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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를 빛낸 펠릭스 멘델스존은 정말 멋지고 훌륭한 음악가였다. 사실, 작곡 외에 독일 음악사에 남긴 업적만으로도 그는 후배 인사들에게 돈수백배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칭송 받았다. 또, 음악에만 재능이 있었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다. 문학과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가 남긴 역사가 이를 반증한다. 신(神)은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한꺼번에 몰아주시곤 한다. 아... 신에게 그 어떤 재능도 부여 받지 못한 나의 슬픔이여...!! 이거 너무 불공평한거 아닌가요?


 

음악의 아버지 바흐 선생의 곡을 들어보지 못한 분들은 꽤 있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들 멘델스존 형님의 곡을 알게 모르게 들어봤다고 장담할 수 있다. 실황이나 드라마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나오는 결혼 행진곡은 바로오~~~!! 멘델스존 형님께서 쓰신 곡이지 말입니다.



멘델스존 형님은 다수의 유명한 음악가들과는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큰 부자였고 은행장이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의 친형님 되시는 분도 사설 은행을 운영했다고 하니, 한마디로 제대로 금수저였다. (친형님 되시는 분도 박애정신을 가진 분이었다고 책에 써있다) 멘델스존 형님은 1809년 생으로 초기 낭만파의 인물이다. 낭만주의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불러온 시대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즉, 왕실, 귀족, 상류층들의 소비물로 인식되던 클래식칼 음악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산층의 소비물로 이동했던 것이다. 베토벤이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마어마한 곡을 썼다는 자체로도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베토벤은 음악 소비의 방향성을 귀족과 상류층에서 대중에게로 향하도록 물꼬의 방향을 틀어 잡았다. 대중에게 낭만 음악의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 바로 악성

베토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음악의 대중성 확보는 베토벤을 기점으로 한다. 베토벤이 위대한 것은, 들리지 않는 귀로 그토록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서가 아니다. 음악사를 바꾼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바흐 선생은 분명 음악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친애하고 경애하는 베토벤 선생은 이런 점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녕 악성(樂聖)이다.


부유한 집안 덕분일까, 멘델스존 형님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낭만주의 음악가들과는 약간 다르게 보수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의 작곡은 고전주의 형식을 지켰으며 낭만주의의 향기를 입혀버렸다. 즉, 낭만주의의 향기를 풍기면서 고전주의의 맛을 가진 묘한 음악을 시전하신 것이다. 그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멘델스존 형님은 안정감을 가진 낭만주의 음악을 낳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음악은 주로 밝은 편이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전통과 개혁 사이에 균형잡힌 해결책을 찾아냈다." (중앙일보사 音樂의 遺産 5권 p.107) 라고 쓰고 있다. 





[[[ 괴테는 어린 멘델스존을 천재라 칭했다. 그의 재능을 일찌기 알아봐준 사람 중 하나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였던 것이다. 과연 멘델스존 형님이 '한여름 밤의 꿈' 의 'Overture 서곡'을 완성한 시점은 1826년 이라고하니 형님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나머지는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다)

17세의 멘델스존 형님께서 셰익스 피어가 쓴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영감을 얻어 곡을 썼다고 전한다. 그는 문학 소년이었고 독서는 이토록 그 파급 효과가 지대하다. 지극히 위험한 것이 독서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대한민국 커플들의 결혼 행진곡에 독서가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




[[[ 위 왼 쪽 ㅡ 12세의 멘델스존 (칼 베가스 유채 스케치 1821년)

12세의 멘델스존은 가르침을 받던  첼터의 안내로 괴테를 방문했다. 1749년생 괴테는 멘델스존 보다 60세가 더 많았다. 당시 멘델스존은 72세의 괴테 어르신을 접견한 것이었다. 괴테는 멘델스존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괴테가 어린 소년에게 말했다. "나는 사울이고 너는 다윗이다." (음악의 유산 5권 p. 108) 


괴테 어르신은 향년 82세, 1832년에 돌아가셨다. 모자르트, 슈베르트, 슈만, 쇼팽 등이 괴테 어르신 만큼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나의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8년 후 멘델스존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준 '대커리'라는 화가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중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음악의 유산 p.107)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씀, 믿어도 되나요 대커리 선생? 


