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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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읽기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 제목에 ’~처럼이 붙어 있지만, 작가는 이렇게 읽는다는 뜻이지, 그것이 누구에게나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스로 자극적인 책‘, ’이상한책만 읽는다고 했다. 각자 상황마다 선호하는 책이 있고 관심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독자는 편협하다고도 했다. 이 말은 정희진이 읽은 책을 보며 위축감이 드는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준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가 이렇게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쫓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하는 차원에서 그중 관심이 가는 책을 몇 권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본문 내용은, <한겨레>에 게재한 정희진의 어떤 메모의 일부이며 서평이자 독후감이자 칼럼이자 비평이라고 한다.


1장 고통 2장 주변과 중심 3장 권력 4장 안다는 것 5장 삶과 죽음, 이렇게 다섯 가지 테마로 나누어져 있고 읽은 책과 그 소회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항상 강조하듯이 책 내용보다는 읽은 사람의 생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프롤로그에서 독서는 혼자 강을 건너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울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p18)

 



처음 본 순간에는 근사하고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내용을 읽고 나니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라 심층의 책 읽기에 관한 것이어서 더욱 공감했다. 여성학자로서 일반적인 독자와는 다른 책 읽기를 하고 있기에 사회적인 약자나 부조리한 제도에 대해 아파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으니 이러한 지론이 나올 만도 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어렵겠지만 관심 목록에 올린 몇 권의 책을 간단히 언급하며 리뷰하려고 한다.

 



1. 현기영의 순이 삼촌

 

학창시절 교과서에 익숙한 민족문학의 대표 작가다.

제목은 향토적인데 비인간적인 현대사를 담고 있다는 대략의 내용만 알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지면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다룬 문학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시 접하게 된 계기로 관심 목록에 올렸다.

 



2. 다자이 오사무의 이십세기 기수

 

일본의 천재 작가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반가웠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타입의 인간형을 좋아하지 않지만 읽는 이를 무장 해제시키는 그의 치열한 절망에 어깨부터 몸부림이 온다고. 그런데 검색해보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이십세기 기수는 나오지 않는다.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3. 이상문학전집1, 4

 

이상 시인 하면 <오감도>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난해한 시로 유명하다. ’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낯설지 않은 문장이다. 저자는 에이왁스(AWACS)를 언급하며 이상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수백 킬로미터 거리 밖을 볼 수 있어서 서울에서 평양 거리의 자동차 번호판까지 보인다는. 일제 강점기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민중, 그 상황에서 <오감도>가 나오고, 시에 은유, 메타포(metaphor)가 담겨있으니 난해한 건 당연하다. 더구나 일본어처럼 띄어쓰기도 없는 문장들이 반복되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이나 시인의 시작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시다. 1934년 이태준이 추천하여 30제 예정으로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를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중단되었다 한다. 그리고 오감도가 조감도(鳥瞰圖)‘의 오타라고 생각한 이들도 많았다 한다.

 



<오감도>에 대해 초현실, 절망, 환상, 난해, 공포, 아방가르드, 심지어 민족 독립을 위한 병법까지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저자는 공포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역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다행히 시편 한 권이 있었다. 지금 읽어도 역시 온전히 이해하는 건 무리겠지만, 시를 다루고 읽는 1권이라도 읽어봐야겠다.

 



4. 프리모 레비의 살아남은 자의 아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110개월 버티고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저서다. 수용소 이야기를 담은 책은 많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아닌가 한다. 레비는 어머니 등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수용소 트라우마로 우울증을 앓다가 1987411, 자택의 층계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까.

 



 

정희진 작가의 책을 기회가 될 때마다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평소에 익숙한 분야의 책만 읽기보다는 다양한 저자의 생각을 접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독서 내공과 글쓰기의 신장으로도 이어질 테니 말이다. 에필로그에는 다르게 읽기와 독후감 쓰는 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좋은 독후감을 쓰려면 다르게 읽기가 필수라고 했다. 물론 다르게 읽는다고 저절로 좋은 독후감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알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해도 같은 독후감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나만이 쓸 수 있고, 저자가 쓰지 못했거나 쓰지 않은 부분을 써서 새로운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지런히 읽고 써야 그런 경지에 다다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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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7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희진샘처럼 읽고 쓸수 있다면야... 하지만 넘사벽입니다. 그래서 정희진샘의 책의 저도 좋아하는거 같아요. 언제나 다르게 읽기에 대한 모범답안같다고나 할까요?

