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필자를 22세기에 살고 있는 한 가상의 인물로 설정해 두고, 그의 시각에서 ‘지난 시대’인 21세기에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가상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자신이 보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책을 영 황당한 공상과학소설로 볼 수도 없는 것이, 저자들의 이력이 단순하지 때문이다. 책에 나온 저자이력이 모두 사실이라면, 한 명은 수백 편의 논문을 제출한 과학 교수(정확히 전공이 무엇인지는 안 나온다.)이고, 다른 한 명은 NASA의 주임 연구원인 것이다. 

     이런 저런 면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책의 정확한 성격은 일종의 미래학 서적과 유사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아주 딱딱하거나 하지는 않다. 책의 형식은 역사서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상의 구체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내용 중 일부는 마치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듯 했다. 

 


 

    책에서 그리는 미래는 긍정적이지만도, 부정적이지만도 않다. 

    일면, 미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매우 긍정적으로 그려질 것처럼 보인다. 생명공학(특히 유전공학)의 발달로 의학 분야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줄기세포와 같은 연구들이 완성되어, 대부분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수명까지도 연장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그것으로 인해 치명적인 위험도 예상된다. 

    5장과 같은 부분은 과학으로 지은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들의 삶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그려진 5장은, 세계의 네트워크화, 대부분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로봇을 이용한 자동화, 재택근무, 의학의 비약적 발전, 각종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기기들의 등장 등, 말 그대로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미래형이자 가능성을 담고 있는 표현)’ 유익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미래의 어두운 측면들도 그리고 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것과 같은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빈부격차의 심화, 자연재해(지진), 사이비 종교가들의 불안심리 조장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대혼란’의 시기, 우발적인 핵전쟁이 남길 끔찍한 고통과 심각한 위협들,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린이들. 저자는 이런 것들을 그리면서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심각한 위협들로 표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천을 ‘인간의 선의’에서 찾는다. 그런 위기와 문제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문제들을 인간 공통의 선의로서 풀어나갈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계적인 핵확산 방지와 핵무기 감축을 위해 뛰는 한 의사, 기아퇴치세를 세계적으로 추진하는 어떤 사람, 하는 식이다. 
 




    요컨대, 저자들은 과학은 인간에게 전반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일부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인간들 내부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선으로서 그것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과학자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관점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책의 내용 가운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으며, 동성애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부분은 매우 위험스러운 정도이다. 저자는 물질적인 면에만 집중할 뿐, 정신적인 영역, 영적인 영역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저자가 생각하는 정신적인 면이란, 기껏해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만 나타난다. 

    과연 그럴까? 이렇게 우연적인 요소(인간의 선의)에 많이 기대어도, 미래라는 사건이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까?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인간’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을 찾아낸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의 부정
M. 스콧 펙 지음, 민윤기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문제의 요점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육체적인 현상일 뿐이다.

 

1. 요약 。。。。。。。                      

 

     이 책은 제법 무거운 주제인 ‘안락사’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안락사의 정의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색다른 정의인 ‘플러그를 뽑는 일’로 설명한다. 사실 여기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안락사’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옹호하는 주요한 근거로 내세우는 ‘끔찍한 고통’이 사실은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제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리라는 가정 하에 그 육체적 고통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서 안락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는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줄 수 있는 의학적 약품창고가 있으며, 우리의 약품창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풍토가 개선되고 있고, 치명적 말기 질병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나와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에 따르는 지속적인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2부에서는 안락사 논쟁에 뛰어드는 저자의 독특한 전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을 이 문제에 대입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 지으려는 현대의 세속적인 흐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서 저자는 ‘죽음’이 사람의 성숙에 주는 많은 영향들을 설명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는지에 집중하라고 권한다.

