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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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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뽑아 든 책이다. 그리고 읽은 후의 느낌은, 역시 이름값은 하는 책이구나 싶었다. 책은 신선한 시도를 담고 있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여기서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사이의 대화라는, 나로서는 흥미가 생길만한 시도였다. 일반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를 근거로 한 난장판 식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의 관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고를 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 대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주제에 대한 대답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깊이 있는 대화, 아니 토론이었다. 정치인들이 나와서 물고 뜯는 싸움박질이나 하는 삼류 텔레비전 토론과는 그 격이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우려가 되기도 한 대화였다.




        주제는 크게 네 가지였다. ‘세계의 종말’, ‘인간 생명의 기원’, ‘교회의 여성관’, 그리고 ‘비신앙인들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근원’이라는 문제였다. 하나 같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고, 형이상학적인 ‘근원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에코가 보낸 공개서한에, 마르티니 추기경이 역시 공개적인 답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이뤄졌고, 마지막 대화에서만 그 순서가 바뀌었다.

        에코는 묻는다.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희망의 개념이 존재합니까?’(20:9-10) 세기말을 앞두고 있는 상황(책이 만들어졌을 때의 상황)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이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이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런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실재할 것’(26:5-6)이라고 전제한 뒤,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는 ‘고결한 가치’를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고결한 가치’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우 모호한 일치점만을 제시-이것이 한계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서의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었다.

        생명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생각해야하느냐는 에코의 물음에, 추기경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바로 그 지고하고 구체적인 생명과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47:12-14)이라고 옳게 지적 하면서, 그 시작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누구나 한 인간 생명의 운명과 대면할 때마다 느끼는 고민과 불안’(51:1-2)을 언급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통의 ‘그 무엇인가’를 기초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에코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차별(?)’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교회의 입장을 묻는다. 추기경은 ‘신학은 가능성이나 <만일 ……라면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며, 계시 진리의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에게 출발하여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82:20-23)이라고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 문제는 어떤 ‘신비’(84:20)가 있으며, 그 신비는 아직 교회에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86:7-8)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네 번째 질문은 마르티니 추기경의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기준은 신에게서 오지만, 비신앙인의 윤리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과연 에코는 어떤 ‘논리적인’ 대답을 할 것인가. 놀랍게도 에코는 ‘제약에 대한 보편 개념’(104:14-15)이라는 것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나간다. 그 관념은 자연적인 것(본유관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 하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의식’(106:5-7)이 또한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계속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인 의무감’이 윤리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대담자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인 만큼, 하나하나가 매우 깊이 있는 질문과 답변들이었다. 때문에 자칫 깜빡하는 사이에 논지를 잃어버리기 쉬웠다. 책을 읽고 가장 의아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충실한 인본주의자, 이성주의자로 여겼던 움베르토 에코의 대답이, 너무나 ‘종교적’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면,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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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미래의 도전들
교황베네딕토16세 지음, 이동준 옮김 / 물푸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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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이 신을 멀리하게 된 이후로

과연 이 세상은 그만큼 더 밝고 즐겁고 자유로운 곳이 되었는가?

오히려 인간들은 그 품위를 박탈당하고

공허한 자유에 내맡겨지는 저주를 받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 요약                                                               

        얼마 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새로 교황에 즉위한 라칭거 추기경, 곧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책이다. 교황 즉위 후 첫 번째로 출판한 책이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 출반되자마자 서점의 한 코너를 장식했던 기억이 난다.

 


        한 종교의 수장으로서, 수 억의 사람들을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로서, 교황은 현대의 정신적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교황이 걱정하는 문제는 크게 몇 가지이다. 하나는 온통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서 정신적인 영역을 소홀히 하는 현대의 사조와, 그 결과로 나타나서 이제는 인류의 공존을 위협하게 만든 위험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에 하는 문제 등이다.

 

        교황은 지나치게 물질중심주의에 치우친 현대인들이 적절한 방향의 수정을 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정신적인 영역은 현대인들에게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무가치한 것으로 천대를 받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내용이 교황의 확신이다. 이를 위해 그는 현실문명이 가진 맹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 감상평                                                           

 

        과연 인문학의 대가 중 한 사람답게, 새 교황의 현재를 읽어내는 눈은 매우 세심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현재를 읽어내는 능력 아래는 매우 뚜렷한 역사의식이 있었다.(역시 역사는 사람을 지혜롭게 해 준다.)

 


        하지만 교황의 이러한 작업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황의 주장은 현대인들의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전제에 한 가지를 더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결국 교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문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와 도덕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의 필요성을 변증하기 위한 목적에 기인한 것 일 테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기독교를, 이런 방식으로 해서 올바로 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그 저변에 깔려있는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능력은 상당히 훌륭하다. 거기에 ‘교황’이라는 네임벨류까지 더해지니, 자기를 제법 의식 있는 교양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혀들어갈 만 하다.

 

        특별히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을 영적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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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신국원 지음 / IVP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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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위기와 포스트모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토대는

  바른 사회의식과 윤리에 입각한 건강한 공동체이다.

 

 

 

 . 요약 。。。。。。。                                                

 

        한국에 몇 안 되는 문화연구 전문가. 더구나 이 연구를 철저하게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진행하고자 노력하는 저자이기에, 역시나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책이다. 딱 봤을 때 지극히 평범한 제목, 사실 이조차도 화려한 겉치레보다는 알찬 내용으로 승부하는 저자 특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너무 편파적인가? ^^;)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것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1부)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는 그 정의부터가 매우 어렵다. 사람들마다, 분야별로 매우 다른 정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정의하기 보다는, 그것이 보여주는 여러 양상들을 소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2부) 3부에서는 구체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그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결론부에서는 이제까지 소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요소들을 다시금 정리하며, 그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를 간단히 논한다.



