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왜건, 인생을 달리다
시게마쯔 키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이제야 알았다.

믿는 것과 꿈꾸는 것은, 미래가 있는 사람만의 특권이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거나, 꿈이 산산조각 나거나 하는 것도,

미래를 차단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행복인 것이다.

 

1. 요약 。。。。。。。

 

     회사로부터 정리해고를 당하고 만 가장(家長) 가즈오. 하지만 가족으로부터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 따위는 기대할 처지가 못 된다. 아내는 바람이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지고, 아들은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으로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제 죽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그 때, 한 대의 오디세이 왜건(일본에서 출시된 차의 이름)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을 태우고 그들의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순간을 다시 체험하게 해 주는 오디세이 왜건. 가즈오는 왜건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젊었을 때 모습으로 나타난 아버지와 함께 삐뚤어진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2. 감상평 。。。。。。。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후회를 하곤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가즈오는 썩 괜찮은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미세한 균열이 오래 전부터 생기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때 조금 더 아내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그 때 아들과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하는 후회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수없이 하는 그런 종류의 후회들이다.

     자연히 ‘가즈오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다. 현실에서는 그런 식의 ‘다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에, 독자들은 가즈오를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기대한다. 다시 사는 삶에서 그는 아내를 용서하고, 아들을 이해하고, 아버지와 화해를 한다. 참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만, 후회 속에서만 했던 일들을 저자는 소설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통해 실현시킨다. 문학의 멋진 힘이다.


 

     주인공은 일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현재의 삶을 더 열심히 살 수 있었다. 이 점은 아들과의 첫 드라이브에서 사고를 당해 죽고 만 아버지의 영혼이 남아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을 태우고 그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순간을 다시 체험하도록 해 준다는 불교적 설정을 희석시켜준다. 책 속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관도, 죽으면 끝이라는 유물론적 허무주의도 아닌, 직선적 시간관을 살아간다. 시간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역시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시간관에서야 가능한 법이다.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중요한 기점들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켰음에도 결국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아.. 물론 아주 작은 변화는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한 한 두 번의 행동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쌓여 나가는 일상적인 작은 경험들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좀 더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특히 쉽게 소홀해지기 쉬운 가족에게 좀 더 애정을 담아 행동하자. 저자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해체화 과정이 일본에 못지않게 빨라지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설적인 사실은, 우리가 인간의 사고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인간적 사고체계의 산물,

곧 프란시스 베이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1. 요약 。。。。。。。

 

     ‘완전한 진리’라는 책의 제목이 썩 잘 지어진 것 같지 않다. 어떻게 보면 저자가 잘난 체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도대체 누가 자신의 책을 ‘완전한’ 무엇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책의 영어 제목인 ‘Total Truth’는 ‘완전한 진리’보다는 ‘총체적 진리’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을 해 보자면 ‘진정으로 일관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 정도가 좋지 않을까.(물론 이러면 제목이 너무 늘어지는 감이 있겠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총체적인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 쓰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총체적이지 못한, 일관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이런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책의 2부이다. 저자는 이런 현실의 원인을 계몽주의시대 이래로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은 인간 이성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예로 든다.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것은 물질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그 물질들이 발전하고 있는 중간단계일 뿐이다. 모든 것은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탐구되어야 하며, 인간의 정신, 감정, 영혼과 같은 것들은 착각일 뿐이고 완전히 화학적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진화론적 전제는 우리의 ‘경험’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진화론적 전제에 따르면 모든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뇌의 특정한 부분에 특정한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서 생기는 작용일 뿐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전혀 사랑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가. 왜 어떤 사람은 바나나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싫어하는가. 매우 간단한 이런 질문들에 진화론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진화론의 사회학적 적용으로 넘어가면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진화론적 사회학자들은 ‘도덕’이나 ‘윤리’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일련의 견해 정도로 설명해버렸다.(사회계약론은 이런 견해를 거의 정설로 만들어버렸다.) 절대적인 인간 행동의 기준 따위는 한심한 소리로 치부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미국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설문조사를 통해 얻어낸 결과는 이런 견해의 위험스런 결론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어내라고 했는데, 결과를 종합해 본 결과 나온 것은 마약, 술, 섹스(그들이 특별히 불량한 학생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였다. 이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서 도덕을 ‘결정’하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러한 도덕적 붕괴현상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드물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화론에 충실한 삶을 산 결과는,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학생이 윤리학자들의 주장을 잘 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A+ 학점을 받는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여전히 사람들은 ‘도덕’을 필요로 하고, ‘윤리’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화론적 전제와는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사실과 가치의 영역의 분리’였다. 소위 사실의 영역은 여전히 진화론적 전제가 작용하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탐구가 되지만, 가치의 영역은 그와는 조금 다른 세계로 종교나 윤리의 세계이다. 결국 사회의 와해를 막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전제와는 다른 일종의 ‘도약’을 감행해야만 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만이 ‘일관된 삶’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전제들은 이 세상에 대한 일관된 그림을 제시해 주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신앙적 도약’을 감행할 필요가 없는 좋은 길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현 상황을 분석하며,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이력을 소개한 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윈주의(Darwinism)로 대변되는 ‘이성중시의 세계관’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이 어떻게 자체적인 모순에 빠져있는지를 밝힌다. 3부에는 이런 현실에 교회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이유가 미국교회의 예를 통해 설명된다. 4부에는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고 이전에 설명된 내용을 종합하며 마무리를 하고 있다.