모나리자 2022-08-08 11:3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요.. 그래도 열심히 읽고 쓰다보면 조금씩 성장하겠지요.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건강 잘 챙기시고 새 한주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 2022-08-07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절대 같은 감상이 나올수는 없는거 같아요. 결국 감상에는 자신의 감정이 반영될수 밖에 없기에? 그런데 좋은 독후감 쓰는건 정말 힘든거 같아요 ㅋ

모나리자 2022-08-08 11: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상황도 경험도 느끼는 감상도 모두 다르니까요.
네, 잘 쓰려고 하면 더 잘 안 되는 것 같아요.ㅋㅋ
 

북반구의 7,8월, 뜨거운 에어컨, 무너지는 빙하・・・・・…. 무엇인가꼭 해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 계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살길이다. 여름 세 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고역이다. 30도 날씨에 생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잠드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개인의 기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말자. 레닌 동지도 동의할 것이다. - P212

<선악을 넘어서>(1886년)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으로 니체 사상 전반을 보여주는 주요 저작이다. 내가 읽은 판본은 영어권 최고의 니체 해석자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의편역본(1965년)을 청하출판사가 기획, 번역(1982년)한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오랜 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욕망의대상이 아니다."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글귀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다. - P214

역사적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상‘과 ‘왜곡‘은 타자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다. 어떤 사람에겐 성폭력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겐 성별화된 역사의 구조적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겐 고문과 도청이 업무상 착오지만, 국가의 본질로인식하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너의 경험은 사건, 나의 경험은 역사? 역사는 누군가의 에피소드일 뿐 보편적이지 않다. 사건과 역사의 구분은 폭력이다. ‘시맨틱‘한 용어로는 편집증(paranoid)이다. - P224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바바는 지구화를 다문화주의나 이국성이 아니라 혼성성으로 개념화한다.
우리는 백제가 일본에준영향은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왜 우리는 무균 상태이길 바라는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사용하면서,
불가피한 한자 병기가 그렇게 문제인가. 한글전용을 존중한다. 다만, 생각하는 것이다. 삶의 잡종성을. - P227

내가 아는 한 우울증에 관해 정치적, 학문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한낮의 우울》보다 잘 쓴 책은 없다.(다만, 성별과 우울증 부분은다소 빈약하다.) 하나의 문장을 고를 수 없는 책이다. 우울증의 직간접 체험자나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한 문장만으로도 독후감이 흘러넘칠 것이다. - P259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우울도 감기도 가벼운 병이 아니며, 질병으로서 우울증과 감기의 작동방식은 매우 다르다. 굳이 비유한다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 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면역력 저하다. 신체가 외부 자극에 대처할 수 없는 상태. 면역성이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생의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 P259

둘째, 공부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힘들다. 쉬운 일은 없다. 어떤 노동이든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쉽게 돈 버는 일은 딸바보 부자 아빠가 주는 용돈? 아니면, 합법적 횡령이나 투기?
대형 마트에서 피자 팔기?
문제는 세상 모든 일이 힘든데, 입시 공부류가 유독 사회적 보상이 크다는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성별 분업, 이주노동자가 주로 하는 일.....… 다양한 노동 분업 체계는 착취와 위계, 특정분야에 과도한 부와 명예가 편중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부가 가장 쉽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 P277

