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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아는 사람이 간장게장 세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

내가 고추장 된장, 간장, 오이지도 담가보고 김장도 해봤지만

간장게장을 담가본 일은 없다 .

그래서 평생 그걸 먹어본 일도 없다 .

 

흠, 이게 얼마나 귀하기에 간장게장 백반이 이만 원씩이나 하지? 싶어서

딸이 아직도 쿨쿨 자고 있는 아침 일찍

쿠쿠가 지어바친 밥을 한 공기 떠서 간장게장을 꺼내 큰직한 가위를 들고

게장 몸체를 해체해가면서 먹었다 .

예상보다 먹을 만했다 .

그래서 폐기율 70% 게를 아주 알뜰하게 먹어치웠다 .

 

 

두 마리 남았다 .

그런데 며칠 지나서 딸이 물었다 .

-엄마! 김냉에 든 거 간장게장이야 ?

-응.

-어디서 났어 ?

-동준이어머니가  보내셨어 .

-그거 맛있어 ?

-맛없어 .

-내가 한 마리 먹으면 안돼 ?

-안돼. 7 월에 이모 오면 이모 줄 거야 . 이모가 그거 좋아하거든.

-그런 내가 다리 한 개만 먹어보면 안돼 ?

-안돼 . 네가 시잡가는데 네 팔을 하나 떼어놓고 보내면 시댁에서 좋아하겠니 ?

-그렇지만 게는 팔다리가 열 개나 되잖아 .

-그래도 남에게 대접할 땐 완전하게 내놓는 게  예의야 .

-두 마리잖아 .

-한 마리 주면 정없지 .

 

딸은  참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진 못했다 .

그리도 며칠 후 도 며칠 후 나는  남은 두 마리를 다 먹어버렸다 .

이유는...맛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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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자 자주기업 키친아트 from 프레시안

2009/03/29 10:47 | Posted by 노성철
'일꾼이 주인 되는 세상'. 가능할까? 유토피아처럼 저 멀리 손닿지 않는 데 있을 듯한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다. 한국의 노동자 자주 기업. 키친아트. '주방 속의 예술'이라는 문구로 주부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기업이다.

인천 주안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키친아트로 가자고 했다. 공장 건물을 예상하고 갔지만 사무실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현관 머리에 사훈이 큼지막하게 내걸려 있다. '공동 소유, 공동 책임, 공동 분배'.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인 게 분명해 보였다.

박선태 전무이사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안 선반에 냄비며 프라이팬, 각종 주방기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을 한 마흔 중반의 박 전무는 별스럽지 않은 경영인 같아 보였다. 모두들 그가 키친아트의 노동자 자주 기업 역사를 가장 잘 대답해줄 것이라고 했다. 키친아트는 언제부터 노동자 자주 기업이었는가?

▲ 박선태 키친아트 전무이사. 모두들 그가 키친아트의 노동자 자주 기업 역사를 가장 잘 대답해줄 것이라고 했다. 키친아트는 언제부터 노동자 자주 기업이었는가? ⓒ프레시안

"2001년 4월부터 경영을 시작했으니까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키친아트의 전신은 경동산업이다. 경동산업은 1960년에 양식기 수출 기업으로 설립되어 승승장구하여 85년부터는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 40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동화 설비 등 700억 규모의 과다 투자로 인해서 기업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 설비 투자를 올바르게 했더라면 저희들은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대로 경영주들이 하고 있겠지요. 100억 정도만 정상적으로 투자되었지요. 나머지는 비자금 등으로 빠져 나갔던 것입니다."

경동산업은 결국 부도를 맞았다. 40년 넘는 기업이 죽게 되었을 때 그 회사를 살리기로 한 이들은 주로 그동안 생산라인에서 일해 온 노동자들이었다. 최종부도 나던 날, 노동조합이 채권에 관한한 모든 권리를 이전 경영진으로부터 넘겨받았다. 기계와 브랜드 등에 관한 양도양수 계약서를 받았다. 그때부터 노동조합원들이 실제 경영을 맡았다.

"별 문제가 없었어요. 영업 부문에서도 기존 영업사원들과 그대로 함께 일해서 그랬는지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가 해고당한 뒤에 복직되었을 때 서울 영업소 근무를 했었거든요. 그 경험이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지요. 우리가 첫해부터 흑자를 냈어요!"

그런데 경동산업 계산서로는 당연히 영업이 계속될 수 없었다. 두어 달 고민한 뒤 조합원들이 독자적인 법인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조합원 모두의 퇴직금을 모으기로 했다. '키친아트'라는 브랜드로 법인을 만들었다.

▲ 키친아트(주)가 설립되면서 370명의 조합원(지금은 276명)은 바로 주주가 되었다. 노사가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개인의 회사가 아닌 모두의 경영으로 직원과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결의하였다. 따라서 이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프레시안

"그때 노동자 자주 기업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고 전국의 변호사를 찾아다녔지요.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어요. 학술적으로 연구된 것도 없었고요.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우리 뒤에 생겼지만 망해버렸고…"

키친아트(주)가 설립되면서 370명의 조합원(지금은 276명)은 바로 주주가 되었다. 노사가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개인의 회사가 아닌 모두의 경영으로 직원과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결의하였다. 따라서 이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그게 참 아이러니지요. 아무도 만들 생각을 안 합니다. 다들 월급을 받지만 또 주주이기도 하니까, 허 참…."

