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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kg 감량 성공한 ‘인간극장’ 주인공 이정선의 비만탈출




레이디경향 | 기사입력 2009.02.16 09:44

10대 여성, 제주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KBS-2TV 인간극장 '나는 날고 싶다'의 주인공 이정선씨(36). 사람들의 시선과 나빠진 건강,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가고자 애쓰는 그녀의 사연은 시청자에게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인터뷰를 망설이던 정선씨는 사진 촬영도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얼마 뒤, 이정선씨의 사연을 본 여의도성모병원에서 그녀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고도비만을 치료하기 위한 '루와이위우회술' 전문의 이홍찬 박사가 그녀에게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한 것. 위 크기를 20cc 정도로 만들어 소장과 연결하는 이 수술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적용되는 대사성 질환 수술이다. 고마운 마음들이 모여 지난해 8월 정선씨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운동과 식이요법, 자기 관리. 한 번의 수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술 후는 물론이고 지금도 꾸준히 스트레칭과 같은 운동을 하면서 '치료 중'에 있는 정선씨. '인간극장' 출연과 루와이위우회술 이후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정선씨는 망설임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이젠 사람 많은 곳에 갈 용기가 생겼어요


병원으로 들어오는 정선씨의 발걸음 소리가 가볍다. 등 뒤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익숙한데, 가벼운 화장을 한 얼굴이 낯설어 보인다. 매서운 추위에 두꺼운 겨울 코트를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날씬해진 모습이다.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보다 60kg 정도 빠진 상태란다. 무엇보다 약간의 비음이 섞인 정선씨 특유의 밝은 목소리만큼 얼굴빛이 좋아 마음이 놓인다. '건강하게 살 빼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동안 쏟았을 그녀의 노력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진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아무래도 몸무게의 변화죠. 음, '인간극장' 촬영 때가 192kg이었고, 지난해 말 옷을 다 입고 쟀을 때 131kg이었어요. 새해 들어 또 조금 빠졌고요."

시원스레 몸무게를 밝히는 정선씨. 어차피 많은 사람이 그녀의 '무거웠던' 몸무게를 알고 있는지라 애써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는 절대적인 몸무게 수치보다는 상대적으로 '얼마나 줄었는지'에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감량 폭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신경 쓰이는 일이 되었다.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어요. 수술 후 몇 달 동안 했던 수영과 개인 헬스 트레이닝은 사정상 쉬고 있고요. 대신 그때 배웠던 스트레칭을 집에서 시간을 정해두고 하고, 헬스센터를 다니며 매일 순환운동을 하고 있어요."

수술을 받고 나서 몸 상태는 물론이고 생활 습관이나 생각 등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는 몸이 '웰빙'이 되었다는 것이다.

"식성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그 전에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기름 냄새를 잘 못 맡겠어요. 튀김집 앞을 지나가면 머리도 아프고 속도 미식거리는 것 같고요. 수술 전에 의사 선생님께서 '웰빙 몸'을 만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게 어딨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몸 자체가 변했어요."

사실 정선씨는 이전에도 살이 찔 만한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먹는 양이 남들보다 많은 편은 아니었다. 덩치가 꽤 있다 보니 주변에서는 당연히 많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친구들조차도 "너는 남보다 많이 먹지도 않는데 왜 살이 찌냐"며 신기해할 정도였다고. 문제는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그것도 급하게 먹는 식습관 때문이었다.





 
"처음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께서 '라면 제일 많이 먹었을 때 몇 개까지 먹어봤냐'고 물으시기에 2개라고 했더니 놀라시더라고요. 제가 대여섯 개씩은 뚝딱 해치우는 줄 아셨나 봐요(웃음). '인간극장' 2편을 찍으며 헬스 트레이너와 운동할 때는 감자, 고구마, 닭 가슴살만 먹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오히려 그렇게 먹는 게 안 좋다고 골고루 다 먹으라고 하셔서 지금은 그냥 남들처럼 먹어요. 물론 먹는 양이 많이 줄기는 했어요. 간식으로는 우유나 과일을 먹고요."

