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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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지금의 우크라이나(당시에는 소련이라고 불렸던) 체르노빌에 위치했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발전소 인근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안드레이의 가족은 서둘러 피하려 하지만, 얼마 후 발전소 운영의 총괄 담당자였던 안드레이는 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인원으로 차출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격리수용 된 병실에서 피폭 후유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소식을 듣지 못해 애를 끓이는 타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2. 감상평 。。。。。。。               

 

     어린 시절 우리는 ‘원자력 기술’을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으면서 화력발전과는 달리 대기 중으로 오염물질도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꿈의 기술’이라고 배웠다. 게다가 석유나 석탄과 같은 화석 에너지는 매장량의 한계로 인해 수십 년이 지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으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첨단 에너지 기술을 늘려가야 한다는 주장이 곧 따라왔다.

 

     물론 불안요소도 있었다. 이미 인류는 2차 세계대전에서 핵에너지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의 죽음과 그 몇 배나 되는 수의 상해를 입은 이들을 통해 분명히 보아왔다. 그럴 때마다 원자력주의자들은 핵무기와 핵 발전은 엄연히 다르며(사실 둘 사이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단지 에너지 발생 속도가 급격한지 아닌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거의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발전소 파괴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명해왔다.

 

     이 책에 실려 있기에는 원자력 발전소는 2만 년에 한 번 꼴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순수한 수학적 확률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 ‘한 번’이 2만 년 가운데 언제 일어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쉽게 말해 당장 내일 사고가 발생하고 앞으로 2만년 동안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확률은 2만분의 1이다. 문제는 원자력 사고의 특성상 그 한 번의 사고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당장의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앞으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2만 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안드레이와 타냐, 이반과 이네사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원자력이 애초부터 저렴한 에너지 생산 방식이라는 주장 자체도 거짓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다른 발전소에 비해 우선 몇 배의 비용이 더 들어간다. 물론 우라늄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발전 비용 자체는 상대적으로 쌀지 모르나, 이건 발전을 할 당시까지만 그렇다는 말이다. 에너지 생산 비용에는 발전 후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 원자력 발전 후 남는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그저 물과 두꺼운 콘크리트로 차단시킨 채 무작정 쌓아놓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물리적, 사회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더구나 미래의 어느 날 사고라도 난다면 그 처리비용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니 원자력 발전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담을 떠넘겨 비용을 낮춘 방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이렇게 대단히 위험하고, 사실 그리 저렴하지도 않은 발전방식인 원자력 발전을 계속 지속하며 늘려가야만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상 이와 관계된 대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그런 기업들의 로비에 넘어간 정부 관료들의 정책적 지원이 더해졌을 테고. 그렇게 안전하다면 원자력 발전소를 서울시청 앞에다 짓거나 청와대 앞마당에 지으면 될 텐데 또 그렇게는 안한다. 결국 사실 딱히 누구에게도, 환경에도 유익하거나 깨끗하지 못한 시설들은 어느 농촌 마을에 들어서게 되고, 결국 피해는 힘없는 이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힘없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아직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의 극단적인 강압적 정치형태가 여전히 기능을 하고 있던 지역의 일이긴 하지만, 오늘날이라고 해서 딱히 달라진 것은 없지 않은가. 당시에는 공권력을 쥔 권력자들이 상황을 은폐하고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오늘날에는 돈을 쥔 권력자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 역시 정보는 힘이다. 지역발전이니, 특별교부금이니 하는 회유책에 넘어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안전에 대한 신화와 장밋빛 미래상에 현혹되어 자신의 아들딸, 손자, 손녀들의 미래를 팔아먹는 짓을 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책은 딱히 극적이지 않다. 그저 사실적이고, 별다른 꾸밈이 없다. 그런데 더 슬프고, 더 무섭다. 환경운동의 고전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붙여 놓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중고등학생 정도라면 충분히 권해줘도 괜찮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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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 알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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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환자들은 담당 의사의 뻔뻔한 태도에 감히 불평조차 하지 못한다.

