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동생 야고보 유골함의 비밀 - 찬우물 고고학 시리즈 1
허셜 섕크스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찬우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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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유골함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야고보에 관해 알려진 것 대부분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어떤 사람이 골동품상으로부터 유골함 하나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그 유골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랐던 소장가는, 어느 날 그 유골함을 저자에게 보여준다. 여러 고고학 관련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생크스는 그 유골함에 써 있는 글귀를 보고, 유골함이 매우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알아본다. 유골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동생(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이자,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야고보서의 저자로 알려진 바로 그 야고보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생크스의 주장이다. 

        과연 그런 명문 하나만을 보고서 그것이 정말 그 당시의 물건인지, 그리고 그 당시에 새겨진 것인지, 또 설사 그것이 진품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이르는 것인지 하는 산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저자는 매우 여러 장에 걸쳐서 그 유골함이 진품이며, 그 당시 요셉이라는 아버지를 두고, 예수라는 형제를 둔 야고보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증을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주장한다. 



        책의 두 번째 부분은 또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앞서 생크스가 유골함의 진위여부에 대한 글을 썼다면, 둘째 부분을 쓴 벤 위더링턴은 그 야고보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쓰고 있다. 내용상으로 앞의 것에 2배가 약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위더링턴은 성경과 그 이외의 몇 가지 참고문헌들을 통해 야고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 사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야고보라는 인물이 초기 기독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 그런 그가 왜 오늘날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등의 문제를 그리 깊지 않게 써 내려가고 있다. 

        한편의 ‘야고보 전기(轉記)’를 쓰듯이, 야고보의 탄생부터 그의 삶, 죽음까지를 시간의 순서에 맞추어 진행한다. 



        야고보의 유골함이라.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기 위한 참고도서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사실 내가 서 있던 서가에 있을 책이 아닌데, 왜 그 곳에 꽂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우리 학교 사서들 책 분류 기준은 뭔지..)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생크스는 이 유골함의 발견을 역사적인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책 제목에 ‘비밀’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의 이 발견의 중요성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사실 일부분 이런 예상은 맞았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그 유골함이 진짜 서기 1세기 경의 것이고, 명문 역시 그 시기에 새겨진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지나치게 장황해 보이는 ‘증명과정’은, 단지 나에게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에 불확정성이 얼마나 많이 개입되는가 하는 점과 인간들이란 다른 사람이 좀 좋은 것을 찾아냈다고 하면 그에 대한 시기심과 의심이 얼마나 놀랄 만큼 잘 발휘되는가 하는 점뿐이었다. 뭔가 발견되었다고 하니까 하나같이 나서서 ‘그건 가짜요.’라고 외치며 이름을 내보려고 하는지. 



        사실 이 유골함의 발견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선 생크스가 참고한 통계학적 자료들은, 솔직히 말하면 지나치게 짜 맞춘 듯한 느낌이 든다. 요셉이라는 아버지와 예수라는 형제를 가진 야고보라는 인물이 몇 명이나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하더라도, 그 유골함은 그 이상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다. 

        저자들은 그 사실을 통해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밝혀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믿음’에 관한 문제지, 이런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극단적으로, 야고보가 예수의 친동생이었다라고 쓰인 글이 발견되더라도 그 신빙성을 쉽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또,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내용인 야고보의 일생에 관해서는 더더욱 알려주는 것이 없음은 분명하다. 책에 나온 것처럼 유골함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부유했다거나 하는 주장은 옳지 않고(유골함은 상당히 싼 가격이었다.), 그 유골함이 정확히 어디서 밝혀졌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죽음과 장례에 관련된 어떤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2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유골함의 발견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했다기 보다는, 이런저런 고대의 문서들과 현대의 주석가들의 글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을 뿐이다. 요컨대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왔다기보다는 이미 알려졌던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도 좀 미안한 일이 될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이 발견으로 인해 ‘과거에 야고보에 관해 알려진 것 대부분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는데 좀 더 흥미를 갖도록 만든다면,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영향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후반부의 내용들은 비록 유골함으로부터 직접 추론한 것들은 아니라고 하나, 야고보라는 인물에 대해 제법 상세하고 일관된 정리를 하고 있다. 기록된 자료들도 제법 여러 권을 찾아가며 쓴 것처럼 보인다. 야고보라는 인물에 관해 알고 싶으면 책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대포장된 면만 아니라면 무난한 느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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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복음과 서구 문화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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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인해 밝혀진 실제 세계는,

목적이 아니라 인과율 중심의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40년 가까이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 그런 인물이 쓴 기독교 변증서는 어떤 모양일까? (적절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시는 분들에게 신학적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선교 사역이라는 것이 워낙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일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으며 연구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35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선교 사역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그 사역의 고귀함을 인정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내용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가졌었다.(모두가 이전에 뉴비긴을 몰랐던 내 무지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좋았다. 