     마지막인 3부에서는 좀 더 기술적(技術的)인 차원에서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구분한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기계론적 견해에 근거한 안락사 지지는 결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2. 감상평 。。。。。。。                    

 

     책을 읽으면서 가장 헷갈렸던 점은 저자는 안락사에 관해 찬성을 하는가, 반대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분법적인 견해를 저자는 썩 내켜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사고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우선 이 부분을 정확히 알기가 참 힘들었다. 다 읽고 나서야 저자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를 ‘플러그를 뽑는 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플러그를 뽑는 일’이란, 치명적 질병의 말기에 이르러 어떠한 의료적인 시술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단지 기계장치들을 이용해 ‘억지로’ 육체적인 활력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강제적인 생명유지장치들을 환자로부터 떼어내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분명히 자살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유의 생명을 끊는 행위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뇌사 상태에서 뇌나 신체 조직이 극도로 손상된 상태에서 인공호흡장치와 각종 주사액으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안락사의 정의 자체를 하기 싫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들의 속성상 한 번 정의를 내리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빠져나갈 구멍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혼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동시에 오늘날 무사공평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 또한 사실상 하나의 ‘판단’과 ‘가설에 근거한 믿음’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도 중요한 내용이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서평을 쓸 때 조금 더 서술하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공교육에 끼친 결과로 ‘더 이상 학교에서 가치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가치’가 아닌 ‘정보’만을 가르치는 교육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붕괴를 낳고 있다는 증거들이 점점 자주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에 담겨 있는 주요한 함의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어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책에는 내가 갖는 견해와 다른 견해들도 몇 가지 등장하곤 한다. 육체적 부활의 부정이라든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에 대한 찬성도 아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저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한 접근과, 저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실천적인 영역에서의 유효함은 결코 깎아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안락사에 대한 보다 진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된 기회를 얻은 것 또한 개인적으로는 큰 수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 잡아내기
폴 에크만 지음 / 동인(김영길) / 1997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보면 매우 흥미로운 책으로 보인다. ‘거짓말 잡아내기’. 마치 이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한 눈에 딱 잡아 낼 수 있는, 신기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으로 착각할 만 하다. 잠깐 들춰보고 뽑아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나게 뺐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책 내용은 그와는 다르다.

        물론, 책 전체가 거짓말을 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긴 하지만, 내용 중 상당부분은 일반인들도 조금의 주의력만 가지고 있다면 평소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고, 나머지 중 대부분은 너무 세밀하고 전문적인 지표들이라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다. 다시 말해,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를 알아내는데 필요한 주요 기술들을 배우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거짓말과 거짓말 밝혀내기에 관련된 몇 가진 금언(金言)들을 발견하거나, 인간 심리에 관한 몇 가지 통찰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적어서, 단지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약간 낭비로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도 책의 후반부에 가서는 거의 대충 넘겨버리고 말았다.(내 경우엔 별로 즐겨 사용하지 않는 책읽기 방법인데도 말이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구성에, 평이한 내용들로 가득 찬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천사 하얀 악마 - 검정과 하양의 문화사
김융희 지음 / 시공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어떤 색이건 색의 정체를 한마디로 밝히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불가능한 일이다.

색의 정체는 색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색과 색이 만나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색과 만나는 우리들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감지되고 서명되고 소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색의 정체를 탐색해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 요약 。。。。。。。                      

 

     제목만 보면 ‘다빈치 코드’ 종류의 신비주의를 가미한 통속소설로 보이지만, 사실은 미술사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검은 색과 흰 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을 소재로, 인류의 미술사에 그것들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사용되어왔는지를 비교,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서론에서는 두 색의 공통점인 ‘무채색’이라는 점에 관한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하고, 1장(하얀 천사와 검은 악마)에서는 두 가지 생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관념-신성, 선의 대표색으로서의 흰색과 악의 상징으로서의 검은 색 -을 다룬다. 2장에서는 이와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두 가지 색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3장(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난, 쉼표 같은 색)에서는 두 가지 색에 관한 약간은 철학적인 상념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4장(우주의 원리를 담은 흑백의 본질)에서는, 앞서의 논의들과는 달리 동양적 사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색의 의미를 설명한다.
 

. 감상평 。。。。。。。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릴 때, 가끔 내 전공과는 영 거리가 있는 책들을 한 권씩 빌리곤 한다. 물리학이나 수학, 음악 등에 관한 책들이 그것이다. 늘 읽는 기초 인문학 관련 책들만 계속 읽다보면 솔직히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머리가 자꾸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이 책도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 뽑아 든 녀석이다.