위 오른 쪽 ㅡ 부인인 세실 멘델스존 (에두아르투 마그누스의 유화, 1873년)

결혼 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세실 멘델스존은 "재능있는 예술가로서 지적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생각이 깊었다" (음악의 유산 5권 p.115) 라고 써있으며 "아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

 


멘델스존이 낭만주의 음악 환경에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여유가 있는 집안인 만큼 경제적인 난관에 처한 음악가들을 위해 애써준 분이 또한 멘델스존 형님이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정말 멋진 분이었다. 그의 혜택을 받은 음악가들은 셀수도 없지만 로베르트 슈만과 쇼팽을 포함한다 (멘델스존보다 한 살 아래였던 슈만형과 쇼팽형은 1810년생으로 동갑이다). 두분께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찐 보수는 이런 보수이다.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닌, 널리 타자를, 그리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인 것이다. 



독일 음악을 한층 더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 또한 멘델스존 형님이다. 그는 바흐 선생과 헨델 선생을 현대에 인식되는 인물로 역사에 남도록 애써준 장본인이었다. 바흐와 헨델 선생을 연구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멘델스존 형님이었던 것이다. 멘델스존 형님이 아니었더라도 그 누군가는 해냈을 일이겠지만 직접 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겠다. 멘델스존의 노력으로 바흐 선생은 서양 음악사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어느 전설적인 고전음악 큐레이터는 말했다,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가 다시 바흐로 회귀하는 것이 고전음악'이라고. 서양음악은 바흐로 시작해 바흐로 끝을 맺는다는 뜻이다. 위대한 바흐의 존재와 멘델스존 형님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는 독일의 가장 오래된 음악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었으며 교수였다.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던 그는 라이프지히 컨서버토리(Leifzig Consrvatory)를 몸소 설립했다.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도 이 학교의 교수직을 역임하며 힘을 보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던가. 브람스는 이런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 중 한 사람 이었다. 그 후 더 확장된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을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멘델스존의 풀네임은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이다) 이 예술대학의 이름에서 멘델스존 형님께서 어떤 일을 해내셨는지 잘 알수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보수인가! 멘델스존 선생께서는 보수의 정의를 몸소 실현하며 살다간 분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라고 칭하는 자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학교는 독일의 내로라하는 연주가들은 물론 수많은 지휘자등을 배출했다. 셀수도 없는 예술가들은 멘델스존 선생의 노고와 베품의 은덕을 입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말하면 뭐하노 푸르트뱅글러, 지극히 경애하는 쿠르트 마주어, 체코의 심리학 야나첵, 도덕주의자 브르노 발터, 색체의 마법사 리카르도 샤이 등등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며, 멘델스존의 커다란 노고와 지대한 헌신으로부터 나온 인물들이다.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안단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협 2악장으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격에 대한 험담들이 있지만 2악장을 들어보면 생각이 완전 달라진다. 감정의 절제미를 완성시킨 곡이 바로 바협 2악장이니 말이다. 포스팅한 분의 해설이 있어 업로드 해본다. ]]]



성격은 한성깔 했다고 전해지지만 누나와의 서신교환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듯 하다. 어째거나 팬이 있으면 안티도 있는 법, 멘덜스존 형님은 아주 쿨한 성격을 가졌던듯 싶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았던 인물이었고, 써야할 곳에 화끈하게 쓰신 분이다. '천재'란 '하늘이 내린 사람'이란 뜻이다. 멘델스존 형님이야말로 진정한 천재였던 것이다. 하늘이 천재를 내릴 때에는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준 그 재능을 세상에 펼쳐, 널리 널리 이익이 되게 하라는 뜻으로 내리는 인물이 천재인 것이다. 과연 멘델스존 선생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진정한 천재였다. 천재라고 다 같은 천재가 아니다. 진정한 천재는 이렇듯 따로 있는 것이다.




그는 작곡, 연구, 음악원 운영, 인재 발굴, 순회 공연등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음악사에 길이 빛낼 일을 하느라 너무나도 바쁘게 살았다. 그는 어느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혹사시켰으며,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형님께서는 과로가 쌓이고 쌓여 병을 얻게 되었다. 이럴 땐 좀 쉬셔야하는데, 순회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결국 선생께서는 영국 고연을 마치고 돌아온 후 뇌졸중으로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 1847년의 일 이었다. 아...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가. 하늘은 진정한 천재를 낳고도 어찌 이리도 박정하시단 말인가.



