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무관생도들 소설로 읽는 역사 1
이원규 지음 / 푸른사상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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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원규님의 책을 읽었단다. 이원규님이 쓰신 역사 소설과 평전을 몇 권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너무 좋아서 그의 다른 책들은 뭐가 있나, 이렇게 찾아보고 알게 된 책이 바로 이번에 읽은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란 책이란다. 이원규님이 쓰신 책들은 주로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을 무대로 책들이라서, 책 제목을 보고 이번에도 그 시대를 쓰셨구나, 생각했단다. 그리고 늘 그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어 알려준 그런 책이었단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고 하면 언제를 이야기하는 걸까. 바로 1908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 받던 생도들의 이야기란다. 그럼,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꾸나. 소설의 형식을 띠었지만, 고증을 통해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구나.

 

1.

1908년 대한제국무관학교. 북악산 삼청동에 위치하고 있었단다. 당시 남아 있는 생도들은 고작 24명이었고, 교장은 노백린이라는 분으로 나중에 임시정부 국무총리도 하셨단다. 1908년이면 을사늑약은 이미 맺어진 다음이라서, 무관학교에서 일본인 파견 고관이 있었는데, 오구라 대위였어.

이응준. 이 소설의 첫 번째 중요 인물이란다. 평안도 농부의 아들로 어렸을 때 가출해서 무작정 한성에 왔다가 우연히 노백린이 그를 알게 되었고, 똘똘한 이응준을 무관학교의 이갑 참령에게 소개시켜 주어 이갑 참령이 자기의 집에 기거하게 하며 학교 공부를 시켜 주었단다. 보성 중학에 다니던 중에 무관학교로 편입하게 되었어. 그는 무관학교에서 지석규, 홍사익과 친해져서, 셋은 단짝 친구가 된단다. 지석규. 이 분의 당숙이 한글학자이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이란다.

1908년 나라가 위태위태한 시기얼마 후 교장 노백린과 이갑 참령 모두 잘리고, 일본과 친분이 있는 이희두 장군이 교장이 되었단다. 그리고 1909년 학교는 폐교되었단다. 그렇게 생도들은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되었단다.

 

2.

학교가 폐간되고, 그들은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로 편입하게 된단다. 이때 애국심에 불타는 생도들은 고민들을 했단다. 편입하는 것은 나라에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일본을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면서 편입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선배들도 그렇고, 주위의 어르신들도 그렇고, 마음에 늘 애국심을 품고 일본을 가서 일본을 배워 나중에 조선을 위한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몇몇 이들을 빼고 대부분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단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 5년제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편입했고, 그 학교를 졸업하면 1년동안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단다.

대한제국의 생도들은 한국학생반이라고 따로 수업을 받았단다. 하지만 모든 수업이 일본말로 진행되어 쉽지 않았어. 육군중앙유년학교에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의 선배도 있었어. 김현충이라는 분인데 나중에 이름은 김광서로 바꿨어. 김광서의 도움으로 일본 생활을 적응하는데 생도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단다. 특히 주말에 외박할 수 있는 거처인 일요하숙을 알아봐 주어, 주말마다 한국에서 온 생도 동기들과 회포를 풀 수도 있었어.

1909 10월 학교의 분위기가 안 좋았단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소식이 전해진 거야. 한국 생도들은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모두들 쾌재를 불렀단다. 하지만, 1910년은 암울한 소식도 전해졌단다. 한일 합병 소식. 이제 더 이상 조선이라는 나라는 대학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졌단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다음, 육군중앙유년학교는 더 이상 한국학생반을 두지 않았단다.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한국에서 온 생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일본생도들이 있는 반들에 배정받았어. 이젠 일본 생도들과 경쟁을 해야 했어. 일본어로 배우는데 일본 생도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었단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홍사익으로 전교에서 3등을 했다는구나.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이끌었던 이들 소식을 좀 이야기해주어야겠구나. 이갑 참령은 식구들 모두 데리고 독립운동을 마음 먹고, 북간도로 망명을 했단다. 이응준이 방학 때 한성 이갑 참령의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망명을 하고 난 뒤였어.

 

3.

세월은 빠르게 흘러, 과락이나 퇴교 조치된 생도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임관을 해서 소위가 되었단다. 지석규는 소대장으로 중국 땅에서 독일군과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단다.

연해주에 있던 이갑 참령으로부터 이응준에게 연락이 왔단다. 이갑은 자신의 딸 정희와 이응준이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사실 이응준이 이갑 참령 댁에서 지내면서, 이갑 참령의 딸을 동생처럼 여겼지만, 언젠가부터 다른 감정이 생겼었어. 정희도 이응준을 따르고 좋아했었단다. 그런 둘의 마음을 알았던 이갑 참령이 둘의 결혼을 먼저 주선한 거야. 이응준은 좋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단다. 왜냐하면 얼마 전 술기운에 유학생 김명순을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신문에도 났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이응준은 속으로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정희와 혼인을 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갑 참령이 연해주 땅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이응준도 전쟁터에 참전하게 되었어.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연합국으로 이루어진 국제간섭군 소속으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연해주였단다. 그곳에 가서 여러 독립 운동가들도 만났고, 수소문 끝에 이갑 참령 댁에 들렀지만, 정희는 한성에 가 있어서 만나지 못하고, 장모님이 되실 이갑 참령의 부인만 만나고 발길을 돌렸단다. 그는 연해주에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는데, 러시아 공산주의 진영에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도 있어서 몹시 갈등했단다. 나중에는 자신도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적을 알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인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말이야. 그것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 위장병까지 앓게 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단다.

