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다른 질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마케팅은 약품 판매량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질병을 앓는 환자 수를 늘리기도 한다.

 

 

1. 요약 。。。。。。。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약들이 나와 질병들을 ‘조기’에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요즈음, 왜 사람들은 과거보다도 더 많은 병들에 시달리는 걸까? 제약회사들에서 약을 만들어 내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인 걸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꽤나 명쾌하게 집어낸다. 제약회사들이 ‘약’ 뿐 아니라, ‘병’까지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약을 팔기 위해 제약회사들이 동원하는 갖가지 방법들이 잔뜩 실려 있다. 예를 들면 고혈압이 있을 경우 심장질환이 발생할 확률이 1%에서 2%로 고작 1% 상승하더라도 그들은 ‘2배 높다’고 선전한다. 또, 정상인의 범위를 좁힘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환자’로 몰아가고, 의학적으로 명백히 질병이라는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증상들도 하나의 병으로 광고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는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약’을 먹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광고를 통해 각인시키는 작업이 더해진다.

     저자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농간’이 잘 드러나는 대표적인 열 가지 증상과 그에 관련된 진실들을 이 책 안에 가지런히 담아 놓았다.

 

 


2. 감상평 。。。。。。。

 

     이 세상 무엇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인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고 있기에 여타 분야보다는 늘 특별한 존중과 대우를 받고 있는 의료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의사라는 말 뒤에는 당연히 ‘선생님’을 붙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 그들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적은 보수를 받고 애를 쓰는 ‘훌륭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의료계를 떠받들고 있는 한 쪽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평생 동안 약을 먹이기 위해 애를 쓰는 제약회사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더불어 자신들의 지갑도 채우는 의사들의 존재까지 확인하는 순간 그저 한숨부터 나오게 된다. 이건 완전히 신뢰에 대한 배신 아닌가!!(물론 다른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까지 함께 도매급으로 넘기겠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단지 신뢰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떻게든 많은 약을 판매하고야 말겠다는 제약회사들의 결연한 의지 앞에서, 그렇게 팔려는 약의 효과 없음은 물론, 부작용까지도 고스란히 일반인들이 덮어 써야 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항우울증 약품이 자살충동을 높이고, 폐경기 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호르몬제가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모든 것을 약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편의주의적 발상을 가진 사람들도 아주 문제가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돈을 벌기 위해 부작용 따위는 가볍게 묻어버리는 관련 업계의 관행들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 허가를 내주는 관계 기관들의 의사결정구조도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실제적인 위협들이다.

 

 

     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세계를(그리고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모든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윤을 더욱 늘리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막으면 안 되는 숭고한 행위라 불러야 안 잡혀갈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온갖 ‘지저분한’ 작업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는 좀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기업들을 가지고는 뭐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그런 행동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떠드는 세계관 자체일지도 모르니까.

     텔레비전에서 하는 광고를 다 믿지 말자. 특히 약 광고는 더 조심하자. 텔레비전 건강 프로그램에 나오는 의사들도 어쩌면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의심만 늘어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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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만 인본주의는 잘못을 사과하고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불변의 신념체계를 뒤흔들거나 거기에 도전할 필요까지는 없다.

 

 

1. 줄거리 。。。。。。。

 

     저자 자신이 왜 종교를 증오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책이다.

     별다른 이유의 제시 없이 그저 종교는 악하다고 주장한 저자는(1장), 종교인들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한 피해들(2-4장)을 그 이유로 제시하는 듯하다. 5장에서 종교의 형이상학적 주장에 대한 ‘형이하학적’ 분석을 하며 종교의 무가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 후에는, 우주에 대한 ‘지적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언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6장)

     7장부터 10장에서 구약과 신약, 코란 등 유력 종교의 경전들을 현대적 기준으로 비난한 저자는, 11-12장에서는 현대의 사이비종교의 탄생을 예로 들며 모든 종교의 시작은 그와 같다는 식의 비논리적인 유비추리를 전개한다. 13장은 2장의 내용과 같으며, 14장에서는 자신의 동양종교에 대한 몰이해를 여지없이 보여주며 그것들을 비난한다. 15장은 7-10장의 내용의 반복이고, 16장은 다시 2장과 유사한 내용인데, 이 장들의 가장 큰 특색은 특별한 ‘증명’ 없이 그저 자신이 경험한(어쩌면 경험하지도 못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점이다.