몇 해 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는 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이 득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 보기에도 비교적 ‘성공한‘ 인생들이다. 그들 역시공부 이야기를 제일많이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 P289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 P291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경기든 연주는 모든 몸의 플레이어들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부상과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언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를 해야 하는 데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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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아직 -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 재탄생’ 프로젝트
세오 마이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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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원서 30권 읽기를 계획하고 처음으로 읽은 단행본이 세오 마이코의 도서관의 카미사마. 대략의 내용은 문예반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거의 폐쇄된 학교도서관을 누구나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든 키요와 가키우치 군이 엮어가는 따뜻한 이야기다.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세오 마이코의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표지에 처음 만나는아버지와 아들의 부자 재탄생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보고 과연 일본스러운 소재와 캐릭터 설정에 재미는 보장하겠구나, 호기심을 안고 읽어나갔다. 도입부부터 코믹한 상황이 연출된다. 어느 날, 히키코모리 작가 가가노에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스물다섯 살 아들 도모가 불쑥 찾아온다. 유일한 연결고리는 다달이 양육비로 보낸 10만 엔과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친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려니 이상하네. 그래도 처음 만났으니까 괜찮겠지. , 내 이름은 알고 있을 테지만 나가하라 도모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P7)

 



첫 만남에서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에게 도모는 이런 말을 건넨다. 예닐곱 살 어린 아이도 아니고 스물다섯 살 청년의 넉살이 보통이 아니다. 시원하고 거침없이 늘어놓는 반말에 아무런 쑥스러움도 없고 원래 알던 사이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은 가가노다. 원래 천성이 밝게 태어난 건지 너무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깔깔 웃게 된다. 호칭은 끝까지 아저씨. 사 가지고 온 간식을 내놓으며 함께 먹자, 실제로 아들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셔? 하고 물어보자, 가가노는 어쩔 줄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 구김살이 없을까.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당분간 여기서 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얼마 뒤에는 새로 생긴 점포로 가게 될 테니 그때까지만 있게 해달란다.

 



대학 4학년 때 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덜컥 대상을 받게 되고 출판사에서 계속 새 작품을 요청해서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작가가 되었다. 소설가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다가 유일한 취미가 글쓰기였는데 직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학창시절 친구가 술자리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고 나갔다가 미쓰키를 만나게 되고... 석달 후 미쓰키가 찾아와서 임신을 했고 아이는 낳을 거라고 한다. 이제 내 인생 끝났구나, 전혀 마음이 없는데 결혼을 해야 하나, 뒤숭숭한 마음을 읽었는지 미쓰키도 매달리지도 않고 쿨하다. 둘이 합의하에 아기를 낳아 미쓰키가 기르고 나는 양육비를 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나 있는 친구한테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렇게 양육비를 대고 자라나는 도모의 얼굴을 사진으로 건네받으며 20년을 계속하다가 5년이 더 지나고 도모가 난데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25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동거가 시작된다. 아무도 안 만나고 소설 쓰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 히키코모리가 되어있었다. 완벽하게 혼자 살다가 누군가가 있다는 건 분명 신경이 쓰일 것이다. 도모는 원래 천성적으로 서글서글한 성격인 것 같다. 말도 잘한다. 아무래도 아비인 나를 닮은 것 같지는 않다. 내 소설을 읽으면서 이건 어떤 의미냐고 물으며 말을 건다. 어렸을 때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았고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안아 본적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내 아들이다. 아기 때 사진의 자신을 쏙 빼닮았다.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다 큰 어른이 되어 나타난 아들이라는 존재가 애틋한 정이 솟을 리 없다. 그런데도 둘은 마주하며 대화를 하고 먹는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익숙해진다. 물론 가가노는 아직도 당황할 때가 많다. 자기보다 어린데도 세상 물정을 더 잘 알고 청산유수인 도모가 신기하기만 하다. 더구나 독심술을 배웠는지 도모는 아저씨의 마음속에 맴도는 말까지 간파하여 말해주곤 해서 가가노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건가. 얘기 도중 미쓰키 얘기가 나와서 기가 센여자라고 하자, 도모는 결코 기가 센 부류는 아니라고, 몇 번 안 만났으면서 기가 센지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자 당황한다.

