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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같은 내 인생 [2008.12.19 제740호]
 
경제 종착역에 밀어닥친 불황 한파…
고물상 이향종(40)씨, 고물 수집상 이정오(55)씨, 고물 줍는 김순남(75)씨 스토리
 
 
 
▣ 안수찬 임주환 김정효


 
 

지난 12월10일 아침 8시, 부산 강서구 대저동 고물상 업주 김아무개(42)씨가 자신의 굴착기에 밧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 현장에 남겨진 유서에는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에게 미안하다. 아내에게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고 적혀 있었다. 김씨는 고철값 폭락으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고물상을 짓누르는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다. 건설업과 제조업에 깊은 불황이 닥쳤다. 생산활동이 줄면서, 생산의 흔적인 고물도 사라졌다. 고물값이 폭락했고 고물상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골목을 뒤져 고물을 줍던 노인들도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 벼랑에 내몰린 ‘고철 인생’에는 한국의 경제사도 깃들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시대를 떠받쳤던 노동계층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바뀌어도 이들의 빈곤은 여전하다.

현대제철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제조업체가 밀집한 인천은 고철 인생이 모여사는 곳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고물상이 망하고 고물 줍는 노인들이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는 인천을 밀착취재했다. 고철 산업의 하층을 이루는 이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중·소 규모의 고물상이 어떻게 서로 물고 물리며 불황에 신음하는지, 그리고 제철·제강업계를 주도해온 대기업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3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통해 경제위기 구조의 한 단면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 한 할머니가 지난 12월10일 인천의 한 고물 수집상에서 리어카에 실어온 폐지와 고물을 부려놓고 있다.
 
 
 


12월10일 오전 10시35분, 인천 서구 가좌동


1t 트럭에 시동을 건다. 동네 작은 고물가게들을 돌아다닐 시간이다. 백미러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가 부르르 몸을 떤다. 사람들은 그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4년 전까진 마을버스 기사였다. 10년 전엔 택시 기사였다. 22년 전엔 농고 기계과 학생이었다. “아니, 그랬던 분이 어쩌다 고물상이 됐어요?” 이런 질문을 그는 들어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향종(40)씨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고물 종류가 많은 걸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모는 트럭 조수석에도 고물이 있다. 커피가 까맣게 말라 굳은 일회용 종이컵, 딸기 과즙이 들어 있던 우유팩, 별이 은하수를 이룬 사이다캔이 뒤섞여 있다. 일하다 가끔 마신 음료수의 흔적이다. 설탕물이 비릿하게 썩는 냄새가 난다. 고물이 수북이 쌓일 때까지 오른편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270평 공장의 한구석으로 옮길 것이다.

그는 ‘공장’이라 부르고 사람들은 ‘고물가게’라 부르는 곳에는 작은 산맥이 있다. 물랭이산, 따데기산, 신쭈산, 스땡산, 고철산, 생철산, 파지산이다. 연한 플라스틱을 ‘물랭이’라 부른다. 딱딱한 플라스틱은 ‘따데기’다. 그걸 주워모으는 할머니들이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고물상들도 따라 그렇게 부른다. 이씨는 물랭이와 따데기 말고도 낡은 고철과 윤나는 생철을 구분해 쌓는다. 비철 중에도 수도꼭지처럼 값나가는 신주(황동)와 냄비처럼 흔한 스테인리스를 따로 모아야 한다. 많은 종류의 고물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것들이 그의 눈에는 밟혔다. 부평역에서 계산역까지 마을버스를 모는데, 골목마다 고물이 쌓여 있었다. 일을 마치면 그것들을 주우러 다녔다. 마을버스를 몰며 한 달에 130만원을 벌었다. 고물을 팔면 하루에 몇만원씩 들어왔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다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던 2004년, 그도 운전대를 놓고 거리로 나갔다. 고물상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은 전쟁이다. 이긴 적은 별로 없지만, 모든 것을 잘 참아왔다. 땅을 빌려 고물상을 열었더니 공무원들이 나왔다. 민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길 건너 주택가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어느 날엔 산처럼 쌓아둔 고물이 몽땅 불탔다. 누가 불을 냈는지도 모른 채, 그 재를 치우느라 구청에 돈을 냈다. 그래도 이씨는 잘 참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집에 들어갔다. 신용보증기금에서 5천만원을 빌려 공장 터를 다시 잡았다. 인천·부천을 거쳐 영종도 공항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씨도 참기 힘들다. 9월이 지나면서 모든 고물값이 떨어졌다. 1kg에 600원 하던 고철이 지금은 100원이다. 9월 이후 고철 거래는 완전히 끊겼다. 1kg의 파지를 30원에 사서 35원에 내다판다. ‘5원 떼기’ 장사다. 3t을 사고팔면 1만5천원이 남는다. 파지 장사로는 월 30만원을 겨우 번다. 공장세만 한 달에 170여만원이다. 감당이 안 된다.

스티로폼을 압착한 뒤 떡처럼 뽑아내 재생원료로 파는데, 그 돈으로 겨우 세를 낸다. 스티로폼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압착하려면 기술도 필요하다. 스티로폼을 다루는 고물상은 많지 않다. 이씨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근처 항구에서 나온 스티로폼 박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많이 난다. 압착할 때 스티로폼 타는 냄새도 비릿하다. 그래도 여기는 공장 지대라 냄새 난다고 민원 넣는 사람은 없다.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을까


소일 삼아 고물을 줍던 외환위기 때는 어려운 줄 몰랐다. 거리에 고물이 많이 나왔다. 카드 대란이 났을 때도 돌려 막아가며 버텼다. 이번에는 다르다. 같이 일하던 5명의 일꾼을 한 달 전에 내보냈다. 없는 사람끼리 서로 형편 봐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냥 내보내지 않고 사정이 나은 다른 고물상 자리를 소개해줬다. 일꾼들이 몰던 1.4t 트럭도 한 대 팔았다. 한 달에 50만원씩 내던 지게차 임대료는 5만원 깎았다. “이제 안 쓸랍니다.” 이씨의 말에 지게차 주인은 군말 없이 가격을 낮췄다.

달리 직업이 없는 형님 내외를 불렀다. 형님한테는 200만원, 형수님한테는 100만원씩 월급을 준다. 대신 이씨는 지난 두 달 동안 아내에게 10만원을 갖다줬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아들을 키우는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있는 사람은 버티고 돈 없는 사람은 나앉는 수밖에 없다고 이씨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건 마비야. 예고 없는 타격이지. 위에 있으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밑바닥 인생들은 금방 알잖아.”


 
 


» 이향종씨: “이건 마비야. 예고없는 타격이지. 위에 있으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밑바닥 인생들은 금방 알잖아.”
 
 
 

아침마다 기도하고 집을 나서는 이씨는 매일 천국을 생각한다. 그의 천국은 제주도에 있다. 고물을 모으며 따로 챙겨둔 골동품들이 있다. 옛날 미싱, 옛날 장난감, 옛날 일본칼, 옛날 소화기도 있다. 그걸 모아 제주도에 박물관을 열 것이다. 제주도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박물관을 열면, 일본 사람들은 이씨를 고물상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지 않을까, 이씨는 생각한다. 지난봄에 1천만원을 주고 사들인 고철 50t의 산에서 녹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씨와 고향이 같은 정동영 민주당 대선 후보의 친구 되는 목사님의 아버님이 이씨의 옆집에 살았지만, 그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운하 사업을 하면 경제가 나아진다는 말을 믿었다.