체중이 줄면서 건강도 따라서 좋아졌다. 몸이 가벼워지니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가슴이 훨씬 덜 답답했다. 전에는 급한 상황에서도 뛰질 못했는데, '뛰어야지'라고 마음먹지 않아도 급하면 저절로 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적도 있단다. 다만 먹는 양이 줄고 단시간에 살이 많이 빠진 터라 똑같이 생활해도 피로함은 조금 더 빨리 느낀다. 몸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저만이 느낄 수 있는 소소한 변화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집 욕실이 작고 물건은 많아서 제가 앉아 있으면 문을 못 열었거든요. 이제는 제가 살짝 몸을 틀면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세요, 하하.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어요. 엊그제 친구한테 제가 먼저 '영화 보러 가자'고 했더니 놀라더라고요."

영화관은 물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리던 정선씨였다. 자신이 지나가면 저절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시선과 "봤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말 못할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연말 선물로 받은 구두 상품권으로 신발을 사기 위해 친구를 불러 백화점 쇼핑을 갔다. 그녀가 백화점에 간 것은 무려 17년 만의 일이었다.

'나'를 바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감행한 방송과 수술


'인간극장' 촬영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방송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정선씨는 방송이 가진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실감했다. 프로그램 방영 이후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봤다. 방송 직후 한 달여 동안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어디에 적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옛날에는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의 반응이 한 가지였어요. '비난'의 시선이었죠. 그런데 방송을 보신 분들은 '인간극장 나왔던 아가씨'라며 특별하게 혹은 불쌍하게 대하시고, 또 방송을 안 본 분들은 여전히 저를 '이상하게' 쳐다봐요. 이제 양쪽으로 신경을 쓰게 된 거죠."

방송 이후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방송국, 신문, 잡지 등 온갖 매체에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는 것은 물론, 일하는 직장에도, 친구에게도 전화가 왔다. 심지어는 운동하러 나가는 동네 공동묘지에서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남에게 싫은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지라 거절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체중 감량이 성공적으로 끝난 상태라면 또 모르겠지만, 더 이상 보여줄 것도 없었을뿐더러 빗발치는 관심이 무섭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얼마나 빠졌느냐', '왜 많이 안 빠졌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높은데 자신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괴로웠다.





1 정선씨의 수술을 맡았던 이홍찬 전문의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수술이 잘 끝난 지금은 '앞으로 더 많이 변화할' 그녀를 계속 도울 것이란다. 2 정선씨에게 든든한 가족 같은 의료진들. 이제는 스스럼없이 농담도 건네고,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넬 정도로 편안해졌다.

"수술 후 미음만 먹다가 처음으로 일반 음식을 먹었던 날, 친한 친구가 찾아와 '뭐가 먹고 싶냐'며 '사줄 테니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거예요. 갑자기 갈비랑 냉면이 생각나더라고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고깃집에 가서 손가락 마디만한 갈비 두 조각이랑 냉면 한 젓가락을 먹었어요.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 굉장히 꼭꼭 씹어야 해서 금방 배가 불렀거든요. 그런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쟤 살 뺀다고 수술했다면서 먹을 건 다 먹고 돌아다니네'라며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날선 반응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차가운 반응과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정선씨를 옭아매는 듯했다. 게다가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과 그럼에도 고군분투 살아가는 정선씨의 평소 모습이 낱낱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그녀를 꿋꿋하고 어머니께 잘하는 '착하디착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PD께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왜 나를 밖에서는 엄마한테 짜증도 못 내는 사람으로 만들었냐고요. 저는 천사가 아닌데 천사로 여기는 분들이 계세요. 감사하면서도 신경이 쓰여요."

방송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까봐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살면서 계속 체중이 늘었지만 먹고사는 일이 바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다 3년 전 교통사고로 갈비뼈와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꼼짝도 않고 누워 지냈더니 급속도로 몸무게가 불어났다. 치료 후 다시 일을 하려고 하니 몸이 받는 하중도 만만치 않았고 허리며 무릎이 아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우연히 접한 다이어트 센터에서는 후유증만 얻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자신을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만 같아 괴롭고 실망스러웠다. 이제껏 살아오며 잘 모르는 이에게 모질게 대해본 적 없는 정선씨였지만, 그 때 섭외를 위해 그녀를 찾아온 '인간극장' PD에게 딱 잘라 거절을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얼마 뒤 찾아온 또 다른 PD는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긴 시간 그녀를 설득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도, 주변 생활도 다 방송이 되는 만큼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종합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다'는 PD의 약속에 정선씨는 출연을 약속했다.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만큼, 이번만큼은 평소 걱정스러웠던 건강이 어떤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정밀 검진을 받기 위한 돈과 시간이 부족한 그녀에게는 이 기회가 마지막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덜컥 방송 출연을 감행할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TV를 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정선씨에게 수술받을 수 있는 기회와 새롭게 살아갈 발판을 마련해줬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빨리, 그리고 많이 살을 빼고 '이렇다 할'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힘든 과제가 되기도 했다.