조선 독립 운동은 국내외 여기저기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단다. 그런 와중에 1919 2 8일 일본 도쿄 한바닥에서 유학생 중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이 일어났단다. 그리고 곧이어 3 1일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단다. 이때가 조선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고 독립운동가들도 생각했어.

한성에 있던 김광서는 일본에 있는 지석규, 이응준, 홍사익에게 조선으로 오라고 했단다.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이라고 말이야. 지석규는 스스로 위장을 망가뜨려 병가를 내고 조선으로 돌아왔단다. 이응준은 이미 전쟁에서 위장병을 얻어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쉽게 국내로 돌아왔단다. 그때 정희는 3.1 운동으로 몸이 안 좋아져서 어머니의 고향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응준도 정희를 만나서 평양으로 갔단다. 하지만 홍사익은 심한 갈등을 했단다. 일본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고 조선인 최초로 육군대학 입학 후보가 되어 있었거든. 그는 결국 육군대학 입학을 위해 일본 잔류를 결정한단다. , 그 육군대학은 일본의 육군대학이 아니더냐.

 

4.

김광서와 지석규는 경의선을 타고 곧바로 망명길에 올랐단다. 그 기차에 이응준도 타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았단다. 다음 열차를 기다렸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단다. 이응준은 자신의 위장병이 아직 낫지 않고, 정희와 결혼한 지도 얼마 안되어 나중에 합류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합류하면 되지, 시기가 중요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구나. 스멀스멀 일어나는 자기합리화. 이응준은 평양에 있으면 권총 분실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고, 김광서와 지석규의 망명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측근이었던 그도 헌병 조사를 받았단다. 그가 난처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조선군 사령관으로 파견 나온 일본인 우쓰노미야의 도움으로 쉽게 풀려났단다. 우쓰노미야는 계속 이응준을 도와주고 회유를 했단다. 이응준은 그 고마움을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대로 조선군 사령부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어린 시절 대한 제국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가 배신할 수 없다고 하는 우쓰노미야가 어떤 놈인지 모른단 말인가. 뻔히 알면서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자기합리화밖에 안 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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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88)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대표적 존재인 이응준과 김석원은 우쓰노미야의 회유책에 그렇게 발목을 잡혀버렸다.

두 장교는 그렇게 우쓰노미야의 선한 면만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제암리 학살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그 무렵 조선민족을 절망으로 몰고 갈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홍범도의 독립군을 도운 만주 조선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출병을 본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만주 출병은 그가 조선군사령관직을 떠난 직후 실현되었다.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해 대규모로 출병했다. 그러나 독립군을 뒤쫓다가 챵산리(청산리) 등지에서 대패해 오히려 3천여 명이 전사했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만주의 조선인 3만여 명을 보복적으로 학살했다. 그것이 경신참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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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망명을 한 김광서는 이름을 김경천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지석규는 지청천으로 하려다가 씨 성이 드물어서 이청천으로 활동을 했단다. , 지청천? 이 사람이 독립운동가 지청천이었던 것인가. 책을 잠시 두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독립운동가 지청천이 맞더구나. 아빠가 그 분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거든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분을 알게 되어 다행이구나.

김광서와 지석규는 신흥무관학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많은 조선이 장교들을 배출하였단다. 그리고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어. 김광서는 간도 지방에서 백마 타고 달리는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단다. 지석규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연해주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많은 학생들을 배출했단다.

일본땅에 머물렀던 홍사익은 결국 육군대학에 입학을 했단다. 똑똑하긴 엄청 똑똑했나 보구나.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본사람과 경쟁해서 잡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독립 운동을 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은 모래성이었던 것이구나. 그 후로 홍사익은 국내와 만주와 일본을 오가면서 승승장구하였단다. 물론 일본 장교로써 말이야. 그는 나중에 그 어렵다는 별 두 개, 소장까지 진급했단다.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에 가장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지. 물론 일본 장교로써 말이야. 그는 만주국에서 관동군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독립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했단다. 양심은 완전히 갖다 버렸구나.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에 이종혁이라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후예였어. 그는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국제간섭군으로 연해주에 왔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탈출하여 독립군을 찾아왔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석규와 해후를 했고, 이후 줄곧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대. 출감 이후 후유증으로 병에 걸려 죽고 말았구나.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은 어찌 이리 쉽게 죽는가.