그러나 고향이 다른 것보다는 처지가 다른 게 문제였다. 대통령은 수출해서 나라를 세운 것처럼 말한다. 이씨는 밑바닥 사람들이 차곡차곡 고생해서 이만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밑바닥 사람들 코빼기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이씨가 말하는데, 밑바닥 동생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는 형님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온다. “점심 먹고 해야지.” 이씨 형제는 500원짜리 빵과 흰 우유를 하나씩 먹었다.


12월10일 오후 4시06분, 인천 부평구 십정동


마음에 드는 일만 일어나길 바랄 순 없는 노릇이다. 11월14일에 중간판매업자가 와서 집게차로 파지 2t을 실어갔다. 2만원이 이문으로 남았다. 이정오(55)씨가 한 달 동안 딱 그만큼 벌었다고 장부에 적혀 있다. 낡은 장부 표지에는 날래고 용감한 옛날 만화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정의의 용사는 그날 이후 이씨의 고물가게를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 고물상협회 인천지부 월례 모임에 갔다. 어느 고물상이 자살했다더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워낙 형편이 힘드니 그런 낭설까지 떠도는 것이라고 이씨는 생각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게 그의 버릇이다. 가게 이름이 ‘겸손자원’이다. YH무역에서 일한 7년 동안에 대해서도 그는 겸손하다.


한 달 2만원, 너무 ‘겸손’한 이문


1972년 그는 가발과 의류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서울 면목동에서 채석장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다니던 공고를 중퇴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다. YH무역이었다. 그는 미싱수리공이었다. 여공들이 쓰는 미싱이 고장나면 그가 고쳤다. 한 달에 ‘오버타임’을 250시간까지 해봤다. 하루에 10시간씩 추가 근무를 했다. 그러면 월급이 50% 정도 더 나왔다. 입사 때 받은 월급은 5500원.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그가 돈을 벌자 식구들이 모두 좋아했다.

밤에는 새참이 나왔다. 수백 명 몫을 한 솥에 넣고 끓였다. 퉁퉁 불은 라면이 양은 사발에 담겨 나왔다. 식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먹었다.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 8시까진 다시 출근해야 했다. 이씨는 그 시간도 아까웠다. 사무실에서 의자를 붙여 잠을 잤다. 회사가 잘나갈 때는 직원이 4500명이나 됐다. 대통령이 주는 수출공로탑도 받았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죽기 두 달 전인 1979년 8월9일, 여공 200여 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 위장 폐업과 감원에 항의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근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서울 왕십리 콩나물 공장 자리에 미싱 석 대를 놓고 가발 공장을 시작했던 사장은 정부의 수출지원책에 힘입어 의류까지 다루는 큰 기업의 회장이 돼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수출 기업의 회장은 공장 문을 닫고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여공들이 사흘간 농성했는데 경찰이 강제진압했다. 노조위원장은 진압 과정에서 죽었다.

그 일은 역사책에도 남았다. 그때 이씨는 다친 사슴처럼 가만히 면목동 본사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데모하러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기했다. 이씨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옛날 이야기하면 가슴이 아파.” 종업원들은 당연히 힘들었고, 회장도 할 만큼 하다가 손을 들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아휴, 좋은 데 있던 분이 저희 같은 회사에 오시면 되겠어요?” 이력서를 넣는 공장마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군인 대통령이 죽고 또 다른 군인 대통령이 취임하던 때였다. 사장님들은 YH무역에서 일했던 과거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엔지니어라고 자부했던 이씨는 눈높이를 낮췄다. 하루라도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80년대에는 청계천에서, 90년대에는 안양공단에서 일했다. 10명 정도 일하는 작은 공장들이었다. 대부분 수출 기업이었지만 예전처럼 신나진 않았다. 이씨는 미싱사였던 아내를 그 시절에 만났다.


 
 


» 이정오씨: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공부 1등 하면, 엄마·아빠도 업계에서 1등 할 수 있나요.” 아내가 말했었다. “아들 학교 보내지 말고 그냥 연금 낼까요?”
 
 
 

공장이 돌아야 고철이 나올 텐데


장인이 운영하던 고물상을 1991년에 물려받았다. 장인이 몸져누웠다. 봉제업도 쇠퇴하고 있었다. 이씨는 트럭을 몰고 밖에 나가 고물을 모아왔다. 아내는 130평의 작은 가게를 지켰다. 도부꾼들이 리어카에 담아온 고물을 사들였다. 예닐곱 명의 도부꾼이 매일 아침 이씨 가게로 출근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옛날 일이다. 오늘 점심 무렵 이씨는 배터리가 방전된 1t 트럭을 고치러 차량 정비소에 다녀왔다. 5월 이후 가게 앞에 세워두기만 했더니 탈이 났다. 나가서 고물 모아올 일이 없다. 큰길 건너 인천공단이 있다. 그 공장들이 돌아가야 고철이 나온다. 공장 사장들은 문 닫고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 YH무역 회장도 그때 그런 심정이었을지 이씨는 궁금하다.

아들 둘은 이제 대학생이다. 들어오는 물건 가운데 학습지를 골라 공부시켰다. 큰아들은 제대한 뒤 휴학 중이다. 작은아들은 막 입학했다. 등록금이 필요하다.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공부 1등 하면, 엄마·아빠도 업계에서 1등 할 수 있나요?” 아내가 말했었다. “아들 학교 보내지 말고 그냥 연금 낼까요?” 외환위기 때 국민연금을 체납했다고 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었다. 20만원 연금을 내면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수 없었다.

통금 해제될 때까지 동상에 걸려가며 일했는데 나라가 우리한테 뭘 해줬느냐고 아내가 말한다. “일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보면 잘못 살았지 싶다”고 말하는 아내는 대학생 아들 생각해서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남편 이씨를 채근했다. 이씨의 큰 귓불이 발갛게 상기된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니 자식들에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겨울의 옅은 해가 일찍 졌다. 옛 미싱수리공은 옛 미싱사의 손을 잡고 19평 집으로 돌아갔다.


12월11일 오전 3시12분, 인천 남동구 간석동


까만 밤이 일직선으로 동네 골목을 가른다. 리어카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나온다. 할아버지의 걸음은 그보다 빠르지 않다. 이제 10여 분 걸어나가면 꽃밭이다.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하는 것이 꽃밭이구나, 10년 전 고물 줍는 일을 시작하면서 김순남(75)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란주점과 실내포차와 20년 전통의 해장국집을 지나며 그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주변을 살핀다. 키가 큰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국가유공자, 왕년의 반공투사


불 꺼진 건물의 유리문을 민다. 다섯 번쯤 그러다 열린 문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종이 박스를 깔고 앉았다. 신문지로 싼 유리병을 꺼낸다. 원래 그 병에는 새우젓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새우젓으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돼지 머리고기에 새우젓을 올려 먹었을 수도 있다. 김씨는 새우젓 말고 그 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쌀밥과 볶은 김치가 담겨 있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김씨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하고 시작하는 게 그의 말버릇이다. ‘우리’는 차가운 걸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짠 것도 좋아한다. 붉다 못해 까만 김치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요즘 나오는 맛소금과 진간장이 참 맛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밥 먹는 걸 싫어한다. 한 줄에 1천원 하는 김밥을 먹으려 24시간 분식집 문을 열면, 식당 아주머니는 주문받을 생각도 않고 잠시 실눈을 떴다가 내처 존다. ‘우리’도 사람인데 시답지 않은 대접받는 건 질색이다.