 

 

2. 감상평 。。。。。。。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요즈음, 아마도 이 책이 올해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저자의 스승인 프랜시스 쉐퍼 식의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설명과 폭넓은 교제를 통한 많은 분야들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 그리고 많은 강연과 상담들을 통해 얻어진 사실적인 경험들은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주요 요인이다.

     저자는 미국인이지만 도예베르트(H. Dooyeweerd)나 카이퍼(A. Kuyper) 등으로 이어지는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 그 쪽에서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스승인 프랜시스 쉐퍼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최근 몇 년간 제법 많은 세계관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실천적인 부분이 강한 책은 아직 보지 못했다. 책에 실려 있는 많은 논지들은 당장 꺼내 사용해도 될 만큼 시의성이 강하다.(변증적 성격이 강한 쉐퍼의 제자답다.)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전반에 걸친 깊은 연구는 저자의 논의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저자는 소위 ‘무조건 믿어라’는 식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정말인지 한 번 이야기해보자’는 초대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신앙과 실제 삶의 영역에서의 분리로 인해 고민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특히 학생들),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 미주나 생각해볼 질문들을 제외하면 본문은 약 700페이지로 줄어든다.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후......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날 뻔 했다.


 

난 3차로에서 2차로로 차선 변경을 하려고 했는데

바로 내 앞에서 갑자기 1차로에 있던 승용차가 3차로로 급변경을..

그리고는 다시 2차로, 1차로로 널을 뛰며 지나간다.

 

덕분에 급브레이크...

내 차 처럼 작은 차는 금방 뒤집어질 수도 있는 상황.
 

 

나쁜 넘.


자기가 무슨 쾌걸 조로라고 Z자 운전을 하느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 좋아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을까 합니다.

 
  


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안 마시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못마시는 음료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젠가 돈을 내고(그냥 주는 커피가 아니라, 3000원 가까이 되는 거금을 주고)

커피를 주문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홍차나 핫초코 같은 걸 시켰을텐데,

그날은 왠지 커피라는 걸 한 번 시켜보고 싶더군요.. ^^

 


음 시도하는 커피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골랐습니다.

그렇게 고른 것이 캬라멜 어쩌구(커피에 별로 조예가 없는지라..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 하는 커피였습니다.

 

 

이블에 앉아서 커피가 담겨 있는 컵을 보니,

위에 거품도 있고,

향도 달작지근 한 것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였죠. 후훗.

  

 

푼으로 거품을 걷어서 입에 넣어봤습니다. 

맛있더군요.. ㅋ

그리고 드디어, 갈색의 액체를 입으로 넣었는데...

ㅡㅡ;;

람들이 왜 이런걸 마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만, 들어간 돈도 있고 해서..

조금씩 홀짝홀짝 삼켜보긴 했죠.

결국... 채 반도 마시지 못하고 그대로 버렸습니다. ㅡㅡ

그렇게 커피 첫 경험이 끝나고,

커피를 제 앞에서 치웠는데도 한참 동안 커피향이 남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실, 커피는 방향제로도 쓰이죠.

