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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학교·나쁜학교 선입견만 심어”
일제고사 논란 가열
일부언론 “학생들 학습의욕 높인다”
학자들 “사지선다형만 가르치게 돼”
 
 
한겨레 유선희 기자 정민영 기자 김종수 기자
 








 

» 전국의 중1~2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학력평가가 일제히 실시된 23일 오전 서울 염리동 서울여자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한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10월 초·중·고교 대상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 이어 23일 전국 중학교 1·2학년들이 일제고사를 치르면서 ‘일제고사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교육당국은 전국 단위 시험을 통해 학습의욕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교육학자들은 이런 주장이 교육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데 따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 시험이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높인다? 일제고사를 통해 개인의 학력을 알려줌으로써 학력 신장을 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성열관 경희대 교수(교육학)는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오히려 시험을 볼 때마다 ‘나는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오랜 연구 결과 시험 횟수와 성적 향상은 의미있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지적했다. 다른 학생들과의 비교를 통해 ‘낙인찍기’ 등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격차를 확인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일제고사로 학교 사이의 격차를 확인할 수 있어 차등적 예산분배 등 알맞은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양성관 건국대 교수(교육학)는 “교육격차의 상당 부분은 부모의 소득 등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비롯된다”며 “중요한 것은 평가 뒤의 대책인데, 이를 보완할 적절한 시스템은 만들지 않으면서 격차만 확인하겠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성열관 교수도 “학생들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담임교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만큼 학교·반별 평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대책 마련은 결국 예산 문제”라며 “이는 교육당국의 의지 문제지, 일제고사를 보느냐 안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전국시도연합 학력평가 시험이 치러진 23일 밤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전교조 소속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이 교사 부당징계 철회와 일제고사 중단을 촉구하며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교수·학습 방식 개선에 도움을 준다? 조상식 동국대 교수(교육학)는 “사지선다형 시험을 반복해 치르다 보면 교사들은 창의적인 교수법을 연구하기보다 답을 잘 골라낼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치게 돼 교육과정의 파행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양성관 교수는 “점수와 등수로 매겨지는 평가로는 학생들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개인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며 “결국 뒤처지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주입식 교육을 하는 학습방식이 도입될 게 뻔하다”고 비판했다.

■ 학교와 교사의 책무를 강화한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시험을 매개로 한 교사와 학교 평가는 학교와 학생의 줄세우기로 귀결될 뿐”이라며 “교사의 책무성을 ‘시험 잘 보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도 반교육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쟁·수월성 강조 교육 방식 아래서는 결국 선행학습을 위한 사교육만 부추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성관 교수도 “미국도 20여년 동안 전수시험을 통해 각 학교에 보상이나 제재를 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나 수십년이 지나도 만족할 만한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현장] 일제고사 거부 기자회견…“줄세우기식 시험은 싫어”







[현장] 덕수궁 체험학습…학부모 “아이들 등수는 왜?”




[현장] 종로 보신각 앞 일제고사 반대 집회




■ 단계별 평가이므로 줄세우기 아니다? 교육당국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의 경우 ‘우수·보통·기초·기초학력 미달’의 4단계로 평가하기 때문에 성적으로 줄을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상식 교수는 “학교정보 공시제 실시로 학교별 학력 정보가 공개되면 등급평가만으로도 학교·지역별 비교가 가능해져 결국 학교를 줄세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선희 정민영 기자 duck@hani.co.kr 영상/ 김도성 은지희 피디 kds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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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일제고사 반대하면 퇴학?”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똑 부러졌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일제고사에 대한 반대 의사는 분명했다. 일제고사 반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 위기에 놓인 정재호군(18·백암고 2학년).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하다”는 그는 22일 저녁에도 ‘부당징계 철회· 일제고사 중단’ 촛불을 들었다.





-“일제고사 반대운동 하지않겠다는 서약서 요구”-

정군의 일제고사 반대활동이 문제(?)된 것은 지난 10월 처음 실시되는 일제고사를 앞두고 서울 오류중학교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을 체육교사가 봤던 것. 거기다 일제고사를 보는 학년은 아니었지만 학생을 일렬로 줄 세우는 교육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등교거부를 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학교 측은 진술서를 요구했고 ‘또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할 때는 퇴학을 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고사 반대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19일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인 ‘Say No’를 도와 자신의 학교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 담임교사에게 적발됐다. 정군에 따르면, 당시 다른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홍보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퇴학을 시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학교 측은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시위 선동이 징계 사유였다.