이응준은 여러 차례 독립 운동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단다. 지석규가 두어 차례 밀사를 보내 독립 운동을 하러 자신에게 오라고 했거든. 하지만 이응준은 거절했단다. 지석규는 이응준과 홍사익이 친일을 하며 일하고 있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단다.  그 옛날의 결의는 어디로 갔는가. 이응준은 일본인 장교가 되어 대좌라는 높은 계급까지 올라갔단다. 이응준뿐만 아니라, 일본을 배우고 일본에 맞서 싸우자고 했던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많은 이들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친일을 했단다. 또는 일본에 순응하면서 지냈단다. 그들의 마지막 양심은 고작 돈을 보아서 살림이 어려워진 지석규와 김광서의 집에 보내주는 것이었어.

 

5.

세월은 흘러 흘러 1940년대일본 장군으로 승승장구하던 홍사익은 필리핀포로수용소장으로 발령 받았단다. 가기 전에 이응준을 만났어. 둘은 홍사익이 필리핀포로수용소장으로 가는 것이 승진을 아니고, 좌천이라는 것을 알았을 거야. 194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전세를 기울고 있었고, 언제 전쟁에서 질 지 모르는 상황에 외국 험지로 보낸다는 것은 책임을 다 떠넘기려는 의도인 것처럼도 보였단다. 결국 홍사익은 필리핀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었어. 그래도 돌아갈 줄 알았던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전범 재판 후 그곳에서 사형을 당했단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준다고 적군에 충성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지막의 모습에 누가 슬퍼하겠는가. 홍사익의 후세들도 전쟁이 끝나도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일본에서 살았다고 하는구나.,

지석규는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어. 광복군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모은 단체로 국내 진공 작전 준비에 힘을 쓰고 있었어. 그런데 그 와중에 해방이 되었단다. 자신들의 손으로 해방이 되었어야 하는데, 외세의 힘으로 해방이 된 점을 아쉬워했어. 그들의 아쉬움은 곧 불행의 현실이 되었어. 한반도는 미군정과 소련에 의해 둘로 나뉘고,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어. 임시정부 요원과 독립군들은 귀국을 하루 이틀 미루다가 마지못해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미군정의 앞잡이가 권력을 잡고 있었어. 지석규는 1947년 개인자격으로 입국했고, 지청천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했으며, 국회의원 등도 했지만, 독립운동 때만큼 부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단다. 그리고 1957년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

조선 해방 후 이응준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조선 해방과 동시에 자신이 벌 받을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미군정에서 그에게 육군창립을 도와달라고 했어. 그래서 참여하면서, 그는 대한민국 군인으로 또 잘 나가게 되었지. 그뿐만 아니라 친일을 했던 그의 동기들도 많은 요직을 차지했단다. 해방이 아니라 침략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구나. 그는 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 죽은 홍사익 구명 운동도 했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구나. 이런 이들은 또 오래도 사는구나. 1985 9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친일을 하고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우리나라, 부끄럽구나.

김광서의 최후가 불행했단다. 연해주 극동사범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간첩죄로 누명을 썼다가 이후 감옥을 오가는 신세가 되어 1942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김광서와 이응준의 삶을 비교해 보면, 분명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게 확실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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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김광서는 최후가 불행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사범대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936년 간첩죄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2년 반의 금고형을 받고 복역했다. 1939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으나 그해 12월 다시 체포되어 8년의 강제수형령을 받고 카라간다 감옥으로 수용됐다가 거기서 북부 시베리아 코미 자치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철도 노역을 했고 1942 1 26일 철도수용소 부설병원에서 영양부족에 따른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56년 유족의 탄원을 받은 소련 군사법원은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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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있단다. 자신의 몸을 다 받쳐 나라를 위해 일을 하신 분들은 꼭 잊지 말아야겠지만, 기회주의자로 적국에 아부하고 동기들과 나라를 배신한 이들의 이름도 잊지 말아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1908년 봄, 한성(漢城)

책의 끝 문장 : 모두 광복되고도 한참 늦어진 수훈(受勳)이었다.

이응준은 권총 분실 사건과 우쓰노미야에 접근한 일로 인생의 길을 180도 바꿀 수도 있었다. 우선 임시정부 밀사인 최성수와 더불어 만주로 탈출할 수 있었다. 3.1운동 무력탄압의 원흉 우쓰노미야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지석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저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우쓰노미야에게 인간적 배신을 할 수 없었다면 그가 떠난 뒤 독립운동 전선으로 갈 수도 있었다. - P290