 

 . 감상평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다른 책들과의 비교는 잘 할 수 없다.


        사실 익숙하지 않은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읽어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주장들을 소개하는 3부의 경우 몇 번씩 반복해서 읽어야만 했다. 특별히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전개를 함께 제시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생소한 용어들과 사상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으로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이 책이 기독교적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균형있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무조건적인 맹종이나 극렬한 저항으로만 나타날 수 있지만, 이 책은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고 있다. 근대문명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功)과 과(過)를 잘 평가하면서도,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발전적 극복에까지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갖는 특별한 가치이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인내를 갖고 모두 읽고나면 보람이 느껴지는 책이다. 문화 영역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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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제임스 사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레서원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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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저 정보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만 책을 읽는 행위는

원색적으로 표현해서, 독서라는 예술의 매춘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                                                     

 

        부제가 눈에 확 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다가, 제임스 사이어라는 저자 이름까지 보고나자 당장에 사버렸다.


 

 

        책의 내용은 말 제목에 잘 나타난다. ‘천천히 읽는 방법’이 전부다. 책을 천천히 읽는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묻는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으리라. 단순히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한 편의 글(책)을 읽을 때, 단순히 훑어가며 개략적인 정보만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완독(緩督, slow reading)'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천천히 읽되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세계관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며 글을 쓴다. 자신과 하나님, 훌륭한 삶, 인간 인식의 타당성 등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전제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전달 방식 모두를 지배한다.’



 

        저자는 책의 내용에서 정보를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저자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1장 전부를 이를 강조하는데 할애한 저자는, 2장과 3장, 4장을 통해 각각 시,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잘 읽을 수 있는지를 약간은 따분하게 설명하고 있다.(워낙에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5장은 모든 장르의 책과 글을 읽는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배경(컨텍스트)’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부분이고, 마지막 6장은 책을 읽고 새롭게 독서습관을 기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책을 선택하는 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실제적인 독서지침들이 실려 있다.



 

 감상평 。。。。。。。                                                  

 

        방학을 하고 처음으로 손에 든 책이다. 책의 서두가 워낙에 흥미로워서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이라는 부제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했었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지를 정리하지 못했던 차에 좋은 책을 만났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세계관 탐색적 책읽기’를 설명하는 1장 부분이다. 이 부분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의 50% 이상은 소화했다고 보면 된다. 비단 책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영화나 만화,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말도 이런 식으로 분석하며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교묘하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이 시대의 많은 변사들에게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서, ‘저자가 당연히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너무나 중요하다.

 

        장르별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를 설명하는 2장부터 4장, 그리고 5장의 부분은 아예 독서를 처음 하는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한 부분으로는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책 읽기에 익숙하고 ‘더 나은’ 책 읽기를 배우고 싶어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에게는 약간 지루할 듯 보인다. 다만 6장의 경우에는 좋은 독서습관을 가지고 싶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이 시대는 우리가 모두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도저히 머리에 담아둘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지식과 정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대에 100권의 책을 대충 읽기보다는 10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아마 저자도 동의하리라.) 책을 읽고는 싶은데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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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의 황혼에서
헤르만 도예베르트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4년 11월
평점 :
절판


참으로 절대적인 이 진리 기준은 그 중심적 의미에서

인간 안에서 발견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요약 。。。。。。。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로 유명한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책이다. 워낙에 유명한 책이라 학부 내내 그 이름은 수 십 번은 들었지만, 여태까지 못 읽고 있다가 이제야 손에 들었다.


 

 

        이 책은 몇 개의 연속된 강의를 모아 둔 책이다.

 

        1장과 2장에서 저자는 기존의 대다수의 철학들이 지나치게 인간 이성에 의존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런 철학들이 갖는 궁극적인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기독교 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타당한 철학이라는 점을 강변한다.

 

        3장과 4장에서는 인간 역사를 물질적인 것의 발전 양상으로만 보려는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결국 허무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밖에 보여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으로 볼 때만이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5장부터 7장까지는 기독교 철학과 신학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장들이다. 저자는 상대적으로 기독교 철학의 우월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신학은 단지 성경에 담긴 진리의 한 부분만을 설명할 뿐이지만, 기독교 철학은 그런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살피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지막 장인 8장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성찰로, 저자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주요 주제를 가지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감상평 。。。。。。。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의 영역에 멋지게 구현한 인물이다. 내가 최근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과 그 중요 구성 요소인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빛이 난다.


 

 

        사실 오랜만에 읽은 제대로 된 철학책이기 때문에, 읽기에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아침마다 한 장씩 읽어 나갔는데, 책 전체를 읽는데 2주가 넘게 걸렸다. 하지만 어렵게 읽은 만큼 보람도 있는 책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저자의 날카로운 논리와 강한 논거는 매우 인상적이다.

 

        다만 약간 유의할 점은 책의 세 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과 기독교 철학의 관계를 다룬 부분에서, 도예베르트가 말하는 ‘신학’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신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의 신학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잘 구분이 안 되는 느낌이 든다. 신학과 구분되는 기독교 철학의 독자적이며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려는 기독교 철학자로서의 저자의 입장은 십분 이해하지만 말이다.


 

        어렵긴 하지만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가능하면 이전에 약간의 선지식을 쌓아둘 것을 권장한다.  관련된 책으로는 쉽게 나온 철학 입문서나 역사관을 다루고 있는 입문서들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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