“일제고사를 반대하고 알리는 게 청소년이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해요. 청소년은 마음껏 뛰어놀고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일제고사와 영어몰입식 교육 때문에 더 심한 경쟁체제에 내몰리고 있잖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못하고 부모님이나 학교, 학원 등에 속박돼 있는 상황인 거죠.”

이날 정군은 결국 서약서를 쓰지 않았다. 대신 ‘일제고사 반대활동에 대한 반성을 할 것이 없다’는 반성문 아닌 반성문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학생부 교사들이 주축이 된 징계위원회가 구성돼 곧 징계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일제고사 대신 현장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파면·해임됐지만, 학생이 징계위기에 놓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생님들을 징계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도 참 답답했어요. 일제고사를 볼지, 체험학습을 갈지 선택권을 준 것 뿐인데 그걸로 징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교사·학생 1000여명이 지난 17일 저녁 촛불을 들고 서울 신문로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용한 7명 교사의 파면·해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약서를 쓰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시작’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제가 서약서를 쓰면 곧바로 다른 학교 친구들의 일제고사 반대활동도 문제 삼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저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명박 대통령과 공정택 교육감, 그리고 이들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의 문제인 거죠.”

-해임교사 “교사 징계보다 가혹”-

아직 징계여부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군은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퇴학처분이 내려지더라도 일제고사 반대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일제고사 때문에 징계를 받은 교사들이 ‘출근투쟁’을 하듯, 자신은 ‘등교투쟁’을 할 계획이다.

일제고사 사태로 파면통보를 받은 송용운 교사(선사초)는 정군의 소식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함께 소식을 전해들은 촛불문화제 참가자들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제고사가 정착되면 전국의 학생들이 무한 경쟁시대에 돌입하게 됩니다. 당사자인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거죠. 그런데 일제고사 반대의사를 표현했다고 퇴학을 운운한다는 것은 교사들을 파면·해임한 것보다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정군의 꿈은 청소년 인권활동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더욱 그만 둘 수 없다. 그는 일제고사를 “멍청한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제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과 징계를 받은 교사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안다면 이렇게 무리하게 추진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누구를 위한 교육정책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전국 시도연합 학력평가’가 열리는 23일에도 일제고사 반대운동에 ‘올인’한다. 이날 오전부터 등교거부를 시작으로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저녁 때까지 ‘일제고사 반대’를 외칠 계획이다.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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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얼굴없는 천사’ 9년째 선행

 전주 | 박용근기자


ㆍ10차례에 걸쳐 총 8110만원 놓고 사라져

전북 전주에 해마다 나타났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사랑을 전했다.



23일 오후 1시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3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남자는 “지하 주차장 옆 화단에 가보면 박스 하나가 있으니 가져가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얼굴 없는 천사임을 짐작한 주민센터 직원이 화단에 가보니 복사용지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박스 안에는 1만원짜리 100장 묶음 20뭉치와 동전 38만원 등 2038만1000원이 들어 있는 저금통이 있었다.

박스 안에는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는 메모지도 들어 있었다.

전주시 노송동에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시작된 것은 2000년 4월. 당시 중노2동사무소를 찾은 ‘천사’는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렇게 올해까지 9년 동안 10차례에 걸쳐 전달된 성금은 모두 8109만7200원에 이른다.

해마다 선행이 되풀이되면서 얼굴 없는 천사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전화 한 통으로 돈이 놓인 장소만 알려주고 사라지는 바람에 얼굴은 물론 이름, 나이도 모른다.

추측도 무성하다. 신원을 밝히기 곤란한 과거 ‘폭력배’나 인근 ‘집창촌 포주’일 것이라는 설이 나도는가 하면 신앙심이 깊은 성공한 사업가일 것이라는 말도 있다. 전주시민들은 이런 추측과 무관하게 ‘얼굴 없는 천사’로 부르며 흐뭇해 하고 있다.