부담감과 강박은 내려놓고 잔잔한 행복 찾으며 살고파요


"사실 요즘 딜레마에 빠져 있어요. 새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알아보는 중이거든요. 당분간은 병원도 정기적으로 가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해서 낮 시간을 비워둬야 할 것 같아 예전처럼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어요.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 자리를 비워서 직장이나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는 싫거든요. 그런데 옛날 '190kg 이정선'이 그 일을 할 때는 '참 열심히 산다'던 사람들이 '살 빠진 이정선'이 계속 그 일을 한다고 하니 '고생하고 살 빼서 왜 그런 일을 하냐'며 질책을 해요. 전 살이 빠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제가 다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누구나 다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정선씨 또한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경제적 형편이 좋아졌다거나, 자신의 능력이 훌쩍 높아진 것이 아닌데 살이 빠지고 방송을 탔다고 해서 '더 좋은' 일을 한다거나, '더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지금껏 해온 것처럼 성실하고 묵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저한테 '대리만족'을 구하고 싶은 이들이 있는 것 같아요. 친했던 사람들도 제가 '신데렐라'가 되길 바라요. 하지만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이었잖아요. 저는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길 원하지 않아요. 살이 빠지고 외모가 조금 나아졌고, 제 건강이 좋아졌고, 스스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해요. 앞으로 꾸준히 노력해서 살을 뺄 거고, 자격증 공부도 하면서 조금씩 저를 발전시켜나가고 싶어요."

그래도 새해가 되면서 정선씨는 한동안 그녀를 힘들게 했던 부담감이나 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기로 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하게 생각하면서 지금껏 그래왔듯이 열심히 살고, 그리고 '나'를 위한 시간도 가져보려고 한다.

"사실 지금 제가 기쁜 건 살이 빠져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겼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잘 때 빼고는 24시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24시간 중 '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꿈도 생기고, 목표도 세우게 됐어요."

당장 실천하려고 하는 그녀의 목표는 몸무게에 관한 것이다. 올해 안에 두 자릿수에 진입하는 것이 정선씨가 세운 첫 번째 계획이다. 올 12월, 몸무게를 쟀을 때 최소한 99kg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병원에서도 이제는 살 빠지는 속도가 훨씬 더뎌질 거라고 하니 "수술했으니 이제 금방 날씬해지겠네"라는 주변의 말에 괜히 조급해지지 않고 건강하게 체중 조절을 할 생각이다.

또 다른 목표는 여행과 자격증 취득, 그리고 피아노 배우기다.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동안은 여유도 없고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많이 다니질 못했다. 가끔은 좋아하는 바다도 보러 가야겠다. 일을 하면서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으려 한다. 자격증이 있으면 일을 구할 때 도움이 될 테니 틈틈이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볼 생각이다. 그리고 정말로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치는 것, 이 목표를 이루는 데는 아마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래도 목표를 세우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게 된 정선씨다.

"살을 빼려고 했던 것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였어요. 물론 워낙 키가 커서(신장185cm) 평생 평범한 몸으로 살 순 없겠지만요(웃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잔잔하고 소소한 행복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10년쯤 뒤에는 하고 싶던 곱창집을 차려 장사를 하고 있겠죠?"

얼마 전 친한 후배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는 세상으로부터 많이 받았지?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아 보여"라고. 세상 그 누구나 아프지 않은 이는 없다. 그리고 그 아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선씨는 앞으로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공짜'란 없는 세상에서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와 부담을 짊어지고 정선씨는 오늘도 살아간다.