국가유공자로서, 왕년의 반공투사로서 그런 일은 견딜 수 없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김씨는 6·25 때 미 해병대 소속 8240 유격대에 자원 입대했다. 9·28 수복 직후 당숙이 송화군수가 됐는데, 중공군이 다시 밀고 오면서 가족 전체가 반동으로 몰렸다. 황해도 신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만 게 그가 배운 것의 전부다. 신천과 송화는 6·25 때 서로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많았던 곳이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배운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 김순남씨: 목숨 바쳐 싸웠고 일했는데 왜 여전히 사는 일이 고단한지 김씨는 잘 모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부자들은 그와는 다른 낙하산을 탔다.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이북 청년들과 함께 유격대에서 싸웠다. 바닷물이 짠지 신지도 몰랐던 그는 ‘양키 싸진’ 밑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았다. 낙하산을 세 번 탔다. 칼 두 자루가 낙하산을 떠받치고 있는 해병대 모자를 그는 새벽마다 고쳐쓰고 나와 리어카를 몬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근데 나라에서 주는 돈은 하나도 늘지 않아 서운했다. 매달 8만원이 나온다. 여기에 노인연금 8만4천원이 더 붙는다. 나머지는 김씨가 알아서 번다. 단칸 지하방에 사는데도 가스비 8만원, 전기세 5만원이 매달 나간다. 볕이 들지 않고 습한 지하방이라 전기와 가스를 안 쓸 수는 없다. 위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안 아픈 데가 없는 할머니 약값으로 20만원이 나간다.

그가 고향의 처녀를 만나 결혼하던 40여 년 전, 통행금지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무원, 기자 그리고 연탄배달부였다. 몸에서 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 마포구 만리동에 연탄가게를 냈다. 쌀도 팔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탄과 쌀만 있으면 해마다 닥쳐오는 겨울을 살아냈다. ‘송화상회’는 한 달에 4500장씩 연탄을 팔았다. 결혼 축의금이 100원 하던 시절, 연탄 100장을 1천원 받고 팔았다.

1966년 연탄 파동이 났을 때, 한 가구당 연탄 20개씩만 사야 한다고 나라가 법을 정했다. 구청에서 가택수색을 나와 더 사모은 이를 잡아갔다. 동사무소에서 확인증을 받아 연탄공장에 가면 정해진 수량만큼 연탄을 받았다. “빌어묵을 양반, 늙어 죽도록 연탄 장사나 하시오.” 주문이 밀려드는데 연탄을 대지 못했다. 만리동 달동네의 아주머니가 욕을 해댔다. 연탄으로 밥 지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만리동 동장은 수완을 발휘해 매일 세 끼니 열한 명의 식구들 밥을 해낼 만큼 연탄을 구했다.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 내놓아야 하나


남한테 머리 숙이지 않고 뛰어다니면 돈이 되는 그 일이 그는 좋았다. 여름철 석 달만 놀면 1년 벌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섯 달을 놀게 됐을 때 그는 조금 걱정이 됐다. 일곱 달을 놀았을 때, 그는 연탄가게를 접었다. 석유곤로로 밥을 짓고, 프로판가스로 요리를 하더니, 도시가스까지 집집마다 들어왔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그는 인천으로 왔다. 전쟁 때 월남한 고향 사람 몇몇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1972년부터 몰던 연탄 리어카 두 대를 함께 끌고 왔다. 할머니들은 힘이 없어 리어카를 끌고 싶어도 끌지 못한다. 유흥업소에서 종이박스와 플라스틱 병과 고철이 나와도 모두 담아가지 못한다. 김씨에게는 36년 된 리어카가 두 대나 있다. 새벽 3시에 나와 저녁 6시까지 리어카에 고물을 담아 모은다. 그런데 올가을부터 재미가 적다. 손가락만 조금 쑤시고 몸은 여전히 견딜 만한데 일감이 줄었다. 종이도 줄고 고철도 줄었다. 어제는 하루 두 번 리어카로 고물을 실어 날랐는데 1만1천원을 받았다. 그제는 9천원이었고, 그그저께는 4500원을 받았다. 매달 40만원을 벌었는데 요즘은 20만원을 겨우 넘긴다.

폭과 길이가 2m쯤 되는 큰 전자저울에 리어카를 올려놓을 때마다 김씨는 구부정한 허리를 억지로 펴고 눈금을 본다. 김씨의 고물을 사주는 작은 가게에서 석 달째 매달 10만원씩 빌렸다. 그 30만원을 언제 갚을지 알 수가 없다. 목숨 바쳐 싸웠고 일했는데 왜 여전히 사는 일이 고단한지 김씨는 잘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자들은 그와는 다른 낙하산을 탔다. 그가 연탄을 배달할 때도 부자들은 석유곤로로 밥을 지었다.

지하방 앞에 모아둔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는 내놓아야 하나, 김씨는 생각한다. 시래기 말린 것을 걸어둔 시멘트 담벽 아래로 냄비, 프라이팬, 세숫대야, 밥솥, 버너, 비디오, 음료수캔, 커튼 지지대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해병대 모자, 리어카 그리고 이 고철들이 70여 년을 살아낸 김씨에게 남겨진 재산이다. 따뜻한 기운도 없는 겨울 아침 해가 그의 굽은 허리를 타고 떠올랐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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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드라마·영화로 역사를 바로잡겠다?

2008 12/23   위클리경향 805호

뉴라이트, 100부작 다큐드라마 제작…실체 없이 소리만 요란



|경향신문

시민단체 뉴라이트 전국연합(뉴라이트)이 거장 PD, 작가와 함께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100부작 다큐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해서 화제다. 그렇지 않아도 뉴라이트의 역사 교과서 수정작업 그리고 일부 극우 강사의 역사 특강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TV 드라마까지 보수색을 칠하겠다는 의도여서 관심이 집중됐다.

제작비 300억,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첫 보도는 12월 2일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가제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로 1945년 해방 직후부터 2007년 이명박 정권 탄생 직전까지 다룬다. 제작비는 300억여 원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기금을 모금하여 충당할 예정이라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를 시작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뉴라이트와 이영신(80) 작가를 제외한 나머지 관계자들은 뉴라이트와 연관을 되도록 부정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색깔이 확실한 단체가 중심이 된 드라마에 가담했다는 세간의 부정적 시각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총책임을 맡고 있는 김진철(전 KBS 편성제작 PD)씨는 “나와 다큐멘터리 감독인 정수웅 감독이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다룬 드라마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해 기획안을 만들었고, 뉴라이트는 자기네가 하고 있는 좌편향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와 맥이 같으니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라며 “뉴라이트와 <조선일보>가 너무 앞서 나갔다”고 뉴라이트의 역할을 애써 축소했다.

