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쟁 2 - 동인과 서인 - 대비의 수렴청정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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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당쟁이 조선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의 조선은 당쟁과 거리감이 있었지만 중기로 오면서 당쟁은 조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현대의 정치제도는 다당제를 인정하는 정치제도의 성격을 띈다. 일당 독재의 위험성을 견제하며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자는 민주주의적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인과 서인인 어쩌면 양당제와 흡사한 모양새를 갖는다. 일당 독재보다 더 진일보한 형태의 정치 체제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당 체제의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 유익함은 종결되고 만다. 조선의 동서인은 그 출발점이 불순했다. 전랑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구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된 동서인은 한마디로 정권의 장악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서인은 다양한 여론의 수렴과 일당 독재를 견제한다는 양당제의 순기능적 장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무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대에 일본의 동태를 파악해오라는 명을 받았던 통신사로 다녀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경우이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황윤길은 왜의 침입을 강력히 경고한 반면 김성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김성일이 왜에 갔을 때 왜가 조선을 침입할 것이라는 정도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윤길과 당파가 다르다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장했던 것이다. 김성일의 한 개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7년간의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람의 사사로운 당파적 주장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실 동인의 출발점을 이루는 퇴계 이황이나 서인의 태두로 지목되는 이이 율곡은 동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구세력으로 분열하여 다툰 탓이다. 실제로 율곡 이이는 동인들로부터 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장적 본인은 그럴 마음도 생각도 없었으며 일생을 두고 동서인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된 당파는 조선의 중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의 정부를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 차례의 살육은 환국이라는 형태를 빌어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그렇게 기득권이 권력 다툼을 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을은 더더욱 비침한 생활고에 시달리고만다. 정부가 안정되지 못하니 지방의 서리들의 백성 수탈은 극에 이르게된다. 백성을 위한 정부는 부재했고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권 권력을 위해 피터지는 싸움에만 열중했다. 당파를 넘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결국에는 사사된다.  

진정한 충신에게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음을 내리는 것이 조선의 정부였다. 이것이 조선의 당파가 가져온 폐악이었다. 관료들이 당파에 목매고 매달리는 동안 백성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 임진 왜란을 거치고도 당파의 싸움을 지속되었다. 그러다 대비도 하지 못하고 호란을 겪게되니 조선의 백성과 강하는 초토화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당파의 왜곡된 형태가 조선에 자리잡은 결과는 비극 그 자체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파의 순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사학자들이 있다. 분명 당파에 목숨건 선조의 후손들일 것이다. 당파가 축을 이룬 조선의 정부는 바른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백성들만이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편히 잠자리에 누워본 서절이 과연 존재했던가? 절대로 그런 적은 없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그 불명예의 탓을 돌려도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양당제의 순가능보다 역기능에 더욱 열을 올렸던 조선 정부는 양당제의 순기능을 어떻게 이끌어아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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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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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고뇌하도록 권고하며 성숙하게하는 좋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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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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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했다. '도'는 '자연'을  본받음에 어긋남이 없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도를 본 받는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은 도를 본 받는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하늘의 뜻이다...라고. 이는 곧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순리라는 말인 듯 하다.  

인간의 지상 낙원은 무엇인가.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완벽한 인간 만을 위한 조직과 체계를 만들어 안간의 완벽함을 위해 통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사는 사실 통제되지 않은 연유, 실로 통제할 수 도 없으므로 '통제'는 상상할 수 조차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할 것이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란 결코 긍정적인 측면들이 아니다. 흔히 사회를 혼란스럽게하고 인간 조직을 파괴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류를 늘 위협한다. 따라서 인간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고뇌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멋진 신계계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최상의 인간생활에 적합한 멋진 신세계라는 이데아를 완성했다고 하자.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완벽한 시스템을 갗주어 놓았다. 이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것은 완성된 이데아를 파괴하는 일이므로 제재를 가하게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이다. 완전한 이데아를 총족시키기 위해 인간의 자율성을 반납해야 한다. 완전한 이데아를 위한 자율성의 희생, 그것은 또다른 불완전한 인간간적 구조를 가진 변형된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데아의 신세계는 과연 완전한 인간적 시스템으로 적합한 구조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된다. 