박 전무는 매우 쑥스러운 표정이 된다. 그는 경동산업 당시 노동조합위원장 출신이다. 부도 위기 당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무노조 기업은 정말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더구나 그는 현재 임원이다. 현재 4명의 이사진이 있는데 다른 3명은 경동산업 당시 현장 관리직에서 일했던 이들이다. 노조 출신은 박 전무 혼자다. 그가 '정체성의 혼란'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신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처음 1년은 술밖에 안 먹었어요."

맨 처음엔 잠바 입고 마티즈 타고 다니면서 일해도 될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하니 다들 웃더란다. 생산 공장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사람들이 뜨악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회사 간부가 워낙 '운동적인 언어'를 많이 쓴 탓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라고 그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가장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것은 주위 선·후배들이 임원이니 좋은데 다니며 잘 먹고 잘사는가 보다 그렇게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런 눈초리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뭣 하러 이걸 하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하지요. 근데 주주들 때문에 버티고 있습니다. 여기서 20년, 30년을 일했던 분들입니다. 마지막까지 퇴직금 걸고 회사를 살렸는데 내가 그분들 위해서 회사를 지켜야하지 않는가, 그 생각이 항상 제 머릿속에 꽉 차있습니다."

박 전무는 1983년에 경동산업에 입사했다. 지금은 키친아트를 위해 온몸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지만 당시 그는 그저 공단에 시커멓게 나붙은 모집 광고를 보고 무작정 입사했다. 특히 기숙사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단다. 처음 들어간 작업 부서는 수저 생산 라인이었다.

박 전무가 서랍에서 숟가락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는 손닿는 모든 곳에 주방용품을 늘 놓아두는 것 같다.

"이걸 노라에 넣고 넓히는 일이지요. 두 개의 큰 볼이 돌아가는데 그 사이에 수저를 방향을 바꿔가며 넣는 거지요. 그 다음에 프레스 가다에 넣어서 찍고, 이바리 제거하고, 광내고… 수저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전부 40가지 공정을 거칩니다.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박 전무는 군대 다녀와서 1987년에 재입사했다. 그때도 수저 부서에 있었다. 그는 수저 만들기의 달인이었다. 하루 2만 개의 수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손이 얼마나 빠르면? 그는 지금도 수저를 딱 보면 안다. 어디가 어떤지, 불량인지 아닌지 한눈에 들어온다.

"수저는 스텐 27종을 써야 해요. 국내 식당에 가보면 주로 24종을 쓰는데 녹이 슬어서 안 좋지요. 함량이 있어야 제대로 된 거죠. 자석에 붙으면 그건 미달인 거고.. 똑같은 수저라고 해도 두께가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 손으로 만들다 보니…."

그렇게 사람의 손으로 수저를 만들다 보니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허다했다. 오죽하면 잘린 손가락을 위한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을까. 공단버스 승객 중에 옷소매 안에 손을 숨기고 있는 이들은 전부 경동산업사람들이었단다. 지금도 키친아트 주주 중에 손가락 없는 이들이 꽤 있다.

▲ "사실 굳이 노동법 안 꺼내더라도 이미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아주머니는 철야를 23개까지 했어요. 매일 새벽 세시까지 하다가 결국 돌아가셨지요. 노동법을 공부해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군요, 이거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시안

1980년대 인천 공단에는 노동운동의 거센 바람이 젊은 청춘을 흔들어 깨웠다. 언젠가 사업을 하리라 마음먹으며 수저를 만들고 있었던 그였지만 우선 눈앞의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위장 취업한 노동운동가들과 그와의 교유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출들이 워낙 많았지요. 노회찬 전 의원도 우리 공단 쪽에서 일했지요. 고향 후배가 와서 노동법은 이런 거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사실 굳이 노동법 안 꺼내더라도 이미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아주머니는 철야를 23개까지 했어요. 매일 새벽 세시까지 하다가 결국 돌아가셨지요. 산재 사고도 많았어요. 사업을 하려던 내 눈으로 봐도 너무 하더라고요. 노동법을 공부해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군요, 이거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삶을 노동운동에 바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는 말이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세었는지 군대 가서 휴가를 회사로 나올 정도였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운동정신이 바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재입사한 뒤 본격적으로 운동에 매진했다. 1989년 9·4 투쟁당시 위원회위원장이었던 그는 구속되어 4년 3개월 형을 살았다. 노동자 중에 단일형으로 그가 가장 오래 살았을 것이다. 그는 복직 투쟁 1년 만에 들어와 일하다가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그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구내식당에 한식 수저를 내놓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양숟가락과 포크를 썼어요. 왜 군대에서 쓰는 포크 있잖아요. 글쎄 우리가 수저 만드는 공장인데 그게 아까워서 못쓰게 했다니까요."