또 연출을 맡기로 한 장기오(62) PD(전 KBS드라마제작국장)와 장형일(70) PD는 “연출 제안이 와서 하겠다고는 했지만 뉴라이트가 개입한 드라마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장형일 PD는 “역사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다큐드라마라고 해서 하겠다고 한 것인데 너무 색깔을 띠면 (연출을) 맡을 수 없지 않겠느냐”면서 “뉴라이트를 세우면 색안경을 안 끼고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장기오 PD는 1971년 KBS에 입사해 시리즈를 연출했고, 장형일 PD 역시 SBS <야인시대> <장길산>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원로 연출자다.

하지만 뉴라이트 임헌조(42) 사무처장은 “뉴라이트가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 6개월 전부터 방송관계자들을 접촉하면서 아이디어를 모았고, 2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정리했으며 지금은 기획 마무리 단계다”라며 “뉴라이트가 이런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고, 객관적인 현대사를 그린 드라마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 분들이 모인 것”이라고 밝혔다.


뉴라이트를 비롯해 보수인사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드라마 <서울1945>. |경향신문
임 사무처장에 따르면, 뉴라이트는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제작도 추진 중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 한 영화로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2005년 9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인천자유공원에서 맥아더동상 철거 문제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진 후 맥아더에 대한 국민의 고정관념이 바뀌었고 그 결과 사회가 좌경화하고 있다는 게 뉴라이트의 판단이다.

임 사무처장은 “나름대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반미투쟁의 아이콘으로 맥아더를 주시했고 맥아더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동상을 끌어내리려고 한 것”이라며 “연합군과 국군의 영웅담을 극적으로 묘사하면 국민의 잘못된 안보관과 국가관이 조금이라도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영화제작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돈을 내고 극장을 찾는 관객만 관람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누구나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데 착안해 드라마 제작을 병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어쨌든 드라마 제작은 현재 초기 단계다. 아직 연출자나 작가가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를 인물 중심으로 갈지, 사건 중심으로 갈지 혹은 시대순으로 그릴지조차 정한 바가 없다.

“뉴라이트 개입 전혀 몰랐다” 난색
하지만 지금까지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가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었다고 믿는 이들이 뭉친 것은 사실이다. 뉴라이트뿐 아니라 김진철씨, 장기오 PD, 이영신 작가는 2006년 방영한 KBS 1TV <서울 1945>가 특히 좌편향적이라고 말한다. <서울 1945>의 주인공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서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설정돼 있고 여운형은 훌륭한 민족주의자로, 이승만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친일파를 이용하는 인물로 묘사돼, 드라마 방영 내내 좌우이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와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의 딸은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다며 KBS 임원진과 제작진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뉴라이트를 포함해 드라마 <남산 위의 저 소나무>와 관련해 거명된 이들은 한결같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역사를 그리겠다”고는 말한다. 김진철씨와 장형일 PD는 “양쪽의 입장을 취합해 중간자적 입장에서 그릴 것이고, 논쟁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은 양쪽의 주장을 다 보여줌으로써 판단을 시청자가 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뉴라이트는 이 드라마의 역사적 오류를 막기 위해 역사학자와 정치학과 교수를 아우르는 자문단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문단의 중심 인물은 김광동 나라정책원장이다. 김 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인수위 정무분과위 전문위원이다. 김 원장이 친MB 성향인데다 뉴라이트 소속인물임을 감안하면 드라마에 대한 자문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청년시절의 김일성.
이 드라마의 집필자로 꼽힌 이영신 작가는 40년 가까이 다큐라이터로서 라디오드라마 <광복 20년>과 <격동 30년>, TV드라마 <제3공화국>, <3김 시대> 등을 집필한 팔순 노장의 원로작가다. 황해 안악 출신인 이영신 작가는 가족과 외가가 6·25 때 공산당에 몰살당했다고 한다. 좌익에 치를 떨 수밖에 없는 개인사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엉터리로 만든 <서울 1945>를 보면서 굉장히 (속이) 끓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다른 한 가지는 그가 막 끝낸 소설이다. 그는 최근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소설 <김일성정전> 집필을 마무리했다. <김일성정전>은 그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독립투쟁의 비화를 그린 드라마(<백두산아 말하라> <백두산은 알고 있다>)를 집필하며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 있는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고, 마적단 두목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만주에서 아편을 밀수하다 독립운동단체에 피살됐다는,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지극히 극우적 내용이다. 이영신 작가가 뉴라이트가 중심이 된 드라마 집필자로 제안을 받은 것도 이 소설이 계기가 된 것이다. 뉴라이트가 올해 중 이 소설을 출판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영신 작가는 “제목을 바꿔야 하지만, 드라마(<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남과 북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며 “난 좌경화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러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 다룬 영화도 만들기로
드라마 제작비와 관련해 뉴라이트 측은 방송사가 지원하는 제작비를 초과하는 비용(일반적으로 외주제작으로 완성하는 드라마도 방송사가 제작비를 대는 게 원칙이지만 방송사가 지불하는 제작비는 실제 제작비의 절반가량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은 국민성금 그리고 여러 단체와 기업의 후원 및 협찬으로 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뉴라이트 측과 제작사로 지목된 드라마파크가 이 부분을 맡겠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와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12월 10일 100여 개 보수단체가 연합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시민사회단체 공동후원행사’를 열기도 했다(상자 기사 참조).

한편 드라마의 제작 여부는 해당 드라마를 방송할 방송사가 있는지에도 달려 있다. <조선일보>는 드라마파크 김강원 대표의 말을 인용해 이 드라마의 기획안을 우선 KBS에 제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KBS 이웅진 드라마기획팀장이나 서재석 편성기획팀장은 “전혀 들은 바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뉴라이트 임헌조 사무처장은 “KBS에서 편성확인서를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내년 중에는 방송할 수 있을것”이라며 거듭 자신감을 피력했다.

결론적으로, 뉴라이트의 드라마는 드라마 원고가 한 줄도 없고(이영신 작가는 이 드라마와 관련해 쓴 원고는 없다고 밝혔고, 김진철씨는 누구를 작가로 선정할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고 했다), 연출자도 정확히 정해지지 않은(장형일 PD는 다른 드라마를 연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직은 그야말로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이야기다.

뉴라이트는 제작과 방송을 확신하고 있지만 제작진이 정확히 꾸려지기도 전에 구설에 오른 이 드라마가 과연 제대로 촬영에 돌입할 수 있을지, 또 완성된다면 얼마나 이념적 색깔을 뺀 채 객관적으로 우리 현대사를 조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뉴라이트가 마련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후원행사’


<김석구 기자>
12월 10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옳소!” “맞소!” “파이팅!”과 같은 감탄사가 연방 터져나왔다.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대표적인 보수단체 100여 개가 개최한 대규모 후원행사에서 참석자들이 내지른 소리다. 객석 사이에서는 “에구, 빨갱이들” “속 시원하다!”라는 말도 간간이 들려왔다.