     17장에서는 ‘저자 자신이 정한’ 종교인들의 ‘최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닌) 경멸이 등장하며, 18장에서는 역사상의 ‘위대한 무신론자들’의 예를 열거하며 낯간지러운 무신론 찬양을 외친다. 결론부인 19장은 비록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무신론은 인간을 진정한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으로 마친다.

 

 

 

2. 감상평 。。。。。。。 

 

     무신론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여기서 백과사전이란 폭넓고 깊은 진리들의 모음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후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잡다하게 늘어 놓여 있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거기에 필요 이상의 반복적인 내용으로 책의 두께가 두꺼워졌다는 의미도 추가할 수 있겠다.

     이 과격하고 자극적인 욕설로 도배가 되어 있는 두꺼운 책의 표지에 어째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같은 종류의 책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찬사가 인쇄되어 있는 지 쉽게 추측할 수 없다. 사실 책 표지에 인쇄된 찬사들은 책에 대한 지배적 의견이라기보다는 출판사 관계자의 구미에 맞는 노골적이고 낯간지러운 원초적 찬양일색인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차라리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생물학’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했지만, 이 책의 경우는 그런 부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원색적인 욕설과 조롱이다. 예컨대 “하지만 종교는 나 같은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리고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종교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러분과 나를 파멸시킬 계획, 인류가 힘들게 얻은 모든 성과를 파괴할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종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29쪽)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저자가 피해망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는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야만적인 반응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비난하지만(49쪽)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야만적인 반응을 보이는 ‘무신론자들’은 보지 못했나보다.

     저자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교양 없음은 130쪽에도 등장한다. 저자는 단지 ‘이론’이라는 말에 자신과 다른 정의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멍청한’이라고 조롱한다. 누군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책에서는 이러한 조롱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 책이 삼류 포르노 잡지도 아닌데 말이다. 그 뿐 아니라 저자는 단지 소설 내용을 근거로 종교를 비난하는가 하면(317쪽) 저질 스포츠 신문에서 스크랩 한 듯한 종교에 관한 온갖 가십꺼리들을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양 제시하기도 한다.(87쪽) 사실 도킨스의 책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 경멸은 ‘고상하신 무신론자님들’의 특성인 듯싶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결국 이 책에 가득한 종교에 대한 경멸과 욕설은, 단지 저자가 선한 종교인들을 ‘경험’해 보지 못해봤다는 이유일 뿐인 것 같다.(276-77쪽)

 

 

     이와는 반대급부로 무신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도 문제다. 저자는 세상을 참 간편하게 이해하는데, 모든 악은 종교로, 모든 선은 이성으로라는 이분법적 구도이다.(cf. 45쪽) 무신론에 대해 거의 반사적인 칭송을 하려다 보니 약간은 혼란하지만 자생적인 문화적 발전보다는 ‘식민지 시대의 장엄한 건물들’을 찬양하기도 하고(38쪽,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던 대학교수가 있었지 않던가? 일제시대는 우리민족 발전의 전기였다고.) 만약 종교인이 그랬다면 당장에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을 만한 윤리적 문제도 무신론자가 그랬다면 관대하게 넘어간다.(274쪽)

     종교를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자료의 인용도 제멋대로다. 마이모니데스라는 중세의 철학자를 예로 들면, 저자는 이 한 명의 인물이 남긴 저작의 신뢰도를 한편에서는 부정하고(100쪽), 다른 한편에서는 그대로 인정한다.(325쪽) 하지만 둘 다 결론은 ‘그러니까 종교는 나쁘다’는 것이다. 정확한 연구 없이 단지 기분에 따라 악평을 써 내려가기도 하고,(283쪽) ‘남아프리카 사회가 야만성과 내부 붕괴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던 것은 호전적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 때문’이라는 낯간지러운 찬양도 보인다.(365-66쪽)