한때 한쪽은 구사대로 다른 쪽은 노조 조합원으로 맞선 적이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함께 일한다. '다들 회사를 살리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말에 그간의 시간이 녹아 있는 듯했다.

박 전무는 요즘도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면 팔을 올리며 같이 부르는데 왠지 팔이 그전보다 높이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아서, 또 옆에서 '넌 팔이 왜 그래?' 할까봐, 신경 쓰인다고 고백한다.

전무 박선태 씨는 경영과 조합 활동의 중간 어디쯤에 서있는 것 같다. 결국 양쪽 세계가 그의 안에서 자연스레 용해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키친아트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면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애초 이익금의 일정 부분을 사회로 환원할 것을 원칙으로 못 박았다. 매월 11월초에는 인천 지역 각 단체, 어려운 분들 공부방 등에 대한 장학금 전달식이 있다. 매년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액수가 1억 원이나 된다.

키친아트의 경영 방침에는 '주주 중심 경영'이 또렷하게 명시되어있다. 조합원이었던 주주들에게 회사가 약속을 지킨다는 약속이다. 현금을 확보해서 신제품 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지만 배당금 지급은 더 시급한일이기도 하다. 주주들이 대부분 60이 넘은 분들이라 노동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주방용품 기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키친아트의 기업 방식은 하청 중심으로 이뤄진다. 생산 품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총 3000여 종에 이른다. 4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가능한 규모다. 각 품목 별로 하청기업들이 생산해내면 본사에서 조립 완성하여 제품을 시장으로 내놓는 것이다. 키친아트는 현재 우리나라 주방용품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꾸준하게 주방용품 제1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키친아트를 사랑해주시는 소비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도 박 전무는 앞서는 걱정을 털어놓는다.

▲ "외국 주방제품들이 들어오면서 국내 업계가 많이 죽은 게 사실이에요. 워낙 외제 주방용품을 좋아하시니까. 아주 미치겠어요. 물론 좋은 것도 있지만 제품의 질이 우리 것보다 훨씬 못한데도 훨씬 비싸게 사 가시는 것을 보면 안타깝지요." ⓒ프레시안

"외국 주방제품들이 들어오면서 국내 업계가 많이 죽은 게 사실이에요. 워낙 외제 주방용품을 좋아하시니까. 아주 미치겠어요. 물론 좋은 것도 있지만 제품의 질이 우리 것보다 훨씬 못한데도 훨씬 비싸게 사 가시는 것을 보면 안타깝지요. 요즘 유명 브랜드도 상표는 그대로지만 중국 공장에서 만들잖아요. 그곳 공장에서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 상표만 다르게 찍어 나오거든요. 그런데 외국 상표는 우리 제품보다 몇 배 더 비싸게 팔린단 말이에요. 실제 이런 사실들을 방송에서 와서 다 촬영해간 적도 있어요."

그는 이야기 도중 연신 냄비와 프라이팬의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그렇게 하는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인다.

"넌스틱(Non-stick) 프라이팬은 길어야 수명이 6개월이거든요. 아무리 좋은 브랜드 제품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외국 제품이 그러면 그냥 넘어가는데 우리 제품은 이거 불량 아니냐고 막 따지고 그러세요. 하아 참…."

요즘 저가 중국 제품이 들어오면서 모두들 한탕주의로 가려는 상술에 속이 탄다. 기업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가격을 지키고, 품질을 지키는 일이 기업과 소비자를 지키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일한다. 키친아트는 그동안 국내 제조만을 고집했다. 일부 제품을 중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지 4년 되어 간다. 꼼꼼한 눈으로 살피는 일은 상표를 지키는 데 있어서 필수다. 디자인과 좋은 재질로 승부한다고 박 전무가 자랑한다.

주방용품을 구입하러오는 고객들은 맨 먼저 키친아트 제품부터 찾는다고 한다. 고객 만족 브랜드로서 확고한 지위를 지키며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 우리 사회에 드문 사훈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뚝심. 이만하면 노동자 자주 기업으로서 이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는…아닌 것 같습니다. 성공을 한 것인지 진행형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식을 상장하자고 하기도 하는데, 외부 자본이 들어와서 좋은 이미지의 기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식을 많이 가진 이들이 저걸(사훈을 말한다) 붙이고 있을까 싶은 거지요. 우리 주주들이 평생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들의 인생이 바로 이 회사인데 말이지요. 이게 내 회사다, 내 땅이다, 자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게 그분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거지요."

이야기를 마칠 무렵 박 전무의 주위에는 각종 주방기구들이 즐비하게 늘어나 있다. 박 전무가 스텐 냄비 바닥을 두드리며 크게 말한다.