이날 행사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소속 20여 개, 국민행동본부 관련 20여 개, 탈북자 단체 30여 개,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소속 20여 개,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모임, 인터넷언론 등 100여 개 국내 보수단체가 참여했다. 한나라당 공성진·심재철·전여옥·장광근·현경병 의원 등 국회의원 4명이 참석했고, 청와대에서는 임삼진 시민사회비서관이 참석했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지지세력인 보수단체들이 공개적으로 이 같은 대규모 후원행사를 벌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 국민행동본부 최인식 사무총장은 “좌파정권 10년 동안 소위 말하는 진보 진영, 실상은 종북 반헌법 반국가 단체들이 정권의 비호 아래 엄청난 모금을 하고 변형된 방식으로 기업 지원을 받아온 반면 정작 대한민국 헌법과 역사를 긍정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애국 진영은 그야말로 꼴통 대접을 받고 폄훼되면서 이런 자리를 가져본 일이 없다”면서 “우리 애국운동단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 기업을 대표해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주최 측은 행사에 앞서 삼성·LG·SK 등 150여 개 대기업을 포함해 초청장 200여 장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후원금은 재정난을 겪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운영비 지원 등에 일정 부분 쓰이고 나머지는 향후 보수단체들의 행사·사업기금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최진학 정책실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오늘 행사에 500여 명 정도가 후원에 참여했다”면서 “목표액은 5000만 원 정도인데 기업 후원과 최종 후원금 액수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임헌조 사무처장은 “이번 행사는 후원금 모금 목적 외 보수우파시민사회단체가 네트워크를 구성해 연대활동을 하기 구심점 구축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많은 치사를 받고 소개된 이는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다. 전 의원은 “저는 여기 오면서 이 세종홀 주변이 차가 막히지 않을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지 않을까, 또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너무 많이 와서 안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왔는데 참 순진했다. 와보니까 (그렇지 않아서) 가슴이 무척 아프다”면서 “이제 정권교체를 여러분의 힘으로 당이 이뤘으나 한나라당에 원했던 것은 올바르고 반듯한 대한민국이지 권력을 나눠먹는 모습은 원치 않았다고 감히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서 가장 열렬한 반응을 얻은 인물은 라이트코리아 봉태홍 대표. 그는 “우리의 목표는 북과 내통해 대한민국 파괴활동을 하고 있는 좌파척결”이라며 “국민이 일 잘하라고 172석을 줬는데 한나라당은 보수단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지 말아달라”고 외쳤고, 객석에서는 장단이라도 맞추듯 “옳소!” “열받아 한나라당!”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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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인 내가 일제고사 실시 거부하는 까닭은"
[CBS <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 (FM 98.1 MHz 18:05~20:00 진행 : 고성국 박사)] - 일제고사 거부, 비판과 논란은 될 수 있어도 징계대상은 아니다
- 일제고사, 시험성적으로 모든 학교와 학생 한 줄로 세우기라 반대한다
- 일제고사 보지 않을 선택의 자유도 주어야 한다
- 교육청 징계 내리면 행정소송 제기하겠다
- 일제고사 징계 행정소송 충분히 승산 가능성 있다
- 일제고사 징계, 우리사회 천박성과 야만성 드러낸 것
- 일제고사 거부교사 징계 유신헌법 시절로 돌아간 느낌
- 현장체험학습인정은 교장의 고유한 권한이다

▶ 진행 : 고성국박사(CBS 라디오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 출연 : 전북 장수중학교 김인봉 교장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 7명이 해임,파면됐고, 이들의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매일 저녁 열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는 23일 중학교 1,2학년 일제고사를 앞두고 있어서 논란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난 10월 일제고사 대신 현장학습을 승인해서 징계대상이 된 전북 장수중학교 김인봉 교장으로부터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이하 인터뷰 내용)

▲ 전라북도 교육청이 중징계 방침을 밝혔는데, 결정이 내려졌나요?

= 아직 내려지지 않았고요. 아마 방학 중에 내려질 것 같아요.

▲ 이미 중징계를 받은 교사는 평교사인데 장수중학교는 교장선생님이 징계대상이에요. 왜 그렇죠?

= 제가 현장체험할 걸 인정해줬기 때문에 성실의 의무나 복종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해서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중징계 의결을 요구했습니다.

▲ 학생들의 현장체험학습을 승인했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받게 됐다고요?

= 네.

▲ 원래 그게 교장의 승인사항입니까?

= 네. 현재 초중등 교육법 제 48조에도 나와 있고요. 우리학교 학업성적관리규정 23조에도 현장체험학습을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이 교장에게 있음을 밝혀놨어요.

▲ 그럼 교장선생님이 체험학습을 승인하신 건 교장의 권한 안에서 하신 거네요?

= 그렇죠.

▲ 그런데 왜 중징계를 한다는 거죠? 중징계를 하려면 법적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 그렇죠. 저는 이번에 일제고사를 봐야 한다고 하는 지침을 위반했다고, 그런 점에서 복종의 의무와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해서 중징계를 요구했더군요.

▲ 일제고사를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는 교육청의 방침이 먼저 있었군요?

= 그건 사실 없었어요. 일제고사를 본다는 공문은 내려왔지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봐야 한다거나 현장체험학습을 승인해선 안 된다는 공문은 없었어요.

▲ 일제고사를 본다는 공문은 내려왔지만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 안 보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공문은 안 내려왔다고요?

=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내려올 수가 없죠.


▲ 10월에 본 일제고사도 학교마다 의무적으로 다 봐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씀인가요?

= 적어도 공문 상으로는 모든 학생이 다 봐야 한다는 건 안 내려왔어요. 준비해라, 봐라, 이런 건 내려왔어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봐라, 현장체험학습을 인정하지 마라, 이런 건 안 내려왔어요.

▲ 징계위원회에서 징계를 하려면 소명절차를 거치게 되는데요. 교장선생님은 소명절차를 거친 상태입니까?

= 안 거쳤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출석요구서를 받았는데 일제고사와 관련해서 제가 적법하게 승인을 해줬기 때문에 비판과 논란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징계의 대상은 아니라고 봤기 때문에 조사를 거부하고 출석요구를 거부했습니다.

▲ 당시 현장체험학습을 승인할 때 교장선생님 혼자서 결정하신 겁니까?

= 그렇진 않죠. 비록 그것이 교장의 권한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적어도 교직원 회의 안건으로 상정해서 인정여부를 교사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인정해도 좋다는 것이 통과됐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의사를 수렴해서 결정한 겁니다.

▲ 어떤 이유로 체험학습을 승인하셨나요?

= 그 당시 저희 학생 15명이 신청했거든요. 그래서 일일이 담임과 제가 확인을 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희 학교 3학년 학생이 61명인데 그중에서 15명이 신청했어요. 그래서 제가 담임과 일일이 확인했는데, 그중에 6명은 학부모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현장학습체험 계획도 불확실하고. 그래서 6명은 인정해주지 않았거든요. 그 6명은 시험을 봤죠. 9명만 인정해줬는데 1명이 마음을 바꿔서 응시했고 8명만 인정받고 현장체험학습을 부모님과 함께 실시했어요.