     아마도 저자는 ‘상징적인 행위’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이 거의 틀림없는데, 간디의 물레를 단순히 ‘문명에 대한 비이성적인 종교적 거부’로 비아냥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271쪽) 저자는 그야말로 굉장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나라의 독립운동가를 편협한 전통주의자로 비난하는 꼴이다.(아마도 윤봉길 의사가 어떤 종교신자임을 알게 된다면 당장에 종교적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만약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이 책의 정확한 반대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쓸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이 저지른 역사상의 만행과 오류에 대한 사례들을 잔뜩 수집해서 아무렇게나 늘어놓으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이 때 양을 필요 이상으로 늘리거나, 그렇지 않다면 두꺼운 종이로 출판을 해 ‘권위’가 있는 척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교인들의 조심성 없는 말과 행동에 실망한다. 때때로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습에는 히친스의 편에 서서 함께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며 악질적인 과학자를 본다고 하더라도 과학을 경멸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관점’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과 ‘과학주의’를 적절하게 구별하지 못한 채 이 편의 것은 무조건 옳다는 오류에 빠져있고, 이는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는 기술적 도구’이고, 과학주의는 ‘모든 것은 과학으로만 설명해야 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저자의 엄격한 ‘과학주의(혹은 증거주의나 기초주의)’를 택한다면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하나도 믿을 수 없어야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저자 자신의 문장 이외에는 전혀 얻을 수 없으니까. 물론 책에 등장한 사례들을 일일이 조사해 본 후에는 이 책의 내용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런 시도가 성공할 지는 미지수다)

     저자는 ‘하지만 인본주의는 잘못을 사과하고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불변의 신념체계를 뒤흔들거나 거기에 도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단언하는데(363쪽), 이러한 단언이야말로 인본주의의 신앙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즐겨 먹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이토록 극렬한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듯하다.(70쪽) 이해 비해 저자의 철학에 대한 몰이해(‘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그럼 신이 언젠가는 존재했었다는 뜻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보아, 104쪽)나 신학적 진술에 대한 몰이해(주로 할례의 대상과 범위에 관한, 328쪽)는 오히려 작은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같은 종류의 책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소개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유사한 책인 『만들어진 신』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과 상당부분이 겹치고 있으며(서평까지도 거의 같아야 할 정도다. 그냥 앞선 서평을 읽어보면 될 것 같다), 그나마 독창적인 점이라고는 좀 더 원색적인 욕설과 조롱이 등장한다는 점과 좀 더 많은 모순적 문장들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책 표지가 내가 좋아하는 밝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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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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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잉태된 배아의 대다수가 자연적으로 유산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품질 관리’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1. 줄거리 。。。。。。。 

 

      작가의 극단적인 무신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들이 했다는 신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에 등장하는 ‘신’은 사실 인격신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옳게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1장),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명들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2장과 3장) 4장에서는 아예 신부존재(神不存在) 증명을 시도한 작가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던 ‘종교는 진화의 과정에 나타난 불필요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5장)

     6장은 흔히 종교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알려진 ‘도덕’은 종교 없이도 존재 가능하다는 주장에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부도덕한 내용들이 많이 있으며(7장), 작가 개인이 경험했던 종교인들로부터의 불쾌한 경험들에 대한 푸념이 8장을 장식한다. 나아가 9장에서는 교육에까지 시선을 돌려, 아이들에게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사실은 무신론의 입장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마지막 장인 10장에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했던, 그러니까 종교나 신의 개념 없이도 인간은 살만하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2. 감상평 。。。。。。。

 

     작가는 대단히 ‘편한’ 도발을 걸고 있다. 그는 종교 전반에 걸쳐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중 한 쪽에서만 변호(혹은 반론)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휘계통이 일원화 되지 않은 대군(大軍)은 일원화 되어 있는 작은 부대보다 못하다는 전략의 기본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는 형세다. 또,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종교’란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어느 특정 종파나 교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그저 모호한 상태인데, 이럴 경우 공격하기는 쉬워도 방어하기는 어렵다. 방어하는 쪽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을 가리켜야 하니까. 작가는 본인이 퍽이나 불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유리한 전장을 설정해 두고 싸움을 걸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는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자신들과 같은 무신론자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유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더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판단을 좀 뒤로 미루더라도, 그의 말대로 오늘날 무신론자들이 ‘공격을 받는 (약한) 입장’에 있다면, 그건 진화에서 탈락할 징조가 아닌가? 적자생존이야말로 진화론의 핵심 뼈대 중 하나니까.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종교’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매우 작위적으로 예를 드는 데 사용한다. 자신이 보기에 과거에 문제가 되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면 과거를 들어 공격하고, 그 반대일 경우 현재의 일을 들어 공격한다. 또, 사실상 정치적 이유로 벌어지는 문제들 -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분쟁 -까지도 종교적 문제인 양 묘사한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목적을 위해 호도한 것인지, 정말로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작가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들은 매우 작위적인 구성을 거쳤으며, 작가의 ‘섭리’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제한적이다. 신은 매순간 수십 조 개 이상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할 필요는 없다.(232쪽 참고) 또, 원문의 의미나 원저자의 사상을 고려하지 않는 작위적 인용도 보이니(290쪽의 루터의 말), 이쯤 하면 책의 어느 부분에는 분명히 신뢰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역자 후기를 보면 번역자는 도킨스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의 장점으로 꼽지만, 정말로 그런가? 도킨스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악의적인 예’들만을 인용해 비난하고는 던져버린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무리했다는 점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슬쩍 한 발을 빼기도 한다.(396쪽) 또, ‘기원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측성 문장들만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가더라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가치중립적’인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는 ‘모든 진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저자는 그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그것이 하나의 ‘전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는 근원으로의 회귀사고는 곧 옳은 것’이라는 전제 역시 ‘증명’되지는 않은 일종의 공리에 해당하는 명제이다. 저자의 말처럼 진화론이 사실이기 때문에 무신론이 자연스러운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118쪽), 오히려 그 반대로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충분히 고려할만한 견해가 아닌가.

