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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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지만 전쟁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전쟁은 곳곳에서 사람들을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독일에서 전쟁은 절망에 의한 폭력을 유발시켰다.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이라는, 묵직하면서도 흥미를 끌 만한 부제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원래는 전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세 번째에 해당하는 책.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과, 그 이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어떻게 설립하였는가 하는 것들이다.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써 있어서 약간 딱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저자는 요즘 나오는 여느 책들처럼 상업적인 목적에서보다는 학술적인 이유로 책을 집필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책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비유법조차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내용의 대부분은 또 다른 기록을 참고해 옮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인용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은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사실성을 한층 더 강조해 주는 느낌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 대학살이 단지 히틀러를 비롯한 몇몇 미친 독일인들만의 범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옮기기 위한 철도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일했으며,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의 강제노동은 양심 없는 독일의 기업가들에 의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더구나 전후에서 그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니, 마치 일본인들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 독일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인들에 의한 유대인 핍박과 학살도 엄청났다. 단지 독일에 협조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색출해 죽이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여러 오스트리아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지휘관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5,090명의 전범 가운데 절반인 2,499명이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들은 나치 친위대 소속 말살부대의 1/3이었고, 6개의 죽음의 수용소 중 4곳을 통제했고, 60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 중에 절반 가까이를 학살했다. 루마니아 인들도 못지않아서, 창고 속에 유대인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2, 3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이는 등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자칭 문명국가라고 하는 유럽인들의 잔학성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이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나치에게 도움을 주기를 거부했고, 벨기에인들은 나치의 시도에 저항하기까지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총파업까지 일어나기도 했다.(이에 비해 우리나라 노조들의 파업의 명분이란..) 핀란드와 덴마크인들도 유대인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었다. 

        영국도, 미국도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급격한 유대인의 유입으로 자국에 일어날 혼란을 우려해서였다. 결국 자국에 예상되는 피해를 이유로 그들은 수 백 만 명의 죽음을 외면했던 것이다. 



        왜 유대인들은 저항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상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려 600만 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눈에 띄는 저항을 하지 않는다. 왜? 

        저자는 유대인들이 저항정신을 상실하고, 타협만을 추구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지적한다. 수 천 년 간의 박해로 인해,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타협이 더 큰 유익을 가져온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홀로코스트도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저항정신의 상실이라.. 한 번 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두뇌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점과, 지나친 낙관주의, 일부 지도자들의 민족배반 등을 또 다른 이유로 꼽는다. 


        홀로코스트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일 것이다. 한 인간의 광기와 이기심과 증오심 때문에 그것을 막지 않고 도리어 협조를 했던 얼마의 사람들이 무려 600만이라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 인간은 과연 얼마나 악한 걸까. 인간들은 그 때에 비해 지금은 과연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그러한 인간의 잔학성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변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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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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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특별한 쾌감은 글을 쓰고 있는 손에서 일어난다오.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지.

손은 자기가 창조해야 하는 것을 창조해낼 때

기쁨에 소스라치며 천재적인 기관으로 변신한다오. 

 

        소설 제목이 특이하다. 살인자의 건강법이라... 살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들을 써 놓은 것인가? 의학백과사전 유의 책일까?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에 여러 기대감을 가지고 뽑아 든 책이다. 

 

        소설은 어떤 작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프로텍스타 타슈. 타슈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위대한 작가이다.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암에 걸려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그를 취재하기 위해 사방에서 기자들이 몰려든다. 사슈의 비서는 그들에게 순서를 정해서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은 차례대로 작가를 만난다. 