<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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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일제고사 전북 일부 학교 거부

 임지선·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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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교과부, 체험학습 무단결석 처리… 갈등 커질듯, 교육학자 142명 “줄세우기식 평가 중단” 성명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력평가가 23일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전북지역 일부 학교는 학력평가를 치르지 않았으며 일부 학부모 단체와 학생들은 체험학습에 참여해 교육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23일 치러진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한 서울지역 학생과 학부모들이 서울 덕수궁 앞으로 모이고 있다. |김창길기자

교육당국은 평가 거부를 목적으로 체험학습을 승인해준 교장·교사가 있을 경우 중징계하고 체험학습을 떠난 학생은 무단 결석처리한다는 방침이어서 갈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시험은 전국 중학교 1, 2학년생 135만여명을 대상으로 국어·영어·수학 등 5개 과목에 걸쳐 치러졌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한 지난 10월 초등학교 3학년 대상 기초학력 진단평가와 초6·중3·고1 대상 학업성취도 평가와 달리 이번 시험은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합의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이 출제를 담당했다.

전북지역에서는 장수중이 학교운영위·교직원회의 등을 거쳐 시험을 거부, 정상수업을 진행했다. 체육 특목중학교인 전북체육중과 대안학교인 지평선중은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앞서 전북도교육청은 각 학교에 공문을 보내 일제고사 응시 여부를 물어 ‘시험 거부를 허용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빚어졌다.

시험을 거부한 전국의 중 1, 2학년생은 40명가량인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경기지역에서는 20여명의 중 1, 2학년생들이 평등교육실현전국학부모회 주도로 덕수궁 미술관으로 체험학습을 떠났다. 경북에서도 중 1, 2학년생 17명과 학부모들이 경주 안압지 등에서 체험학습을 진행했다. 교과부는 이날 체험학습을 가거나 평가를 거부한 학생은 모두 36명이라고 발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은 이날 오전 검은옷을 입고 출근하는 ‘블랙 투쟁’을 벌여 일제고사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경기지역 200여개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중도·진보성향의 교육학자 142명은 성명을 통해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학생 줄세우기식 평가를 중단하고 일제고사 거부를 유도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내린 중징계 결정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성명에 동참한 경희대 교육과정학과 성열관 교수는 “교육 소외지역에 대한 어떠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책도 마련해 주지 않고 시행되고 있는 학력평가는 과열입시경쟁 체제와 사교육 광풍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선·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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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이 행복한 취리히 [2008.12.19 제740호]
 
[체험! 살기 좋은 대도시 ①]
기자가 홈스테이로 들여다 본 도시의 삶… 다니엘 가족이 여유로운 까닭은?
 
 
 
박수진


 
 

한국은 경제대국으로도 손꼽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 가운데 최고의 노동시간과 자살률로도 악명 높다. 수도인 서울은 특히 높은 인구밀도와 개발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도시에서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도시의 삶의 질이 더욱 아쉬워지는 때다.

<한겨레21>은 이번호부터 ‘삶의 질’ 평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도시 네 곳을 찾는다. 우리보다 나은 대도시 삶의 양식은 어떠한지, 그런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현지 가정에 ‘홈스테이’를 하면서 해당 도시민의 삶의 결을 들여다봤다.

첫 번째 방문지인 스위스 취리히는 매년 세계 대도시의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는 ‘머서휴먼리소스컨설팅’사가 2007년 최고로 꼽은 도시다. 13위를 차지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38위의 영국 런던, 아시아에서 수위를 차지한 싱가포르(34위)·도쿄(35위)도 찾아간다. 서울은 86위에 그쳤다. 지구촌 시대 다른 대도시의 높은 삶의 질, ‘어떻게’부터 ‘왜’까지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편집자


 
 


» 다니엘이 12월4일 저녁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 놀이를 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모의 짧은 노동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와, 그리티반츠는 잘돼가고 있어?”

12월5일 금요일 저녁 8시30분. 스위스 취리히의 제바흐 지역에 사는 다니엘 게이트링어(43)가 큰딸 야나(13)와 함께 현관문을 열면서 외쳤다. 집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아폴턴에서 승마를 하고 온 뒤다. 둘째 티모(11)와 막내 릴리아(7)는 아빠 베아트(46)와 함께 그리티반츠를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티반츠는 사람 모양의 빵이다. 다음날인 6일은 스위스 전통 명절 산타클로스 데이다. 스위스에서는 산타클로스가 이날 방문한다. 전날엔 산타에게 줄 선물로 온 가족이 모여 그리티반츠를 굽는다. 우리나라에서 추석 전에 송편을 빚는 것과 비슷하다. 다니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금요일마다 승마를 하느라 조금 늦었다.