인간적 완전함을 위한 인간적 불완전함의 강제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빠지게된다. 이제 딜레마는 더더욱 깊은 수렁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완전한 이데아 속에서의 고뇌는 끝없는 의문과 회의의 반성이 고개를 쳐든다. 

인간은 언제나 고뇌하는 주체이다. 그것이 에데아를 위한 것이든 사사로운 이기심에서이든 말이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함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자께서 마저 자연을 따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멋진 이데아의 세계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과연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바로 행복의 추구라고 했다. 이 명제가 진리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갈망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의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자율성의 희생이 강제된 이데아속에서 과연 안간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끊임없는 인간적 고뇌와 사유를 권하는 책이 바로 멋진 신계이다. 아직 가치간을 성숙시키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많은 고뇌라는 명제를 던져준다. 고뇌는 자신의 성상을 뜻한다. 고뇌의 연속속에서 인간은 갈등하고 성장한다. 이러한 촉매제를 던져주는 책이 바로 멋진 신셰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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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사 안광복의 키워드 인문학
안광복 지음 / 한겨레에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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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저술이라면 살펴 볼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저자들이 있다면 내게는 바로 안광복 선생님이다. 특히 청년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글을 써주시는 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가치관 일 것이다. 가치관에 따라 모든 자신의 행위와 판단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각 개인들의 저 깊숙한 곳에 있어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이드가 고개를 들어 한 개인에게 속삭일 때 초자아가 그 이드의 욕망을 억제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한다고 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가 승리할 때 그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어떻게 욕망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반대로 초자아가 너무 강력하여 이드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할 때 그 개인은 너무나도 고독하고 융통성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욕망에 의거한 삶 보다는 낫겠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상호 소통을 필요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초자아의 승리는 그러한 사회적 소통마저도 단절시킬 수 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이드와 초자아를 중재하는 EGO이다.  

독서는 바로 그 중재자인 EGO의 작용력을 기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빼어난 에고의 역할은 개인들에게 그 어떤 결정과 행동을 할지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 에고가 바르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르지 않은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그 어떤 쪽의 손을 들어줄지 적절한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독서가 왜 중요한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광복 선생님의 도서들은 비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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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지 大學을 논하다 왕부지 논하다
왕부지 지음, 왕부지사상연구회 옮김 / 소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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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거의 필독 항목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학문과 지혜의 근간을 이루는 필독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치고 대학을 읽지 않는 선조들은 없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학의 가치는 그 어느 학문보다 더 소중할 것이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주자라는 인물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그 어떤 인물의 주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조선의 학문은 결국 주자의 학문으로 통했다. 특히 조선 중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뚜렷해진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막시즘의 마르크스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한 종교 일파의 교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주자에 죽고 주자에 살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문난적의 출현이다. 

사문난적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기타의 모든 이론들은 사문난적이되어 처결해야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된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경대승의 관계 그리고 송시열과 윤휴의 경우이다.  

송시열은 주자 맹신자라고 해도 과언아 아니었다. 윤휴는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설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치부했고 결국 서인들은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고만다. 

주자이론의 교조적 현상이 왜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생각이 다른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대적 비극은 주자라는 인물에 대한 교조적 맹신에서 오는 편협함이다.  

학문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아 아닌 조선의 신비들이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자신들의 강건한 사상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사상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현대의 정치적 형태로 본다면 일당 독재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주자의 사상이 지배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수 있다. 하여 조선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회적 현상이 지속된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을 더욱 튼튼히 해가는데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그 학문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의 방향을 어떻게 지향하느냐는 사회적 비극이 될수도 있고 복지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을 읽으며 주의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 생각한다. 

왕부지의 대학이 주자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그러나 기타의 견해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란 사회의 활력이다. 제 아무리 좋은 기르침이라해도 편견에 사로잡힌 사상이라면 그 사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왕부지는 독자들에게 대학의 또다른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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