        책의 주요 내용은 현대주의에 물든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우선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고(1장), 현대 사회(특별히 서양근대사회)의 기초적 전제들을 검토한 후(2장), 그에 대응을 했던 교회의 반응들과 우리가 택해야 할 기본적 방향을 정리 한다.(3장) 이렇게 올바른 방향을 정립한 후, 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타당성 있는’ 논증을 소개한다.(4장) 복음은 단지 신앙의 차원이 아니고 사회의 실제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5장)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6장) 책을 마무리 한다. 



        왜 나는 이 책을 좋다고 말하는가? 저자에 대한 선이해가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오직 이 책의 내용만이 그런 평가에 영향을 주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탁월했다. 특히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흩트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집중력,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 이면에 감추어진 기초적인 전제들을 정확히 집어내는 날카로운 분석능력, 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키(key)로서의 성경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해 내는 능력 등이 그러하다. 

        저자의 말처럼, 서양근대사회는 결코 정상적이지 못하다. 죄의 영향 때문이다.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세속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과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바울의 오래된 설명(고전 5:10)처럼,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말한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분열을 겪고 말 것이다. 방법은 이 시대의 세계관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명백히 지적하고, 올바른 세계관으로의 ‘시각의 교정’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저자는 이 시각의 교정을 ‘회심’이라는 말로 부른다.(이 얼마나 탁월한 표현인가.) 

        현대 사회는 세계에서 ‘목적’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고, 오직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로 설명한다. 그런 눈으로 신앙을 바라볼 때,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시도가 이런 문제, 즉 적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고, 그 안경을 벗겨내는 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전개와 고찰은 불분명하거나 흐리지 않고 매우 선명하다. 



        책 내용은 매우 무게감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논리적 전개나 저자가 사용하는 어휘들에 담긴 함의가 지나치게 난해하지는 않다. 그래서 책을 읽어나가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일 것이다.(두려워하지 말고 사서 읽어보라는 말이다.) 

        저자의 이력 가운데 WCC의 주요요인이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매우 가끔 물음표가 떠오르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단지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특별히 그런 그리스도인 청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가장 크게 높임을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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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거룩한 삶의 실천 시리즈 4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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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싸우는 신자가 힘든 것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죄의 유혹의 강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죄와 결별하지 못하는 신자 자신의 죄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할 것이다. 비록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변한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수십, 수백 번 절망을 하기도 하고, 맹렬히 회개를 한 후에도 어느 샌가 다시 같은 죄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심정이란……. 

        이 책은 바로 그런 신자 안의 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 제목 『죄와 은혜의 지배』란 불신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을 다룬다. 과연 죄는 어떤 식으로 신자에게 접근해 그를 지배하는가, 신자가 반복적인 죄의 지배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신자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것이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서두름 없이 조목조목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죄는 신자 안에서 절대적인 지배를 이룰 수는 없다. 책의 후반부에는 신자 안에서 죄의 지배의 불완전성과 어떻게 하면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지를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유명한 청교도 존 오웬의 저작을 딱 한 번 읽어 본 경험이 있다. 학부 때 어떤 강의의 과제를 하느라 읽었던 책이었는데, 학부를 들어가자마자 읽었던 책이라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을 때였다. 아주 힘들게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참 책을 힘들게 써 놨구나 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책도 그 때 읽었더라면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끊임없이 죄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죄가 가져온 영향을 굳이 1, 2, 3 하면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죄는 그냥 나쁜 거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이제 10년 쯤 하게 되니까 그러한 좀 다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점이다. 저자는 죄의 문제를 매우 깊게 연구하고 파헤치면서, 조목조목 그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의 그러한 세밀한 연구는 독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죄의 요소들을 그냥 무감각하게 넘길 수 없도록 만든다. 그 무감각함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뿌리에는 어떠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지,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되고 있어서 책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보를 얻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책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좀 길다는 점과(때문에 내가 이 책을 선물로 주려는 걸 보고 신학생들한테가 아니면 다들 무리라고들 했다.)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 책의 내용이 깊으면 내용이 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보다 세밀한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책 자체는 가볍게 만들어져서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부피만 빼면 부게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사한 내용의 반복은 이 책이 애초에는 설교를 목적으로 작성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언급했던 내용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법. 때문에 저자는 자주 반복을 통해 이를 일깨우려고 한다. 사실 이 정도의 깊은 내용을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운 일이다. 일선의 목회자가 이정도의 깊은 영성과 지성을 설교에 담아 설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설교를 꾸준히 듣기를 원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단점은 오히려 감탄으로 바뀌게 된다. 