환자들은 불평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환자들은 정말 요구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지도,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도 못한다.

 

 

 

1. 요약 。。。。。。。                    

 

     의학교육을 받고 실제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기도 했던 저자가, 병원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부조리한 일들을 고발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의사들 자신이 너무나 ‘직업적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환자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어느 정도 애로사항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되지만, 환자를 인간 대신 대상으로 바라보는 무신경함은 환자들을 육체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막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지적은 오늘날의 ‘의료산업’의 구조적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병원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회사로 전락해 더 많은 돈을 얻어낼 수 있는 환자를 위해 그렇지 못한 환자를 차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또, 의사들은 더 많은 성공과 출세를 위해 환자를 더 잘 진료하고 치료하는 것보다는, (임상과 유리된) 더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영향력을 늘리기 위한 일들에 매진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만큼 환자를 더 잘 알고 치료할 수 있는지 와는 관계없이) 그런 이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감상평 。。。。。。。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스럽고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보아 왔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빼앗아 버렸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그들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 버렸던 것이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노동자 정부를 구성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던 그의 해답에는 동의하지 않지만(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당의 독재로 나아가는 건 시간문제), 이 문장은 아무튼 그가 살던 시대를 날카롭게 집어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자본주의란 것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시켜 볼 수밖에 없고, 그런 사회에서 직업이란 돈벌이 그 이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 책은 세계에서 최초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던 독일 의료계가 오늘날 자본주의 원리 앞에 어떻게 무너져버렸는지를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돈은 의사로부터 ‘후광’을 빼앗았는데, 정확히 표현하면 의사들 스스로가 후광 대신 돈을 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의사들뿐이랴.

 

 

     공공보험과 사보험이 경쟁하는 독일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런 면도 있다. 당연히 병원과 의사들로서는 좀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보험 환자들을 ‘유치’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애써 눈에 띄지 않게 추진하는 민간의료보험제도나 영리의료법인 설립은 뻔히 답이 보이는 멍청한 짓이다.(물론 그 멍청한 짓으로 이득을 보는 작자들이 있으니 애써 욕먹으면서도 추진하는 것이겠지만)

 

     비단 구조의 문제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그 구조 속에서도 또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구조의 문제와 더불어 개개인의 사명감 회복, 혹은 의식개선이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문제가 여기에 이르면 딱히 즉효약이 없다. 무슨 수로 그들에게 돈이 덜 벌리는 방식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당장에 법으로 규제를 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이상 사람들은 다시 빠져나갈 길을 찾기 마련이니까.

 

     다시 마르크스의 언명으로 돌아가 보면 문제는 ‘후광’이 사라진데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인간과 세상을 신비한 대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하찮아지면서 당장의 즐거움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결국 마르크스가 후대에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유물론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전에도 유물론은 존재했지만, 그가 이 철학 위에 자신의 정치 사회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유물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자본주의 역시 그 뒤로는 그 철학을 받아들여 이제 최선봉을 달리고 있으니까.(그는 현상은 잘 관찰했지만 그 원인은 잘못 짚었다) 모든 것이 물질로 확인된 순간, 숭고함이라든지, 고매함이라든지, 외경심과 같은 단어들은 곧장 창고에 처박히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가치가 특정한 종류의 금속과 인쇄된 종이보다 딱히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이 끔찍한 사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아마 변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노력들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이런 노력들은 일정부분 자정능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하게 행해지던 일들을 수면 위로 부각시켜서 사회 전체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의사들이 읽고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3년 여 동안 지속되었던 병원생활은 이 분야의 비전공자인 나까지도 ‘의료산업’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게 만들기도 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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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터는 어디로 가버렸지?
딘 리플우드 지음, 양억관 옮김 / 이레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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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두 마리의 고양이(미케와 다마)와 두 마리의 여우가 등장하는 짧은 우화. 어느 날 숲속에서 커다란 버터를 발견한 고양이와 여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터를 즐기지만 이내 다 사라져버리고 만다. 새로운 버터를 찾으러 나서는 여우들과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고양이들. 하지만 고양이 중 하나인 미케는 자신만의 새로운 버터를 찾겠다며 길을 떠난다. 과연 미케는 버터를 찾을 수 있었을까?

