절의 흐름을 오롯이 느끼며 지난날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카키색 재킷을 입은 노인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겨울은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외로운 외침 소리가 들린다.

-! 싼 장작 있어요!”

영혼의 눈에는 어두운 밤만 보이고, 차가운 심연 속에서는 떠돌이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려온다. 창가에 서면 갈라진 아스팔트 위로 노인과 당나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난로 연통이 창문 밖으로 삐져나온 흉측한 집들이 보인다. 바람이 창문을 때리고 잠시 잠잠해지던 바람은 곧 다시 휘몰아치면서 연통에서 검댕과 연기를 앗아가 교외 지역을 뒤덮은 먹구름과 뒤섞인다. 바람에 아스팔트 위의 빈 플라스틱 병이 뒹굴고 비닐봉지가 찢길 때, 어딘가에 몸을 숨긴 흰 비둘기들이 떠오른다.’(P91)


 하지만, 겨울이 깊어가며 점점 헐벗어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가브리엘의 차분한 마음은 더욱 가라앉고 심연 속을 서성이는 느낌이다. 혼란한 나라 상황이 계속되면서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감추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어서 봄이 되어 생명의 약동과 함께 가브리엘의 동동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의식흐름의 기법으로 쓰인 작품들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반복적으로 읽어보니 시적인 느낌이 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능직 무명으로 짠 낙원


 러시아 전쟁에서 아들 라티를 잃은 레나는 밤이면 아들의 망령을 만난다. 아들을 잃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는 없을 게다. 아들이 어릴 때 입었던 능직 무명 바지에서 다람쥐, 토끼, 야자나무를 오려내서 벽에 붙인다. 바지는 갈가리 찢어졌다. 행복하다고만 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전의 삶이 낙원이었던 것이다. 오줌 쌀 곳을 가리지 못하고 첫사랑의 남자를 보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조카 라우라가 가끔 와서 숙모를 보살펴주기도 하지만 힘에 부친다.


어때요? 레나 숙모, 거기로 갈까요?”

어디로?”

노파가 나지막이 물었다.

거기…… 멋진 집으로요. 내가 종종 들를게요. 따뜻한 음식도 가져갈게요. 거기 가면 친구를 아주 많이 만날 거예요! 그럼 나한테도 그 사람들 소개 좀 시켜줘요. 여기서는 지내기 힘들어요, 레나 숙모. 기억 때문에 괴로울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혼자서, ,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P150)


“(전략)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레나 아줌나, 라티의 영혼에 맹세컨대, 아줌마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내가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요! 난 이제 가요, 걱정하지 말아요……. , 제 걱정은 하지 말아요…….”(P154)


 라티의 친구 렉소는 레나를 만나는 것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죄인이나 다름없다. 맨 정신으로 레나를 마주대할 수가 없어 술에 취해 횡설수설 장광설로 늘어놓기 일쑤다. 전쟁의 비극으로 인한 상실을 누가 어떻게 몰아내 줄 것인가.


 형제


 첫사랑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 바르탄을 낳는다. 바르탄이 상속자가 될 것이기에 잔인하고 모진 성격인 남편의 온갖 모욕적인 행동을 견디어낸다. 8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면서. 남편이 이 사실을 모르리라는 여자의 생각과 달리 남편은 바르탄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참아내면서 아들을 미워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8년이 지나 자신의 핏줄 레오가 태어나면서 인물들의 운명은 극으로 치달린다. 레오가 태어나던 추운 겨울 날 바르탄은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얻어맞는다.


 자신의 피붙이라는 이유로 오냐오냐 키우면서 레오는 위아래도 못 알아보는 망나니로 자라난다. 사랑을 독차지하는 레오에 대한 시샘과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깊어간다. 특히 형보다 더 교활하고 뻔뻔스러운 레오의 행동과 비웃음은 레오를 두려워하게 되고 형의 지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오직 어머니의 위로만이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르탄에게 비빌 언덕이 더 이상 없다.