 

      책은 앞에도 설명했듯이,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들의 독특함과 그 독특함에서 파생해 나온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색깔 자체야 ‘나는 이런 색입니다’라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냐 만은, 똑같은 색을 두고도 시대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부여하는 모습이 제법 재미가 있다. 저자도 말했듯이 ‘색의 정체를 탐색해 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 미술에 관한 책답게, 저자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많은 수의 그림 보조 자료들을 사용해 ‘보는 재미’도 함께 느끼게 해 준다.(물론 덕분에 책값은 상승?!) 역시나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실감하겠다.

 

      저자는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가지 소재가 담고 있는 다양한 상념을 한 권의 책으로 엮고자 노력했다. 나름대로 주제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반대로 때로는 서로 반대되는 진술들이 고작 몇 페이지만을 사이에 두고 나오기도 하니 약간 혼란을 느낄 만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완전 정반대의 내용으로 두 번에 걸쳐 실려 있다. 요런 건 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어서인지 문장들은 매끄럽다.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니 쉬어 가는 기분으로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베틀 경문수학산책 18
클리퍼드 픽오버 지음, 이상원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신이 수학자였는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신이 우주라는 천을 짜 내려갈 때 수학이 그 베틀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다고 믿는다.

 

. 요약 。。。。。。。                       

 

     이 책이 꽂혀 있던 서가는 ‘수학’과 관련된 책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당연히 이 책 역시 수학책이다. 물론 수학책이라고 해서, 교육과정표에 맞게 각종 공식들을 소개하고, 문제들을 실어 놓은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조명해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굳이 수학서적에 ‘신의 베틀’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문에 처음에는 책의 제목을 잘못 이해했었다. ‘신의 베틀’을 ‘신의 배틀(battle)’로 이해했던 것. 이름만 들으면 무슨 SF 소설인가 싶지만, ‘배틀(battle)’이 아닌 ‘베틀(loom)’이다. 베틀은 직물을 짜는 기계를 말하는데, 저자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 세상을 수학이라는 베틀을 사용해 짜 내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의 당초 목적은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교한 수학적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제목부터 상당히 문학적이더니, 내용의 전개방식에서도 그런 티를 내기 위해 애를 쓴 면면이 보인다. 책의 내용은 단순히 이런저런 내용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독자와 동일시된다. 마치 체험놀이기구를 타는 사람처럼, 독자는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조수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면서 사람들이 수학적 진술과 그들의 종교적 심상을 어떻게 연결시켜왔는지를 살피게 된다.

 

 

. 감상평 。。。。。。。                    

 

     나름대로 애를 쓴 책으로 보인다. 흔히 서로 대결구도를 가진 것처럼 생각되는 수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고가 역사적으로는 오랫동안 서로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숫자들과 기호들, 공식들을 일일이 의미 있는 숫자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그러기에는 종종 나 같은 비전공자들이 읽기에 지나치게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각종 정교한 수학적 원리들은, 그 모든 것이 단지 우연히 된 것이라는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가. 또, 소위 과학적 사고의 핵심 중 하나인 ‘보편타당성’이나 ‘필연성’과, 진화에 있어서의 핵심 원리인 ‘우연’은 도무지 어울릴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의 야심찬 의도에도 불구하고, ‘수학사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약간은 인위적인 노력’ 때문에 책의 중반에 들어가서는 약간 긴장도가 떨어진다. 종종 그 근원이나 원리가 의심스러운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에 불과한 주장들을 대단히 중요한 무엇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특별히 성경과 관련된 여러 세부설명에 사실과는 좀 다른 내용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사상들에 대한 설명에서도 같은 식의 오류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든다.(여러 가지로 책에는 마이너스적 요소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신’은 기독교적인 신은 아니다. 그저 이 세상을 계획적으로 창조했을 것으로 가정되는 가상의 어떤 존재나 힘, 의지에 대한 설명으로 보일 뿐이다. 잘 해봐야 이신론(理神論, Deism)적 신의 개념이라고 할까? 하지만 수학과 신이라는 개념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시도 자체는 꽤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결론이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