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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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특히 대사 위주로 글을 쓰거든요.


        매우 유머러스한 책이다. 작가인 주인공(뒤에 그 주인공의 이름은 이 책의 저자인 아멜리 노통으로 밝혀진다)은 어느 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왜 폼페이와 같이 아름다운 도시만이 화산재에 묻혀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을까’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화산 폭발을 일으켜 화산재로 덮게 한 것이 아닐까. 현재의 기술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미래의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품은 채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은,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약간 황당하다. 그는 서기 2580년. 전신마취로 잠이 든 사이에 주인공은 어느새 미래로 이동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셀시우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주인공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주인공이 그곳으로 납치(?)된 것은, 폼페이에 관한 진실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품었던 의문은 사실이었던 것. 셀시우스는 ‘위험인물’인 주인공을 감시한다. 

        주인공이 만난 셀시우스라는 인물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지능이 199이라는데 강한 자부심(좀 과할 정도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고귀한 귀족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천민(셀시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미래는 지능지수로 신분이 정해진다)으로 여기는 주인공과의 대화를 계속 유지한다. 물론 철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말이다. 

        셀시우스가 설명하는 미래상은, 어느 정도 오늘날의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다. 빈부, 학력의 격차, 사회갈등 등. 소설에 나온 해결책은 한 가지 방향으로 귀결된다. 그런 문제들을 없애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고착화 시키는 방법이었다. 미래의 인간들은 빈부격차의 문제를, 가난한 사람들을 지구의 남쪽(아마도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남아메리카)에 몰아 두고 아예 그들의 존재를 잊기로 한다.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는 식이다. 학력, 사회의 갈등 역시 이러한 식으로 풀어간다. (발상의 정당함의 논의를 뒤로 한다면) 기발한 발상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나는 특히 대사 위주로 글을 쓰거든요.’라는 대사가 있었다. 그 말대로 이 책 전체는 대사로만 가득 차 있다. 배경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는 극히 절제가 되어 있고, 오직 주인공과 셀시우스 둘의 대사로 200여 페이지가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다는 감이 적은 것은, 역시 저자의 필력 때문이리라. 단지 대화로만 위기와 긴장, 초조함과 안도감을 주는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미래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들이 쉽게 빠지는 논리적인 오류 - 미래에서 과거의 어떤 사건을 바꾼다면, 그 사건은 현재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게 진행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미래의 인물이 어떻게 과거의 그 사건을 바꾸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는가 -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셀시우스의 입을 통해 현대의 양자역학 식의 이론을 제시하며 어느 정도 설명을 하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설명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장치일 뿐, 이야기의 주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큰 문제를 삼을 것 까지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인간세계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근본적인 목적이 아닐까 싶다.(그렇다고 딱딱한 논문식의 글은 아니니 너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쉽게, 재미있게, 그리고 빨리 읽어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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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르제 자니위스키 지음, 김명수 옮김 / 현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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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와 각이 없고, 단단하면서도 완만하고 부드럽게

서로 이어진 통로 내부의 표면들.

통로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연결되고 교차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모든 통로들이 목적지로 통해 있다.

네가 예기치 않게 머리를 부딪히는, 눈에 안 보이는 벽은 없다.

네가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 중에 하나다.

너는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교수가 쓴 소설. 이 소설을 출판할 당시 바르샤바 문과대학 학장이자 폴란드 작가 협회 부회장을 맡았다는 저자의 이력이 책에 무게감을 주기 위한 노력을 책의 첫 페이지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식이 가득 찼기 때문일까? 저자의 서문에 실려 있는 지나치게 설교적인 말투는 왠지 모르게 반감이 들도록 만드는 느낌이었다.(사실 서문을 읽고 난 후에야 저자의 이력을 읽게 되었다) 저자가 채식주의자이든, 극단적 환경주의자이든, 혹은 윤회론에 관심을 갖고 있든, 그것을 마치 강의실에서처럼 독자에게 굳이 책의 첫머리부터 강의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덕분에 책의 본문을 읽기 전부터 평점 1점 감점) 



    책의 내용은 쥐가 주인공인 특이한 소설이었다. 일명 동물소설. 물론,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은 뛰어난 풍자적 소설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우화나 동화 정도로 취급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인 ‘쥐’는 톰과 제리에 나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몸서리가 쳐지는 잔인하고, 끔찍하며, 혐오스러운, 바로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쥐를 묘사하는데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사용한다. 그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과정이 책에 매우 빠른 박자로 묘사되어 있다. 300여 페이지가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그리고 단지 한 마리의 쥐의 의식을 따라가는 내용의 소설이었음에도, 저자의 호흡이 워낙 가쁘게 진행되는 까닭에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책의 전체를 뒤덮고 있는 심리묘사, 상황묘사 등의 솜씨는, 번역된 문장들이었음에도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주인공 쥐는 왜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과연 어디인가.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쉬지 않고 질문을 했던 내용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대답은 아마도 그가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듯한 환상 가운데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어떤 윤회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결국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내용이 책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그건 저자의 생각일 뿐 내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그 두 가지의 주제 - 윤회론과 쥐의 일생 -가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쥐의 생태에 관한 매우 일반적인 관념들만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이런 일종의 밀착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한 가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쥐를 주제로 쓰려면 적어도 쥐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연구해야하지는 않을까. 