 그 차갑고 잔인한 아버지가 어느 날 몸져누웠는데, 두 형제는 각각 다른 이유로 기뻐한다. 레오는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생각에, 바르탄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병상을 지키며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희망은 사라진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어. 나는 더는 내가 아니니까. 내 이름도 이제는 바르탄이 아니야. 내 이름은 하나뿐. 인간이 내 이름이야. 나는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어. 하지만 내 의무와 내 양심은 어떻지? 어머니는 어떻지?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P197~198)


이 녀석은 몸속에 피가 얼마나 많은 거야?” 바르탄은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으려는 순간, 제수를 빼앗은 게 동생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수는 어머니를 대신했을 뿐이다.(P203)


 사랑의 결핍은 시샘을 낳았고 냉담함과 잔인함은 복수심을 키웠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은 양심과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애착의 대상을 잃고 낭떠러지에 선 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절절히 보여준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낼 줄이야. 구람 메그렐리슈빌리의 <형제>는 이 소설집에서 몰입감 최고의 소설이며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빚어진 상처와 부도덕, 증오와 복수심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낯 선 먼 나라 조지아의 문학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고 할까. 앞으로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조지아 문학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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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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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쿠르 상 수상작인 <달콤한 노래>를 읽었던 감흥이 남아있어서 그녀의 데뷔작이라는 이 작품이 정말 궁금했었다. 제목과 달리 사악한 발톱을 감춘 스릴러가 떠오를 만큼 오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제목이 주는 아련함과는 달리 내용면에서 이렇게 폭력적인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작품의 원제는 식인귀의 정원(Dans le jardin de l’ogre)이라고 한다. 유럽의 민담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그려지는 식인귀를 모티브로 한 식인귀의 정원에 놓인 하나의 인형이 되고 싶은아델의 이야기라고. 그것을 알게 되어 아델의 상황이 약간 이해는 되었지만 완전히는 아니다.


 

담배를 입에 문다. 샤워기 아래에 서니 온몸을 할퀴어 두 조각으로 찍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벽에 이마를 찧는다. 누구든 내 몸뚱이를 휘어잡아 이 유리벽에 내리쳐서 두개골을 박살내주면 좋겠어. …… 무리 한가운데에서 잡아 뜯기고 먹히고 온몸이 핥아졌으면 좋겠어. 그들이 내 두 젖가슴을 꼬집고 배를 사납게 물어뜯어줬으면 좋겠어. 식인귀의 정원에 놓인 하나의 인형이 되고 싶어.’(P12)



 도입부부터 심상치 않다. 아델의 내면이 어떤 생각으로 들끓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아델은 35세의 파리지앵이며 지성과 미모의 신문사의 기자다.(글쎄 지성은 좀 의심스럽다.) 가정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외과의사 남편, 세 살짜리 아들 뤼시앙과 살고 있다. 이만하면 겉보기엔 어느 정도 행복한 중산층의 삶이다. 격한 감정의 내면을 보면 섹스 중독으로 일그러진 그녀가 보인다. 그 상대방은 특정의 상대도 아니다. 특정의 상대라면 어느 정도 연애감정을 느낀 불륜이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만도 하겠지만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구한다. 직장에서, 출장지에서, 심지어 남편의 친구까지 얽히게 되면서 그 끝이 도대체 어디일까 싶을 만큼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가학을 즐기는 듯이 보이고 폭력의 수준까지 요구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아델은 기자라는 직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다가 지각하는 것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둘러대면 된다. 최대한 죄책감을 감추고 태연할 것. 그녀의 욕망은 오직 타인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남편 리샤르는 아들 바보다. 아델이 보기엔 부자끼리만 살아도 행복이 넘칠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델은 안도했을까. 이런 아델의 숨겨진 모습을 리샤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아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모르고 껍데기만 데리고 살 뿐이다.