"우리도 100년 가는 주방용품 회사 하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공동 소유, 공동 책임, 공동 분배'. 그것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노동자 자주 기업 키친아트가 삼중바닥, 오중바닥 스텐 냄비처럼 굳건하게 지켜나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면 우리도 100년 가는 주방 용품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사진=손문상 기자


노조가 설립한 종업원 자주관리회사 (주)키친아트 - 부실, 퇴출기업 노조가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월 매출 10억에 1억 순이익…200만원씩 배당 네차례 종업원 주주에게
 

- -무차입, 투명 경영, 참여 경영으로 "모두가 주인인 공장 만들 터"



2000년 4월 법원은 인천소재 경동산업의 퇴출을 결정했다. 당시 노조 비상대책위원을 맡고 있던 박선태씨는 기자에게 독백처럼 다짐을 했다. "두고 보십쇼. 절대로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1년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1년 뒤 정말로 그들이 해냈다. 기름 밥에 사출기, 용접기 밖에 만질 줄 모르던 경동산업노동자들이 무차입 경영에 월 매출 10억원, 순이익이 1억여원이나 되는 건실한 기업 (주)키친아트를 설립한 것이다. 

경동산업노조의 역사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의 양식기 업체였던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월 200시간씩 잔업 철야를 하면서도 저임금에, 구사대와 다름없는 어용노조,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짓눌려왔다. '1년에 짤린 손가락이 한 트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산재로 쓰러진 이는 수를 헤아릴 수 없고, 89년 투쟁과정에서 두 명의 동료를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상처를 '한'으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주)키친아트를 설립한 것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대표이사는 노조 최성춘 위원장, 그리고 최위원장과 마치 한 몸처럼 팀웍을 이루는 노조 전 위원장 박선태씨(민주노총 인천본부 전 사무처장)가 상무이사다. 또 경동노동자들의 한, 그 한이 상처로 박혀 온몸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이종화씨. 89년 '9.4 사건'으로 온몸에 불이 붙어 전신3도 화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품질관리를 맡고 있다. 주주 288명은 모두 퇴출 당시 경동산업노조 조합원들. 이들은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출자 전환해 주주가 됐다. (주)키친아트는 노조가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갖는 '자주관리기업'이다. 

* 적대관계에 있던 노사, 12년 뒤의 '아이러니'한 만남

지난 6월23일 토요일 오후 인천 송도비치호텔. (주)키친아트 창립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 왔다. 63년 경동산업 창사이래 사장을 맡았고 '산업재해의 왕국', '노조탄압의 왕국' 경동산업을 이끌었던 최경환 회장이 나타난 것이다. 89년 9월4일 대량징계 때 노동자들이 그렇게 만나려고 했어도 만날 수 없었던, 그리하여 경동산업노동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겼던 당시 사장, 최경환 회장. 당시 투쟁의 주역이었던 지금의 키친아트 경영진들과 12년만에 만난 것이다.

"지난 12년, 우리는 큰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 노사 당사자가 오늘 이 자리에 마주 앉았습니다. 제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원칙 없는 경영으로 회사의 근본이 뿌리 채 흔들리게 했던 회사관계자와 경영진을 배제하고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주)키친아트를 설립했습니다." 최성춘 대표의 인사에 답하듯 여든이 넘은 최경환 회장은 담담히 말했다. "회사 직원들과 관계자들에게 많은 심려와 피해를 끼친 데 죄송합니다." 12년만의 만남은 그렇게 키친아트의 발전을 기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망한 회사를 우량기업으로…노조의 역전 홈런

경동산업노조의 (주)키친아트 만들기는 지난해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96년, 그러니까 박선태씨 등이 6년만에 복직하여 노조위원장에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미 그 때부터 회사가 망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경동산업노조는 임단협 때마다 '채권에 대한 양도양수각서'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거의 두 달에 한번 꼴로 파업을 했다. 사무장이었던 최성춘씨가 위원장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 

지난해 2월 주문도 끊어지고 생산도 중단됐다. 임금은 두달째 체불. 최악의 상황에서 노조는 전면파업을 벌였다. 최성춘대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파업 7일만에 채권에 대한 양도양수 구두 약속을 받아낸다. 또 퇴출 직후인 5월22일 정식으로 키친아트 상표권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채권을 노조에 양도양수 한다'는 합의를 한다. 

경동산업의 모든 채권을 양도받은 노조는 이때부터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100억원에 달하는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경동산업을 20∼30년씩 다니면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낸 노동자들', 이들에게 퇴직금은 단지 돈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짐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은 이름만 남은 경동산업에 사표를 제출하고 (주)키친아트의 주주가 됐다. 다른 한편 노조는 도매업자들을 불러 도움을 청했다. "책임지고 경동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주)키친아트는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 3월16일 (주)키친아트로 법인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한 두 번의 난관을 겪은 게 아니지만 부채가 한 푼도 없는 알짜배기 우량기업을 만든 것이다. 주주(조합원) 전원에게 1인당 약 200만원씩의 배당금을 네 차례나 지급하기도 했다.

12년 전인 89년 9월4일. 경동산업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한을 남긴 날이다. 그 날의 한이 오늘 키친아트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어용노조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던 친목회 '디딤돌' 회원 10여 명이 대량징계에 항의해 최경환 사장실을 점거했다. 이들 모두 온몸에 시너를 붓고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죽으려면 죽어!"