염창섭은 일본영사관에 소속되어,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를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만주국 건설을 찬성하게 지도하고 취약지구에 집단부락을 만드는 등 친일 행위를 하고 있었다. 원용국은 지린성 판스현에서 동포들을 회유해 항일무장세력이 발을 못 붙이도록 자위단을 조직하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배 학년 중 우등생이었던 윤상필은 관동군 참모부 조선반에 속해 있었다. 재만동포들을 만주국과 일본군 쪽으로 끌어당겨 항일세력을 와해시키는 온갖 공작을 기획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P338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이제 천명을 안다는 오십 줄 나이에 이르렀고 절반 이상이 퇴역했다. 현역장관들은 대부분 고국에 돌아와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뽑아내는 병사(兵事) 업무를 맡거나 전문학교와 중학교의 교련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퇴역한 사람들도 대개는 교련 교관 등 육사 출신에 걸맞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독립투쟁을 하고 민족혼 교육에 매달렸던 조철호가 세상을 떠나 그런 역할을 할 위인은 이제 없었다. 아오야마 묘지에서 뒷날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던지자고 한 맹세는 대부분이 추억으로만 생각할 뿐 몸도 정신도 이제 일본의 통치에 젖어 있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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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을 펼쳐 들면 순식간에 나만 남습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한낮의 카페 한가운데 좌석에서든, 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울리는 한밤의 방 한구석에 홀로 기대 앉아서든, 모두 그렇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경험이지만, 그 고독은 감미롭습니다.


(13)

저의 서재에는 물론 다 읽은 책도 상당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서문만 읽은 책도 있고 구입 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는 것, 서문만 읽는 것, 부분부분만 찾아 읽는 것, 그 모든 것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25-26)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독일인의 사랑>을 썼던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말했어요.


(68)

독서를 즐기는 것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려운 책을 통해 지적인 성취감을 얻는 동시에 독서력에도 도움을 받는다면 그다음에 다른 책을 훨씬 더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가끔은 생소하고 어려운 분야의 책에 도전해보세요. 일단 시작해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힘든 일은 아닐 겁니다.


(77)

왜 하필이면 3분의 2 지점을 보는 거냐면, 저자의 힘이 가장 떨어질 때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무슨 책이든 시작과 끝은 대부분 나쁘지 않습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렇습니다. 원고를 배열할 때 잘 쓴 걸 앞에 둡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앞쪽부터 읽어나갈 테니까요. 한편 맨 뒤부터 슬쩍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맨 뒤에 넣죠. 바로 그래서 3분의 2쯤을 읽으면 저자의 약한 급소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그 책은 정말 훌륭하니까 그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98)

과학 분야 같은 것도, 중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책을 재미있게 읽었더라면 나중에 책 읽기 훨씬 좋았을 텐데 싶어요. 지금은 독서에서 넓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적으로 한창 책에 깊이 빠져든 중고등학교 때 저는 깊이를 더 중시했던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했지만, 특히 십 대에서 이십 대는 책을 넓게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143)

낮 동안에 일하느라 힘들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간다거나 그런 게 우리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습관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오히려 쩔쩔매는 시간이에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죠. 그런데 패턴화되어 있는, 습관화된 부분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인생은 너무 행복한 거죠. 시공간 속에서 매번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갑옷을 두르는 게 최상의 행복 기술인데 그 습관 중에 독서가 있다면 너무 괜찮은 거죠. 예를 들어 매일매일이 습관으로 빼곡한데, 모처럼 이번 달 말일에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책을 한번 읽어보자. 그러면 책 읽는 게 행복이 아니라 쾌락인 거예요. 그런데 습관화되어 매일 책 읽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세요. 저녁 먹기 전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책을 자동적으로 펼치는 거예요. 그건 행복인 거예요. 똑같이 책을 읽어도 쾌락이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다만 쾌락은 지속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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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영 지음 / 휴(休)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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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나무 의사 우종영님의 글은 참 담백하고 좋단다. 십여 년 전에 처음 그의 책을 읽고 좋았던 기억이 있다가, 한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고 있다가 작년에 신간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라는 책을 오랜만에 읽었어. 그리고 우종영님의 책을 검색해봤더니, 아빠가 읽지 않은 책들이 더 있더구나. 이번에 그 중에 하나 <게으른 산행 2>를 읽었단다. 전작 <게으른 산행>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2권을 읽는데 너무 오래 걸렸구나. 1권에서는 경기도와 강원도에 있는 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2권에서는 중남부 지역의 산들을 소개해준다고 하는구나.

작년부터 계속되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산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단다. 아빠도 산행을 좋아해서 가끔 산행을 간단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적은 이른 새벽이나 야간 산행을 가곤 하는데, 산은 어느 때 가도 참 좋은 것 같구나.

특히 요즘 같은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칼바람 자체만으로 좋지만, 눈 덮인 풍경이 감탄을 절로 나게 한단다. 추위의 고통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눈 덮인 겨울 산행의 장점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단다. 그것은 산과 나무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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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렇게 푹 쌓인 눈 위를 걸으니 옛날 산 친구 생각이 난다. 백두대간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녀본 후 그가 던진 한마디.

앞으론 눈 쌓인 겨울산만 다니련다.”