그는 생전에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음악이 계속 존재하면서도 더이상 슬픔이나 이별이 없는 곳"이라고. 로베르트 슈만은 커다란 슬픔속에서 친 형님과도 같았던 멘델스존을 운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 든든하고 믿음직했으며 참으로 멋진 관계였던 것이다.


모자르트 향년 35세, 슈베르트 향년 31세, 슈만 향년 46세, 쇼팽 향년 39세 그리고 멘델스존 향년 38세.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할일이 너무나도 많았던 분들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다니! 신이시여, 이토록 귀한 분들을, 정녕 그러셔도 되는건가요? (오늘 따라 신에게 불만이 많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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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5-0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급진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만 그의 보석 같은 현악사중주와 현악팔중주가 빠진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차트랑 2026-05-06 22:12   좋아요 1 | URL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Falstaff님.

제가 종종 언급하는 ‘태권도 2단론‘이 있습니다.
고전음악에 관해서 Falstaff 님께서 태권도 9단이라고 한다면
저는 겨우 2단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본디 고수들은 강호에 있되 은둔하지만 2단 짜리들은 꼭 티를 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임자를 만나 쌍코피가 터지고 말죠^^

멘델스존 형님의 현악곡을 첨가했더라면 훨씬더 좋았겠지만
제가 그러지 못한 것은 아직 뭔가를 제대로 모르는 2단쯤 되기때문입니다.

이점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Falstaff님.

기온이 좋은 밤입니다.
좋은 밤 되십시요~



니르바나 2026-05-09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멘델스존, 용모만큼 아름다운 음악 인생을 사셨군요.
다만 미인박명은 여성에만 해당되는 옛말인줄 알았는데 38세로 저세상으로 돌아가신 일은
지금 생각해봐도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네요.
저 개인적인 취향으로 가을에는 브람스 음악을 많이 듣지만
봄을 여는 음악으론 단연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그리고 5개의 교향곡도 듣기 좋습니다.
물론 현악 중주곡들도 아름답구요.
차트랑님, 즐거운 주말 시간 보내세요.^^

차트랑 2026-05-09 18:5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니르바나님,
말씀해주신대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다간 멘델스존의 죽음은
여러면에서 참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경애하는 마음으로 멘델스존 선생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삶과 생각과 박애의 아름다움을 가까이 하고 싶군요.

말씀해주신 교향곡과 현악 중주곡들을
잘 들어보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저녁 되십시요 니르바나님~!


 


혹여 제목이 거창하여 클릭 후 실망하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오늘의 날씨는 마치 Vincent 를 닮아 뒷 동산에 오르내리며 

들은 노래 중 하나 입니다.






 2001년 데뷔 앨범인데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느낀 음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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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03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ry, starry night~~~ 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차트랑 2026-05-03 12: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잉크냄새님,
독서는 참으로 영향력이 지대한듯 합니다.
돈 맥클린은 고흐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이토록 멋진 곡을 써서 불렀고,
멘델스존은 셱스피어의 희극을 읽고 ‘한 여름 밤의 꿈‘을 작곡했으니 말입니다.

아, 박기서 선생은 김구 선생의 자서전을 읽은 후
정의봉을 들고가서는 안두희를 단죄했다고 하니,
독서의 힘은 참으로 ...

다음 포스팅은 존경하는 멘델스존 형님에 관한 것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잉크냄새님~


 




[[[ 노래는 독일 노래이지만 국내산 성악으로 들어본다. 사적으로 슈만의 Widmung은 황현한으로 끝! 저 팔뚝 보소!! 가사는 맨 애래에... ]]]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음악을 향한 그의 뜨거운 가슴은 그를 피아노로 이끌었다.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본디 그런 것이다.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지 못하면 말라 비틀어지다가는 결국 죽고 만다. 조선에서 가장 불행했던 여성 중 하나였던 세기의 천재 난설헌이 그랬다. 



슈만이 스승을 찾아 들어간 곳이 클라라네 집이었다. 클라라의 아버지를 음악의 스승으로 삼고 내제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클라라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음악을 배웠던 것이다.



하숙생이 하숙집 주인의 딸과 정분이 났다는 스토리는 대한민국에서 흔히 있었던는 일인데,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던듯 싶다. 밥해주던 하숙집 안주인이 장모님 되시는 대한민국 사위님들이 적지 않았다. 독일도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줄이야...