그리고 잠시 후……

그 사건으로 강현종, 김종하씨는 고인이 되었고, 실신해 쓰러진 디딤돌 막내 최성춘씨와 박선태씨는 병원에서 '자살방조, 업무방해, 방화, 화염병투척, 폭력' 등 10여 가지 '죄명'으로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다. '4년 3개월 1일'동안 구속돼 있었던 박선태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감옥에 있으면서 이를 갈았다. '반드시 복수를 할거다.' 근데 복수가 이 방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실험"

"우리는 투명경영과 참여경영으로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실현하는 기업을 만들 것이다." 
이들은 이날 창립기념식에 앞서 임시주주총회를 갖고 몇 가지 의미있는 회사의 운영원칙과 사업방향을 결정했다. "2002년도까지는 자체 공장설비를 완비하여 현재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을 벗고, 흩어진 경동가족들을 다시 모아 직접 생산한다. 부채없는 경영을 실현한다. 또한 개인의 회사가 아닌 모두의 경영으로 직원과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 구체적으로는 총 순이익의 40%는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30%는 공장설비를 위해 적립하고 30%는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경동산업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개인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업, 누가 경영하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그간 경동노동자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89년 9.4 사태 때 고인이 된 김종하, 강현종씨의 추모사업회를 설립,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나 그들의 자녀 학비를 대는 장학사업을 하는 것도 (주)키친아트의 경영 목표라고 이들은 말한다. 

한 때 경동산업 노동자들에게 고급 주방용품 키친아트를 만드는 일은 '전쟁같은 고역'이었고, 동료들의 잘린 손가락이 투영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 키친아트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뿌듯함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키친아트가 넘어야할 산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 앞에서 오만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암울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나침반으로 삼은 경동산업 노동자들 아니, (주)키친아트 경영진들의 이 새로운 실험이 주목된다. 

 
노현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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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명 체험학습 예고 ‘일제고사 폭풍전야’




한겨레 | 입력 2009.03.29 19:50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강원

 















[한겨레] 전국서 등교거부·오답선언 등 동참 물결


교육당국 "방해교사들 엄격 대처할 것"

초등학교 4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일제고사)를 치르는 31일 교육운동 단체들이 전국에서 시험을 거부하고 체험학습을 떠나거나 등교를 거부하기로 해, 이 시험을 둘러싸고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평등교육 학부모회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서울시민모임'은 시험 당일 경기 여주군의 한 사찰과 남한강 일대로 체험학습을 떠날 계획이라고 29일 밝혔다. 정경희 평등교육 학부모회 사무국장은 "이날까지 서울지역 학생 300여명이 체험학습을 신청한 상태"라며 "지난해 일제고사가 실시된 뒤 여러 문제들이 드러났는데도 반대 교사들에 대해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교육당국의 행태에 학생·학부모들이 더 크게 반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남교육연대·목포사랑시민연대 등 전국 16개 지역 30여 교육 시민사회단체들도 31일 낙동강, 구례 산수유마을 등으로 체험학습을 떠날 예정이다. 교육운동 단체들은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의 학생이 체험학습에 참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청소년운동 단체인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 세이 노(Say! No)'는 31일 등교를 거부하고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일제고사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이 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일제고사 반대 오답선언'에는 지금까지 청소년 2400여명이 서명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와 평등교육 학부모회는 학부모 1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30일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전국 학부모 선언'을 발표할 계획이다. 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강원·대전지부는 중징계를 감수하고 이번 진단평가에 대한 반대 활동을 해 온 교사들의 명단을 30일 공개하기로 했다.

교육당국은 진단평가 거부를 유도하는 교사들을 이번에도 엄하게 처벌할 방침이어서 교원단체와 충돌이 예상된다.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는 지난 26일 "(평가를 방해하는) 불법적인 단체행동에 대응해,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이날 "평가 자체를 거부하거나 불참을 유도하는 것은 교사의 본분을 저버린 행동"이라며 "조직적인 거부나 방해 시도가 있다면 지난해와 같은 기준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실시된 학업성취도 평가 때 체험학습을 허락한 초·중학교 교사 8명을 해임·파면 등 중징계한 바 있다.

정민영 기자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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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 음악가 정명훈이 쏟아낸 말들
"계집애들이말야, 한밤중에 찾아와서"
"해고해도 하루면 5백명 모여…미국에 구걸하던 사람들이 촛불을?"
 
 
 

파리에 있는 진보신당 당원들은 하루아침에 유례없는 방식으로 전원 해고된 한국의 국립오페라단 합창단 소식을 접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그들의 복직을 위한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 -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파리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 - 은 우리의 설명을 들은 지 3분 만에 정황을 파악하고, 이 놀라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와 지지의 뜻을 즉각 표했다.


   
  ▲ 지난 2월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이 공공-운수-건설 노조 결의대회에 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사진=공공노조)


프랑스 예술가들의 조언

공연예술노조에선 하루 만에 지지 성명서를 발표해 주었고, 바스티유 오페라의 합창단원은 거의 대부분 주저 없이 서명해 주었으며, 한국 오페라 합창단 단원의 복직을 지지하는 거리콘서트에 대한 논의도 자체적으로 진행중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정명훈을 만나서 지원을 호소할 것을 조언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정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 권력자의 한사람이었기에.