     저자는 종교에서 다윈주의에로의 헌신으로 갈아타는 과정을 ‘안경을 바꿔 쓰는 비유’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탁월한 비유다. 바로 다윈주의도 하나의 ‘안경’이라는(하나의 관점이라는) 사실 말이다.더구나 저자가 신봉하고 있는 ‘다윈주의’는 단지 생물학적 가설만이 아니라 종교적 함의까지 담고 있는 ‘사조’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비록 다윈주의가 무생물의 세계(가령 우주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생물학 본연의 영역 너머에 있는 분야들에서도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176쪽)
 
   

 

     또, 다윈주의의 기저에 깔려 있는 ‘효용성’의 신화(248쪽)에도 우려가 든다. 낭비를 표적으로 삼아 일일이 제거하는 하는 것이 다윈주의의 본질이라면, 사회적 입장에서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와 여자 등을 도와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곧바로 신자유주의는 곧 선이라는 신화적 사고와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이미 책에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이 등장한다. 도킨스는 자연유산을 ‘품질관리’로 보고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종교와 사랑에 빠지는 매커니즘 사이의 비교를 다룬 부분이었다.(283쪽) 하지만 그 둘을 전적으로 기계적 반응으로만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왠지 애처롭기까지 하다. 당신은 당신이 그(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제정신으로 결혼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고 ‘출판 자체가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었다. 책이 담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은 굳이 책을 내지 않아도 텔레비전만 켜면 충분히 듣고 볼 수 있는 내용이었을 뿐더러, 책이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대단히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나는 이 책만큼 오직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해 두껍게 쓰인 책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를 보고 당장에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최소한의 ‘교양’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성서의 괴물’이라는 표현까지도 가리지 않고 뱉어낸다. 교양 없음, 혹은 지적 세계의 천박함의 증거가 아닐까. 책에서는 특별히 ‘건설적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가래침을 뱉고자 하는 목적’만 보인다. 그나마 자신의 주장에 철저하지도 못하다. 정말로 낭비적인 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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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ckle 2008-03-11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낭비적인 서평

노란가방 2008-03-11 07:57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시는 '논리적 이유'라도 함께 제시해주셨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군자란 2008-03-1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신을 놓고 종교인이 아닌분(????)이 이렇게 도발적으로 쓰신것을 보니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사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눈먼시계공....을 읽으면서 경이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사실 만신을 그렇게 평가하기에는 저의 역량이 아직은 모자란듯 싶습니다.
하지만 도킨스의 논리가 약간은 과장된면도 있겠지만 무시할수 없는 진실이 숨어 있기에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지 않을까요....