다니엘은 세 아이의 엄마이자 직업여성이다. 취리히를 포함해 12개 도시가 속해 있는 취리히주(Canton Zurich) 정부에 소속된 사회복지사다. 다니엘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친다. 세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고 집안일까지 하느라 헉헉대는 느낌이 없다. 월요일과 금요일 이틀은 2시간씩 승마를 한다. “말을 타고 달리면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확 풀려요. 정신이 맑아지죠. 다음 한 주를 사는 동력이 되고요.” 다니엘이 말했다.


데이케어센터와 근무시간 조정


세 아이를 둔 일하는 엄마. 한국에서는 듣기만 해도 버거운 이 단어가 취리히의 다니엘에게는 어떻게 가벼운 걸까. 우선 학교 안에 있는 데이케어센터가 큰 도움이 된다. 데이케어센터는 두 종류가 있다. 아이들이 점심 시간을 보내는 ‘미탁쇼트’와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타게쇼트’다. 스위스 아이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 이때 부모가 모두 일해 집에 없거나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은 미탁쇼트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타게쇼트는 수업이 끝난 뒤 오후 5시30분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숙제를 하고 책을 읽거나 게임 등을 한다. 스위스의 모든 초등학교에 설치된 데이케어센터는 시에서 운영한다. 사회복지사들도 취리히 시청에 속해 있는 직원들이다.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인 콜베나케에 다니는 릴리아와 티모도 타게쇼트를 이용한다. 릴리아의 학교에는 모두 9개 데이케어센터(미탁쇼트와 타게쇼트 포함)가 운영되고 있다. 전교생 38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이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한다. 한곳에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20명 정도씩 나눠서 돌봐진다. 데이케어센터의 가격은 가계 소득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에 10프랑에서 100프랑 사이다. 다니엘 가족은 하루에 60프랑을 낸다.

학교가 가깝다는 점도 엄마·아빠에겐 큰 이득이다. 취리히시는 학교의 접근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주지와 인구 등을 파악해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1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에 짓고 있다. 그래서 면적 4.72㎢의 제바흐에는 초등학교가 5개 있다. 릴리아와 티모가 다니는 콜베나케도 집 바로 뒷골목에 있어서 후다닥 뛰어가면 1분, 걸어가도 2분이면 충분하다. 다니엘은 “학교가 가깝고, 학교 안에 데이케어센터가 있어서 일하는 중에 아이들을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여기에 일하는 시간도 조정했다. 다니엘은 월요일에는 6시간, 화요일과 목요일엔 8시간씩 일한다. 스위스의 대부분 회사들은 하루 8시간씩 주 5일 근무를 100% 일하는 것으로 본다. 다니엘은 이 중 55%만 일하는 셈이다. 스위스에서는 근로계약을 할 때 근로 시간을 50~100% 사이에서 조정할 수 있다.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일하는 시간을 정하기 때문에 일자리는 많고, 삶의 질도 높아진다. 다니엘은 티모와 릴리아가 모두 낮 12시에 수업을 마치는 수요일을 일하지 않는 날로 정해 이날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 숙제도 봐준다. 대신 6시간만 일하는 월요일과 일하지 않는 금요일에는 취미인 승마를 중요한 스케줄로 잡아뒀다. 다니엘의 이웃 마르쿠스 베만(43·남)도 6살, 8살 난 두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일주일에 80%만 일한다. 금요일에는 아이들과 갤러리나 박물관 등 전시회에 가거나 지역문화센터에 간다. 이번주 금요일에는 지역문화센터에 가서 크리스마스 때 쓸 촛불을 직접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다니엘을 비롯해 취리히의 학부모들은 이렇게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시에서 제공하는 데이케어센터의 도움을 받아 일과 여가, 일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운영한다. 워킹맘인 다니엘의 여유는 이런 다양한 사회적 조건 덕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 진학률 10~20%, 시험 없는 학교

 
 


» 다니엘 가족이 12월5일 저녁 다음날 먹을 그리티반츠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맨 위). 초등학교마다 설치된 데이케어센터는 낮 시간 아이들의 보육을 책임진다(가운데). 다니엘의 남편 베아트가 아들 티모와 함께 집 근처 강가를 거닐고 있다. 풍부한 자연환경은 쾌적한 삶을 즐기는 데 필수적이다.
 