 

 

2. 감상평 。。。。。。。        

 

     저자의 이력이 흥미롭다. 이름으로 보면 분명 미국인으로 보이는데 서문은 ‘유심 선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찾아보니 금융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후 불문에 귀의해 오랜 수행생활을 한 사람이라고 한다. 저자가 종사했다는 금융사업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독특한 경력임에 틀림없다.

 

 

     이야기는 - 저자 자신도 서문에 밝혔듯이 - 어디선가 충분히 들었을만한, 또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한없이 앞을 향해서만 달리다가 결국 가진 것마저 잃어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행복만을 쫓다가 그 뒤에 있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이들 등 소유와 행복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물론 불교적 세계관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막연히 낙관적인(하지만 비현실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한없이 앞으로 달려갈 것만을 주입하는 오늘날 세태는 분명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다. 결국 모두를 사냥꾼의 총 앞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볍게, 하지만 생각하며 읽을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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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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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병이 드는 것은 의식이 무의식의 지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의식과 그것을 치료하려는 무의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의식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 질환은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무의식의 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려고 할 때 일어난다.

 

1. 요약 。。。。。。。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이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고 믿는(82) 저자는, 이를 위해서 적절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부) 그러나 훈련은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어째서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하려고 하는가? 저자는 그 동인(動因)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진정한 자아를 확장시킨다.(2부)

     3부부터는 그런 자기성장과 종교의 관계를 탐색해 나간다. 저자는 ‘종교’를 세계에 관한 여러 신념들의 총체로 정의하면서,(이에 따르면 자신을 무신론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세상에 관한 여러 신념들을 가지고 있기에 - 예를 들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사실이다, 증명될 수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와 같은 -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종교적 관점이 그의 영적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한 인간의 참된 성숙에는 그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자신을 넘어서는 신적 은총이 필요하다는 주장(4부)으로 글을 마친다.

 

2. 감상평 。。。。。。。                  

 

     책의 전반부는 일반적인 심리학을 다룬 책들과 유사하며, 종교와 인간의 정신적 성장의 관계를 다룬 후반부는 종교 심리학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쪽에서 나오는 책들과 비슷한 주장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경우 충분히 예상되는 결론이지만, 스스로를 비종교적 심리학도(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어설픈 종교적 주장을 덧붙이려는 시도라고 비판을 받을 것이고, 자신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독특성이 배제된 이런 ‘일반적인 종교(종교하면 흔히 떠오를 수 있는 공통적인 것들만을 모아 놓은, 그래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종교)’에 관한 언명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아쉬움을 토로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해있기 때문일까.

 

     저자는 책의 시작부터 인간 삶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기고 있다. 이 책 자체가 처음부터 종교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는 좋았는데 후반부는 종교색이 짙으니 어쩌니 하는 서평들이 많이 있던데,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은 셈이다.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낭비 아닌가? ‘~~답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목적과 이유를 떠올리게 만들고, 무목적성이 특징인 물질들의 세계(유물론적 세계관의 세계)에선 처음부터 목적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 책에 대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종교’란 대단히 옅은 색깔을 띠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책은 여전히 선(禪)이나 도(道) 정도의 종교에 관한 인식만을 담고 있다.(선과 도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은은한 향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성경의 인용과 비유가 자주 발견되기는 하나, 그 역시 그저 ‘일반적 종교’의 언명일 뿐이지 특별한 가치나 중요도를 인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확실히 저자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신은 비인격적이며(저자는 무의식을 신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죄란 인격적인 신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 무의식의 메시지를 따르지 않는 게으름으로 정의된다. 결국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거룩한 신의 인도에 따라, 게으름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훈련해 나갈 때 인간은 완성될 수 있다는 식의 뉴에이지 사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영적인 성장’이란 개념을 자주 반복하지만, 영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니까.