노란가방 2008-03-17 13:04   좋아요 0 | URL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조작이라거나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도킨스가 고발한 것처럼 문제가 있는 종교인들의 행위들은
마땅히 비판과 수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도킨스 자신이 종교를 비난하는 중요한 이유인 '증명되지 않은 전제(믿음)'는 도킨스 자신도 가지고 이있다는 데서 그의 주장의 인식론적 모순이 발견된다는 점과, 소위 다윈주의가 가져올 인간파괴의 전조들, 또 책의 주요한 특징인 모욕과 욕설은 분명히 지적을 받아야 한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2008-03-17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neit 2008-04-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란 타이틀을 본 순간엔 '과학자가 넘어서는 안될 영역을 건넜군. 어쩌면 건방진 과학자의 삐뚤어진 모습이 아닐까?' 이것이 저의 첫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내 창조론자들의 반동적 행위에 관한 기사(리차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과학TV에서 방영된 '진화론의 명암')들을 접하면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미국 내 한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이 고등학교에 소속된 광신적 기독교 신자 학부모들이 수적인면에서 소수이지만 학부모 모임 중요 직책을 장악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죠. 그들은 교과목인 생물 교과서 내에 언급한 다윈과 관련된 내용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삭제 할 것과 대신 창조론적 내용과 지적 설계론자들의 내용들을 생물 과목 부분에 채택하여 교육할 것을 종용한 사건이었죠. 이는 엄연히 정교분리를 제창한 미국 건국 정신에 위배된 사건으로 그 지방 법원의 재판까지 벌어질 정도로 미국 전체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죠.
이는 분명 종교계가 그들의 영역을 넘어서 교육계와 과학계에 가한 테러라 여겨집니다. 더구나 극소수에 불과한 일부 광신도들의 무지에 의해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에 오직 침묵(왜냐하면 과학계에서 대응하면 오히려 광신도들의 움직임을 대외에 널리 알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므로)으로 일관해 오던 도킨스를 비롯한 정식 과학계 인사들의 반성과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으로 나온 책이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 과학자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소신을 밝힌 용기 있는 책으로 읽혀져야 하며 우리나라 정서와는 다른 서구 사회에서의 기독교 중심 분위기를 염두해 둔 체 읽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도발은 종교계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도킨스의 이 책이 나왔습니다. 결국 역사적 반동으로 이어질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과학자로써의 최소한의 반응이며, 단결력 하나만은 인정해야 할 소수의 광신도들에 의한 움직임을 성토하고 이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주의와 단결을 최소한 끌어내려는 움직이라 보시면 될 듯 하군요.

노란가방 2008-05-17 14:51   좋아요 0 | URL
네..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니까요.

다만, 이 문제는 좀 복잡한 철학적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진화와 창조'를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시도 자체가
이미 한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에 이 문제를 올려 놓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생물의 기원이나 발전에 관한 문제는 엄밀히 말해
'과학적 검증'을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추론'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추론을 하는 당사자가 어떤 사전의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 '과학적 설명 = 진리'라는 매우 간단한 도식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제가 문제삼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죠.

karneit 2008-05-2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가방님의 말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님의 생각은 또다시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바로 '성경말씀(신의 말씀)=진리' 도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소위 고대 및 중세적 신 중심의 세계관인 (천동설)에 대한 생각에 반대를 했습니다. 처음엔 지동설도 '추론'에서 시작되었지요. 과학자는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통하여 끊임없는 실험, 관찰, 계산과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이 시행착오 중엔 종교계의 강압적인 협박, 무지, 정치적 개입 등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과학의 편이었죠. 종교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단순한 생각과 아집, 무지와 고대 서적의 일부 말도 안 되는 억측이 아니라 과학자의 실증적 연구 자세와 과학적 증명 편에 있었던 거죠.
어떤 연구는 수 백년이 지나는 동안 증명이 되지 않다가 축적된 연구 성과와 천재적인 발상 내지 다른 분야와의 연계를 통해 '추론'을 '학설'로 바꿔 놓기도 하죠(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 이것이 과학입니다. 도킨스는 이러한 노력에 감명을 받아 생명과학의 과학자가 된 것이고, 찰스 다윈의 과학적 노력에 탐복했다 봅니다.
생명의 창조에 관해서도 지금 그 말이 적용될 듯 하군요. 우주천문학, 유기화학, 생명과학 중 특히 유전공학의 발전은 이러한 생명 탄생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과학자들은 생명 창조에 대한 '추론'(생명의 창조는 물질의 우주적 진화과정 결과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죠)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연구와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도킨스는 자신의 다른 저작인 <<조상 이야기>>에서 이러한 연구 결과로 진화론에 반하는 과학적 증거가 단 한 개라도 나오면 그는 진화론의 매커니즘인 '자연선택'을 폐기처분 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결코 '과학적 설명=진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명백한 과학적 증명과 사례가 뒷받침 될 때라야 비로소 학설이 되는 것이죠. 물론 이 학설도 언제라도 반증이 나오면 폐기처분 될 것이라 그는 말합니다.
단지 어떤 성역을 설정하여 그 분야에 뛰어드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는 종교계야 말로 도식적 생각과 강요(소위 철학,논리라 칭하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바로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부득이 '진화와 창조'를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보이게 하는 부조리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군요(절대 환원이 아닙니다).

