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말할라 치면 지난 해에는 단 1편의 영화를 본 기록을 가진 영화의 젬병인 사람이다. 그동안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되돌아 봤다. 그런데 매우 오래 전에 보았고 인기 없었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물론 가장 인상 깊은 영화가 무었이었냐고 누군가가 묻는 다면 단연 '매트릭스'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이고 따로이 말할 필요도 없는 영화인데다가 1년에 한 편 보는 간큰 사람이 논할 그런 영화도 아니다.
매트릭스의 감동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폐업하는 비디오 대여점에가서 비디오를 구입해서 보았고, DVD가 나오자마자 그 DVD를 사서 보았을까...매트릭스만 100여번 반복해서 보았다면 이건 쑨 뻥이고, 수십번 반복해서 본 것은 사실이다.
결국 영화 매트릭스는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라는 책을 구입하게했다. 워소스키 형제의 철학적 사고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매트릭스는 두고두고 볼 일이며, 볼때마다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숨어있는 철학을 깨닫게 한다.
매트릭스 이외에 가장 인상 깊고, 감동적이며, 여전히 그 음악을 든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신과 함께 가라'이다.
비록 처음의 내용이 재미가 없으시더라도
'카스트라토'가 들려올 때까지만 기다려주시면 감동받으실 지도 모릅니다. 물론 장담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영화 '신과 함게 가라'는 종교를 넘어 매우 인상 깊은 영화였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수도사들은 칸토리안들이다. 칸토리안은 대중을 향해 노래부르지 않는다. 다만, 하늘을 향해 찬양을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칸토리안은 '검소함', '침묵' 그리고 오직 '찬양'만으로 신과 만난다. 찬양은 그들의 '생활'이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이자, 그들의 '생명'이다.
그러나 칸토리안들이 그 입을 열때면, 그 입에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칸토리안의 화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화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게해준다. 수정같이 맑고 고우며 화사하고 따듯하며 거룩한 노래라는 것이 그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젊은이가 부르는 고음은 카스트라토 창법이다. 흔한 말로 카운터 테너인 것이다. 남자가 카스트라토를 부르기 위해서는 가성을 연습하여 발달시켜야 하는데 그와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서려있다. 고통과 슬픔, 고독 그리고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정녕 고독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동반자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교회가 권위를 중시한 나머지 웃음을 금지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신성하고 거룩한 장소의 교회에서 웃음은 신격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한 당시 여자들은 교회에서 침묵해야 했다. 중세 교회안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결코 들려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교회에서 여성부에 해당하는 높은 고음을 남성이 부르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리하여 카스트라토의 창법으로 그 음역을 소화해낼 수 있는 남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이름도 유명한 '엔리코 카루소'와 같은 사람이 탄생하고, 슬프디 슬픈 '파리넬리'라는 영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우리나라에는 정세훈이라는 분이 카운터 테너이다.
여하튼 중세의 칸토리안은 오로지 찬양만으로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렸다. 검색에 의하면 현재는 전 세계에 딱 2곳만의 칸토리안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여 카톨릭에서는 칸토리안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단이라기 보다는 방식은 비록 다르지만 신을 위해 존재하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이를 수락하기가 꽤 곤란한 모양이다. 중세에 이미 이단으로 낙인 찍힌 교단을 이제와서 정통 카돌릭의 한 일파로 인정한다는 것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들의 노래를 자꾸만 듣고싶어지는 것은 칸토리안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어가 아니다. 그 무엇이 아닌 오로지 '찬양의 노래'로 신을 섬기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 싶을 뿐...이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다만 듣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