 



어느 날은 편의점 점장이 찾아오더니 도모에게 전해주라고 약을 가져온다. 감기에 걸려서 3일째 못 나오고 있다고. 그런데 가가노는 그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집이 넓기도 하지만 2층의 방 하나를 쓰고 있으려니 하고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일에 파묻히기도 했지만, 누구와 함께 살아본 적이 없고 사회성 제로인 가가노는 아들이 왔다고 해서 단번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둔감한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니 우습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도모에게 올라간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 도모는 자치회비 1년치를 내고 가입했으니 주민축제가 있으면 참여하자고 한다. 보통 70이 넘는 노인분들이 활동하는 걸 보고 가가노는 놀란다. 젊은 사람이 나와주어서 고맙다고 하자, 젊지 않습니다. 하다가 멀쓱해진다. 도모 덕분에 조금씩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그리고 이제와서 도모가 왜 나를 찾아왔을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역시 소설가의 촉수가 있었나 보다. 도모는 이런 상황이 소설이라면 어떨 것 같느냐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귀결되는 캐릭터가 패턴화된 최근의 몇 작품을 보고 위태로움을 느껴서, 혹시 아저씨가 죽으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미쓰키가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아들이 그런 사소한 일로 만나러 찾아오다니 나는 도모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도모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자문하며 자신의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득 부모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을 못 본 지 28년이 지났다. 내 얼굴을 알아보시기나 할까, 역정을 내시지 않을까. 초인종을 누르고 문앞에 선 가가노는 불안했지만, 부모님은 금세 알아보신다. 그런데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부모님을 뵙고 어떻게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걸까 당황스럽다. 그리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듣게 된다. 여러 개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랍게 한다. 재미있게 읽을 독자를 위해 숨기고 싶지만 딱 한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예쁘기만 하고 머리가 텅빈 여자로 생각했던 미쓰키는 가가노의 열혈 팬이었다. 가가노가 데뷔할 때부터 팬이라서, 너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더라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는다. 어머니가 쏟아내는 얘기 하나하나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끔찍하다. “네 최고 걸작은 네 자식이야.”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급반전을 이루며 행복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25년 동안 쌓인 이야기가 하루 이틀 밤에 끝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코믹하고 쿨한 소설이다. 결국 히키코모리였던 가가노를 다시 가족과 연결시켜 준 것은 미쓰키와 도모였다. 아이를 떠맡았다고 해서 원망을 품거나 신파조로 흐르지 않았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해주려는 미쓰키의 슬기로운 지혜와 넉넉한 마음 덕분이 아니었을까. 역자의 말에서 결손 가정이라는 폭력적 용어가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도 인상 깊었다. 겉으로 보이는 구조적인 결손만이 아니라 심리적 결손까지 포함한다면 이 세상에 결손 상태가 아닌 가족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다. 이제 세오 마이코의 작품을 두 권 읽었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인 그리고 재미와 감동까지 보장하는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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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07 09: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원서 30권 읽기 대단한거 같아요. 모나리자님 벌써 25권은 읽으셨을거 같아요~!! 따뜻한 책이군요 ^^ 최고의 걸작은 역시 자식 이군요~!!

모나리자 2022-08-08 11:30   좋아요 3 | URL
어머나! 쪽집게시네요~!
세어보니 딱 25권! 아직도 어렵네요.ㅋㅋ
감사합니다~오늘도 화이팅 하세요~새파랑님.^^

scott 2022-08-09 00: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원서 30권!
응원 합니다

전 게이고 옹 전작 독파 하다가

이제는 신간이 나오는 것도 무관심 ㅎㅎ


모나리자 2022-08-10 14:2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스콧님~

저도 게이고 원서 몇 권 가지고 있는데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안남.ㅎㅎ
그걸 붙잡으면 다른 책 못 읽어요.

그레이스 2022-08-09 0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응원합니다.
어떤 외국어로도 30권 독파 작심은 해본적이 없어서...!
그저 응원만!

모나리자 2022-08-10 14:3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30권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어렵다는 것!
그래도 꾸준히 하렵니다.^^

mini74 2022-09-08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축하드려오 ~ 추석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오 ~

모나리자 2022-09-08 13: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미니님~!!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08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축하드려요~~

모나리자 2022-09-08 13: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그레이스님~^^
풍성한 추석 명절 보내세요.^^

scott 2022-09-08 1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의 기적은
오늘?어제?
이달상 선정
축하 합니다
해피 추석 ^^

모나리자 2022-09-08 13:13   좋아요 2 | URL
맨날 기적같은 삶이죠~ㅎ
감사합니다~스콧님~
해피 추석 되세요.^^

이하라 2022-09-08 1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모나리자 2022-09-08 13:4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풍성하고 행복한 명절 되세요.^^

새파랑 2022-09-08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의 걸작은 아직인거 같습니다 ^^ 당선 축하합니다~!!