■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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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핀란드 교육에 흥분 하는가

핀란드 교육, 제대로 공부하고 따라갈 일이다

 

2008.04.03이영탁/새사연 이사

 

 



핀란드의 교육 현장을 취재한 모 신문기자는 ‘학생들을 위한 나라’, ‘ 교육의 천국’이라고 소감을 밝힌 적이 있다. 인구 500만의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세계적인 경쟁력을 만들었을까. 방송이나 신문의 보도 내용을 보면 가히 호기심과 유혹을 받을 만하다. 1등을 모르는 아이들, 과외 없는 나라, 시험 없는 평가, 무료 교육, 무료 급식, 무료 교재, 국가예산의 14% 교육 예산...

특히 핀란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6년 학업성취도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과학 1위, 수학 2위, 읽기 2위 등 사실상 교육경쟁력 1위의 나라다. 뿐만 아니라 반부패지수(청렴), 경제 분야,  대학경쟁력, 국가경쟁력 등 모든 부분에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 이렇다보니 교육개혁과 교육경쟁력을 논할 때마다 핀란드를 따라가자며 너도나도 처방전을 내놓는다.

영어몰입교육이나 교사평가, 대학경쟁력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부터 무상교육을 주장하는 사람까지 모두 핀란드식 교육모델을 배우자고 한다. 방송을 통해 1등도 꼴찌도 만들지 않는 교육현장을 보면서 맘 놓고 울어봤다는 선생님까지 핀란드 교육은 감동 그 자체다.

과연 핀란드 교육이 한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확대하여 한국사회에 이식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우려가 앞선다.

이명박 정부의 영어몰입교육과 교원평가

이명박 정부가 총선에서 한반도 대운하와 영어몰입교육 같은 핵심 대선공약을 감추고 있지만 영어몰입교육과 교원평가정책은 이미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국가경쟁력을 강조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모델에 핀란드의 교육제도도 자주 등장한다. 핀란드 교육의 경쟁력을 영어몰입교육과 우수한 교사의 질로 보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영어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토플성적도 최상위에 속하고 국민의 80% 이상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불편이 없다고 한다. 교사들은 영어로 수업하고 학생들은 영어로 에세이나 보고서를 쓰는가 하면, 국민들은 국가공영방송에서 하루 종일 영어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웬만한 드라마, 영화는 자막 없이 영어로만 방송하고, 나머지 방송도 영어로 자막이 제시된다. 세계적인 영어교육전문가인 데이비드 마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열린 어느 심포지엄에서 CLL(내용-언어 통합학습법)을 조언한 바 있다. 수학, 과학, 미술, 체육 사회, 국어 등 다양한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는 핀란드식 몰입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영향을 받은 탓인지 과학과 수학 등 다양한 과목에서의 영어몰입교육, 초등학교 3학년부터 2시간 영어수업, EBS영어방송, 영어전문교사 계약직 고용 등을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핀란드 교육의 또 다른 성공비결로 꼽히는 것이 최고 수준의 우수한 교사진이다. 유치원 교사는 최소한 정규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초중등학교 교사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박사 학위를 소지한 교사도 상당수다. 보수 언론이나 일부 전문가들은 능력 없는 교사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스템이 핀란드의 성공비결이라고 해석하며 교사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원평가를 강행할 태세다. 교사 경력 15년 이후의 교사연봉을 비교해보면 핀란드가 1인당 GDP의 1.29배인데 한국교사의 연봉은 2.2배라며 교사집단을 향한 불신의 칼날을 갈고 있다.