노란가방 2008-06-06 18:33   좋아요 0 | URL
말씀에 저도 일부 동감합니다.
충분히 사려깊지 못한 '과학주의자'들만큼,
충분히 사려깊지 못한 '종교주의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내용 중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향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막은 '압도적 부분'을
종교의 탓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초기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연구를 계속했고,
종교(아마도 기독교겠지요)는 이를 지원했습니다.
천문학자인 케플러, 만유인력과 열역학법칙의 뉴턴, 원자론의 돌턴 등이 그 예이죠.

무엇인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설명하고, 검증하려는 노력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설명되고, 검증된 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은
(제가 보기엔 도킨스 박사는 이런 전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하는데,
전 도킨스와 같은 과학주의자들의 생각이 가져올 파괴적 문제들도 염려되구요.

무엇보다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처럼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를 하는 식으로는
저자 자신이 무엇인가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많은 걸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군에서 훈련을 받는 중이라서요..;)
 
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고정관념 Q 8
빅토르 퀘페르맹크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것은,

대중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성공한 경우 그들이 어느 민족인지를 캐지 않지만,

유대인일 경우에는 반드시 민족적 뿌리를 밝히려고 든다는 것이다.

 

 

 

1. 줄거리 및 간단한 감상평 。。。。。。。

 

     웅진 지식하우스의 ‘고정관념 Q’ 시리즈의 하나다. 저자는 역사, 전통, 경제의 세 분야로 나누어 유대인에 얽힌 ‘고정관념’을 매우 살짝, 그나마 종종 제기된 고정관념에 대한 엉뚱한 해명을 늘어놓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첫 번째 ‘고정관념’에 대해(이게 고정관념이라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겠지만),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유럽 사회로부터 박해를 받아왔다는 내용을 쓰고 있다. ‘유대인은 경전의 민족이다’라는 ‘고정관념’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렇다’는 대답을 하고 있고(이런 결론을 내는 항목들이 제법 많다), 책의 말미에는 이 모든 것들이 ‘편견’이라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읽은 네 권의 ‘고정관념 Q’ 시리즈의 책 중 가장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 책. 책에 담긴 정보의 정확성이나 옳고 그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책의 논리적 구성에 문제가 보인다.

 

 

 

2. 트리플 감상평 。。。。。。。

 

     ※ 이 리뷰는 ‘리더스 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서 했던 ‘트리플 리뷰 이벤트’를 위해 쓴 것입니다. 이 책(『유대인』)만의 리뷰는 앞서 간단히 썼고, 이후에 쓰는 내용은 『유대인』 외에 같은 출판사의 시리즈로 나온 책들인 『이슬람』과 『팔레스타인』의 내용까지 포함한 리뷰입니다.

 

 

     세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고 막상 노트북을 여니 약간 고민이 생긴다. 리뷰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 지 하는 고민이다. 세 권의 책이 담고 있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써야 할 지, 아니면 시리즈의 기획 자체를 두고 말해야 할 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스쳐간다. 생각 끝에 적당히 섞어서 내용을 이어가기로 했다.;;

 

     유대인, 이슬람, 팔레스타인. 이 세 가지 주제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나는 사람을, 또 하나는 종교를, 나머지 하나는 지명을 가리킨다. 언뜻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만한 내용이 전혀 없어 보인다. 세 주제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이슬람교를 믿는 유대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도 참 어색하다.(이걸 묶으라고 한 사람 누구야!!)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 주제들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접합점은 ‘분쟁’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책들 사이에 감춰진 또 하나의 요소, 즉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이들 주제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복잡한 문제의 양상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이 문제의 땅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 유럽인들의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측은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땅을 두고 둘 이상의 민족들에게 보장을 해 주는 비열한 짓을 벌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런 사태를 그대로 뒀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졸지에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다. 또, 유대인들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은 유럽인들 중 하나인 게르만민족이 그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사회의 책임이 상당부분 있다.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생긴 이유는 중세기 동안 끊임없이 벌어졌던 유럽사회와의 전쟁들 때문이고, 그런 상황은 다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사이의 충돌과 그로 인한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세계화라는 주제는 비단 오늘의 주제만은 아니다. 말은 국지적인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원인을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이상 국제적이지 못한 주제들이 많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은 유럽의 식민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발칸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청소의 문제에도 복잡한 유럽 제 국가들의 역사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나비효과라고 했던가. 지금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언젠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 중동하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중동의 정국불안은 유가상승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당장에 자동차를 이용해야 하는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각종 산업에도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통해 증명되었다. 우리가 다른 지역이나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싸움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만들고, 그 벽이 오래 되면 서로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그리고 오해가 굳어지면 만들어지는 것이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다시 오해를 만들고, 오해는 벽을, 벽은 싸움을 만드는 역순의 진행도 일어난다. 누군가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으면 오해는, 분쟁은, 고정관념은 한없이 계속될 것이다.