슈만이 하숙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의 클라라는 어린 나이였다. 처음에는 어린 클라라가 슈만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슈만은 밖으로 나가 연애를 화려하게 했던듯 싶다. 젊은 슈만이 그 나이에 사랑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슈만은 아직은 한참 어린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클라라가 14세가 된 시점일 것이다. 클라라도 슈만을 아주 좋아했던듯 싶다. 참고로 슈만은 클라라보다 9살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당시 슈만의 나이 25세, 클라라의 나이 14세인데 슈만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클라라의 부친께서 올커니 했을리 만무했다. 




[[[ 클라라는 남편 슈만이 리스트와 교류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클라라는 자신이 나름 정통 피아니즘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클라라에게 리스트의 예술 행위는 전위 예술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처럼 클라라도 전위 예술은 불온하다고 생각했던듯 싶다. 그런 리스트가 슈만의 곡 '헌정'을 편곡하여 피아노가 독주를 할 수있도록 했다. 클라라가 싫어했던 리스트 덕분에 수도 없는 피아니스트들이 슈만의 곡 '헌정'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다.


역시 국내산 피아니스트 손열음이다. 아...손열음의 모자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손열음을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명연주라고 본다. 모자르트를 정타로 쳐내는 손열음의 연주는 정녕 감동적이다. ]]]



동양이나 서양이나 젊은 시기의 사랑은 결코 쉽게 다스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동서양의 사랑법에는 뚜렷한 스타일 차이가 있기는 하다. 동양은 서서히 군불을 때듯 하다가는 앓는 가슴 못이기고는 끝내 덜커덕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곤 한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은 참으로 은근했지만 아름답고 뜨겁기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저리가라 였다. '장교애련(長橋哀戀)'은 겉으로는 은근한듯 보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 안쪽은 섭씨 구백만로 뜨겁던 그들의 사랑이 만들어낸 애틋한 고사성어이다. 동양의 젊은 사랑은 이렇게 서양에는 없는 고사성어도 만들어낸다.  

반면 서양은 빠르고 화끈하며 화려하게 꽃피우다 비극을 맞이하는 스타일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 자체가 서양의 고사성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 나이의 사랑 그 뜨거움을 온도계로 측정해보면 그 안 쪽은 족히 섭씨 구백만도의 정렬이 불타오른다. 



일이 이지경인데 슈만의 눈에 뵈는게 있겠는가. 그럴수록 부모 혹은 주변 환경의 반대는 그만큼 더 거센 것이 이치이다. 이를 알게된 클라라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내 사위가 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며 반대했던 것이다.



반대 이유를 들어보면

1. 우선 슈만은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었다. 절대로 딸 책임 못질 것 같았다. 


2. 엄마 없이 애지중지 키운 외동 딸 클라라는 나이는 어렸지만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것이 뻔했다. 한마디로 장래 촉망되는 인재였던 것이다. 9살에 신동 소리를 들었으니 말 다했지 말입니다. 슈만에게 시집보내기엔 너무 아깝다고 판단한듯 하다. 실제로 그들이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슈만은 클라라의 남편으로 인식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당시의 슈만은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었던 셈이지만... 



3. 반면 슈만은 피아노를 배우던 중 오른 쪽 손가락을 다쳤는데, 피아노에 관한한 영구 장애 상태여서 연주가로서의 미래가 어두웠지 말입니다.



4. 내심 중요한 반대의 주요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슈만형님은 나이는 비록 젊었지만 남녀 관계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던듯 싶다. 심지어 홍등가 출입을 자기 집드나들듯 했던 모양이지 말입니다.



결국 클라라의 아버지는 미성년자 유괴죄로 슈만을 고소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한 쪽이 쎄게 나오면 그만한 강도로 반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모든 것의 이치이다. 슈만도 질세라 결혼 반대죄로 클라라의 아버지를 맞고소했다. 슈만이 이렇게 쎄게 받아치자 클라라의 아버지는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다. 슈만이 알콜 중독자라는 주장을 해버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짜 뉴스가 문제이다. 가짜 뉴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진위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러면 상황이 불리해진다. 결국 법원은 슈만의 손을 들어줬다. 클라라가 법정 연령인 성인이 되면 부모의 허락없이 혼인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을 했다. 그 해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년 쯤 거슬러 올라가는 1840년 이었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 하기 전 날, 그녀에게 연가곡 하나를 헌정한다.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입힌 것이다. 제목은 Widmung(헌정)이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Du meine Seele, du mein Herz,
Du meine Wonn’, o du mein Schmerz,
Du meine Welt, in der ich lebe,
Mein Himmel du, darein ich schwebe,
O du mein Grab, in das hinab
Ich ewig meinen Kummer gab!