 읽으면서도 많이 기가 막혔다. 아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것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델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왜 그럴까 하고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그냥 몸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였다. 결혼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런데... 조금은 자신의 행동에 뭔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결혼도 출산도 세상에 귀속되어 타인들과 그 외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P44)로 여겼던 듯하다. ‘방탕의 나날에 기댈 곳이 되어줄 피난처’(P45)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은 자신도 이것을 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과에 상담을 받거나 하는 등의 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지만 뤼시앙이 태어나면서 자신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돌보기에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무분별한 행동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엔 겁도 났겠지만 들키지 않고 해냈다는 것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조금씩 강단이 생겼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호텔방에 혼자서 엄마를 기다리던 공포의 기억, 피갈 광장에서 엄마와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공포와 욕망, 혐오와 에로틱한 흥분은 열 살의 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든 감정으로 각인된다. 또 열다섯 살의 아델에게 수치심과 성취감을 동시에 안겨준 비뚤어진 기행(奇行)이 있었다.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좋겠어. 리샤르,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야. 당신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믿어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 자신보다 더 힘센 어떤 게 날 움직여.”(P206~207)



 리샤르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날 오히려 단잠을 자게 되었다는 아델. 리샤르는 분노로 길길이 뛰면서도 아델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안 것은 아무것도 몰랐던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이 어떻게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스쿠터 사고로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이 되자 아델의 머릿속은 계산으로 복잡하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만약에 죽는다면? 빈털터리가 되어 끔찍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리샤르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생각인가. 심지어 남편의 수술을 담당한 의사에게까지 작업을 거는 아델이 아니었나. 그저 식인귀에 마귀가 씌였다고 하기에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참아내기 힘든 상황임에도 리샤르는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과 아델을 치유해 주기 위해 시골로 이사를 하며 환경을 바꾸는 등 어느 정도 노력에 성과가 보이는 듯하다. 이상하게 조용하게 살고 있는 듯한 아델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미심쩍은 마음이 생긴다. 아델은 잘 견디고 있는 걸까. 과연 리샤르의 바램대로 회복할 것인가. 매여 있던 아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식에 가게 된다. 이를 계기로 숨통이 트였는지도 모른다.


 

아델, 그게 끝이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끝나지 않아. 사랑은 인내일 뿐이야. 경건하고 열정적이며 폭군과도 같은 인내. 비이성적일 정도로 낙천적인 인내.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P293)



 괴로움을 안고서도 아델에 대한 사랑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엾은 리샤르는 아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과연 그녀는 돌아올 것인가.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아마도 아델의 외모와 몸짓에 사기당한 리샤르의 광기어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추천 평에 마리클레르는 왜 여성의 성을 순수함, 성스러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는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평에 맞는 이야기라면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여야 한다. 아델의 행위는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 가학이고 폭력이고 일종의 질병이다.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광기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절망에 이르는지 잘 보여주는 외침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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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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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아니 확실히 난 김인숙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참 이런 일도 다 있다. 아무리 그의 작품 제목을 들여다봐도 읽었다고 확신을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왠지 김인숙의 소설은 세련된 도시인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쓴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 그것은 나의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았다. 맨 처음에 실린 <델마와 루이스>를 읽으면서부터가. 의외였다. 우리 주변에서 친숙한 사람들이 등장인물이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실수도 하고 그것으로 인해 평생을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남아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이제라도 인연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차용했다는 제목의 <델마와 루이스>87,89세 할머니 자매들의 유쾌한 일탈을 그려낸 이야기다. 이렇게 연로한 노인의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환갑이 넘은 며느리와 아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동생 델마를 보러 미국에 살던 루이스가 며칠만 있겠다고 왔다가 아예 눌러 앉게 된다. 며느리의 분노는 남편에게 향할 수밖에. 그 공간의 불편함을 감지해서였을까. 자매는 어느 날 밤에 택시를 잡아타고 가출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모의하면서 마음은 들떴으리라. 모텔에서 하룻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고 매운탕집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사장의 지갑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진다. 자유분방한 미국에서 살던 영향인지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루이스는 델마에 비하면 무척 대범하다. 가출로 인해 며느리에게 격렬한 분노를 안겨 주었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신속하게 판단하고 움직인다. 델마와 루이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식당 여자 최영자와 딸 부영희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바다를 보러 간다. 매이고 매인 삶, 핍박 받던 삶에서 벗어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은 얼마나 후련했을까.