그가 2004년 국립오페라 합창단과 까르멘 공연을 한 후, 자기가 만난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했던 바로 그 합창단의 해체 소식에 예술가의 양심을 발휘해주기를 우린 바랬다. 정명훈은 또한, 1994년 그를 부당 해고한 오페라 바스티유극장 측과 힘겨운 소송을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의 노조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으며 뼈아픈 경험을 이겨낸 그였기에, 비슷한 사안에 대하여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힘을 보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명박과 막역한 사이이긴 하나, 예술가의 순진함에 기인하는 불행한 사건일 것이라고 애써 짐작하며.

3월 20일,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샤틀레 극장에 갔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 콘서트는 완벽하게 우리를 고무시켰다. 나와, 함께 간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당원은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정신이 맑지 않을 수 없고, 정의와 진리를 담지 않을 수 없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정명훈의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

공연이 끝나고, 극장 뒤편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린 한국 사람들이고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운을 떼자, 그는 대뜸 비서를 불러서 그 사람한테 말하라고 했다.

그의 비서에게 우리가 가져간 서명운동 용지를 보여주며,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를 설명했다. 그녀는 정명훈이 아마도 이 사실들은 모를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오페라 합창단원들이 그의 형을 통해 정명훈의 지원을 호소했던 것을 우린 알고 있었지만, 그 비서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전달해 주고 그에게 서명하도록 할테니 아침에 호텔에 와서 찾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어로 된 문서를 보고, 한국어였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언질을 주었다.

한국의 합창단원들은 문화부, 오페라단과 담판을 벌이는 중요한 날인 다음 주 화요일까지 이 모든 서명을 받기를 원하고, 그는 내일 아침 떠나고... 우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근처 사이버까페에 가서 한국어 본을 출력하여 밤에 호텔에 전달하기로 했다.

서명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생각이고, 지지의 발언이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서 갔다는 정명훈씨가 지금쯤 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뫼리스 호텔에 도착했더니 그는 1층 레스토랑에서 몇몇 사람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호텔서 쫓겨날 뻔하다

기왕 온 김에 단 3분이라도 그에게 우리의 육성으로 절박한 현실을 전하고 그의 예술가적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기에, 우린 그에게 전달할 문서를 들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호텔의 한 직원이 우리에게 누구와 약속이 있냐고 묻고, 그렇지 않다면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돈 많은 현대의 귀족들의 충실한 심복 같은 그들은 물리적으로 우리를 쫓아낼 판이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정명훈에게 남길 메시지와 한글로 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문서를 남기면 호텔측에서 그 문서를 전달하기로 하고, 글을 거의 다 쓸 무렵, 마침 그들의 긴 만찬이 끝이 났다. 정명훈은 우릴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조금 전 비서에게 전한 문건을 손에 쥐고 흔들어 대며, “도대체 이게 뭐예요. 이게 뭐하자는 일이예요?” 나는 그의 말을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경악스러움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건 완벽한 오해였다.

그는 도대체 왜 그깟 합창단 하나 없어진 일이 뭐가 대수라고 지금 여기까지 자길 찾아와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기자도 아니고, 에이전시도 아니고... 도대체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분류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사회적 연대 따위를 요청해 온 일은 없는 사람처럼.

약간의 설명 끝에 대충 감 잡은 그는,
“이 합창단이 없어졌다고, 그 합창단을 살려야 되겠다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들을 꼭 구해야 돼요? ”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 하기에"

“선생님이랑 함께 공연했고, 2004년에 프랑스에도 없는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합창단입니다. 그냥 합창단 하나가 아니라, 국립오페라단에 있는 한국에선 유일한 상설 오페라 합창단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그 상황을 전하고 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고자 온 것입니다.

이 합창단을 없애고, 더 좋은 사람들을 뽑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상설합창단을 없애고, 앞으로 모든 공연을 건별로 대학생 단체 같은 곳과 계약해서 공연하기로 한답니다.”

오페라 합창단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찬사는 지나가는 립서비스였는지 그는 자신의 그 합창단에 대한 칭찬을 기억초자 하지 못했다.


   
  ▲ 지난 3월 문광부 앞에서 복직촉구 집회 중인 국립오페라단원들(사진=공공노조)

“뭐요? 언제 같이 공연했다구요? ”하고 되물었다.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 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한국에서는 합창단 때문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대체 왜 해체했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래요? ”

“그야 물론 경영효율, 예산 절감이 이유죠. 표면적인 이유는 상설 합창단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거고.”

“거봐요. 예산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 예산 당신들이 어디서 만들 거예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데.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니요. 오히려 오페라단 예산은 올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산 집행의 우선 순위를 잘못 두고 있는 게 문제죠.”

“이봐요. 내가 서울시향에 있는데 거기서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해요. 여기만 해고당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아니예요. 지금 온 나라가 다 그러구 있는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그리고, 도대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서명하라구?”

우린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단원들이 서명한 서명지를 보여주며, 거의 모든 합창단원들이 서명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나 정부에서 오로지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서명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프랑스에서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6페이지에 빼곡히 담긴 바스티유 오페라단원들의 서명을 보면서도 그의 태도에는 티끌만한 변화도 없었다.