연유를 물으니, 눈이 쌓이면 나무뿌리를 밟지 않아도 되고 흙이 패지 않으니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는 얘기다. 미안한 마음 없이 나무의 진면목을 바라본다는 것, 겨울산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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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시작은 제주도 한라산부터 시작한단다. 아빠도 예전에 눈 잔뜩 덮인 한라산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의 모습은 정말 잊을 수가 없더구나. 새파란 하늘과 눈 덮인 한라산의 조화,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아빠의 영혼의 찌든 때를 날려버리는 기분이었어.

알면 보인다고, 산에 오르면서 나무들의 이름도 알면 더 멋진 산행이 되겠지만, 몰라도 좋단다. 곧게 뻗은 나무가 있으면 곧은 성품을 가진 나무겠거니 생각하고, 여기저기 가지를 친 나무가 있으면 푸근한 마음을 가진 나무겠거니 생각하고 말이야. 지은이 우종영님은 나무 의사답게 나무 이름들을 정말 많이 알고 있더구나. 이런 사람의 산행기에는 나무 이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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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협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탐스럽게 생긴 담팔수가 나그네를 반기고,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황칠나무, 참식나무, 조록나무, 아왜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사이사이에는 예덕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멀구슬나무, 머귀나무, 때죽나무, 자귀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굴피나무, 합다리나무, 꾸지나무, 곰의말채나무, 까마귀베개 같은 낙엽 지는 나무가 살고 있다. 숲 바닥에는 바람등취(후추등)이 바위를 뒤덮고, 맥문아재비가 보석같이 영롱한 열매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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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대표적인 것이 한라산이지만, 수많은 오름들도 있단다. 예전에 읽은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도 오름들에 대한 찬사가 있었는데, 우종영님도 오꼬메오름 등 여러 오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단다. 다음에 제주도를 가게 되면 여러 오름들도 계획에 넣어봐야겠구나.

울릉도도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으로 봉우리가 하나 있단다. 성인봉이라고 부르는데, 산이 아니고 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아빠는 그 성인봉의 해발고지가 그리 높지 않은 줄 알았단다. 그런데 성인봉의 높이가 웬만한 산보다 높은 984미터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산이란 이름이 아니고, 봉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그 이유는 산괴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 잘 이해는 가지 않더구나. 그냥 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산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제주도 하면 한라산, 울릉도 하면 성인산. 이렇게 말이야. 성인봉이라고 하니, 아빠처럼 잘못 알고 있는 이가 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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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성인봉은 왜 산이 아니고 봉일까? 산의 격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곳의 높이는 984미터이다. 1000미터에서 16미터 못 미치는 큰 산이다. 사방으로 갈래를 친 겹산인데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도 깊다.

산과 봉()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이 많지만, 일단 산이라고 하면 산괴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있어야 한다. 한라산은 한라산을 떠받치고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에 산이며, 울릉도는 섬 자체가 산으로 떠받칠 땅이 없기에 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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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는 밤나무뿐만 아니라 너도밤나무도 많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고 하여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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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29)

옛날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고 하면서 만약 100그루를 심지 못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을 사람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 만에 전부 심었다. 심은 밤나무에서는 싹도 나고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찾아와서 그동안 심어놓은 밤나무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다. 산신령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여러 번 세어도 아흔아홉 그루밖에는 안 되는 밤나무가 그사이에 한 그루 더 생길 수는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심기는 100그루를 심었지만 그사이 한 그루가 말라 죽은 것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옆에 서 있던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입니다.”하고 외쳤다. 산신령은 다시 그 나무에게 밤나무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 나무는 자기도 밤나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이름 붙여주고 잘 가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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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도와 울릉도를 지나서는 계룡산을 시작으로 선운산, 백암산, 조계산, 두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주흘산을 시작으로 주왕산, 비슬산, 금정산, 지리산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산들을 소개하고 있단다. 저 아랫동네에 있는 산들은 거리가 있다 보니, 아빠도 많이 다녀보지는 못한 것 같구나. 지리산을 좋아해서 지리산만 여러 번 가보고 말이야. 이 책에 나와 있는 산들의 사진을 보니, 다들 멋지구나. 꼭 가봐야 할 산들 목록에 적어두어야겠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쉽게 산에 갈 수가 있어서 좋구나. 작년에는 너희들과 두어 번 집 근처 산에 갔다 오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나라 산은 그렇게 많은데, 또 높은 산을 별로 없어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산들이 대부분이란다. 이런 조건을 갖춘 나라가 많지 않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많은 사람들인 것 같구나.

산 이야기를 하니 또 산에 가고 싶구나. 이제는 안 가본 산들을 한번 가봐야겠구나. 그리고 올해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산의 정기를 백 퍼센트 다 들이마시고 싶구나. 곧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PS:

책의 첫 문장 : 사람 이름이나 노래 제목, 책제목에 이르기까지 이름이란 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책의 끝 문장 : 계절은 어느 때고 좋으나 여름 집중호우 때는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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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3 - 초기 기독교 문명과 미술 : 더 이상 인간은 외롭지 않았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3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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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서양 역사에서 화려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가 저문 이후 수백 년 동안을 암흑기라고들 한단다. 이번에 읽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권에서 다루는 그 시대도 그 시대의 이야기란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미술이라는 것에 아빠는 소질도 없고, 감상 능력도 없기 때문에 뭐가 잘했고 뭐가 못했는지 잘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이 시대의 미술 작품들이 확실히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 작품들보다 못하다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오긴 하더구나.

