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상 까치글방 150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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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점을 타당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안을 제시한 것아니겠습니까. 개정판을 내어 놓아야 할 책무가 있는 번역가님께 새로운 버전의 번역을 촉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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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은 뭘까? : 오행편 젊은 한의사가 쉽게 풀어 쓴 음양오행
어윤형, 전창선 지음 / 와이겔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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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과 오행은 동양 사상을 이해하는 기본이 된다. 시대적으로는 미신으로 치부되기 쉬우나 음양오행은 우주와 인간세상의 작동원리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성리학에 기본을 두고 발전해온 한국의 동양사상도 중화라는 균형의 미학이다.  

위의 책은 목화토금수의 상생과 상극을 단순한 상생상극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바탕으로 설명하여 보다 근원적인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금은 목을 극하는 것으로 이해되하기 보다는 '열매가 익으면 줄기는 시들어간다'로 이해하는 것이 좀더 오행의 의미를 더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극의 대상은 그 상대를 꺼리는 것이지만 그 상대가 없다면 오행은 원활한 작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행은 거대한 우주의 작동 원리이기도하지만 인간 신체의 원리이기도하다. 우리의 신체는 오행의 요소들이 원활한 상호기능을 해야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상태의 신체 작동은 서양에서 말하는 disorder, 즉 질병을 뜻하게된다. 하여 사람의 균형을 잃은 상태인 것이다. 균형의 파괴는 곧 질병을 뜻하고 이 불균형을 다시 균형있는 신체 조건으로 돌려놓는 것이 치료의 의미가 된다. 

한의약에서 환자의 생년월일을 따져 약제를 구성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오행의 원리에 의한 처방이 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하고, 드러나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란 세상의 큰 근본이고 화란 세상의 공통된 도이다. 주희는 '희노애락은 감정이고, 그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은 본성이다'라고 했다.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는 것을 중이라고 한다.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감정의 바른 상태이고 어긋나 온당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화라고 한다. 하늘이 내려준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인데 이는 온 세상의 이치가 모두 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했다. 중은 도의 본체이고 화는 도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중화는 동양 철학의 기본을 이루는 요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화는 바로 우주의 이치이며 세상 모든 것의 작동원리가 되는 것이니 중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삶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오행은 중화를 지향하기 위한 이해이며 그 이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기본적인 오행의 작동원리를 아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시작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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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부수 해설 동양문화총서 4
이충구 엮음 / 전통문화연구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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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다양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언어에는 3,000-7,000개 정도 종류가 있다고 하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언어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엔은 1980년에 7424개의 언어가 있다는 보고를 했지만 현재는 6800여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멸된 언어의 사용자가 그만큼 감소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장 널리 사용하기로는 영어이고, 중국어 사용자 또한 중국인의 인구수와 같으니 어마어마하다 하겠다. 세계적인 국제 대회의 공식 사용언어는 대개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개최국 언어등 3가지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데 서울 올림픽도 이에 준했다. 물론 이는 IOC의 규정이고 행사의 취지와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는 있다. 

여하튼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언어의 목적은 소통일 것이다. 상대방과 의사를 주고받는 쌍방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그 목적은 같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나는 단연 한글을 꼽고 싶다. 가장 널리 퍼져있는 영어와 비교할 때 그 표현의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우리 언어이고  아름다운 표현의 다양성도 단연 으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심오하기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언어가 있으니 바로 한자이다. 한자는 배우기에 가장 까다로운 글자 중 하나에 속한다. 물론 아랍어등과 더불어 한글도 외국인들이 익히는데 무척 애를 먹는 언어에 속한다. 한자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족과는 달리 상형문자라고 한다. 형상을 보고 만들어낸 글자라는 것인데 이 글자가 전달하는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  

예를 들어 법 (法)  이라는 글자는 물수 변(水)에 그칠 거(去) 를 합해 놓은 글자이다. 물은 중력에 의하여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즉 자연의 이리를 담은 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되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갈 줄 안다. 가는 길이 굽어있으면 그 굽은 길을 따라간다. 그렇게 물이 점점 한 지점으로 모여들어 작은 내를 이루고 큰 강을 이루다가는 드 넓은 바다를 이룬다.   

바다에 이르러서는 그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 무엇이든 포용하고 관용의 덕목을 가진다. 처음에는 마치 타에 의하여 돌아돌아 회피 하는 듯 부정적인 측면으로 바라 볼 수도 있지만 결토 쟁투하지 않는 본연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한다. 분명 부드러움이 강함을 능히 제압하지 않던가.

그러한 물의 자연법에 해당하는 본성에 '그친다'라는 의미릐 거를 첨가한 것이 법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그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그 물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났을 때이다. 작은 그릇은 작은 량의 물을 담고 있으며 큰 그릇은 큰 물을 담을 수 있다. 흔히 큰 그릇이 되는 의미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자연의 본성을 가진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됨됨이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래로 흐르면서 그칠 곳이 있으면 그치고 머물다가는 증발하기도 한다. 불은 그 속성이 부드러워 잘 간수하지 않으면 증발해버리기도 한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날아가는 새와도 같다. 