모나리자 2022-09-12 19:07   좋아요 1 | URL
어머나~제가 정신 없어서 답글을 이제 달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어느새 명절 연휴가 다 지나갔네요. 잘 쉬셨지요~
이제 일 모드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네요.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러블리땡 2022-09-14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25년만에 만난 부자이야기 재밌을것 같네요 ㅎㅎ 일본어 원서책 읽기 완전 멋지십니다 우왕

모나리자 2022-09-19 14: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주말 잘 지내셨지요~
네, 재미있게 읽은 책이에요. 감사합니다~러블리땡님!
새 한주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상쾌한 햇살이 쏟아지는 10월 오후, 어젯밤에 늦게까지일을 해, 오후 1시가 지나도록 잠자던 나는 초인종 소리에확인도 하지 않고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신문 구독권유나 택배. 요 몇 해 동안 찾아오는 사람은 그런 이들뿐이라 청년 아니, 아들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까・・・・・・ 자네가 그 뭐냐."
"그 뭐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바람에 무심코 시선을 피하자 ‘아니, 이런 아들이 찾아왔는데 왜 그렇게 허둥대?‘ 하며 청년이 웃었다. - P8

"프리터라고도 하지. 8월부터 이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얼마 뒤면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새 점포가 생길 텐데 그렇게 되면 그리 옮길 거야.
그때까지만 여기서 다니겠다는 거지."
청년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이후쿠 마르기 전에 어서 드셔‘라며 웃었다.
양쪽 입가가 살짝 올라갔고 눈에서도 웃음이 넘쳤다. 아무런 꿍꿍이도 없는 듯한 맑은 웃음. 그 여자와 똑 닮았다. - P14

"아저씨, 아니야. 난 원래 붙임성 좋고 요령 있게 태어난성격이야 엄마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고 아저씨가 보내준 양육비도 있어서 꽤 넉넉하게 지냈어."
너무 정확한 표현이라 내 마음의 목소리라고 착각할 뻔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 알았어. 그렇지만 네 멋대로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말하지 말아줘."
- P23

"그래, 역시 이상하겠지. 남자가 쉰 살이나 나이를 먹고도 혼자 살고 평일 대낮에도 집에 있으니. 무얼 하는 사람인지 수상하게 여길게 틀림없어. 남들 시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난나다. 생각은 이렇게 해. 그렇지만 이웃의호기심 어린 시선을 생각하면 숨죽이고 사는 편이………."
"아니, 너. 마치 내가 하는 이야기처럼 멋대로 혼잣말하지마."
- P37

어쨌든 나는 25년이나 아버지였다. 내가 참 무심하다는생각이 들어 놀랍기는 하지만, 아무리 같은 핏줄이어도 만나지 않고 살면 자기가 부모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지난주 수요일에 처음 실제로 아들을 만났다. 그렇지만 모르는 고양이가 집을 잘못 찾아 들어온 느낌이라 아들에 대한정 같은 게 솟아나지는 않았다. - P41

"그럼. 아저씨, 방에만 틀어박혀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 이야기만 쓰는 사이에 이런 당연한 것도 모르게 되었구나 큰일이네."
청년은 키득키득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의 말처럼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 청년의 저런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는데 고생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걸까?
이 청년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비로소 아들에게 조금 흥미가 생겼다. - P57

66
"그런가………? 그런데 너 생각보다 내 소설 많이 읽었구나."
"그야 당연하지. 난 매달 사진을 보냈는데 아저씨는 돈만 보냈잖아? 그러니 책을 읽는 수밖에 없지."
- P88