     책들을 읽으면서 왜 사람들인 ‘함께’라는 의식을 갖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지하는 정치적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싸워야만 한다는 건 좀 궁색한 이유가 아닌가. 다르다는 것이 곧 다툼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분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다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다르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선동에 넘어가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선동자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유무형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앎을 방해하는 것은 선입관이고, 선입관은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고정관념 타파는 매우 의미가 있다. 비록 이 책들이 일차적으로는 프랑스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고정관념)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항목들도 많고, 종종 중립적이기 보다는 특정한 ‘주의(主義)’에 치우쳐있는 서술들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물론 누구도 엄밀하게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들의 장점은 편집 방식에도 있다. 저자들은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통해 독자들과 직접 대화를 하는 느낌을 주고 있고, 글의 내용들은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논의보다는 상식적의 것들이라 쉽게 읽힌다. 교양을 쌓기 위해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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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이 뭐야? - 개정판
사토 가츠히코 지음, 김선규 감수 / 비타민북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어쩐지 대충대충이며 애매한 것 투성이이고,

 우리들이 믿어왔던 ‘질서정연한 자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양자론을 구축한 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양자론은 물질이나 자연이 단순히 하나의 상태로 정해지지 않고 굉장히 애매한 것을,

그리고 애매함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인 것을 우리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1. 줄거리 。。。。。。。

 

     제목대로 양자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쓴 책이다. 저자는 빛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인류의 시도(1장)가 어떻게 양자에까지 이르렀는지, 역사적 순서에 따라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있다.(2-3장) 이어서 양자론에 담긴 함의들(4장)을 설명한 뒤, 그에 대한 반대 주장들과 반대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인 다 세계 이론에 대해 서술한다.(5장) 마지막 장(6장)에서는 양자론이 현대의 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과학 청소년을 위한 알기 쉬운’이라는 첨가구가 덧붙여진 물리학 이론서이다. 대충 고등학교 수준에 맞춘 내용인가 싶어서 빼어 들었는데(고등학교까지는 다들 비슷한 걸 배우니까), 다행히 기대했던 정도다. 아무래도 전공과 꽤나 거리가 있는 분야이기에 처음 시작으로는 이정도가 알맞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 왜 전공과 상관도 없는 책을 읽으려 하느냐고? 뭐.. 교양으로? ^^

 

2. 감상평 。。。。。。。

 

 

     청소년들을 주 타깃으로 한 책이라 그런지 필요 이상으로 어려운 수식들은 많지 않았다.(그래도 어려운 식들은 꽤나 보였다..;;) 또,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본문의 이해를 돕는 적절한 일러스트들이 있어 책장을 넘기는 데 큰 힘이 됐다.

 

     양자론이란 꽤나 흥미로운 분야다.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한 양자의 성질은 고전물리학의 엄격성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정작 양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양자가 가지고 있는 그 모순적인 두 가지 성질을 어떻게 조화 시킬 수 있을지 어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결국 관찰되는 것만 가지고 말하자,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넘어가니..)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존재 → 하나인 동시에 셋인 존재,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 그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가 있는 관계.. 퍽이나 재미있는 기독교적 적용이 아닐까? 물론 모든 물리학의 궁극적 목표인 ‘대통일이론’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에 맞추어 추구되고 있다는 점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책의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오타의 문제는 심각할 정도다. 종종 중요한 개념에서조차 O, X가 바뀌는 식이니.(그래서 이 책의 개정판이 그토록 빨리 나왔나보다.) 또, 우리나라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일본식 한자 표현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좋을 것 같은 책이다. 나처럼 교양으로 대충이라도 훑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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