 심상정 후보의 핀란드식 자율학교, 핀란드형 교육특구

이번에는 진보진영의 ‘핀란드 따라 배우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고양 덕양갑에 출마한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가 핀란드형 교육특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학부모들과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지역에 출마한 진보신당 국회의원 후보들도 핀란드식 자율학교, 교육특구 공약을 앞세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심상정 후보 측은 핀란드가 맞춤형 자율교육을 핵심경쟁력으로 하고 있는 선진 교육국이라며  중등 2개교, 고등 2개교를 선진유럽형 자율학교로 전환하고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선진형 자율학교로 전환되면, △교과편성 자율성을 통해 창의성과 특성을 살리는 맞춤형 자율 교육 실시 △ 우수 교원 초빙과 교과 편성 자율성에 근거한 책임 교육제 실시 △ 북유럽식 토론형 학습, 체험 학습, 개방형 학습 진행 등 기존 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혁신한 선진형 교육 모델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심 후보가 제시한 맞춤형 자율학교는 한국의 초등, 중등학교를 합친 격인 핀란드의 9년 의무교육기관 ‘종합학교’를 모델로 삼은 듯하다. 핀란드 종합학교의 성공비결은 최고 대우를 받는 최고수준의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교육과정운영의 융통성과 자율권, 평가권이다. 특히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능력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하고 모든 학교에 특수교사들이 배치되어 학습부진아만을 위한 특별수업도 진행한다. 또한 수업은 반나절만 진행하면서도 방학기간은 3개월이나 될 정도로 가정교육과 자유로운 취미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고등학교를 지자체가 운영하며, 학년과 학급 개념이 없는 무학년제로 3~4년 동안 75강좌를 이수하면 한다. ‘학업능력이 탁월한 아이는 집에서 선생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공부하기도 한다’는 소툰키 고교 교장의 말처럼 교육과정이 유연하며 공평한 수월성을 추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상정 후보의 핀란드식 자율학교 모형이 핀란드의 종합학교 또는 고등학교의 모습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학교단위의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과 우수한 교장, 교사의 확보, 수업 방법 등의 개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학생들의 고른 학업성취능력의 비결은 종합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지도에 있다. 교사들의 자기계발 노력과 학생 개개인의 수준에 맞는 맞춤형 지도가 양질의 무상교육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의 경우 학년의 구분 없이 능력대로 배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월성 교육과 평등교육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결국 교육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사들의 열정과 전문성, 교육철학이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눈에 띄는 몇몇 장점들만을 들여올 경우 또 다른 입시명문고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핀란드 교육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2000년 유럽정상들은 리스본회담에서 2010년까지 3%의 경제성장률과 20만 개의 고용창출을 위한 lisbon agenda로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경쟁력 있는 지식기반 경제 건설’을 합의하였다. 최근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lisbon council은 연구조사 보고서에서 경쟁력 있는 EU 건설을 위한 lisbon agenda의 우수 모델로 핀란드를 선정했다. 핀란드는 14개국 중에서 생산성 증가와 인적 자원개발 지원 항목에서 최고점을 획득했다.

핀란드 교육이 이처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을 받는 이유는 최고 수준의 교육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교육시스템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출신과 경제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다양한 성인교육기관들이 활성화되어 평생교육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다. 부정부패 없는 청렴한 정치 문화도 이러한 교육시스템이 정착하고 변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핀란드 교육의 성공 뒤에는 평생교육의 큰 틀에서 인적자원 개발에 투자되는 엄청난 규모의 교육예산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예산의 약 14%를 교육 분야에 할당하고, 국내총생산의 7%를 공교육비로 지출하고 있다. 수업료, 급식비, 교재비까지 모든 교육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돈이 없어 공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사교육을 담당하는 학원이 없는 것은 물론, 과외도 피아노 등 예술분야에 한해 소수만이 받을 뿐이다. 20여 개의 대학 모두가 정부의 소유이며 정부가 모두 재정을 부담하여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종합기술전문학교들은 산업현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매년 약 100만 명의 핀란드 국민이 성인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 5명 중 한 명꼴로 국가가 공짜로 시켜주는 직업교육을 받는다. 평생교육의 큰 틀에서 교육시스템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는 교육철학도 당연히 남다르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공동체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핀란드 교육의 목표이자 철학이다. 지역, 성별,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평등한 교육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철학 덕이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학교들에는 복지담당관, 심리학자, 특수교사들이 배치돼있어 학생의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 발달을 체크하면서 학생들의 학습과 어려움을 진단하고 해결해 주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학력성취 수준에 따른 지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1등과 꼴찌에 상관없이 이런 교사들의 개별지도로 공평한 수월성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에 대해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영어교육이다. 핀란드의 영어경쟁력은 영어몰입교육보다도 오히려 모국어 교육의 토대 위에서 이룬 성과이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가장 중시하는 교육은 읽기다.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 교육법과 습관화된 독서, 높은 도서관 활용 시스템으로 읽고 쓰는 능력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길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어렸을 때 모국어인 핀란드어를 완전히 학습하였기에 다른 과목도 자신감 있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핀란드 교육의 성공 배경은 바로 우수한 교사들이다. “Teachers, teachers, and teachers”로 요약될 정도로 우수한 교사의 확보와 교사의 질을 높이는 교사교육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대우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가 국가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수업과 평가에서 자율권을 행사하면서 자율적인 경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적 교육주권운동을 벌이자

그렇다면 인적 자원이 최고의 국가경쟁력이라는 한국사회에서 교육시스템의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핀란드의 교육경쟁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보수, 진보 진영뿐만 아니라 현장의 교육전문가들도 국민과 토론하고 소통하며 찾아야 할 대안이다.