▲ 그런 상태에서 체험학습을 인정하지 않은 학생은 일제고사를 보도록 지도하신 건가요?

= 네.

▲ 일제고사라고 표현하지만 정식명칭은 전국연합 학업성취도평가인데요. 이 평가시험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 제 개인적으론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시험과 성적으로 모든 학교와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건 반대해요. 그럼 교육의 본질을 해칠 우려가 많이 있거든요. 만약 일제고사가 전국에서 시행된다면 모든 학교가 문제풀이로 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겁니다. 거기서 1점이라도 더 많이 맞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창의적이거나 사고력을 신장시킬 여지가 없고, 지금보다 더 심한 입시교육에 내몰려야 해요.

▲ 이 시험을 통해서 학부모들이 자녀의 성적을 진단하고 약한 부분을 확인해서 좀 더 보완할 수 있다는 효과도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전혀 그런 효과가 없습니까?

= 아뇨. 저도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긍정적은 측면에 주목하는 분들은 시험을 봤으면 좋겠어요. 그분들은 보게 하고,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 분들은 안 보도록 허락해주는 선택의 자유를 줬으면 좋겠어요.

▲ 단위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어떤 학생은 시험을 보고 어떤 학생은 안 보면 좀 혼란스럽진 않을까요?

= 혼란스럽더라도 강제로 다 보게 하거나 강제로 다 못 보게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 오는 23일에 중학교 1,2학년 대상 일제고사가 예정되어 있는데요. 장수중학교는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 다행히 교육청에서 15일에 공문이 내려왔어요. 1,2학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은 학교에서 응시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라, 다만 교장이 결정하지 말고 학교 구성원의 협의를 거쳐서 결정하라고 해서 저희는 학교운영위원회와 교직원회의를 거쳐서 응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이런 조치가 지난 10월에도 있었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됐겠네요?

= 당연하죠. 지난 10월에도 표집학교만 시험을 보도록 하고 다른 학교는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했다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죠.

▲ 이번 12월엔 학교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라는 건 전북교육청만 그런 겁니까, 아니면 전국이 다 그렇습니까?

= 제가 다른 시도는 모르겠어요.

▲ 전북지역의 경우에 단체로 시험을 안 보기로 한 학교가 있나요?

= 저희 학교 말고 다른 학교의 경우는 못 알아봤습니다.

▲ 다들 그런 논의를 내부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인가요?

= 아닙니다. 저희가 공문 받은 날짜가 12월 3일인데 12월 5일까지 보고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거의 다 결정이 끝났고, 저 개인적으로 몇몇 학교를 알아봤더니 놀랍게도 그런 공문이 온 사실조차 몰라요.

▲ 공문을 어떻게 교사들이 모를 수 있죠?

= 그걸 공개하고 이런 공문이 왔으니까 우리가 자율적으로 협의해서 결정하자고 해야 하는데, 아마 그런 과정을 안 밟은 것 같아요.

▲ 다른 학교의 경우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씀이네요?

= 몇몇 학교 알아본 데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 전라북도 교육청은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징계절차를 밟고 있는데 징계는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응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어쨌든 앞으로 교육청에서 징계조치를 내리면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 행정소송을 할 예정입니다.

▲ 승소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관련법규와 법적근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초중등교육법 48조에도 나와 있고, 그에 준해서 저희 학교가 학업성적관리규정에 명시해놨기 때문에 저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 서울지역 7명 교사가 해임파면을 당했는데요.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 저는 그걸 보고 우리나라가 30여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비방을 못했잖아요. 100% 찬성을 강요했던 유신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제고사의 경우도 100% 찬성하라는 것 아닙니까. 저희 학교 61명 중에서 53명이 봤으니까 87%가 응시한 거예요. 8명이 13%거든요. 이 13%의 반대마저 포용하지 못하고 징계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한가, 야만스러운가를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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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를 통해 본 한국사회 영웅의 조건

정희준 |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경향신문



ㆍ그대, 우리 콤플렉스의 거울 우리의 자아도취

‘김연아 신드롬’이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국정을 포함한 사회 주요 현안까지 싹싹 쓸어 뒷구석으로 치워버리는 수준이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웅’은 모두 스포츠에서 탄생했기에 (아마도 2006년 몰락한 황우석이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세계적 수준의 운동선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별로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연아라는 운동선수에게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지점과 열광의 작동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영민기자
김연아에게 빠져 든 상당수는 스포츠팬이 아니고 피겨스케이트팬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트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던 우리 국민들을 붙들어 앉혀 ‘피겨공부’까지 하게 했다. 당연히 우리가 김연아에 환호하는 이유는 분명 ‘스포츠적’인 것만 아니다.

과거 등장했던 한국 사회 영웅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랜 세월 지지리도 못 살았던 약소국이었던 탓인지 우선 무조건 ‘세계적’이어야 한다. 바로 ‘국위선양’ 코드다. 사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영웅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외국에선 소방수, 교사나 신체적 불리함이나 역경을 이겨낸 학생선수 등 ‘세계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우리는 민족의 탁월함을 세계만방에 알린 선수들만 선택했다. 가발 외엔 세계에 내놓을 게 없었던 1960~70년대, 세계무대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했던 김기수, 김일, 양정모, 홍수환, 차범근은 우리 국민의 움츠러든 가슴을 펴게 했다.

스포츠를 통한 국가주의적 자기만족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라는 자기최면까지 가능케 됐고 여기에 가속도까지 붙었다. 앞뒤 안 가리고 영웅을 찾아 나선 우리에게 걸린(?) 인물이 바로 하인즈 워드와 추성훈이다. 우리가 멸시하고 핍박해 내쫓은 ‘튀기’가 유명하고 돈도 많은 ‘미제’가 되어 돌아오자 우리는 ‘한국인의 피’라며 열광했다. 그래도 쑥스러웠던지 갑자기 과거를 반성하자는 국민적 반성운동(?)까지 벌이며 우리의 모순됨을 합리화했다. 우리는 또 재일동포 추성훈이 한국에 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다가 그가 일본에 돌아가 성공하자 갑자기 돌변해 그를 ‘우리편’이라 우기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뒤틀어진 자화상이다.

90년대 이후엔 새로운 조건이 하나 추가됐다. 바로 ‘경제효과’ 코드다. 딱 10년 전 박찬호와 박세리는 외환위기 당시 달러벌이(?)의 선두주자로서 나라를 ‘국난’의 위기에서 구출할 인물로 묘사됐다. ‘월드컵4강 신화’조차 ‘축구4강에서 경제4강으로’라는 엽기적 논리로 곧장 전환된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경제강박’에 빠졌는지 잘 알 수 있다. 여기에 이어달리기 하듯 등장한 박지성, 황우석도 ‘국위선양+경제효과=영웅’이라는 한국 사회 영웅공식을 또 다시 증명했다.