당신은 나의 영혼, 나의 심장입니다
당신은 나의 기쁨, 오 당신은 나의 고통입니다
당신은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당신은 내가 날아다니는 하늘입니다
오 당신은 내가 내려갈 무덤입니다
그 안에 나는 영원히 나의 슬픔을 묻어버릴 것입니다 (내맘대로 의역)


Du bist die Ruh, du bist der Frieden,
Du bist vom Himmel mir beschieden.
Dass du mich liebst, macht mich mir wert,
Dein Blick hat mich vor mir verklärt,
Du hebst mich liebend über mich,
Mein guter Geist, mein bess’res Ich!


당신은 나의 안식, 나의 평화입니다
당신은 하늘이 내게 보내준 사람이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이 나를 가치있게 합니다
당신의 눈길은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요
당신은 나스스로 더욱 사랑하게 합니다
나의 영혼을 드높이고 더 나은 내가 되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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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27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혼 반대죄로 고소가 가능한 세월도 있었군요!!!

차트랑 2026-04-28 07:31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아주 흥미로운 시대였던듯 하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잉크냄새님~

니르바나 2026-04-29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부모가 사랑을 뜯어 말리면 가만두면 떨어질 애들도 더 들러붙게 마련이지요.
청개구리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고보니 클래식 음악 역사에 클라라 아버지가 큰일을 하셨네요.
클라라 아버지가 슈만을 들들 볶아서 슈만은 그 동력으로 좋은 클래식 음악을 만든 셈이니까요.
그나저나 유명 예술가곡을 많이 작곡한 슈베르트나 슈만이나 인생 팔자가 왜 그렇게 사나웠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좀 불쌍해 보입니다.
두 분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빌어봅니다.^^

차트랑 2026-04-29 16:5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니르바나님,
말씀을 듣고보니 ‘청개구리 심정론‘을 간과할 수가 없겠습니다.
구백만도 짜리 러브 스토리에는 늘 강력한 반대가 있었거나
이루어지기 힘든 조건들이 가로막고 있었던듯 하네요.

슈베르트와 슈만의 삶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마음을 아프게합니다.
그래서인지 애틋한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군요...

저도 두분께서 복을 많이 받는 다음 생이 되기를 빌어드리는
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좋은 오후 되십시요 니르바나님!

 


[[ 애초에는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사월이의 딱한 처지가 눈에 아른거려 페이퍼로 대신하게 되었음 ]]


제조업은 대수롭지 않다. 최고의 생산품은 꾸지 나무로 만든 몇 가지의 종이인데 이 중에서도 외관상 고급 피지 같은 기름종이는 매우 질기기 때문에 네 사람이 각 모퉁이를 잡고 들어올릴 수 있다. 이 밖에도 돗자리와 대나무 발이 있다. 예술품은 전무하다.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29 ]]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부록 p. 439, 죄다 농수산물이다 뿐이다 ]]]




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장장 500년을 이어간 나라이다. 이 점을 높이 평가하는 사학자들이 많다. 사실 단일 국가 체제가 500년을 이어간 역사는 실제로 흔하지 않다. 시황제가 통일 후 세운 진나라는 겨우 15년 만에, 수나라는 4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중국 역사의 전설의 전설들을 만들어가며 나름 수명이 길었던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400년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비추어볼때 500년 역사의 조선은 과연 대단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조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대단한 나라 조선 최고의 생산품이 꾸지나무로 만든 종이라하지 않는가. 이 한 줄의 글은 조선의 제도와 정치, 관료들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성이 매우 큰, 부인할 수 없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조선의 백성들은 그 어느 나라의 백성들보다 더 훌륭했다. 또한 조선의 백성들은 그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 애국심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 백성들의 애국심 지수는 그 어느 나라 국민들의 애국심 지수보다 더 높을 것이다. 백성 지수만 놓고 본다면 단연 세계 으뜸이 조선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백성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국가에 대한 다양한 공로가 지대함에도 말이다. 불구하고 전란이 일어나면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농기구를 들고 나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이토록 조선의 백성지수는 드높았으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가 지수는 백성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조선의 관리들과 제도, 정치등은 너무나도 표리가 부동하여 그 백성들을 품지 못했다. 조선의 정치는 백성들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은 백성들의 재능을 활용하여 국익을 증진시키기를 거부했다. 그 못된 고정관념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문학도, 예체능 학도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의 앞 길을 막아서게 했다. 그 길로 갔다가는 천대를 받다가 굶어 죽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과거부터 기득권이 천대했고 누락자들이 천대받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조선 백성들과 강산은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냥반들은 결코 그렇지가 못했다. 결국 사월이도 이런 나라에서는 더이상 못살겠다고 떠났는데 하필이면 왜국(倭國)으로 떠났다고들 한다.