 

     자기 성장을 위해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며, 이 훈련의 동인이 사랑이라는 진단 자체는 대단히 와 닿았다. 그리고 각론에 있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종교가 영적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사실 살면서 수많은 은총을 경험하고 있다는 주장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과연 이 책에서 소개된 것과 같은 저자의 여행을 통해 제대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물론 책이 출간된 지 꽤 됐으니 이후 저자의 여정에 좀 더 발전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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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네츠 2012-01-08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장을 읽을 때 뭔가 하나님에 대한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느꼈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정리가 잘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글 써줘서 감사합니다.

노란가방 2012-01-08 16:49   좋아요 0 | URL
예. 반갑습니다. ^^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위키리크스 -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지식갤러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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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2010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특종을 쏟아낸 것은 기존의 유명한 언론사가 아니라 위키리크스라는 이름의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이전부터였지만, 작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감추려고 했던 민감한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정부 당국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이 책은 그런 위키리크스에 초기부터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저자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이트의 내부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냈다. 정보공개에 대한 신념으로 설립자인 어산지와 함께 유럽 전역을 누비며 활약했던 이야기뿐만 아니라, 점차 사이트의 위상이 높아지고 많은 기부금들이 들어오면서 내부적으로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위키리크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2. 감상평 。。。。。。。

 

     수백 명에 달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원로원 주도의 로마 공화정을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바꾸고자 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consul)에 취임하면서 '악타 디우르나‘라는 제도를 시행한다. 일부 학자들이 신문의 시초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제도는 원로원 안에서 이루어진 토의와 의결의 내용을 시장의 한쪽 벽에 공개적으로 게시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이제껏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언을 윤색하고 편집했던 의원들은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민을 무시하는 정책을 무분별하게 제정하기 어려워지는 법. 민중파로 알려진 카이사르의 주도면밀한 입법이었다.  

 

 

       정보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 정보는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또한 다른 힘의 위력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그렇게 보안 산업이 발달하는 것일 게다. 정보의 이런 놀라운 위력을 아는 사람들은 거짓 정보를 만들거나 특정한 정보를 감춤으로써 자신의 힘을 늘리거나 힘의 감소를 막으려 한다. 그렇게 만들고 유지해낸 힘은 다시 정보를 모으고, 모인 정보는 다시 힘이 된다. 대단한 정보의 불균형이자 권력의 불평등이고, 이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상황에서 위키리크스와 같은 정보공개 사이트들과 활동가들의 활약은 대단히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이라크에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공식적으로 작성된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그들 국가들은 이전처럼 쉽게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어쩌면 더 은밀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할지도 모르지만) 또, 기업들이 법률을 어기면서 자사의 이익을 위해, 혹은 소수의 관리자들의 막대한 수익을 챙겨주기 위해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가 공개됨으로써 좀 더 깨끗한 기업문화가 (타의에 의해서라도) 형성되어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정보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신원이 노출되어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막상 공개해 놓은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기에 그 정보가 사실과 부합하는 지 확인을 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모이면서 그것들을 선별하고 정리하고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제작하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렇게 공개할 수 있는 정보를 손에 쥔 공개자가 그 정보의 힘에 취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저자가 위키리크스에서 나와 오픈리크스라는 새로운 정보공개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시스템적으로 풀어보고자 시도하지만, 글쎄 힘이란 건 그런 시스템도 무시할 수 있으니까 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그의 좋은 의도가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문득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내부 고발자(이젠 공익제보자라고 부르던가)들이 조직의 배신자로 불리며 겪어야 했던 부당한 대우들, 툭하면 국가안보를 위한 기밀이라며 정보를 공개하기 거부하는 정부(문제는 어떤 것이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철저히 담당자의 주관적 판단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문화는 대기업을 감히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으로 만들어버렸고, 만약 그런 ‘훌륭한 기업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국가경제를 망치려는 불순분자로 몰리는 상황. 아니, 공개적으로 텔레비전 방송이 정부와 당국자들을 비판하면 쫓겨나기까지 하니 참 갈 길이 멀다. 정보가 가진 힘을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모두와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은 언제쯤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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