김연아를 위시해 최근 등장한 박태환, 장미란, 최홍만, 추성훈 등에게서 우리는 영웅공식의 변화를 본다.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적 색채는 많이 희미해졌다. 우리가 한·일간 대결구도보다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 관계에 더 집중했던 것부터가 그러하다. 또 우리는 이들을 경제효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빈 공간을 채운 새로운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이들의 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몸이다. 이제 근대화의 짐을 벗어 버린 우리는 탈근대적 우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조선이 개화하면서부터 우리 내면에는 왜소한 신체에 대한 민족적 콤플렉스가 자리해 왔다. 서구문물을 흠모했던 이광수는 조선인은 눈동자가 풀렸고, 팔다리는 늘어졌고, 가슴은 새가슴이라서 그 용모가 궁색하다고 묘사했다. 잡지 ‘개벽’은 조선인은 원래 어릴 때부터 업혀 길러진 데다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난다고 하면서 운동을 해야 다리가 길어진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윤치호가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 우월성을 타파한 것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시대 양반은 절대로 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뛰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어느 사학자의 말처럼 양반은 다리가 짧아야 했고 길면 상놈 취급당했던 것이다. ‘롱다리’ ‘숏다리’ ‘농다리’ 농담 시리즈가 괜히 나왔겠는가. 다른 이들을 다리 길이로 품평(?)하는 우리의 버릇 속엔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롱다리’는 민족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탈근대시대 스포츠영웅은 바로 이 민족적 콤플렉스를 날려버리는 치유의 장이 되었다. 장미란은 역기를 장난감 들 듯하며 천하를 제패했고, 최홍만은 그의 하드웨어 자체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다. 박지성은 지칠 줄 모르는 ‘산소탱크’를 장착하고 세계 최고의 팀에서 풀타임을 소화해 낸다. 떡 벌어진 가슴을 가진 6척 장신 박태환은 체급별 종목이 아닌 수영에서 신장 2m를 넘나드는 백인 선수들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체급에 상관없이 서구 선수들을 압도하는 신체와 힘과 기량을 지닌 우리 선수들을 보며 열광하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수들이 보유한 몸의 힘과 ‘사이즈’에만 흡족해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다. 강철 같은 ‘갑빠’와 역삼각형 ‘등판’을 가진 박태환과 추성훈의 몸은 강력한 터보엔진을 장착한 근육질 스포츠카 같다. 그러나 동시에 매끄럽고 아름답다. 이들의 몸은 한 세기 전 조선인의 몸도, 근대화시기 이상적 남성형인 이대근, 백일섭의 몸도, 수영장 가서도 셔츠로 몸을 가리는 삼촌의 몸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포츠영웅에서 몇 걸음 더 진화한 것이 바로 김연아다. 우리가 그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경기력에도 경외감을 갖는다. 3회전 점프는 고도의 순발력과 근력이 버무려진 엄청난 점프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점프력이 그 가냘픈 열여덟살 몸매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런 게 바로 모순이다. 초절정 몸의 완결판이다.

이제야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승부하는 선진국형(?) 스포츠에서 세계적 선수를 갖게 됐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을 세계에 빛낸 많은 여자선수들을 보았고 자랑스러워했다. 여자골프, 양궁, 쇼트트랙, 탁구, 유도 그리고 ‘우생순’까지.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이런 몸매를, 이런 ‘요정’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세계적 요정’이다. 항상 웃는 얼굴이 예쁘면서도 귀엽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데다가 날씬하고 또 (두둥~) 길기까지 하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중년 여성들도 그의 몸을 즐겁게(?) 이야기한다. “피겨도 잘 타는데 몸두 너무 예뻐요~” 하면서 말이다. (재밌게도 중년 남성들은 다르다. 대부분 스케이트 잘 타고 얼굴도 예뻐 좋아하는 것이지 몸매가 예뻐서는 아니라며 극구 부인한다. 그대, 짐승들이여~)

이렇듯 요정 김연아는 수많은 열혈 광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했는데 김연아에 대한 ‘팬덤’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지난주 김연아팬을 지칭하는 ‘승냥이’들은 그랑프리 파이널대회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오른손으로는 미친 듯 ‘클릭질’을, 왼손으론 휴대폰 붙들고 ‘전화질’을 해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극한의 신체기능을 구사했음에도 결국 표를 구하지 못한 승냥이들은 절망에 빠진 서로를 위로했다. 극적으로 표를 구한 김연아팬들은 크고 작은 배너와 꽃, 곰인형을 준비해 가져갔는데 이틀 동안 곰인형만 1000개가 넘게 던져졌다고 한다.

그런데 인형들을 택배로 주문해서 다른 입장객들에게 나눠줘 이를 던지게 했다고 한다. 팬이라면 자기가 선물을 사서 전달하든 던지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꺼번에 많이 주문하면 싸서 그런가? 요즘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들고 다니기 싫어서 그런가? 이는 자신의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우상의 인기를 물량공세로 증명하고 과시하려는 뒤틀어진 욕망의 표출이다.

팬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응원 행태도 이를 방증한다. 자기만족과 과시를 위해 경기장으로 쳐들어간 이들은 피겨스케이팅에서 필수적인 선수와 관중 간의 소통은 물론 관전예절조차 무시했다. 한 외국선수의 말처럼 그들은 ‘미친 듯한’ 괴성과 비명을 지르며 카타르시스의 수준을 넘어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들은 김연아의 아름다운 경기를 보러 간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김연아 인기의 크기와 강도를 확인하고 즐기기 위해, 또 외국인과 카메라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진군한 것이다.

선수에 대한 배려나 예절이 실종된 일방적이고도 호전적인 응원 덕에 전에 없이 긴장한 김연아는 실수 한 번 안 하던 트리플 살코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장기인 트리플 러츠는 돌다 말고 내려왔다. 골프스윙 하려는데 카메라셔터 누르고 바둑대국장에서 비명 질러대는데 잘 할 선수 있을까. 결국 팬들이 김연아에게서 홈어드밴티지를 뺏어 가버린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팬덤보다는 ‘팬질’이라는 표현에 더 가까웠다.

한 방송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 한국 사람들은 수영이 아니라 박태환을, 역도가 아니라 장미란을, 피겨스케이팅이 아니라 김연아를 좋아한다. 그런데 김연아에겐 자신의 사랑을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명하려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스토커가 나온다. 김연아 팬들을 보면 어째 좀 불안하기만 하다.

<정희준 |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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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암이 의심스럽다는 진단을 받은 때가 2003년 11월 중순이다. 뒤에 알고 보니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담당의사 말로는 이렇게 전이된 환자들 가운데 5년 생존율이 20-30% 정도라고 한다. 용케 5년을 잘 살아왔다. 

 2003년 12월 말부터 세 차례 항암 색전술을 받고 이어서 스물 네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때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나마 입맛 당겼던 음식이 어머니가 해 주시던 콩죽이었다. 한 번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직접 해 오셨고, 한 번은 아내가 시골 가서 쑤어왔다.  손바닥만큼씩 썬 두부에 비개 붙은 돼지고기 넣고 고춧가루 듬뿍 뿌려 끓인 두부찌개도 떠올랐다. 맵고 짠 두부찌개는 먹을 수 없고 콩죽만 몇 번 먹었다.