 

이 나이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최영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 손을 잡듯이 델마의 손을 잡았다. 델마가 그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나 쪽지 한 장만 달랑 놓고 떠나온 집의 자식들을 떠올려서는 아니었다. 델마는 자식 생각들을 그때 아주 잊었다. 첫 새끼를 낳고부터 그날에 이르도록 육십여 년이 넘게 자식 생각을 잊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P55)



 그 나이가 되면 걱정을 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서글프다. 노인이 되면 주변의 보호 아래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고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 반면 그것을 당하는 편에서는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울까하는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함박웃음을 웃는 그녀들을 보며 후련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달라질 것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가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아홉 번째 파도><내 이럴 줄 알았어>에 나오는 화자인 의 부모와 언뜻 닮은 모습이 보인다. <아홉 번째 파도>의 그 남녀는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뜨거운 열정도 없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삶,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끈끈이 엮어지지도 못하는 삶이 안타깝기도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가 휴대폰을 도둑맞돌아온 후 어느 날 클라우드에서 도둑이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빨간머리의 여자의 얼굴.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싱싱한 사랑,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환기시킨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더이상 '버티는 삶'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후자는 더는 같이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부모의 홍콩여행에 실직자인 아들이 따라가는데 극심한 태풍을 만나 호텔에 묶이는 상황이 나온다.



좀 무서웠지만, 사는 건 안 무서웠나, . 꿈속에서 울면서도 그렇더라고. 왜 우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죽는 게 슬픈가? 그럼 사는 건 안 슬펐나. . ‘그는 이처럼 기꺼이 굴복하는 삶을 다시 묵인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P252)

 

 어머니는 혼자 암 검사를 받고 암이란  암은 다 아니라고 했다는데 왜 아픈거냐고 아들에게 묻는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이 구절을 말하면서 지나온 삶을 토로하는 어머니가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지난날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내 이럴 줄 알았지. 결국 이럴 줄.'(P258) 마치 의지하고 싶었던 일이 엇나가서 실망스럽다는 듯이 쓸쓸하게 들린다. 특별히 행복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불행하지 않다면 그냥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어쩌면 모나지 않고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삶에 안주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하루하루 견디는 삶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일깨워주는 <넝쿨>도 있다. 형오와 형윤은 연년생 남매다. 형오의 군 입대를 앞두고 송별식이 있던 날 오빠의 친구 김정호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난장판이 된 분위기를 피해 밖에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 범인이 김정호 인 줄 알았는데 진범이 따로 있다는 소식은 그들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기억이 단번에 뒤엉키는 순간이다. 형윤은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고 형오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마치 형벌처럼 삶을 점령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그들.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삶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

 

토기박물관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67세의 미라가 65세의 제니와 토기박물관에 가서 발굴된 토기, 깨어진 토기가 온전한 모습을 갖춘 것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딸이 다니다 만 날수를 채우기 위해 대신 다닌다는 제니가 우습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은 그녀와 다르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대한다. 우연히 무너져 내린 제니의 울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질그릇처럼 다 깨져 더는 담을 게 없어진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깨어져 상처투성이인 삶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고만고만한 사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인생이 끝나지 않은 이상 삶도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을.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이 소설집의 표제로 붙은 이 작품은 3인칭 시점으로 선생의 숨겨진 딸 M과 연애를 했던 를 내세워 선생의 삶을 이야기한다. 삼십 년 전, 하룻밤의 실수로 영원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선생이 있다. 선생은 해안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여제자와 동행했는데 충동적으로 도중에 하차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고 여자는 딸을 낳는다. 덕망 있는 학자라고 주변에서는 오히려 여자에게만 돌팔매질을 하였다. 여자는 한복집을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는데. 선생은 여자와 아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침묵으로 일관한다. 학문적인 명성보다는 세상의 모든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연히 꾼 악몽쯤으로 여겼을까. 나쁜 꿈을 막아준다는 인디언의 부적인 깃털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절실했을까.