이렇듯 법 자는 자연의 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글자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 알맞는 법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죄인되어 법의 구속력이 작용한다. 그렇다면 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으로만 볼것인가.    

위에서 물 수와 그치다 거의 으미로 알아봤듯이 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흐르고 그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를 가진 글자를 왜 법이라고 하는 것일까.  

바로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동양 철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철학을 가진 서구와는 그래서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동양 사상은 자연의 섭리를 곧 도 라고 했다. 이른바 '신(God)'이라 했다. 동양인에게 신은 곧 하늘이요 그 이치 자체이다. 그리하여 하늘님이라는 말은 이리하여 생긴 것일 게다.  

나아가 법과 도가 만나 법도法道라는 두 글자를 만들어 낸다. 도道는 쉬운 말로 '길'이다. 즉, 인간이 살아갈 때 따르는 길이다. 자동차만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도 올바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를 닦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쉽게 인간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낸다는 뜻일게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도正道  인 것이다. 올바른 길이다. 도를 닦기 위해서는 수신이 필요하다. 수신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하늘님인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수신은 곧 인간이 살아가면서 행해야할 올바른 행위를 일걸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려 한다면 애써 평화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법이라는 한 글자 속에는 들어있는 심오함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만 일일이 모두 거론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한 글자 속에 세상의 이치를 담을 수 있는 것이 바호 한자이다. 이러한 한자를 공부하는 일 또한 좋은 일이며 법에 따르는 일일 것이다.  

한자의 특징 하나는 부수가 있다는 점이다. 부수를 알면 한자가 보인다 라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한자 공부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 유익함은 말할 핑요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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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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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에서 방송하고 있는 도올의 강의는 시청자인 나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의 강의가 이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저자의 공부가 매우 깊으면서도 넓은 덕분 아닌가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흔히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는 용어로 지식의 모양새를 평가한다. 제너럴리스트는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모르는 것이 없는 정도의 사람을 일컫는 것이고 스페셜리스트는 한 전문 분야에서 매우 깊이 있는 학문의 성취를 이룬 사람을 말한다. 물론 심신 수양을 하여 매우 높은 무공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나 우리가 TV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는 '달인'들도 스페셜리스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도올은 이 양자 모두에 해당하는 듯 하다. 그것이 동양 철학이 되었든 서양 철학이 되었든, 아니면 종교가 되었든 의학이 되었든...인문학적인고 철학, 의학적인 모든 분야에서 매우 심도있는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 여겨진다. 

이렇다보니 강의에 막힘이 없다. 경계에서 머물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통섭한 인물이 바로 도올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다른 닉네임을 주고 싶은데 바로 '석학'이라는 칭호다. 

석학이라는 칭호를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아니다. 그의 강의 내용일 빌자면 수신과 능구가 필요하고 또한 우환의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만 제한된 고뇌가 아니라 나아가 백성과 민족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이 석학이라는 칭호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공부가 절대적이다.  

여하튼 도올의 강의는 흥미를 훨씬 뒤어넘어 하나의 사상을 형성하고 있다. 도올사상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그의 강의를 다수가 듣고 공감하며 마음깊이 새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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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풍속사 1 -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푸른역사 조선 풍속사 1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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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자 우리 선조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전해준 화가이기도하다.  한국화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역사를 더해가면서 한국적인 그림을 완성해간다. 이제는 한국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특유의 미술세계를 확립한다. 

우리의 옛 그림을 아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아는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원은  제자인 혜원과 더불어 다른 화가들이 해내지 않은 풍속화를 남겼다. 풍속화는 조선 백성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한폭의 그림에 담아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유산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풍속을 담은 그림은 주로 민화를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화원으로 활약했던 단원과 혜원의 풍속을 화폭이 담아내는 일은 결코 사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그림의 중심이 사군자와 산수를 중심으로 내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조선 후기라고는 하지만 가히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편견과 선입관을 벗어버리기 전에 일국의 화원이 시도하기에는 시대적 사상으로보아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풍속을 화폭에 담아낸 단원은 우리의 소중한 서민 문화를 전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화가라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림을 이해하는 감식안이다. 저자의 해설과 더불어 단원의 그림에 의도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은 매우 흥미진잔하다. 그림을 읽어내는 눈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그 즐거움을 느낄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러가지 면에서 저자는 단원의 그림을 통해 그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서구의 영향을 여과없이 흡수하게된 한반도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고유의 문화에 대한 재신식이 필요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창과 같기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가 역사의 이해이며 우리 문화의 이해이다. 단원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신의 결정과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뿌리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할 일 중 하나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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