영어몰입교육, 자율형 고교 확대, 입시제도 개선, 대학평등화나 자율화 등 부분적인 처방을 통해 백년대계인 교육을 바로 잡기에는 우리의 교육 현실은 너무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 중요한 것은 1920년대부터 무상의무교육을 추진하면서 평생교육시스템으로 국가적 인적 자원을 길러온 핀란드의 교육경쟁력이 한국의 교육개혁 과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교육비, 대학등록금 걱정 없이 모든 국민들이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교육체제는 어떻게 가능한지 국민 모두가 나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한 국민적 교육주권운동을 벌여야 한다. 교원노조, 교육전문가 단체들은 국민과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안적 정책과 비전을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도시와 농촌, 경제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학업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대안적 공교육 운동에 나서야 한다. 끝으로 중앙집권적인 교육체제와 입시제도의 개선만큼 중요한 것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기 위한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다. 교사들이 꼴찌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때, 교사들이 진정 학생들의 희망이 될 때 핀란드식 교육시스템도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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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경제신문 칼럼 - 좋은 경제로 가는 길
우석훈

자기 직업과 자기 생각이 얼마나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좀 의문이다. 스스로 ‘엔지니어’라고 말하면서 말끝마다 ‘엔지니어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짜로는 돈만 생각하는 사람을 종종 본 적이 있다. 경제학자 중에서도 말로는 맨날 경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경제 보다는 이념을 훨씬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좋은 경제’라는 말은 지난 몇 년 전부터 나도 종종 쓰는 개념인데, 이 단어를 정의하기가 참 어렵다. 올해 KBS 신년 토론회에서는 “조금 가더라도 더 많은 사람을 태우고 가는 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답지 않게 철학적으로 이 개념을 정의한 셈이다. 한 달 전 동경신문의 전 편집국장과 긴 시간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을 신뢰의 자본주의로 본다”라는 한참 일본이 좋았을 때의 일본 자본주의에 대한 유럽의 시각을 전달한 적이 있다. “일단 그 안에서 태어나면 밥은 먹여주는 경제”, 그런 정의를 쓴 셈인데, 일본 사람에게도 이 얘기가 간만에 듣던 얘기였는지, 신문에 짧게 언급이 되었다.

경제학자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쮜리히의 어느 젋은 커플을 보았을 때의 일이었다. 오전에 코와 뺨에 피어싱을 하고 스켄 헤드를 하고 있던 이 커플은 누가 보아도 극우파 패션을 하고 있었고, 아마 분명히 넉넉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정치적으로도 외국인을 미워하는 그런 정치적 흐름에 속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스위스는 극우파 정당이 단일 규모로는 최대이고, 이런 극우파 흐름의 본산지가 쮜리히다. 그러나 버스를 타기가 너무 어려웠고, 버스 정류장마저 복잡했는데, 길거리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으므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이 커플에게 버스 타는 법을 물어보고야 말았다. 늘 모르는 도시에 가면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기는 하는데, 나는 독일어로 길을 물어볼 정도는 안 되니까, 영어로 물어봤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경우는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결국 이 커플은 10분 거리에 있는 다른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중에 어떻게 이 극우파 커플이 그렇게 친절할 수 있는지, 쮜리히 시와 찌리히 경제 그리고 스위스의 사회교육 등 관련된 맥락을 연구를 했는데, 이 연구가 졸저 <88만원 세대>의 첫 모티브가 되었다. 극좌에게 극우까지, 서로 정치적 지향은 다르지만 국민경제라는 틀 내에서 새로운 다양성을 만드는 경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국민경제의 한 조건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국민소득 4만불을 넘는 나라의 특징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이다. 당연한 것이, 이 조건 내에서만 국민들의 ‘열정’을 제대로 끌어내면서도 이것이 다양성의 지식체계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의 청소년 경제교육이 드디어 어린이 경제교육까지 내려왔고, 사실상 한국은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돈’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면 국민경제가 곧 지옥과 같아진다. 지식은 나오지 않고, 효율성은 떨어지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임금을 낮추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다시 효율서은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삶을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 그러나 돈에 목 매지 않은 국민, 이런 사람이 많아야 경제가 잘 되는데, 이런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