이번 3권에서는 왜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 당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주고 있으며, 그런 암흑기에서도 우리가 관심 가져볼 작품들을 소개해 주고 있단다. 미술 작품만 쭉 이야기하면 다소 따분할 수도 있는데, 역사 이야기도 함께 해주는 것이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시리즈의 장점이 아닌가 싶구나.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질문과 답변의 강의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어서, 읽기도 편했단다.


1.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끝날 것 같지 않은 로마 제국의 영화도 끝이 나고 말았단다. 로마 쇠퇴의 원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도 하고, 추측도 했는데이 책에서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간단히 설명해 주었단다. 로마제국이 번성했던 요인은 영토를 점점 확장하면서 얻은 재화가 큰 이유였는데, 영국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축 이후 영토 확장을 멈추게 되었단다. 그렇다 보니 국가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단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지배층의 탐욕과 부패일 것 같구나. 그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지고 시민들은 소작농과 빈민층으로 전락했어. 희망이 없어진 현실에서 그들에게 한줄기 빛을 준 것은 약자를 돕고 부활의 메시지를 던진 기독교였단다. 그렇게 로마의 쇠퇴와 함께 기독교는 널리 퍼지게 된 거야. 삶이 피폐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시절의 미술도 함께 퇴보하였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려했던 로마 조각상들에 비해 많이 퇴보하였단다. 이 시절 작품들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 이어지던 시간이 끊어진 듯한 느낌이었단다. 이 당시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지배층의 탐욕이 커지면서, 자신들을 우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뭐하나, 작품성이 떨어지는데 말이야.

기독교가 로마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탄압을 받아왔단다. 그러다가 4세기 그 유명한, 기독교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가 되는 것은 물론, 로마의 국교가 되었단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서,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기도 했다는 구나. 이후 기독교 관련된 미술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구나.

이 시대 대표적인 미술작품은 5세기에 만든 크베들린부르크 이탈라라는 작품인데,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으니, 이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 바로 교회를 짓는 일이란다. 기독교가 합법화되기 전에서는 집이 교회 역할을 하곤 했는데, 합법화된 이후에는 신도들이 함께 예배를 들일 수 있는 교회를 지었단다. 그 양식은 직사각형의 교회와 원형의 교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이 양식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구나.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성지가 된 곳이 있는데, 바로 예루살렘이란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기독교만의 성지가 아니고, 이슬람교의 성지, 유대교의 성지도 예루살렘이란다. 그래서 오늘날도 늘 종교의 분쟁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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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134)

그래서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분쟁의 땅이기도 합니다. 뒤 페이지 지도를 보세요. 일단 이 도시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구역이 있고, 여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던 소수 민족입니다. 이렇게 사방 1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 안에 각자 이곳이 자기 종교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옹다옹 모여 있으니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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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루살렘에 지은 유명한 교회로는 예수 성묘 교회란 것이 있단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주도로 지어진 교회라고 하는데,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 예수가 부활하기 전 안치되었던 묘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서 알려줄게. 예수 성묘 교회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다리가 하나 있다고 하는구나. 예수 성묘 교회 외벽에 놓여 있는 평범한 사다리인데, 1757년 이후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러 기독교 세력들이 예수 성묘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 보니, 누구 하나 섣불리 그 사다리를 옮길 수 없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움직일 수 없는 사다리란 이름을 붙인 채 말이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해 준 것뿐만 아니라, 로마 역사에 또 하나의 큰 사고(?)를 친단다. 수고를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긴 것이야. 그러면서 그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사 콘스탄티노플이라 지었단다. 콘스탄티노플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요충지로 좋은 지역이지만, 그래도 로마는 로마여야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으면서 말이야. 그렇게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서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로마로 갈리는 원인도 제공하게 된단다. 동로마 제국을 다른 말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한단다.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곳에 여러 건축물을 짓게 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란다.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라는 과학자들이 설계를 해서, 상당히 과학적인 설계로 지었는데, 그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6세기에 다시 재건하였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무너지면서, 이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라고 하는구나.


2.

비잔티움 제국 레오 3세 황제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느끼고, 제국을 개혁하려고 했단다. 종교를 형상화한 이미지를 모두 없애라는 것이었어. 그게 개혁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라는 권력으로 교회 안의 모든 형상과 이미지를 제거하라고 했대. 예수의 상도 없애고, 그림도 없애고 말이야. 교리를 무척 좁게 해석한 성경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단다.

