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모닥불 




      도서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게 여전히 특별한 장소로 남아 있다. 
      그곳에 가면 늘 나를 위한 모닥불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아담하고 친밀한 모닥불이고,
      어떤 때는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하게 넘실대는
      화톳불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모닥불 앞에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왔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잡문집》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학교 때인가,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 뒤 밭길을 걸어 걸어가 얕은 언덕을 넘어 친구의 집으로 가곤 했다. 금호동 산꼭대기 낮은 집들이 오손도손 앉아 있던, 담요나 이불들이 볕 좋은 날 널려있던 그 동네가 왠지 참 이유없이 좋았다. 우리 집이 있던 을지로 6가와는 달랐던 정서가 있어서였을까.

 친구네 집으로 가면 우리는 그녀의 대학생 언니와 오빠들의 방에 들어가 턴테이블에 패티김의 LP판이나 돈 맥클린의 '빈센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잉'들을 들었고 때론 장독대의 포도주를 국자로 떠가지고 와 마시고 그 방의 책들을 꺼내 읽으며 둘 만의 재미있고 오붓한 시간을 즐겼었다. 그러던 어느날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을 한 권 꺼내 읽었는데, 무엇인지 몰라도 빛처럼 그 시들이 내 마음으로 들어 왔다. 시인 고은의 詩集. 친구에게 부탁해 그 시집을 빌려온 그 날부터 나의 첫 시인은 高銀이 되었다. 본명 고은태(高銀泰), 법명 일초(一超) 환속시인. 불분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아이에게 그의 시들은 하나의 출구였을까, 하나의 도피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우주(宇宙)였을까. 그 이후 내 노트에는 그 황홀하고도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시들로 가득하였다. ' 폐결핵' ' 천은사운(泉隱寺韻)' ' 해연풍(海軟風)' ''내 아내의 농업(農業)' '애마(愛馬) 한쓰와 함께' '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저녁 숲길에서' '예감(豫感)'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삶' '봄밤의 말씀' 等等.  그리고 또 한 쪽에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敵)'이 자리잡고.

 우리는 그때부터 고은이란 시인의 추종자가 되어 장편소설 '어린 나그네'를 시작으로 산문집 '환멸을 위하여'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등을 종로서적으로 나가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때인가는 역시 시험이 끝나면 588번 버스를 타고 시인이 살던 화곡동의 집을 찾아가 목련꽃이 만발하던 시인의 담장 밖을 맴돌다 가쁜 숨을 내쉬며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대학생이 되어선 그 친구가 유학을 떠나 우리의 시인원정기는 끝났다. 그리고 1991년 장편소설 '화엄경'과  세월이 또 지나 시집 '어느 바람'을 지나  2001년 '순간의 꽃'과  '만인보'가 아직  내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젠, '순간의 꽃' 속에 들어 있는 '그 꽃' 을 끄덕이는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니 시인 고은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각인시켜 준 분이었고,  때묻고 어리숙한 아직도 사는 일의 정답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의 기나긴 시간을 함께 한 시인이었다.

 이제 고은 시인은 '마치 잔칫날처럼' 내 곁에 다시 오신다. 잔칫날이란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삶을 누리는 날이 아닌가. 우리에게 산맥이 되고 젖줄이 되신 시인께 아련한 날의 기억을 더듬어 감사드린다. '밤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새 세상이 되가는구나.' (詩, '패러수트' 에서)

 

 

 

 

 

          과육(果肉)

 

 

 

         1

 

         마침내 빈 말수레들이 돌아간다

         빈 수레라 해도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실려 있다

         이상한 노릇이다 과일이 벌써 익었다

         그 캄캄한 살이 싱싱하게 아프리라

         저 남쪽에서 소묘(素描)한 반원(半圓)이 겹겹이 사라진다

         내 둘레에서 방금 사용한 단어(單語)들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손을 놓은 처녀의 은(銀)방울도 떨어진다

         그녀의 입술은 또다시 위아래가 해후(邂逅)처럼 닫히리라

 

 

          2

 

         벗이 왔다 둘이 올 것을 하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을 여기까지 떠올 까닭은 없다

         여기는 벗 하나로도 충분하다

         과일이 절로 떨어진다

         그것이 감인지 사과인지 모른다

         그렇다 마지막에 추상(抽象) 감탄사(感歎詞)로 길이 끝

        난다

         벗이여 더 고백(告白)하지 말아라

         너무 많은 진실은 허황하구나

         저녁 햇빛에 고백이 모여 고백을 태운다

         이제부터 나는 벗에게 과수원으로 인도한다

         가을이 떠나간다

         과일로 꽉 찬 과수원은 빈 과수원의 과거이다

         과일 속의 살의 무지(無知)에 다다르고 싶다

         그 삶의 암흑! 충실! 그리고 그 살 속의 씨앗!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없어. 그냥 날 가만히 놔 두길 바래, 하다가

아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무망한 마음이.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詩集, <자명한 산책>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로의 음식 - 지치고 힘든 당신을 응원하는 최고의 밥상!
곽재구 외 지음 / 책숲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로`란 나의 경우 많은 말을 하진 않아도 그냥 가만히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일이었다. 이 책이 그렇다. 이것 저것 먹어서 부대끼는 속을, 따끈한 물에 밥을 말아 잔멸치볶음과 함께 먹으며 풀듯이. 다정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2-11-02 18:16   좋아요 0 | URL
멋진 100자평이에요, 님.^^
때론 지극히 단순한 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appletreeje 2012-11-03 14: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멋진 프레이야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에는 `스노우맨`을 읽으며 지난 겨울을 생각했고, 10월에는 `레오파드`를 읽으며 다가 올 겨울을 떠올렸다. 스노우맨도 좋았지만, 더 넓고 세련되고 정교하다. 새 초코렛을 입속에 녹이는 듯한 매혹적인 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