도모는 계속해서 단호하게 어린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녀석일 처리를 잘하는구나. 정말 나하고는 정반대다. 유전자만으로는 공통점이 이어지지 않는 걸까? - P105

"아, 그래. 그렇겠구나………. 어라? 그런데 넌 어떻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한 듯한 말을 듣고 깜짝 놀라자도모는 키득키득 웃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정도는 대부분 알아차려."
"그래?" - P130

사람을 대하는 내 안테나가 둔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둔감한 내가 소설을 쓴다니, 우습다. 잘난 척하며 인생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를 잘도 썼다. 나는・・・・・・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다. 도모가 아프다. 그것도 아르바이트를 빠질 만큼 아프다니 상태가 꽤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 P151

나는 어쩜 이리 한심할까. 눈앞에 나타난 도모는, 나를한 번도 본 적 없이 자란 도모는 엄청나게 건강하다. 그게답이다.
기가 센 미쓰키의 딱 부러지는 성격은 도모를, 그리고틀림없이 나까지도 지켜 주었으리라.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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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177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허승진 옮김 / 더스토리 / 202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3대 시성 중의 한 사람이고 독일 문학의 거장인 괴테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작품은 그가 스물다섯 살에 단 14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발표한 직후 전 세계에 자신의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테르 신드롬이 생길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베르테르가 입었던 파란 연미복에 노란 조끼를 젊은이들이 따라 입었으며 2천 건에 가까운 모방자살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청년 괴테의 질풍노도와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던 그의 육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하지만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괴테의 친구인 예루잘렘이 친구의 부인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얘기와 법무실습을 함께 했던 동료의 약혼녀 샤를 로테에게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체험을 조합하여 작품으로 형상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있다. 가장 친한 친구 빌헬름에게 쓴 편지로 177154일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멀리 떠나와서 잘 지내고 있다. 어머니께서 맡긴 일을 잘 처리하고 있고 곧 소식을 전해드리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있는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탄하며 묘사를 하고 있어서 눈앞에 선하게 이미지가 떠오른다. 편지들은 짤막짤막하다. 행복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으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낙원처럼 느껴진단다. 친구가 책을 보내준다고 했던 것에 대해 제발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장가라고. 끓어오르는 혈기를 잠재우려면 자장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천재 작가도 책이 물릴 때가 있다니.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왜 집을 떠났는지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가족 이야기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며, 본 풍경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청년시절 괴테는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적이라는 것, 그리고 권위적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귀족과 평민 계급이 뚜렷했을 텐데 평민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도와주거나 아이들에게 아주 인기있는 청년이었으며, 다정다감한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공직자 S의 초대를 받아 무도회에 갔다가 베르테르의 인생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춤 파트너 일행과 마차를 타고 무도회장으로 가는 길에 샤를 로테라는 여인을 태우고 가게 되었는데, 베르테르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춤 파트너의 고모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면서 이미 약혼을 했다고 알려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건만 아니나 다를까, 첫 만남에서 그녀의 자태,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행동에 온통 사로잡히게 된다.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이고, 언변이 뛰어나고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임을 주도하거나 춤추는 것, 어린 동생들을 다정다감하게 돌보는 세세한 마음까지 어느 것 하나 흠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든다.

 



늘 로테와 로테의 동생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대놓고 구애를 하는 건 아니다. 어느 날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이고 눈길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마치 어린아이 같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친구에게 털어놓는 부분은 그 천진함에 또 웃음 짓게 한다. 우연히 그녀와 손가락이 스치고 서로의 발이 닿기만 하면 온몸의 혈관이 요동을 쳤고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입김을 닿을 듯 할 때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쓰러질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격정적인 사랑의 열병은 점입가경으로 커져만 간다.

로테를 만나지 못했던 어느 날은 하인을 시켜 로테에게 다녀오라고 시킨다. 햇빛을 받은 야광석이 그 빛을 흡수해서 밤에도 빛을 발하듯이, 로테의 시선이 머물렀던 하인의 얼굴과 뺨, 윗옷의 단추, 외투의 깃에 닿았던 그 모든 것을 성스럽고 소중하게 여기며 행복해 한다. 이런 사랑을 어떤 여인인들 받고 싶지 않을까. 이 얘기를 전하며 만약에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묻는다.