    저자 서문과 역자 후기를 보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풍자, 혹은 비판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던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너무 의도가 많아서 오히려 그 의도들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단지 쥐를 통해 그런 심오한 가치들을 드러내기엔 소재가 빈약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름대로는 전쟁, 빈곤 등의 배경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것들은 그다지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의도성을 지닌 글이었기에, 책 자체에 논리적인 문제가 생겨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가장 단적으로, 주인공 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의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그리고 그것이 도를 넘어서 인간들이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명칭들까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쓴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같은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정도의 상상력까지는 발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소재의 참신성이나 묘사의 기술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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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성냥갑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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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사설집이다. 그가 한 잡지에 연재하던 사설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사설집이다 보니 특정한 주제에 관한 깊은 사색이라기보다는 매우 상황적이고 논설적인 글들이 대부분이다. 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가운데 이 책은 첫 번째. 



        상황성이 매우 강조된 글들이기는 하지만, 역시 움베르토 에코답게, 그 주제는 매우 광범위했다. 최첨단의 인간복제에 관한 글부터, 고전에 관한 글까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부분은 물론, 추억과 회상에 관한 문학적 느낌이 짙게 느껴지는 에세이까지. 

        저자의 관심분야는 매우 넓었지만, 결코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결코 겉도는 글을 쓰지 않고 있다. 특별히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컴퓨터 매체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은 지나치게 무절제한 감이 있는 오늘날의 대중문화 현상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지적을 하고 있다.(비록 그 글들이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 전에 쓰인 글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의 지적 깊이만큼은, 너무나도 닮고 싶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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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 범우사상신서 10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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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케 한다.

 

1. 줄거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었다. 알베르 카뮈라는 인물을 단지 좀 어려운 소설가정도로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그를 부르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인 것 같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과연 이 세상에서의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 세상은 살아갈 만큼 만족스러운 곳인가. 인간들의 삶은 행복한가. 저자가 보는 세상은 이런 질문들에 부정적인 대답만을 준다. 삶은 의미 없는, 매우 부조리한 것으로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런 부조리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이는 부조리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하는 방법이다. 사실 의미없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그런 논리를 극단으로까지 이끌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도피일 뿐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두 번째의 방법은 종교와 같이, 현세가 아닌 내세에 대한 희망, 혹은 미래에는 부조리한 지금의 삶을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회피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의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세 번째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어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그 안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아 평생 동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했던(꼭대기로 올라간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오고, 그러면 다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작업이 영원히 계속되는 형벌이다) 시지프가 신들의 그러한 저주(부조리한 삶)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 감상평


    카뮈의 세계관에서 현실 자체는 부조리한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진화론(혹은 자연주의)에 기반한 유물론적(그리고 이성중심적) 세계관의 결론도 동일할 것이다. 모든 것이 물질일 뿐인데, 거기에 도덕이, 윤리가, 삶의 숭고한 목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껏해야 '유전자를 전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혀 내키지도, 감흥이 일지도 않는 비인간적 '목적(그것을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만 남을 뿐.

     나는 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왜곡되어 부분적으로는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 이 세상은 질서와 논리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이며, 최종적으로 그것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다른 만큼, 그에 대한 해결책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카뮈 식의 실존철학적 해결방법은 인간 내부에서 구원의 방법을 찾아낸다. 현실에서 초연한 채 자기 내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살면 족하다는 식이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단지 현실로부터의 자기 내면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뮈가 말하는 종교적 방식은 도피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카뮈 자신의 방법이야말로 도피다. 부언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현실도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적인 미래상이다.



    오랜만에 머리를 좀 싸매게 만드는 책을 읽게 되었다. 비록 그 내용의 전개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읽어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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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기적 - 마더 테레사의 삶과 믿음
T. T. 문다켈 지음, 황애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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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를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 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온갖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느님과 함께하시기를!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는 유명한 수녀의 전기이다. 통상적인 전기의 방식에 따라서 그녀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그리고 있다. 마케도니아 지방 출신(당시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던)의 한 소녀가 어려운 이웃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그 이후 인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전 세계에 약자에 대한 관심과 도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까지의 과정을 저자는 차분하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정신을 온 몸으로, 평생에 걸쳐 실현한 인물.

        전기를 읽고 난 뒤 든 가장 첫 번째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빈민, 나병환자들, 버려진 아이들을 그 자신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했던 마더 테레사. 무모할 것 같았던 그의 시도는 놀라운 기적들을 만들어 내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적극적인 실천 의지. 그런 것들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나와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테레사와 같이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면, 그의 종교가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그러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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