       소설의 전반부는 다섯 명의 기자들이 타슈를 인터뷰하는 내용이다. 각 기자는 한 날씩 정해 타슈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타슈는 능수능란한 대화법을 통해 기자들의 질문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결국 그 대화를 통해서 기자들이 얻어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타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무능력한가 하는 점과 타슈의 천재성에 대해 감탄만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들은 전혀 타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기자들이 거의 맹신적으로 작가를 천재로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소설가를 천재로 떠받드는 것일까.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한 번 도 없는 사람들이, 더구나 그의 책을 몇 페이지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부르고 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섯 번에 걸친 인터뷰 시도와, 다섯 번에 걸친 실패. 독자가 이에 서서히 지루해할 만한 시점에서 아멜리 노통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작가의 소설을 모두 읽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싫어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작가의 기를 꺾어버린다. 이제까지 기자들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기만 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처음 대한 작가의 불순한 태도를 사과하지 않는다면, 인터뷰를 중단하고 가겠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타슈는 그녀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는지(아마 이때까지는 주눅은 아닐 것이다.) 흥미를 느꼈는지, 그녀에게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사과를 한다. 그리고 여기자의 인터뷰는 시작된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랐다. 아마도 작가의 스무 권이 넘는 책을 모두 읽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는 타슈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의 숫자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총 등장하는 여자들의 수와 작품의 수, 그리고 작품마다 등장하는 여자들의 수 등. 기자의 초점은 한 권의 책으로 모아진다. 타슈는 의도적으로 그것(아마도 ‘여자’라는 것과 그 소설을 결합시켜 생각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만, 기자는 집요하게 물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작업은 타슈가 남긴 한 편의 미완성 소설로 모아지게 된다. 작가는 그 소설을 집필하던 중 돌연 붓을 꺾고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칩거를 해 버렸다. 기자는 그 소설에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인터뷰의 주도권은 질문을 받는 입장에 있었던 타슈였지만, 이번에는 질문을 하는 여기자에게 있었다. 그녀는 여느 사람들처럼 타슈를 천재로 떠받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하는 말 가운데 들어있는 온갖 궤변과 비약, 모순들을 있는 그대로 펼쳐버린다. 그리고 그런 솔직함 앞에 타슈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못한다. 그녀는 능수능란한 화법과 함정, 유도심문을 통해 그 미완성 소설에 담긴 비밀을 타슈 스스로 고백하도록 만든다. 마치 탐정이 범인에게 자백을 받아내듯이, 그녀는 타슈로부터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비밀은 이제까지 타슈가 드러내었던 여성혐오증과 같은 특징, 그리고 앞서의 인터뷰에서 살짝 언급했던 내용들을 모두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사실 이 비밀을 알기 전까지, 타슈가 앞서의 인터뷰들에서 했던 말들은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 노인의 말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치 셜록 홈즈 식의 치밀한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는 여기자의 작업을 바라보는 타슈의 초조함과 (나중에는) 부끄러움을 아멜리 노통브는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한 번도 타슈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행동묘사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의 놀라운 요소. 아멜리 노통은 독자가 안심하게 될 때까지 충격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 읽고 나면 한 방 먹었다는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분이다.

 

 

        『오후 네 시』를 통해서 느꼈던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 번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오후 네 시』에서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상황의 모순성과 그로 인한 갈등을 실감나게 그렸던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서는 소설이론에 충실한 배경과 장면의 이미지를 사용하며 실감난 장면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어나갈 수록 점점 더 빠져들게 만드는 진행력도 역시나 훌륭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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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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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암세포는 자폐증에 걸린 위험한 세포이다.

그것은 다른 세포들을 고려하지 않고

불멸성을 헛되이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증식하다가

마침내는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린다.

 

        제목이 좀 선정적(?)이다. 왜 여공은 그런 ‘대수술’을 감행해야만 했을까. 그 ‘수술’이 이 책의 내용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등등 제목만을 보고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제목과는 상관이 없었다. 몇 년 전 읽었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의 증보판 격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제목은 이 '사전'에 실린 한 항목의 이름일 뿐이었다.

 

 

        이 책의 원판이라고 할 수 있는 앞서의 그 ‘백과사전’이 일반적인 백과사전 류의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름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온갖 분야의 잡동사니 격의 지식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수집책과 같은 책이다. 이 책 역시 그 책의 증보판인 만큼 동일한 설명이 가능하다. 저자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사방에서 보고, 듣고, 읽었던 각종 지식들 가운데, 저자의 기록욕구를 특별히 자극할만한 주제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전 판의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군데군데 생각을 좀 하도록 만드는 항목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저자의 다른 책에서 거의 대부분 한 번쯤 언급했던 내용들이라 그 내용들에 관한 생각들도 한 번 해 본지라,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류의 책을 통해서는 베르나르 특유의 풍자와 비꼬기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어서,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몰입할 수 있다. 베르베르의 글쓰기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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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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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자여, 그대는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세계와 우주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독자에게 말을 거는 책이다. 수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책 자체가 그렇게 하고 있다. 아예 책은 독자를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자신과 대화를 할 것을 요구한다. 책은 마치 여행 가이드가 여행자를 인도하듯이 독자를 여행지로 인도한다. 그 여행은 기차나 버스를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행이다. 공기, 흙, 불, 물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독자는 이 세상과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베르나르가 또 한 건 올렸구나 싶은 책이다. 독자는 책과의 대화를 통해 정신의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정신의 흐름에 따라 글을 써 내려가는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심리주의적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정신의 흐름을 유도하는 책이니, 뭐라고 해야 할까... 복잡하다. 