조선의 지배층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글만 읽었다. 글을 읽는데 관심이 없는 냥반들은 그냥 놀았다. 그렇다고 상공업을 장려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조선은 오로지 농사였고, 기술직을 천대했다. 예능 또한 천대했다. 그렇다고 또 농사꾼을 우대했냐하면 역시나 천대했다. 조선의 기득권은 한자를 읽는 자신들을 뺀 한자를 읽지 못하는 나머지 모두를 천대했다. 쉬운 말로 양천제였다. 조선에서 양인을 뺀 나머지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양인들 중 냥반들은 군역에서도 면제 대상이었다. 조선은 백성들의 재능을 억누르고 천시하였으며 그 재능으로 스스로를 빛낼 수 있는 기회를 원천 박탈했다.


조일전쟁을 혹자들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왜국은 조선이 천대해 온 조선의 도자기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우대했다. 억울하게 왜국으로 끌려갔던 조선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왜인들은 조선의 장인들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존경하며 극진히 대우했기 때문이다. 조선 출신 장인들은 조선에서는 평생 그런 우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왜인들의 존대를 받아본 조선의 장인들은 조선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후 '기유약조'를 통해 포로 송환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의 조선 백성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왜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을 데리러 갔던 조선 관리들은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다시 그 지옥으로 누가 되돌아가고 싶었겠는가. 조선의 냥반들은 조선의 백성들이 조선과 냥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저자는 냥반들을 대놓고 흡혈귀라고 칭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적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전국의 농지가 황폐된 것도 그렇지만 농사를 지을 사람도 모자랐다. 임진란 이전 150 만결의 농지가 전후 30 만결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조선은 후에 경신 대기근을 겪어야 했다. 조선의 백성 100여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이런 이유 또한 자명했다. 임진왜란을 치루고도 기득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전후 조선에 긍정적 변화가 찾아왔다고 주장하는 역사 학자들은 모두 노론출신 역사 학자들이다. 


조선의 냥반들은 냥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힘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득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방법이 바로 백성들의 재능을 천대하는 것이다. 재능을 가지고 있어봐야 소용없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재능이 출중했던 천민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저주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기득권은 더욱 탄탄해진다.



'나는 땅을 경작하는 이들이 최종적인 수탈의 대상이라는 것을 거의 지겹게 반복했다. 농사꾼들은 다른 어떤 계층보다 열심히 일하고, 토지의 생산성과 다소 원시적이지만 토양과 기후에 매우 잘 적응된 그들만의 기술들을 쉽게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확에 대한 소유권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하는 데 만족하고, 더 좋은 집을 짓거나 훌륭한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방관과 양반들의 대출 강요와 수탈로 인해 경작지가 해마다 감소하는 농부들이 부지 기수로 있는데, 그들은 현재 겨우 하루 세 끼의 식사가 가능한 정도이다. 수탈당하는 것이 확실한 운명을 가진 계층이 최악의 무관심과 타성과 무기력의 늪으로 가라앉아야만 했다는 점은 슬픈 일이다.'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p.425 ]]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방법은 남의 것을 빼았거나 남에게 일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냥반이라는 타이틀이 붙기만 하면 대다수 관직이 없는 냥반들은 무위도식을 하는 것이 생활 방식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노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냥반들이 노동을 하지 않는 조선의 사회구조는 반드시 노비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은 1만명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했다고 한다. 대군이 아닌 냥반 중에 홍길민은 소유 노비의 수가 1,000 명에 달했다고 한다. 상상도 못할 숫자가 아니던가. 퇴계 이황이 소유했던 노비의 수는 최소 367명이다. 이퇴계 소유의 토지는 일부 문헌에 의하면 36만 평이었다고 한다. 노비의 수와 재산의 규모로 세종의 아들들과 이퇴계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조선의 실상이 그랬다는 역사의 실례를 들고자 할 뿐이다.