초기 항암치료 받고 나서 3년여 동안은 운동요법, 명상요법, 식이요법을 정성껏 잘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어느 정도 살았다 싶을 즈음 빵가게 앞을 지날 때 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빵 냄새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슬그머니 빵을 사먹었다. 내가 세운 원칙을 어기는 짓이었다. 한두 번 먹고 나니 빵 특유의 냄새만 아니라 혓바닥이 옛 기억을 되찾아 난리였다. 안되겠다 싶었다.  아내가 거칠고 거무스레한 우리 밀 식빵을 사서 배낭에 넣어 주었다. 그것도 천천히 꼭꼭 씹으면 먹을 만 했다. 그렇게 제과점 빵 유혹을 벗어났다.  

 그 다음에는 붕어빵이 문제였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20여분 걸린다. 늘 걸어 다녔다. 중간쯤에 붕어빵과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어느 날 1천원에 네 마리 주는 붕어빵을 한 봉지 샀다. 한 달에 한두 번으로 늘어났다. 붕어빵을 들고 길에서 한 마리씩 꺼내 먹는 맛이 빵 못지않다. 신호등에 걸리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네 마리를 다 먹을 수 있다. 바로 파란불이 켜지면 시간이 모자란다. 그럴 때는 다음 파란불까지 기다리든가 아니면 아파트 담장 모퉁이 당단풍 나무에 기대서서 먹었다. 들고 들어가면 한 마디 들을 것이 뻔하고, 아이들 보기에도 창피하지. 그런 것도 못 참느냐고.  

 붕어빵을 먹다보면 어렸을 때 먹어본 풀빵 맛이 떠오른다. 껍질과 속에 넣은 팥 사이에서  말랑말랑하고 보드랍던 감촉을 느낀다. 강원도 홍천 서석장은 끝자리가 4와 9일일 때 서는 5일 장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장날이면 장터를 몇 바퀴 돌다가 끄트머리에 있는 풀빵 장사 앞에서 맴돌곤 했다. 풀죽 쑤려고 만든 것 같은 밀가루 물을 주전자로 풀빵 틀에 돌아가면서 따른다. 구멍하나가 지금 국화빵보다 배는 컸다. 아래쪽이 다 익으면 나무막대에 굵은 철사 줄을 꼬부려 만든 꼬챙이로 콕 찍어서 홀딱 뒤집는다. 저러다가 익지 않은 밀가루 물이 쏟아지지 않을까, 삐져나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제자리에 착착 들어가 앉는다.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다 입안에 고였던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 앞에서 기웃거리다 보면 장보러 온 엄마를 만날 때가 있다. 잘하면 풀빵을 얻어먹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때 풀빵에는 속에 팥도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입에 착착 들어붙으며 살살 녹았다. 그 맛이 조금 뒤 신앙촌 크림빵이나 삼립빵 속에 발라놓은 하얀 크림을 앞 이빨로 삭삭 긁어먹는 것 못지않게 환상이었다.  

 초등학교 때 말고는 풀빵 먹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20여년이 지난 뒤 1980년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나온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에서 다시 풀빵을 만났다. 이 부분이다. 

 “그 당시만 해도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일이 끝나고 밤늦게 도봉산 집까지 가려면, 미아리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서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허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 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전태일이 사주었던 풀빵은 한 개에 1원짜리였다. 요즘 국화빵만한 크기였나보다. 서석시장에서 팔던 풀빵은 좀 커서 10원에 네 개였다. 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 모음집인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 보면 풀빵이 국화빵이고 국화빵이 풀빵이었다. 

전태일이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 다니면서 풀빵 사주던 이야기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노동운동사 강의를 할 때 종종 인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을 읽은 때는 1984년이었을 것이다. 1983년 6월 초판이 나온 다음해이다. 나중에야 <<전태일 평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태일평전은 그전에 읽었던 광민사판 문고본 <<노동의 역사>>,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민중교육론>>, 조금 뒤에 읽은 쟝세노의 <<실천을 위한 역사학>>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으로 돌려주자고 마음먹게 만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였다.    

 전태일을 따라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60년대로 다시 들어가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가난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뒤 실제로 ‘목구멍에 풀칠’하던 배고픈 노동자들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1946년 10월인민항쟁이 일어났던 대구에서 일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귀환동포와 식량문제가 다른 지역보다 더 컸다. 식량난에 따라 식량폭동 일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청송군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나왔다. 대구에서는 전매청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풀을 직공들이 먹어치우자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다. 물감 탄 풀까지도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다 쫓겨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도청의 농산부장은 “장에 고기도 있고 잡곡도 있지 않은가? 굶어죽는다니 별말이다”고 했다고 한다. 10월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9월 총파업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의 철도노동자들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고 했다. 프랑스혁명 때 마리 앙트와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하는 말을 외우고 다니다 내뱉는 듯한 말들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말들이 없을까. 먹고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좋은생각’을 들먹이는 말들도 다를 바가 없다. 

학교도 아닌데 막강한 동문을 형성하고 있는 조중동문같은 ‘일보’들이나 뉴라이트나 이명박 정권처럼 이승만과 박정희 중심으로 현대사를 보는 것은 홍보지 역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담배 풀로 목에 풀칠하던 노동자들, 풀빵으로 허기를 달래던 배고픈 노동자들 자리에서 그들의 눈으로 그 시대를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강의를 갔다 오다가 기차에 도수 낮은 안경을 두고 내렸다. 책볼 때 쓰는 안경이었다. 부랴부랴 서울 전농동 네거리 가까이 있는 아는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마련했다. 버스를 타고 오다보니 답십리지하철 네거리 옆에 붕어빵을 파는데 1천원에 6마리 한다고 써 붙였다. 다른 곳에서는 밀가루 값이 뛰었다고 네 마리 하던 붕어빵을 세 마리 준다. 6마리짜리는 얼마나큰지 언제 다시 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뒤 대방역 옆에 있는 서울여성프라자에 강의를 갔다. 길옆에 붕어빵 장사가 있다. 여기서도 1천원에 6마리이다. 좀 작기는 작다.  부부가 둘 다 말을 못하는데 열심히 붕어빵과 마른 호떡을 구워 팔고 있다. 3천원어치 18마리를 샀다.

역사를 보는 관점을 이야기할 때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붕어빵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때 사가지고 간 붕어빵을 나눠주고 먹으면서 강의를 했다. 붕어빵은 생긴 모양이 붕어 같고 이름도 붕어빵이지만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붕어가 아니다. 붕어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붕어빵이 아니라 붕어튀김이 맞다. 빵과 튀김은 다르다. 그렇듯이 교수니 박사니 하면서 그럴듯한 폼으로 말과 글을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더라도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무엇이고 누구의 이해를 반영하는지 한 번 더 꼼꼼히 따져보자고 했다. 붕어빵을  먹으면서 보니까 더 실감이 난다고 한다. 

  80이 20에게, 90이 10에게 지배당하는 사회에서 붕어빵이 20과 10을 비춰보는 투시경이 될 수 있을까. 80과 90을 비춰보는 자성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아파트 옆 당단풍 나무 아래서 붕어빵을 몰래 먹곤 했던 것이 단지 유혹을 못 이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별 변명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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