“그거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한국 가서 이거 알아 볼 거예요. 오페라 단장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된 건지.”

그의 말이 맞다. 그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서명을 (할리도 없겠지만) 한다한들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우린 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가 사건의 정황을 묻게 될, 해고 당사자 오페라 단장한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너무나 뻔했다.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터이다.

"촛불시위, 그게 말이나 됩니까"

늦은 밤이니 빨리 투숙할 것을 종용하는 동행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우리가 초반에 자기 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 번 남의 일을 위해 한밤중에 그에게 달려온 우리를 외계인을 보듯하며, 왜 남의 일에 나서서 이러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우리는 운동을(militant)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함께 일하는 세상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40년 전에는 미국에서 뭐 안 갖다주나 하면서 손벌리고 있더니, 이제 와서는 미국산 쇠고기 안 먹겠다고 촛불 들고 서 있는 그 사람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알았어요. 알았어.”

촛불을 든 시민들을 천민으로 묘사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망언이 언뜻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투와 어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서 익히 접해오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이 대목에선 우린 둘 다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위대한 예술가 정명훈인지, 바로 조금 전 우리의 영혼을 황홀하게 감싸주던 음악을 선사하던 그 지휘자가 맞는지.

정명훈과 주성영

잠시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을 거리의 불쌍한 걸인 취급하는 저 인간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내 눈빛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무한한 경멸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정명훈은 제대로 역정이 났다.

“도대체 제 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게 야니야. 이 계집애들이말야. 한 밤 중에 찾아와서.”

비속어까지 서슴지 않는 그를 향해, 나는 그에게 제대로 적합한 말인 “정신차리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그는 거의 우리를 때릴 듯이 씩씩거리며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아프리카에나 가라구.” 다시 한 번 아프리카를 들먹이며 코앞까지 다가와서 소리 질렀고, “기도하라구, 기도” 하는 말을 끝으로 올라갔다.

그의 마지막 말.
“기도하라”.
그에게도 이명박이 서울을 봉헌했던, 그래서 그를 도왔던 하느님이 있었나보다.

"기도하라구, 기도"

나와 성악하는 학생은 분노와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걸었다. 그녀는 울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그 예술가가 저토록 상상할 수 없는 사상의 오물을 잔뜩 머리에 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린 소화하기 힘들었다. 예술 전체에 대해, 인생 전체에 대해 거대한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 지난 3월 문광부 앞에서 복직촉구 집회 중인 국립오페라단원들(사진=공공노조)

문득 호텔로 오기 전, 샤틀레 극장 주변 까페에서 만난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말이 생각났다. 우린 거기서 만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한국에서의 사태를 설명했고, 그들은 모두 경악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서명운동을 전개해줄 것을 약속했다.

우리가 혹시 정명훈에게 당신들이 동참을 호소할 순 없느냐는 제안에는 단호히 불가를 표명했다. 정명훈은 정치적 사안에는 늘 거리를 두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곁들이는 말이, “당신들 지금처럼 파업하면 한국에선 감옥에 가.”라고 정명훈이 라디오 프랑스 단원들에게 말했다는 거다.

그동안 어떻게 저 고매한 예술가가 이명박과 손발이 맞아 수년간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 방에 해결되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도대체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그는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은 그저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사소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 다 갖다 버려도 다음날 얼마든지 손쉽게 충전할 수 있는 건전지라도 되는 듯.

그 사고의 경박함은 이명박, 유인촌, 이소영과 그가 한 치의 차이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상의 '오물종합세트'

물론 우리가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린 결례를 범하긴 했다. 그러나 조용히 옆의 로비에서 기다렸고, 그가 우리를 마주친 시간이 1시였던건, 그들의 긴 만찬이 끝난 시간이 1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짧은 시간에 자료를 읽어야 할 그가 한국어로 된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초반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약속도 안 잡고 무례하게 무조건 사람을 기다리고 끼어든다”면서 우리를 한참 나무랐다. 언짢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잠시 3분 정도 우리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 읽어보겠다고 하며 서명지를 들고 객실로 올라갔어도, 우린 그의 수면을 단지 3분 정도 지체시킬 뿐이다.

긴 얘기를 한 건 그였고, 우린 그가 쏟아내는, 사상의 오물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포극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우린 너무 빨리 넘어갔고, 그것의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란 사실에서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했을 때, 그는 노조의 지원을 받아 함께 싸웠고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지휘하는 서울시립합창단에는 노조가 없다. 그가 취임하면서 “음악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면서 노조에 대해 못을 박았기에 단원들은 감히 노조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노조 경영 삼성과 비슷하다.

그가 현재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에도 그가 지휘했던 바스티유 오페라에도 강력한 노조가 있다. 한국에서 가진 제왕적 권력이 거기에선 당연히 없는 탓이다. 2007년, 오페라 바스티유는 열흘이 넘는 강도 높은 파업을 하기도 했다. 무려 4만9천명에 달하는 고객들에 대한 환불사태가 있었다.