결국 “돈이 최고야”, 이런 나라는 중남미에 가면 많다. 한국 경제 위기에서 ‘돈독’ 오른 사람들이 더 늘어나는데, 이게 새로운 함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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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김중배 선생이 내 치기를 우려해서 독설을 최대한 줄이고 정중하고 우아한 글을 쓰라는 ‘교시’를 내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 그 충고의 말씀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명박대통령은 심각한 인지부조화 상태다. 자신이 틀릴 리가 없는데 실제로는 틀려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갖가지 인지부조화의 증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은 바보의 행렬에 합류시켰다. 우기고 또 박박 우기다가(인지부조화의 부인 단계) 이젠 모두 틀렸으니 괜찮다는 얘기다(합리화 단계). 천만에... 스티글리츠나 루비니교수, 또 국내외의 정치경제학자들을 거론할 것도 없이 내가 재작년과 작년에 이 지면에 쓴 글에도 경제위기에 관한 얘기는 무수히 등장했다. 아예 만보쯤 물러서서 대통령의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10% 이상의 차이로 틀린 곳은 아무데도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한나라당의 인지부조화는 이제 내년의 경제성장율 예측으로 향한다. IMF가 금년에 -4% 성장을 하지만 후년에는 4.2%로 성장률이 껑충 뛸 것이라는 예측을 했으니 ‘합리화’가 더욱 힘을 얻는다. 또 한번 천만의 말씀이다. 30년 가까이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단언한다.  아마도 IMF는, 그리고 여러 경제예측기관은 현재의 상황을 단기적  충격의 외생변수로 처리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각종 함수의 탄력성 계수가 모두 변한 상태이다. 이걸 수정하지 않으니 충격 후의 성장률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인지부조화는 모든 사실과 합리적 예측을 무시한다. 전국에 걸친 미분양 사태가 주택의 과잉공급을 증명하고 텅빈 고속도로 수준의 지방도로가 널렸는데도 전국에 또 삽질을 한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대부분의 강은 천정천이라는 ‘사실’은 초등학교에서 배웠는데 이명박정부의 머릿속에는 인지부조화의 지우개가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촛불에 밀려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겠다”던 대운하 사업을 강행하고 심지어 참여정부에서 중단됐던 경인운하까지 판단다.

컴퓨터로 계산해낸 파생상품이 리스크를 분산시킬 것이라는 거짓 이론을 믿고 투자은행의 규제를 풀고 자산시장의 왜곡된 유인체계를 법제화한 결과가 현재의 금융위기인데도 자본시장통합법을 시행한다. 기재부 관리들과 일부 금융자본가들은 기어코 수영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온 국민을 바다에 빠뜨릴 난파선을 기어코 출범시켰다. “재벌에게 은행을 주는 법이 어떻게 경제살리기법이냐”고 비판하는 이동걸박사를 기어코 몰아냈다. 인지부조화를 깨우치는 목소리만큼 듣기 싫은 게 또 어디 있을까? 급기야 검찰은 용산참사를 찍은 칼라티비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인지부조화’의 사실 그 자체를 담은 영상마저 무서운 것이다.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임금이 농부를 죽였습니다”

2월 2일 밤, 천주교의 사제들이 시국미사에서 맨 앞에 내세운 만장의 글귀다. 대통령은 자신의 인지부조화로 인한 모든 오류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스스로 뉴타운의 입안자니 그로 인한 부작용을 어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생존을 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특공작전’에 의해 철저히 막아야 한다. 10년 전의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억하는가?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실업자와 무직자 등이 차례로 용산 세입자들의 뒤를 이을 것이다. 그 때마다 인지부조화의 정신병은 특공대를 동원할 것이니 어찌 성직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이들의 생명, 그리고 죽음같은 후유증을 감당해야 할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대통령과 주위의 집단적 인지부조화부터 빨리 치료해야 한다. 사제들의 치료법은 이렇다. “어리석은 통치자에게 더 이상 사람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되찾읍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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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자본주의