 


 

그토록 로테를 사랑하면서도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로테에게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엔 로테는 베르테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베르테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깊지 않은 것 같았다. 약혼자가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우정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베르테르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자석산 이야기처럼 로테에게 빨려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알베르트가 돌아왔다. 누구에게든 평판이 좋은 그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알베르트에게 로테를 빼앗긴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그들과 우정을 나누어 간다. 겉으로는 우정이었지만 상당히 마음으로는 힘들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심정이라니. 이들은 베르테르에게 알리지 않고 결혼식을 했는데 서운한 마음에도 자주 왕래하며 어울린다. 자살에 대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자살을 나약함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하는 알베르트에게 강하게 반박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어서 기쁨, 슬픔, 고통 등 어느 정도까지는 견딜 수 있겠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파멸해버릴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느 선까지 견딜 수 있느냐하는 문제라고 말이다. 아마도 로테를 향해 치닫는 격정적인 사랑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피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은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면서 권총을 빌려달라고 했고, 로테가 건네주었다는 그 총으로 자살하게 되는 비극의 최후다. 처음엔 무덤덤한 듯 보이는 로테에게 빠져드는 베르테르가 좀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나 태도에 민감하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으로 알베르트와 결혼하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문학적인 공감대에서는 오히려 베르테르와 더욱 찰떡궁합이었다. 베르테르가 낭송해주는 오시안을 듣다가 로테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하고 두 사람의 마음은 동시에 통한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에서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간파하게 된다.

 



아마도 어머니가 정해준 운명이라서 거스르지 못하고 알베르트를 선택한 건 아닐까. 알베르트도 충분히 훌륭한 남자였지만 베르테르에게 향하는 마음을 뿌리치려고 노력했던 듯하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는 중세 시대의 사랑, 너무나 고전적인 사랑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나온지 2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사랑에 대한 의미와 관념은 많이 달라졌다,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청년 세대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기성세대들에게는 지난날 사랑의 의미와 추억을 되새기며 읽어본다면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줄 것이다.

 



계속 편지형식의 글이 이어지다가 후반부에 뜬금없이 편집자가 독자에게라는 페이지가 온다. 처음엔 이 작품 편집자의 목소리를 넣은 건가 했다. 그런데, 답장이 없는 편지글 형식의 소설 내용상 전달할 수 없는 사건들을 보고한다는 의미로 문학 표현 기법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너무 참신하지 않은가. 로테에게 쓴 편지를 알려주는데 베르테르의 죽음이 임박했고 죽음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더욱 긴장감을 자아내고 몰입감을 높여준다.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다니. 괴테의 천재성을 새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괴테의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작품부터 권하고 싶다. 청년 괴테의 순수한 마음과 생각을 마주한 듯 친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더구나 177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이라는 점도 소장 각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베르테르의 사랑 고백을 들었으니, 다음엔 60년이나 걸려서 나왔다는 파우스트를 도전해봐야겠다.

 





126

 

어디를 가든 그녀의 모습이 나를 따라다닌다네.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그녀의 모습은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는다네! 두 눈을 감으면 여기, 마음의 눈이 눈을 뜨는 머릿속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어른거린다네. 바로 여기에!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눈을 감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다네. 마치 바다처럼, 심연과도 같은 그녀의 눈동자는 내 앞에,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린다네.(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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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8-05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만큼이나 답답하기도 했는데 이들의 순수한 열정만큼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을것 같아요^^*

모나리자 2022-08-06 14:23   좋아요 1 | URL
네, 그래서 고전문학은 오늘날에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더위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미미님.^^

새파랑 2022-08-05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괴테는 베르테르의 슬픔 아닌가요? 그런데 전 괴테 작품윽 베르테르밖에 안읽어봤네요 ㅋ 파우스트 어려워 보이더라구요😅

모나리자 2022-08-06 14:2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파우스트 아주 오래 전에 조금 본적 있어요.ㅎ
역시 만만치 않을 거예요. 문학동네 2권짜리 갖고 있는데 한번 들춰봐야겠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