노조 안되는 한국 예술가, 노조 되는 프랑스 예술가?

이곳의 예술가들이 지금의 안정적인 대우를 받으며 -합창단 연봉은 한화로 약 8천5백만원 내외, 오케스트라 단원은 1억원 내외이며 은퇴까지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이다 -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을 안정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술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창작기반을 위협하는 경영자의 어떤 요구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연대와 투쟁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당히 대우하는 이 사회의 예술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수반되었던 까닭이다.

가장 강력한 지원을 기대했던 정명훈을 통해 전원해고 사태를 가능하게 했던 문화 통치자들의 사고의 핵심을 오히려 들을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정직하고 양심있는 예술가였더라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그 수많은 문화예술계에서의 사건에서 그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않고 지내올 순 없었을 것임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정명훈은 아름다운 소리를 이끌어내지만 그 소리의 구체적인 주체는 연주자들과 합창단들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예술가로 대우하지 않고, 소모품 정도로 간주하는 그는 더 이상 존경을 바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권력자의 그늘 아래 안거하면서, 그가 나눠주는 달콤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우리 시대가 만든 신화의 슬픈 이면이었다. 우리가 쇼크를 받는 수고를 감수했을지언정, 그럴싸하게 포장된 무관심을 드러내기보다, 촛불 발언부터 '계집애' 발언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준 정명훈이 차라리 고맙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막강한 권력자의 마술지팡이 같은 것은 없다. 그 어떤 친절한 권력도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선물해 주진 않는다. 예술노동자들 스스로가 보다 넓은 연대의 틀에서 그것을 쟁취하려고 나서지 않는 한. 연대의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서명에 동참했던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이 정명훈의 발언을 접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하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나

정명훈이 일하는 라디오프랑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그가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유네세프 친선대사로 있으면서 그는 여기저기서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가지기도 했다.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여는 자비를 베풀수 있을지언정, 수십 명의 예술가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아도 채워 넣을 예술가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아무상관 없다는, 구세계의 모순에 온전히 빠져있는 자기중심의 거룩한 예술가. 어마어마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2009년 03월 23일 (월) 00:15:11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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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제] 공정성·인력 문제 도마에… "사교육 되레 조장" 우려도




한국일보 | 입력 2009.03.18 03:00 | 수정 2009.03.18 10:11

 















일부 대학선 탈락학생 이의 제기로 벌써 홍역
한명당 서류 5만장씩 검토 '날림 사정' 가능성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입학사정관제 도입을 발표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입학사정관이 사교육비 감소와 입시 지옥 해소에 기여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 만큼 벌써부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입학사정관제가 당면한 과제는 공정성 확보다. 입학사정관은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계량화 한 교과성적 외에 인성 창의력 잠재성 등 정성(定性)적 요소들을 두루 평가하는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특히 지원자가 제출한 자기소개서, 추천서, 학습계획서와 이를 토대로 진행되는 면접은 입학사정관의 주관적 판단이 100% 작용하기 마련이다.

실제 2009학년도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실시한 일부 대학은 홍역을 앓기도 했다. 전형에서 탈락한 학부모와 학생, 교사가 정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부산 A고 교사 정모씨는 "성적이 좋고 품행도 바른 학생이 떨어진 걸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며 "(입학사정관 전형) 선발 기준이 없다 보니 지도 또한 막막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교육학과 김계현 교수는 "기본적으로 입학사정관제는 객관ㆍ정량적 평가가 아닌 주관ㆍ정성적 평가여서 지나치게 객관화 한 평가기준을 요구할 경우 시험으로 회귀할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입학사정관의 주관적 기준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입학사정관들이 참여한 건국대 자기추천전형에는 15명 선발에 1,105명이 몰렸고, 한양대 수시2학기 모집 입학사정관전형은 12명 모집에 627명이 지원했다. 다른 대학 비슷한 전형에도 수십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나, 정작 참여한 입학사정관은 5명 안팎에 불과했다. 짧은 전형기간에 학생들의 지원서류를 꼼꼼히 검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날림 사정' 지적이 대두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은 올해도 개선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파악한 각 대학 입학사정관은 모두 218명(비정규직 201명 포함) 수준이다.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려는 인원이 1만 명 선인 점을 감안하면, 10배수가 지원할 경우 입학사정관 1명이 검토해야 할 서류만 5만 여장이 된다.

입학사정관 전문성 부분 역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부도 사정관 연수 및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해 연수기관 인증제를 도입키로 했지만 정착까지에는 꽤 오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수준 높은 사정관을 확보하려면 대학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사정관의 지위보장을 위한 제도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교육계 일각에서는 입학사정관제가 취지와 다르게 사교육을 되레 조장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대학들이 성적 비중은 줄이는 대신 비교과 영역을 강조할게 분명하고, 이렇게 되면 각종 대외활동, 수상경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수요에 대비한 고급 사교육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것이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장은숙 회장은 "현행 공교육으론 학생들의 잠재성과 창의력을 신장 시키기엔 미흡한데도 대학들이 입학사정관 전형을 확대키로 한 것은 결국 사교육을 받으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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