        죄와의 싸움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에게라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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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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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보다는 머리의 문제다.

조련사는 심리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국적인 환경, 조련사의 꼿꼿한 자세,

차분한 태도와 흔들림 없는 눈길,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가는 태도,

이상한 소리(예를 들면 채찍 휘두르는 소리나 호루라기 부는 소리)…….

이런 것들이 동물의 마음에 의심과 두려움을 심어주게 된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 처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그것은 동물들이 알고 싶어 하는 점이기도 하다.

만족한 이인자가 뒤로 물러서면,

일인자는 관객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소리칠 수 있게 된다.

 

        인도의 폰디체리라는 작은 마을의 동물원을 경영하는 한 사내. 그의 두 아들 가운데 막내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피싱(‘오줌 싸는’이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었던 파텔은 자신의 별명을 파이(π)라고 짓는다. 인도의 정치사정이 돌아가는 것에 불안을 느낀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을 정리하고 캐나다로의 이민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오른 가족은 큰 재앙을 맞는다. 

        배가 침몰해버린 것이다. 졸지에 파이는 구명보트로 던져지고 만다. 태평양 한 가운데서 파이를 제외하고 배에 탔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더욱 배에는 하이에나 한 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늙은 암컷 오랑우탄, 그리고 뱅골산 호랑이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슬슬 파이를 위협하던 하이에나는, 호랑이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잡아먹히고 만다. 이제 보트에 남은 건 파이와 리처드 파커(호랑이의 이름) 뿐. 

        파이는 그 가운데서 살아남고자 온갖 방법을 고안해 낸다. 배의 선창 안 있던 응급식량(고열량 비스킷)과 물이 담긴 깡통, 그리고 조난을 당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책 한 권. 파이는 호랑이와 한 보트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노와 구명조끼 등을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들어 보트와 줄로 연결한다. 그렇게 호랑이와의 위험한 동거가 시작된다. 

        구조의 손길은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파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생활을 한다. 파커의 먹이가 떨어지지 않도록(그랬다간 자신을 덮칠지도 모르므로) 낚시를 통해 먹이를 제공해주고, 간이증류기구를 통해 물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서서히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는 작업을 시작한다. 동물원장의 아들로 오랫동안 아버지의 일을 지켜봤던 그였던지라, 동물의 생리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무려 227일간의 놀라운 생존 사투 끝에, 마침내 파이는 멕시코의 해안에 도달하게 된다. 파이는 살아 남았다. 


        이야기의 초반은 파이의 회상 장면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가 살던 폰디체리가 얼마나 그에게 아늑한 곳이었는지, 그의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옛날이야기를 하듯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파이의 어린시절 만난 세 종교에 관한 부분이 심상치 않았다. 파이 자신은 카톨릭과 힌두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갖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잠시 난감해 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기로 결정한다. ‘얼마쯤이나 가겠느냐’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었다. 철저하게 세속주의였던 부모들은 종교에 대해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고, 파이는 종교를 자기 식대로만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둘 모두 종교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의 정신적 혼란과 혼동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파이에게도, 그의 부모들에게도 종교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시골풍경과 경험들이라 솔직히 약간은 지루하고도 졸린 듯 한 서술들이 끝날 즈음, 갑자기 소설의 어조가 달라진다. 배가 침몰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골의 중산층 소년의 아름다운 추억회상기에서 생존이야기로 변한다. 그리 넓지 않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 더구나 그 곳은 태평양이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이는 소년답지 않은 침착함과 현명함을 보여준다. 환경적인 어려움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파이의 모습은,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초반의 약간 지루한 듯한 서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 부분에 관한 작가의 묘사는 매우 생생했고, 힘이 느껴졌다. 