이에 서로마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레오 3세 황제의 이런 개혁을 반대했단다. 그레고리우스 2세는 포교 활동을 위해서는 형상이나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 둘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기독교는 동서로 분열이 되어,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정교회로 나뉘게 된단다. 정교회가 우리나라에서는 낯설지만 오늘날에도 러시아와 그리스의 국교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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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11세기 무렵 기독교가 동서로 분열하며 서쪽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가톨릭이, 동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중심으로 정교회가 세워집니다. 가톨릭은 교황이, 정교회는 총대주교가 대표하게 되었죠. 이렇게 분열한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름에도 그 주장이 드러나 있습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은, 정교회를 가리키는 오서독스(Orthodox)는 정통을 의미하거든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정교회는 지금도 러시아와 그리스에서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기독교 종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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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에서 형상과 이미지를 제한하다 보니 미술을 쇠퇴하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은 형상과 이미지를 허용해서 미술의 발전이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한 황제의 이런 정책에 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구나. 그레고리우스 2세도 레오 3세의 의견을 따랐다면, 미켈라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도 많이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면서,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융성과 함께 쇠퇴했단다. 게르만족은 기근과 전쟁 그리고 훈족의 위협을 피해 이주하게 되는데, 그들이 이주한 곳이 서로마의 영역이었단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영국으로 이동하여 정착했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이동했고, 고트족은 남부 유럽으로, 프랑크족은 오늘날 프랑스 지역으로 이동을 했어. 그들은 로마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기독교 신앙이 융합시켰단다. 그러면서 속세를 등지고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사들도 나타났는데,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수도원은 중세 미술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


3.

고대 로마 제국이 망하고 암흑기에 빠져든 서유럽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왕이 등장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단다. 그가 왕이 된 시기는 8세기 말부터 9세기까지인데, 이때 이미 그리스 로마 부흥 운동도 주도했다고 하는구나. 잘 알려진 15세기 르네상스보다 한참 빠른 시기에 그리스 로마 부흥 운동을 해서 이것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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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르네상스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이어진 카롤링거 르네상스입니다. 이 시기에 드디어 본격적인 중세를 망라할 사회제도, 기독교 교리, 중세적 감수성 전체가 선명해집니다. 더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유산들이 복원되기 시작했고요. 초기 기독교 시대의 혼란을 넘어 서유럽 세계의 질서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중세의 암흑기가 거의 끝나간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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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취약한 아빠는 샤를마뉴 왕을 처음 들어봤는데, 샤를마뉴는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유럽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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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샤를마뉴가 사랑받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샤를마뉴가 화려한 로마시가 아니라 소박한 북쪽의 고향 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교황에게서 로마 황제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했지만 샤를마뉴는 평생 로마 시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거점에서 나라를 통치하다가 지금의 독일 아헨에 수도를 정한 후로는 쭉 그곳에 머물렀죠. 샤를마뉴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거예요. 샤를마뉴 치세에 게르만 문화와 그리스 로마 문화, 그리고 기독교가 융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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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권의 이야기란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6권까지 나왔는데, 6권이 끝인데, 더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6권짜지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 미술 초보자들을 위해 쉽게 서양미술사를 잘 적은 시리즈인 것 같구나. 이 시리즈를 읽고 나면 곰브리치의 깨알 같은 크기의 글자로 된 <서양미술사>도 읽어볼 수 있을까?


PS:

책의 첫 문장 : 이번 강의는 주로 로마제국이 멸망해가는 혼란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책의 끝 문장 : 다음 강의에서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 중세 사람들이 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중세 미술을 본격적으로 탐험해 보겠습니다.



아무로 높고 강력한 파도라도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 슈테판 츠바이크
- P36

네, 다른 말로 하면 삶에 철학적 깊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부분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중세는 흔히 암흑시대니 뭐니 해서 역사가 후퇴한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면적으로 아주 깊은 성찰을 했던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시기이기도 했고요. 또 앞으로 보겠지만 신은 어떤 존재여야 하고 신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끝없이 탐구하는 과정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 P90

그래서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분쟁의 땅이기도 합니다. 뒤 페이지 지도를 보세요. 일단 이 도시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구역이 있고, 여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던 소수 민족입니다. 이렇게 사방 1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 안에 각자 이곳이 자기 종교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옹다옹 모여 있으니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겠죠. - P133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고대 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중세가 시작된 때라고 합니다. 물로 동로마는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단단한 방벽 뒤에서 1000년을 더 살아남긴 했지요. 그러나 살아남은 동로마를 고대 로마제국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고대 로마제국의 중심이 이탈리아 반도였다면 동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지역이거든요. 당연히 동방 문화권이고요.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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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4 03: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어서 사서 쌓아두고 잇는데 빨리 읽어야겠네요. ㅎㅎ

bookholic 2021-02-14 11:02   좋아요 0 | URL
얼른얼른 펼치세요~~^^ 남은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요~~
 















(14)

나는 금세 자랐다. 몇 시간 만에 요람기가 끝났고, 그뒤로 몇 분 만에 아장아장 걷는 시기가 끝났다. 어머니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에 곁에 남은 이모가, 눈이 노랗고 우는 소리가 특이하고 가늘다며 내 이름을 매(hawk)라는 뜻의 키르케라고 지었다.