 

선생은 언제나 기차역이 바라보이는 여관의 창가에 서 있었고, 창문 바깥에서는 키 큰 나무의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P143)

 

분명한 것은 선생이 주기적으로 그 기차역의 여관방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혹은 그것을 꿈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 살아 있는 날의 한낮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날의 한낮으로 굴절된 꿈의 한 장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생은 언제나 가방 속에 깃털 하나를 지닌 채 나뭇잎이 흔들리는 창가에 서 있는 것이다.’(P147)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남아서 자신을 괴롭힌다. 이미 저질러진 일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졌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방관자처럼 회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의 뭇매를 맞은 여자의 삶도 얼마나 고단했을까. ‘꽉 붙들어! 꽉 붙들란 말이야, 이 늙은이야.”(P150) 사랑과 미움이 애증이 되어 메아리치는 삶이었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창피한 마음을 지닌 채 감당해야만 하는 삶, 그 고통을 마주하면서 끝까지 가야하는 삶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떠나 좀 더 용기를 내어 책임을 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선생은 떠났어도 남은 사람은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빈 집


 남편과 27년을 살아온 쉰다섯 살의 그녀가 나온다. 수더분한 남편과 이제는 더 이상 전율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 이 여자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아간다. 이삿짐과 화물을 운송하는 남편의 일터에서 젊은 애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어 중얼거리다가 택시기사의 핀잔을 듣고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도 그리 나을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남편을 경멸했지만 속으로는 사랑했다는 것을. 미웠던 마음이 문득 그에게 얹혀진 삶의 무게가 가엾음을 느낀다. 팔리지도 않는 쓰레기같은 영천 집을 고모부에게 상속받은 남편은 그곳에 자신만의 내밀한 기쁨의 공간을 구축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개 대신 또 하나의 백구를 키우면서. ‘소리 내는것을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답답함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치이고 치인 마음의 상처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남아있는 삶은 그렇게 자신을 위한 세계를 쌓고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정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으리라.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여기에도 그다지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이 나온다.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여 전처가 두 명이고 아들이 두 명인 남자. 두 명의 아들은 히어로를 좋아해서 히어로 영화를 보고 히어로 장난감을 사고 히어로를 이야기한다. 일 년에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어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도 혼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눈치를 보는 주눅이 든 아빠다. 아들에게조차도 히어로가 되지 못하는 남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특별한 쓸쓸함이 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 쓸쓸하고 달콤한 느낌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비루하기까지 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한, 아니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그걸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어쩌면 저 사소한 히어로들의 소그룹 하나쯤에는 끼어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P225)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중에라도 이룰 수 있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우리는 아주 사소한히어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힘들게 살기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내 눈에 비친 타인들은 모두 잘 나가는 인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한두 개의 아픔은 지니고 산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삶의 과정에서 시간은 아픔의 흔적을 조금씩 희석시켜 줄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는 인생이지만 우리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조금 나은 길을 안내받는다. 알 듯 말 듯한 친근한 이웃처럼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내밀한 감정 묘사는 웃음과 쓸쓸함, 따뜻한 연민을 품어주었다. 마치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어, 인생 다 비슷하지 않아?’ 라고 위로해 주는 듯했다.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 너머로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가교가 되고 한동안 울림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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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라이즈 아르테 미스터리 16
T. M. 로건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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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던 조셉 린치는 아내와 아들 윌리엄을 끔찍이 사랑하는 가정적인 남자로 나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이 태어난 후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일주일에 3일로 일을 줄였고, 커리어우먼인 아내 멀리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일까지 도맡아하며 한 조각의 퍼즐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을 데리고 오던 중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들의 눈에 엄마 차가 눈에 띄고 조셉의 눈에 익은 번호판 분명히 아내 멀의 차가 맞다. 테니스를 하러 간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부리나케 따라가다 보니 피리미어 인 호텔의 주차장에 이르고. 멀과 절친인 베스의 남편 벤 딜레이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끼어들어 아는 체 하기도 이상한, 이야기하려는 멀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으르렁대는 벤을 본 조셉은 윌리엄이 보게 될까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상황에 벤이 나타나고 멀을 봤느냐고 묻지만 벤은 잡아떼고는 오히려 화를 내며 몸싸움을 일으킨다.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공격적으로 나오는 벤을 뿌리치며 살짝 밀쳐냈는데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바닥에 쓰러진다. 귀에서는 핏방울이 흘러나오고. 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조셉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윌리엄은 천식 발작을 일으켜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벤도 급하지만 아들의 상태를 먼저 수습하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찾은 호텔 주차장. 온갖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벤에게 갔지만, 아무것도 없다. 벤도 그의 차도 조셉의 휴대폰도 사라졌다. 피 흘리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것은 조셉에게 잘 된 일일까. 분명히 안도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금세 빠져든다. 돌아온 멀에게 아까 보았던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호텔에 가지 않았다는 말에 조셉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내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만큼 조셉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한 조각의 퍼즐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던 조셉의 일상은 멀의 거짓말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휴대폰은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의 온갖 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셉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주차장에서 다툰 현장의 모습이 담긴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벤이 살아있기에 이런 짓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조셉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것도 같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되니까. 벤은 학창 시절 찌질이 였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앱을 만드는 기업가다. 그렇게 부자라서 아내 멀의 마음이 기운 것일까. 미심쩍은 마음에 조셉은 괴롭기만 하다. 결국 추궁에 못 이겨 벤의 회사 기밀 문제로 조언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멀의 사과를 듣기는 했지만 왜 자신의 계정에 그런 게시글을 올리는 것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베스는 괜찮은 것일까. 조셉과의 몸싸움 이후 흔적 없이 사라진 벤이 살아있거나 적어도 연락은 되어야 한다. 베스는 조셉의 집에 와서 벤이 물건을 부수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가 연락이 안 된다고 울먹인다. 또 조셉에게 위협적인 말을 하며 엽총도 하나 없어졌다고. 베스와의 대화에서도 이제 멀의 거짓말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릴 수도 없다.