        표류가 길어지면서 파이의 심리에도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아무와도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정신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파커가 없었다면, 파이의 투쟁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 자신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호랑이를 길들이는 과정을 위해, 아니 생존을 위해 그의 두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고, 그런 긴장감은 파이로 하여금 일찍이 나가떨어졌을 수 도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역사발전의 동력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표류의 후반부에서 파이는 마치 정신착란에 이르는 듯 하다. 그 클라이맥스는 식충섬 이야기였다. 알 수 없는 섬에 도착한 파이는 그 섬에서 수많은 미어캣 무리를 본다. 그리고 섬의 군데군데 일정하게 파여진 호수들. 사실 지나치게 일사분란하고 규칙적인 그 섬의 모습에서 이미 그 섬의 심상치 않은 정체가 복선으로 깔려 있는 듯 하다. 밤만 되면 나무 위로 올라오는(본능과는 다르게) 미어캣들을 본 파이는, 그 섬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 섬은 하나의 거대한 생물로, 밤만 되면 유인된 물고기들을 산으로 녹여 섭취를 하고 있었다. 마치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이 환상적인 섬에 관한 이야기는, 파이의 정신세계가 잠시 혼란을 겪는 시기와 겹쳐져 서술이 되기 때문에 과연 사실로서 쓴 것인지, 환상으로 쓴 것인지 읽으면서도 잠시 혼란을 겪었다. 

        육지에 다달은 파이. 그리고 그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려는 해운사 소속의 일본인들. 그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빼어내어 자신들의 논리로 기록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파이는 오랜 표류생활로 인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아이로 비춰질 뿐이었다. 



         이야기의 전후에 실린 작가의 기조설명과 후기 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 소설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였다는 인상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이것이 움베르토 에코 식의 ‘속이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 소설의 성격을 쉽게 단정 짓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유이다. 작가는 이 책이 순수한 소설만이 아니며 사실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작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해 이겨내는 소년의 불굴의 의지를 이 소설의 주제로 삼은 듯 하다.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성취되었다. 독자는 어느새 소설 속의 파이와 일체감을 느끼고, 그의 고생에 함께 아파하고, 그의 성취에 함께 기뻐하게 된다. 그의 정신세계는 육체적인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성숙해 있기 때문에, 자칫 ‘아이의 생각’으로 인해 정신적 몰입도가 떨어지는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 짧은 소설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있는 감동의 요소를 깊게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만 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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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1 - 성경 속의 유대인들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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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님이 다스렸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의 율법이 통치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법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체제는 법의 통치와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이중적인 장점을 구현한 최초의 체제였다.

 

        이번 책의 이야기는 성경시대의 유대인의 역사였다. 지난번 책이 근현대의 유대의 역사라면, 이번 책은 고대 유대인의 역사였다. 책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던 중, 이제까지 내가 배워왔던 내용들, 그리고 성경과 많은 연관이 있을 것 같아 흥미를 끌었었는데, 이같은 흥미는 책을 읽어나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책은 성경시대의 유대인의 역사를 가능한 시간의 순서대로 일관된 논리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려고 노력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책 전체가 그런 노력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성경의 순서들이 아니라 ‘시간적’ 순서였다. 선지자들은 모두 뒷줄에 서서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로 직접 들어가 생생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시대 이후 중간기 시대, 그리고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시대까지의 이야기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유대 중간사를 다룬 책을 따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뒷부분만을 읽어도 상당히 훌륭한 수준의 유대 중간사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러 고고학적 발견들과 정황으로 볼 때, 성경은 역사적 기록임에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여호와 이레, 엘 샤다이 등의 '여러 신들'을 섬겼다는 주장도 다른 설명없이 제시되는 등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내용도 제법 보인다.  전체의 약 3, 40% 정도에 해당하는 이런 입장 차이만 감안하고 본다면, 이 책 자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저자는 성경의 이야기는 분명한 역사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약간의 재미와 서술상의 흥미를 가미한다면, 일반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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