주위의 잡냄새를 제거해주는 기능이 있거든요.

냉장고 같은데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면,

원두커피 몇 알을 망에 싸서 넣어두면 악취가 제거된다고도 하더군요..(들은 얘깁니다.)

만큼 커피향이 진하다는 말도 되겠죠.

다른 모든 냄새를 덮어버릴만큼.

 

 


른 말로 하면, "이기적인" 향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것 이외의 다른 향들은 없애버리고,

오직 자신의 냄새만 남기고자 하는.

 

 


렇게 강한 자극에 익숙해져버린 존재는,

더이상 약한 자극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기 마련입니다.

커피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은 어지간히 향이 강한 꽃이 아니면,

(요즘 인공적으로 향을 진하게 품종 개량 - 자연적인 것을 없애고 특정 성질만을 기형적으로 성장시킨 것을 개량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을 해서 파는 꽃들 처럼 말이죠.) 

이를테면 들꽃과 같이 약한 향을 가진 꽃들의 냄새는 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향을 가지고 있는 꽃들인데도 말이죠.

 

 

쩌면 우리도 너무 큰 행복, 큰 즐거움, 큰 기쁨만 바라보다가,

결국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작은 기쁨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손에 커피를 들고서, 자스민 차의 은은한 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요.

 
 

 

것들을 향한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작은 것의 소중함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지만 말입니다...

그런 작은 행복들이 모여서 큰 행복을 이루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망각.

잊어버림.




학창시절 누구나 난 왜 이렇게 잘 까먹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 번 쯤 해 보았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고민을 꽤 했었다.

특히 영어 단어들...

난 외국어만 보면 왠지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체질인 것만 같았다.

외워도 외워도 잘 안되는 영어단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단어 수첩을 하나 만들었더랬다.

폭은 손바닥 가로정도 만하고, 길이는 손바닥보다 약간 더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첩의 앞뒤는 좀 두꺼운 종이가 대어져 있었고,

까만색 바탕에,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구피가 그려져 있었다.

스프링으로 묶어놓는 수첩이었는데..

자주 들도 다녔더니 정이 들어서 나중에는 물고기모양의 열쇠고리까지 달아서 다니기도 했었다.
(이와 연관되어서 내가 쓴 인간성에 관한 첫번째 글을 참고하면 좋을듯.. ^^;;)





아무튼, 그렇게 정성들여서 만들지....는 않았고, 암튼 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영어단어장.

대학교 들어와서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를 외울때도 사용했던 방법이지만,

내가 단어를 외우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적당한 종이를 준비해서 적절하게 칸을 배분한다.

고등학교때의 단어장의 경우 가로가 짧은 직사각형의 수첩이었기에

그냥 그대로 배분하지 않고 사용해도 무방했지만,

A4용지 같은 경우에는 경험상, 가로를 3등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다음에 할 것은, 다시 그 칸을 반으로 접는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외우고자 하는 단어를, 오른쪽에는 그 단어의 뜻을 적는다.

그 다음에는 오른쪽에 적혀있는 뜻을 뒤로 접어 넘기면 끝.

이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외국어.

처음에야 계속 펴보면서 그 뜻을 찾기 마련이지만,

서너번 하다보면 펼치는 빈도가 많이 낮아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사용했던 영어 단어장.

하지만, 이넘의 머리는 어떻게 된 것인지 단어는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단어장 10장까지는 겨우겨우 넘어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영 안됐다. ㅡㅡ;;;

성격상 그냥 넘어가기는 싫고.. 별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봐야했는데..

그 결과 단어장의 채 절반도 쓰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난 고등학교를 지하철로 다녔었는데,

3년간 딱 두 번 내려야할 역을 놓친 적이 있었다.

바로 그렇게 단어를 외우다가 깜빡한 것이었다.

아.... 맨날 영어 단어는 잊어버리고,

영어 단어를 안잊어 버렸다 싶으면 내려야할 역을 깜빡하고.. ㅡㅡㆀ





그 밖에도 시험때면 언제나처럼 조금 전에 봤던 건데,

아... 이거 책 어느 부분에 쓰여있는 것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등등..