 
 


아이들도 학교가 끝나면 다양한 취미를 즐긴다. 티모와 릴리아는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수영을 하러 동네 수영장에 간다. 악기도 배운다. 티모는 매주 수요일 기타를 배우고, 김나지움(중·고등학교가 합쳐진 교육과정)에 다니는 야나는 월요일에 피아노를, 금요일에는 승마를 한다. 세 아이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는 다 같이 가라테를 배우러 도장에 간다. 토요일에는 취리히 시청 사회복지과 공무원인 아빠 베아트가 아이들을 도장에 데려다준다. 그러고 나서 베아트는 도장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르헬 공원에서 조깅을 한다. “이르헬대학 캠퍼스에서 뻗어나온 공원이에요. 둘레가 4~5km 정도 되는데 잘 조성돼 있어 달리기에 좋아요.” 베아트의 취미는 여행과 조깅이다.

아이들과 부모가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교육환경의 덕도 크다. 스위스는 한국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가 시험을 통해 경쟁하지는 않는다. 대학 진학률도 10~20% 정도다. 정말 대학 공부가 필요한 아이들만 대학에 간다.

교육제도나 일하는 방식 등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럽 안에서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런데 유독 취리히의 삶의 질이 높은 건 왜일까. 베아트는 “편리한 교통, 지역 어디에서나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높은 점 등이 취리히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말했다. 베아트 가족이 살고 있는 제바흐는 취리히시 북쪽 끝에 해당한다. 오각형 모양에 가까운 취리히시의 오른쪽 끝 모서리다. 시 외곽 공항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제바흐에서 각종 문화와 쇼핑 공간 등이 집중된 취리히 도심까지는 트램(전차) 한 번이면 족하다. 14번 트램을 타면 21분 만에 중앙역에 도착한다. 이것은 취리히시 어느 권역에서나 마찬가지다. 중앙역을 중심에 두고 방사형으로 13개 트램과 각종 버스, 전철인 에스반이 모세혈관처럼 촘촘하게, 그러나 체계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다. 공장 등이 많아 ‘노동자들의 방’이라는 콘셉트를 가진 취리히 서부 지역에서도, 부자들이 주로 산다는 취리히 남쪽 취리히버그 지역에서도 도심까지 가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베아트는 직장 근처인 도심 베르트 지역에 살다 좀더 싼값에 더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해 외곽 지역인 제바흐로 이사했다. 그는 “취리히도 도심으로 갈수록, 또 강변을 둘러싸고는 집값이 굉장히 비싸요. 부촌과 그렇지 않은 동네의 구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베르트에 사는 것과 이곳 제바흐에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것이 취리히의 장점이죠. 각 지역의 특색은 그대로 있으면서 편리한 대중교통을 줄기로 모든 지역이 원활히 소통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집 앞 공원, 길 건너 공공 수영장


이런 장점을 취리히시에 사는 거주자들은 충분히 활용한다. 여가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도시를 200% 활용한다. 베아트 가족은 한 달에 두 번쯤은 트램을 타고 중앙역에 간다. 중앙역 근처 극장에서 아이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박물관에서 하는 전시 목록을 살펴본 뒤 국립박물관에 가기도 한다. 여름이면 전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강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햇볕을 쬐며 수영을 즐긴다.

이 모든 것들은 집 근처에서도 가능하다. 집 근처에는 자연환경이 풍부하다. 베아트의 집에서는 길을 건너 3분 정도 걸어가면 공공 수영장이 나온다. 수영장 옆으로는 6천 평 정도의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여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수영장으로 나와요. 자연스럽게 이웃들이 누가 있는지 알게 되죠.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이웃과의 교류는 없는 편이고요.” 이 수영장이 지겨울 때면 자전거를 타고 10분쯤 거리에 있는 고양이 호수(Katzensee)에 가기도 한다. 이곳엔 나무가 잘 조성된 숲이 있다. 샌드위치 등을 싸 가서 돗자리를 펴고 수영을 즐긴다. 문화시설도 많다. 제바흐역에서 두 정거장을 가면 있는 외어링콘에서는 각종 전시회와 스포츠 경기 등이 열린다. 외어링콘에는 할렌스타디움이 있어 스위스 테니스 오픈이 매년 4월 이곳에서 열리고 하키 경기도 자주 열린다. 겨울에는 아이스쇼가 펼쳐진다.

12월6일에도 아이들의 가라테가 끝난 뒤 베아트는 중앙역 근처로 가서 티모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골랐다. 다니엘과 릴리아와 야나는 팝아티스트 자클레티의 전시를 보러 갔다.