조선 냥반들이 노비를 얼마나 사랑했냐하면 왕사남에 나오는 한명회는 사육신 유성원의 아내와 딸을 취했다. 그뿐이 아니다. 정인지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내를, 박종우는 사육신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권언은 사육신 하위지의 아내와 딸을, 권반은 사육신 유응부의 아내를, 강맹겸은 사육신 이개의 아내를 취했다. 그 여인들을 노비나 첩으로 삼은 것이다. 양녕이 난을 일으킨 후 냥반들이 노비나 첩으로 데려간 여인들은 무려 173명, 그 중에는 성삼문의 동생인 성삼고의 1살된 딸도 포함되어 있다고 세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를 첩으로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하는데 진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조선 냥반들의 노비와 첩 사랑은 염치를 생각할것도 눈치를 볼것도 없이 강렬했다. 노비를 가지고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했다. 실상은 그랬으면서 입으로는 혹은 글로는 안빈낙도를 찬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율 배반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조선 냥반들은 녹봉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백성들로부터 약탈을 일삼았다. 관직에서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최대한 빼앗아놓으려 했다. 고리대와 방납제도는 대표적인 약탈과 착취의 수단이었다. 인징과 족징은 하룻밤 사이에 마을 하나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사회적 문제였다.


조선 사회는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조선의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부를 축적하는 정치를 했고, 왕들은 이를 방치했다. 아니, 동조했다. 종모법과 일천즉천제를 보면 국가가 동조했음을 잘 알수 있다. 조선의 냥반들이 자신들을 위해 정치를 한 결과였다. 모든 제도는 자신들의 이익에 촛점을 맞추었다.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싶은 제도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반대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100년이 걸린 이유였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그러나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많았다. 남자들의 태도는 미묘하지만 사실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여자들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은둔의 습관을 지켜 나가고 있었지만 조선의 가정에서 그들의 특징이었던 비굴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국내에서만 자란 조선 사람들은 아내에 대한 의심과 독단, 노예 근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아시아적이라기보다는 영국적인 남자다움과 독립심으로 바뀌었다. 양반의 거만한 몸짓과 농부가 기운 없이 어슬렁대는 태도도 민첨한 행동으로 바뀐 것이 특징이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으며 그들이 번 돈을 짜낼 양반 도, 관리도 그곳에는 없었으며, 안정과 재산은 더 이상 관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재산에 대한 불안감보다도 신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많은 농부들이 부유하다. 그들은 무역에 종사하면서 광범한 계약을 맺고 있었다.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주로 중국 국경 방향에 정착한 조선 사람들은 벌목과 운반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부 유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부락은 다소 불결했다.

조선에서 나는 그들이 열등 민족이었고 삶의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프리모르스크에서 나는 나의 의견을 수정해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229 ]]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선 백성들의 모습인가!!! 냥반들의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보여준 조선 백성들의 빼어난 능력을 보며 저자가 감동하며 적은 글이다.


임금의 질문에 대한 사월이의 답을 들어보자.



[[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저자는 수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조선의 냥반들은 '흡혈귀'라고, 극중 광해의 대사대로 백성들에게 조선은 정말 족같은 나라였다 ]]]


잠시 삼천포이지만, 어린 궁녀 사월이는 영화 '광해'의 극 중 인물이다. 사월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巳月에 태어났을 것이다. 巳月생들은 본디 재주가 빼어나기 쉽상인데 극중 사월이는 그 마음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결기는 빼어났다. 


사실 여성의 이름에 '월'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의 이름에 희, 화, 초, 매, 월 등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남성들의 이름에 화, 희등은 오히려 무방하다. 왕사남 전미도의 이름은 매화(梅花 혹은 梅華)이다. 매(梅)와 란(蘭)이 절의와 기개 그리고 충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매'와 '란'이 그런 의미를 가질 때는 동양화나 글 에서이다. 이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지은 이름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왕사님 옥의 티는 '매화'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의 이름이 '초희'였다. 개명을 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기만 했을 뿐, 끝내 말하지는 못했다. 에구, 소심하기는  ㅠ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닌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 각설하고.

조선의 냥반들은 타자가 냥반으로 진입하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냥반이 아닌 자들이 냥반으로 진입하는 길을 원천 차단했다.