(101)

그가 말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키르케. 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 아버지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 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 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 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 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107)

공포가 철썩철썩 나를 때렸고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점점 더 싸늘해졌다. 고요한 공기가 내 살갗을 스멀스멀 가로질렀고 그림자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내 혈관이 뛰는 소리 말고 다른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순간, 또 한 순간이 하룻밤 같았지만 마침내 하늘의 질감이 점점 깊어지고 가장자리가 희부예져갔다. 그림자들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날이 밝았다. 나는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몸으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누가 돌아다닌 발자국도, 꿈틀거린 꼬리 자국도, 문을 할퀸 흔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청난 시련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253)

왜 이래,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 돼지라서 좋은 점도 생각해야지. 진창 때문에 미끌미끌하고 날렵해서 잡기 어렵지. 땅바닥에 붙어 다녀서 쉽게 엎어뜨릴 수 없지. 개하고 달라서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지. 찌꺼기든 쓰레기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지. 멍청하고 둔해 보여서 적들이 방심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똑똑하지. 상대방 얼굴도 기억하거든.


(258)

내가 보기에 전쟁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늘 어리석은 선택인 것 같아요. 거기서 뭘 얻던 간에 몇 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잖아요. 그러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더 크고.”

음 명예라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저희 사령관에게 그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줄었을 텐데요.”

뭣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나요?”

하도 많아서 기억을 더듬어봐야겠네요.” 그는 손가락으로 꼽았다. “복수. 욕망. 오만. 탐욕. 권력. 또 뭘 빠뜨렸지? , 허영심. 그리고 자존심.”


(294)

시인들은 잠을 죽음의 형제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대부분의 인간이 느끼기에 그 컴컴한 몇 시간이 생의 마지막에 기다리는 정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잠은 그의 인생과 닮아서 엎치락뒤치락했고 늑대들이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잠꼬대가 심했다. 나는 진주색 여명 속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잔뜩 긴장한 어깨. 레슬링 시합에서 쓰러뜨려야 하는 상대 선수라도 되는 듯 잡고 비트는 홑이불. 나와 함께 지내는 일 년 동안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음에도 매일 밤은 여전히 전투 태세였다.


(404)

오디세우스는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걸 좋아했지만 세상에 그와 비슷한 사람은 없었고, 이제 그가 죽고 없으니 그런 사람은 전멸한 셈이었다. 영웅들은 모두 바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건 곧, 자기를 제외한 모든 영웅이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랬으니 그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느 누가 바로잡아줄 수 있었을까? 그는 바닷가에서 텔레고노스를 보고는 해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이가 둘이었지만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 아이를 제대로 아는 부모는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면 우리가 저지른 실수만 거울처럼 비쳐 보일 뿐이다.


(416-7)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 건. 왜였을까요? 한순간의 자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면 구혼자들은 찾아올 일이 없었겠죠. 제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제 삶도.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 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것을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게 끔찍한 인생이 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을 꼬드겨놓고 내팽개친 게 아닙니까.”


(417)

너희에게 돌아가기 전에 신들이 네 아버지에게 저승으로 들어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찾아가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생전에 알고 지냈던 아이아스, 아가멤논과 더불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대가로 요절을 선택한 과거 아카이오이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의 영혼을 만났지. 너희 아버지는 그 영웅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찬사를 늘어놓고, 세간이 널리 이름을 떨쳤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를 나무랐지. 교만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고, 좀 더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425)

저희는 스스로를 탁월한 지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맨 처음에 결혼했을 때 건드리는 모든 걸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바꾸어놓을 방법을 연구하며 같이 천 개의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죠. 그이는 아가멤논처럼 형편없는 사령관은 본 적 없다고 했지만 그를 이용해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그의 기발한 장치로 트로이아를 무찌르고 세상의 절반을 재편했으니까요. 저도 머리를 잘 썼습니다. 어느 염소끼리 교배를 시킬지, 무슨 수로 수확량을 늘릴지, 어디에 그물을 던져야 고기가 가장 잘 잡힐지. 이타케에서는 그런 게 관심사였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이의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구혼자들을 죽였지만 그러고 나니 뭐가 남았을까요? 물고기와 염소. 여신과는 거리가 먼 나이 먹은 아내, 이해할 수 없는 아들.”


(499)

나는 나이를 먹는다. 반질반질한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에 주름이 져 있다. 몸도 불고 피부도 점점 늘어지기 시작한다. 약초를 썰다 베면 흉터가 남는다. 어떨 때는 그래서 좋다. 또 어떨 때는 허영심이 생겨서 못마땅해진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내 육신의 종착지는 당연히 흙이다. 거기가 내 육신이 있을 곳이다. 언젠가 헤르메스가 나를 죽은 이들의 신전으로 안내할 것이다. 나는 백발이 성성할 테고 그는 영혼을 인도할 때만 유일하게 진지해지는 이답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길 테니 우리는 서로를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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