 베스의 소식을 들은 조셉은 어딘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에 경찰에 알리고 벤을 찾아보자고 하는데. 멀은 경찰에 알리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2년 전 벤과의 실수를 실토한다. 이것이 그냥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아내는 불륜을 말하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하나씩 드러나는 더한 일에도 마음은 무너지지만 가정을 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조셉이 정말 안쓰럽다. SNS의 위력은 조셉을 교직에서 정직을 당하기에 이르고 힘든 이 상황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믿었던 친구 애덤마저 등을 돌린다. 어쩐 일인지 경찰도 조셉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된다. 시체가 없는데 어떻게 살인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가정을 이전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벤을 찾아야만 한다.


 위기에 몰린 조셉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하지만 변호사마저 조셉의 편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경찰이 너무 많은 증거를 확보해서 조셉에게 불리하니 자진 출두하여 협조하라고 조언하는 변호사에게 화가 나 미칠 지경이다.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이다. 압수된 조셉의 차 트렁크에서 벤의 혈흔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나. 누군가 조셉의 무덤을 파고 있는 건 확실하다. 벤을 만나기 위해 선덜랜드까지 찾아갔지만 흠씬 얻어맞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돌아온다. 범인이 누굴까. 머리가 똑똑한 엘리사가 게시글을 올리며 혼란을 일으켰나 생각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발신번호 없는 이 문자 메시지를 받은 조셉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벤은 살아있는 걸까.


 예상치 못한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놀라웠다. 그렇게 8일간의 조셉의 악몽은 끝났다.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철저한 계획과 음모를 꾸민 이들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억눌린 채 살아야했던 정신적 학대를 벗어나고 매여 있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모험이라고 해도 좋을까. 씁쓸한 마음이 든다.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겪어봐도 모르는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는 어떤 불신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살펴야 한다. 한 번의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요즘의 일상에서 페이스북, SNS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의 장이다.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알리고 사진을 퍼 나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 덜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문명의 이기를 악용하여 한 사람의 소박한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누군가 나의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거짓말은 언젠가는 탄로나게 되어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거짓말의 끝은 결국 자신이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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