분류없음 2009/02/01 14:32

원래 처음에 풀어보려고 했던 세 가지의 문제가 age, gender, region, 이렇게 세 가지였다. 답까지는 아니더라도, age와 region의 문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했는데, gender에 대해서는 아직 파편들만 있지, 이걸 모아낼 틀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고민을 모을 틀을 별도로 만들려고 시도해 본 것은, 아주 조금 있기는 한데, 하여간 솔직히 별 거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도 연구 주제를 미리 정해놓고 있으면, 시간이 그냥 지나기만 했는데도 조금씩 뭔가 고이기 시작하는 때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나의 대학원 수업은 '생태교육론'이라는 주제로 3년간 진행되었었는데, 이 주제는 이번 <생태 페다고지>를 출간하면서 어느 정도는 한 번 정리가 된 셈이므로, 일단은 접으려고 한다.

이대의 김은실 선생과 연대의 조한혜정 선생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여성학 관련 대학원 수업이 있는데, 김은실 선생이 멋진 말을 생각해내서, 당분간 실험적인 시도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젠더와 자본주의>...

내가 원래 이 수업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젠더의 위치나 역할과 같은 것에 대해서 좀 찾아보는 것과 함께... 그 시절 패비안 사회주의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버나드 쇼의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이라는 책을 그 출입구로 삼으려고 하는 중이다.

그리고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것은 '젠더와 경제' 혹은 '젠더와 자본주의' 정도의 축으로 50개의 주제를 찾아내는 일이다. 물론 예전 하던 방식대로라면 그냥 내가 주섬주섬 모아서 50개 정도를 만들면 되는데, 어쨌든 나는 여성이 아니므로 여성들의 눈으로 50개 정도의 질문을 꾸려보고 싶은 게, 나의 진짜 의도이다.

그럼 50개 정도를 1주일치로 만들면, 1년간 1일 연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될 것 같다.

이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을 것 같다. 강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을 떠날 때 마지막 책으로 하고 싶은 게 <빨간 머리 앤의 경제학>이라는 책이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때려넣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아마 <젠더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1년짜리 여정을 한 번 떠나보면, <빨간 머리 앤의 경제학>의 내용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대체적으로 내가 가진 학술적 여정의 밑그림의 출발점은, 고치기 전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의 서문에 담아놓았다. 이 서문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결국 개정판을 내면서 이 서문을 뺐는데, 참... 너무 어렵다고 아우성들이라서 빼기는 했는데, 빼면서 좀 마음이 아쉽기는 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다. 젠더에 관한 문제는 들어가는 출입구가 잘 찾아지지 않고, 너무 파편적으로 모든 게 흩어져 있어서, 몇 번이나 그만둘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이런 문제를 정말로 분석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고 돌아서, 역시 또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니 말이다.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가?"

이 질문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무거운 질문이다. 삶과 인식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식이 삶을 바꾸는 측면도 많다. 결국 풀고 싶은 문제는, 삶에서 나오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길게 보니까 그렇다.

나도 잘 못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이 지독할 정도의 마초 사회에서 살면서 나도 상당히 힘들었나보다.

모티브라는 말이 있고, 모티베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인센티브라는 말도 있다. 경제학에서는 세 가지 용어 전부 우리 말로는 동기로 번역되지만,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인센티브는 돈에 관한 얘기니까, 빼고.

모티브는 벡터값에 관한 이야기이고, 모티베이션은 여기에 스칼라값을 더한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프로이드식 표현을 쓰자면, 에너지에 관한 문제라고나 할까?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peer group이라는 말이 있다. 이 몇 가지 것으로 대체적인 사람들의 행위가 어느 정도는 결정되는 것 같다. 돈으로 설명하면 기가 막히게 잘 설명될 것 같아보이는데,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 혹은 복지국가라고 하는 국가일수록, 그런 식의 설명이 종종 벽에 부딪히게 된다.

젠더나, 생태 같은 질문들이 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일은 학생들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가지고 스터디를 한다. 구조주의라는 프레임이 간단한 것 같아도, 생각보다 무거운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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