12월14일에는 취리히 도심 1.5km를 달리는 ‘도시 달리기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취리히 시청은 매년 12월 둘쨋주 일요일마다 도시 달리기 대회를 열어왔다. 가족 단위로 참가할 수 있는 취리히의 전통적인 행사다. 이 대회는 직경 8.7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가 있는 성피터 교회, 샤갈이 죽기 전 선물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는 프라우뮌스터 교회 등이 있는 리마트강 일대를 한 바퀴 돈다. 베아트 가족은 3년 전부터 이 경주에 참가해왔다. 그동안은 늘 참여하는 데 의의를 뒀지만 이번에는 순위권 안에 들고 싶은 게 베아트의 욕심이다. 12월만 되면 다른 운동은 모두 좋아하면서 유독 달리기만 싫어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연습하자”고 조른다. 다니엘은 “취리히 사람들은 여름에는 절대 안 달려요. 여름에는 모두 호수로 풍덩풍덩 빠져들죠. 겨울이 돼야 그나마 달려요”라고 말했다.

12월6일 토요일 저녁에는 50km 떨어진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올라왔다. 베아트 가족은 전날 만든 그리티반츠 등 쿠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요 화제는 내년 여름 휴가다. 베아트 가족은 거의 매년 여름에 국외로 여행을 간다. 지난해에는 스페인, 올해는 모로코에 다녀왔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요트 여행도 기억에 남는다. 현관에는 베아트 가족이 각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들이 전시돼 있다. 추억의 장소이자 가족 전시관이다. 릴리아가 이번에 모로코에서 주워온 동물 발자국이 찍힌 돌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이건 공룡 발자국일지도 몰라요.” 눈을 크게 뜨고 릴리아가 말했다. 그렇게 산타클로스 데이의 밤이 깊어갔다. 베아트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즐기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인생관은 그가 사는 도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한 갈 곳, 볼 것, 할 것 등의 영향을 받아 그는 한결 풍부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낙후지역 개발 정책

비싼 집값을 잡아라


베아트가 원래 살던 곳은 취리히 도심 한가운데였다. 직장이 있는 베르트 부근에서 살던 그는 11년 전 둘째 티모가 생기면서 기존의 방 세 개짜리 1층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이 필요했다. 도심의 집값은 너무 비쌌다. 결국 베르트를 지나는 14번 트램 구간의 외곽에서 찾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제바흐다. 당시 집 가격은 90만프랑(11억여원). 지금은 이곳도 가격이 갑절가량 올랐다.

도심의 비싼 집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리히시는 어떤 정책을 취할까. 취리히시는 도시 곳곳을 면밀히 살펴 노후하거나 이미지가 나빠져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지역에 사람들이 다시 유입되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질강 부근이 대표적이다. 리마트강은 반호프역 앞에 있는 스필츠 광장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리마트강, 다른 하나는 질강이다. 13~14세기부터 리마트강 주변에는 프라우뮌스터 성당, 그로스뮌스터 성당 등 성당이 들어섰고, 17~18세기에는 은행들이 들어서면서 금융·산업·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쿤스트하우스(취리히 미술관), 오페라하우스, 시청, 시의회 등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도 대부분 이 리마트강 주변에 자리잡았다. 반면 질강 주변에는 비교적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는 가게들과 값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지나가다 보면 고치거나 보수가 필요한 낡은 집들이 더러 눈에 띈다. 취리히 도시계획국은 이 질강 주변의 노후한 건물들을 정책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이 작업은 그동안 군부대여서 개발되지 못했던 부지의 재개발과 맞물려 진행 중이다. 이 부지에 학교, 은행, 노인을 위한 거주단지 등을 짓고, 나머지 40% 부지에는 개인 사업자들이 짓는 아파트를 조성할 방침이다. 리마트 강변과 맞먹는 주변 환경을 가졌으면서도 비싸지 않은 주거단지로 개발하는 게 목표다. 현재 여러 건축가 등에게 아이디어를 받는 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제반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외부에서 취리히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차량이 이용하는 고속도로가 지난다. 고속도로 소음으로 이주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취리히시는 또 다른 고속도로를 만듦으로써 소음 문제를 해결했다. 프란츠 에버하드 도시계획국장은 “차량이 줄어들면서 제반 지역의 삶의 질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취리히(스위스)=글·사진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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