자신의 기억의 짧은 유효기간을 원망했던 경험들이 허다하다.. ㅡㅡ;;






이렇게 잊어버린다는 것은 우리 생활을 여러가지로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 왔다.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 법.

그것은 과거의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즉, 내가 좋아하는 역사야말로 '인간의 망각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흠흠.. 잠시 역사로 빠져서 흥분을 했나.. ㅡㅡ;

다시 돌아와서...






그럼 망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불편하게만 하는가?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간이 하루에 각종 입력기관 - 눈, 코, 혀, 귀, 피부 -을 통해

두뇌에 저장하는 정보의 양은 실로 막대하다.

잠자는 시간 8시간을 빼 놓고는(요즘엔 좀 적게 자기도 하지만서두..)

나머지 시간 내내 눈을 뜨고 있다.

안구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의 눈꺼풀이 안구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잠시의 시간을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눈을 통해 우리의 두뇌로 전송되는 정보의 양은 하루에 16시간에 해당한다.

CD롬 한 장에 80분에서 90분 정도의 영상이 저장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려 11장에 해당하는 정보이다.

우리가 매일 CD를 11장씩 방안에 쌓아놓는다고 생각을 해보라.

좁은 방 안이 금방 CD로만 가득차고 말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두뇌는 고맙게도 눈이 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 뿐인가.

우리의 코, 혀, 귀, 피부를 통해 입력되는 정보의 양도 적지 않다.

사실 현재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시각정보와 함께,

청각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간단한 일이다.

라디오가 가장 먼저 발명이 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 뒤 시각정보를 전달하는 텔레비전이 발명되었고,

일부 촉각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 연구중이다.

아직 후각정보나 미각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은

직접 냄새를 피우거나 맛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은 어려운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것들을 데이터화 시키는 기술도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두뇌는 그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다.

그것도 하루에 16시간이라는 중노동을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온 날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그 데이터의 양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 방대한 정보를 모두 어디에 저장하는가?

현대의 발전한 생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뇌,

그 중에서도 대뇌의 일부분에 저장된다고 한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 많은 정보가 우리의 작은 뇌 안에 다 저장될까.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중요도, 자주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그 정보들을 적절하게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예를들면 자주 사용되는 것들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곳에,

잘 사용되지 않는 정보들은 저 밑바닥 어느 곳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치 서랍을 정리하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일부분은 저 멀리, 너무나 깊은 곳에

도무지 꺼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망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다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정보를 쉽게 꺼넬 수 있는 위치에 저장하기 위한)라는 것이 통설이다.





다시 말하면 망각이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들이 저 깊숙한 곳에 숨어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기억의 파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말한 것 처럼 망각은

우리의 뇌가 가진 기억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만약 망각이 없다면,

우리의 두뇌는 얼마가지 못해서 쏟아져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저장하느라

다른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눈을 감고 당신이 앉아 있는 뒷 편에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라.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이 나는가?

대개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정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보다 중요한 정보,

이를 테면 오늘 점심에 어떤 메뉴를 먹었느냐(?)를 기억하는 대신,

내가 늘상 드나드는 방의 한 쪽 벽에 어떤 것들이 배치되어있는지와 같은

가벼운 정보(뒤를 돌아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는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망각이라는 도구는 이렇게 실용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인간이 무슨 컴퓨터도 아니구..





어쩌면, 망각이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추억이란 대개 아름다운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첫사랑에 대한 추억.

비록 그 첫사랑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 년이 지나고... 10년이 넘어버린다면 그저 아름다운, 예쁜 추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냥 떠올리고 있으면 빙긋이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추억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망각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두뇌가 망각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삐져나오고, 모난 부분은 과감히 깎아내고 없애버려서

남은 기억 중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남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좀 더 나아가자면,

과거의 슬픔이나 아픔, 원한 같은 것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추억으로 삼고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원한을 잊지 않고 대물림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은혜나 호의를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그 보답을 하기 위해 살아갔던 사람은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다.

매스컴에서 선행을 한 사람을 기사꺼리화 해서 보도하는 것도,

그것이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 아닌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리 길지 않은 삶..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을 더 많이 기억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예쁘고, 아름다운 일들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