종모법(從母法)을 법제화 했다. 이것도 모자랐던지 일천즉천제(一賤卽賤制)를 시행 했다. 냥반들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최고의 제도였다. 조선의 냥반들은 양인과 천민의 혼사를 강력 몰아붙였다. 노비의 수를 늘려 재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합법적 최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노비의 수는 점점 늘어났는데 어떤 학자들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리한 수치는 무조건 줄여 놓고 보는 관행에 따르면 50% 설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조선의 백성들의 삶이 지옥과 다름없는 삶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저자가 그런 의도로 쓴 책이 아님을 잘 알지만 오지의 오지, 더 오지로 도망가 관리들의 관심 밖에서 살아야 했던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삶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도 과거의 조선처럼 국민들에게 입은 은덕이 너무나도 크다. 일제에 진 빚을 온 국민이 힘모아 함께 갚았고, 3.1운동으로 나라를 지켰으며, 전시에는 학생들마저 전선으로 나가 고지전을 치뤄냈고, 금을 모아 금융 위기에 대처했다. 그러나 정작 기득권들은 금 한 돈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코로나 때는 일사 분란하게 움직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파시즘이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자 온 국민이 함께 이를 저지하여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런 국민이던가. 


현재의 젊은이들의 고통은 기득권들의 과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1인이다. 부동산의 가격을 너무나도 크게 올린 결과 그들은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 피우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고통을 준다. 미래가 구만리인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다. 내집 마련은 부모의 찬스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바뀌어야야 한다. 




저자는 37장 '조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 가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착취하는 사람들과 착취 당하는 사람들, 이렇게 두 계층만이 존재한다. 전자는 허가받은 흡혈귀라 할 수 있는 양반 계층으로 구성된 관리들이고, 후자는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하층민들로서 하층민들의 존재 이유는 흡혈귀들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가망 없는 그러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교육에 의해, 생산계층 보호에 의해, 부패한 관리들의 처벌에 의해, 그리고 실질적으로 마무리된 일에 대해서만 댓가를 지불하는 식으로 정부의 모든 공직의 업무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건립되어야 한다.'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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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2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다 하면서 500년이라면 참 축복할 일이지만 산소 호흡기 달고 500년이니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 듯 해요. 구한말 동학 농민이 저항을 통해 그 책임을 물으려 했지만 실패한 역사가 통탄스러운 뿐입니다.

차트랑 2026-04-23 06:32   좋아요 0 | URL

조선이 그러고도 500년을 이어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아... 동학 농민운동요!
관련도서를 보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지경입니다 ㅠ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백성들에게 중 무장한 일제군을 시켜 모두 학살하는 장면을
어린 학생들에게 대체 뭐라 설명하며 가르쳐야 할까요.

이 땅에는 일찌기 새로운 국가가 건립되어야 했다는 저자의 견해에
적극 동감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잉크냄새님~!!




 


오늘 아침에 우체국에 갈 일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우체국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가야한다. 그곳은 우체국이 아니라 우편취급국이다. 업무 공간은 작아서 프론트 데스크에는 2명의 실무자가 앉아있고 뒷 편에는 1인의 직급이 있어보이는 직원이 앉아있다.


여하튼 택배 상자를 들고 버스에 올랐는데, 앗차, 만원이다!

아이쿠, 이런~ 나의 실수!

우리 학생님들 출근하시는 시간에 아무런 생각없이 버스를 타버렸음 ㅠ


버스 기사님이 문을 닫는데 시간이 걸릴 정도 였으니

아... 나의 실수여...!!!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 사이 한 정거장이 지나버렸다.


이제 내려야하는데....큰일일세....
하면서 어찌어찌 버스 뒷문으로 떠밀려가는데,
아니, 버스 중간에 자리 하나가 비어있네?

이렇게 비좁은 중에 비어있는 자리라니!


다름 아닌 임산부석(pink seat) 이었다!!


아.... 대한민국 학생님들의 드높은 의식 수준이여!!!  떠밀리고 비좁은 공간에 탑승하여 pink seat를 비워 놓는 저 기상이여!

대한민국은 이정도 수준의 학생님들 보유국이다. 감동의 물결이 나의 가슴속에서 차올랐다. 이런 학생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 또 있을까.

늘 그러하듯 대한민국은 어른들만 잘하면 된다.


힘들게 출근하시는 대한민국 학생님들께
내가 학생 때 들었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다.
부디 지금처럼 훌륭하게 자라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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