        책은 ‘상상의 힘’ 혹은 ‘명상’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서술로 일관한다. 이는 라마승들의 참선에 대한 서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저자에 따르면, 신도 지도자도 필요치 않다. 오직 자신의 정신의 힘이 모든 것을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힘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다. 자신의 내부에 안락한 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고달픈 삶에서의 피난처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문제의 해결책이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약물이나 컴퓨터 프로그램, 고행 등을 이용해 그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책은 단지 정신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동양적인 선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부분이다. 저자 자신은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의 내용은 특정의 종교나 뉴 에이지와 같은 사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책의 전체에서 묻어나오는 뉴 에이지적 요소는 감추려야 감출 수 없을 것처럼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뉴 에이지 명상법 실천편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의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힘과 가능성을 제대로 잡아서 대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번뜩이는 생각에 놀라게 된다. 과연 글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책의 곳곳에 나오는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적 시각 역시 베르베르 특유의 날카로움이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띄고 있는 사상적 경향이 여러 면에서 내가 가진 것과 충돌을 일으키기에, 책의 문학적 시도 외에는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는 싫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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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 DVD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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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물들에게 겪게 했던 것을 우리 자신이 겪고 있는 거야"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 상자 같은 곳에 한 남자가 갇혀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여자가 또 그 상자 안으로 떨어진다. 그 둘은 그 곳에서 처음 만났다. 남자는 화장품 회사의 연구원이고, 여자는 서커스단의 호랑이 조련사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너무나 낯선 곳에서 만났다. 그 곳은 어디일까? 왜 그들은 그 곳에 있는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착상이 반영된 글들이 있었다. 때문에 책의 극 초반부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너무 잦은 설정이 아닌가 하고, 반전(?)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같은 설정이었다. 그들은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사육 상자' 안에 갇힌 것이다. 


 

        일견 무슨 황당한 설정이냐고 반문을 할지도 모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점은 그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베르나르는 이 책을 통해 ‘어려운 이야기꺼리’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에 관한 논의를 시도한다. 

        상자 안에 갇힌 두 사람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상태의 변화, 그리고 그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그리고 인류의 모험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논의는 그들을 사육하던 외계인들이 핵전쟁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장면을 텔레비전(논리상 난감한 소설적 장치다.)을 통해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 촉발된다. 이제 남은 인간은 그들 둘 뿐이다. 스스로 자살을 해버린 인류. 과연 그들 둘은 2세를 낳아 인류라는 종을 지속시켜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가가 문제의 일차적인 초점이었다. 



        결론은 저자로서도 명확하게 내고 있지는 못하다. 상자 안의 두 사람은 그 문제를 두고 모의 법정을 열어(다분히 프랑스인적 기질이 강한 인물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극이라니..) 결론을 내고자 한다.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재판’의 논리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상황의 변화를 전혀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변화의 요인은 감상적인 요소였다. 남자 주인공의 과거의 아픔을 들은 여자 주인공의 심적인 동요가 그들을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인류의 지속은 그런 논리적이고 당위적인 결론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과 심리적인 요소에 더 큰 영향을 받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다.) 



        책 전체에는 베르나르 특유의 유물론적인 관점과 반종교적인 관점이 남자 주인공인 라울을 통해 상당히 자주 표출되고 있다. 이 점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뉴에이지적인 저자의 또 다른 경향과 어떻게 생각하면 배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 제시는 시도했으나, 그 결론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부분이 약간 부족했던, 20% 부족한 느낌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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