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론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였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구멍을 위해서는

       동사(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 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최승자 詩集, <기억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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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4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4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

     는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것이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

     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거야 근처 미술

     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

     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

     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

     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

     은 미술관처럼

 

 

 

                                      -김이듬 詩集,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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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씨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담당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이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 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 속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 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 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 예순 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단풍잎, 은행잎을 주워 식탁유리 밑에 끼워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 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을 낙엽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리고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 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10쪽)

 

 

 문학에 눈 뜨는 일은 회의에 눈 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 존재에 눈 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이 내려간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뜸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딜 가나 치유와 긍정의 말들을 사나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얼굴에 들이대어 삶에 눈 멀게 할 때, 시는 은은히 촛불 밝혀 삶의 누추한 자리를 비추어주니까. 배신과 치욕과 절망과 설움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덮어두는 그 구질구질한 기억의 밑자리를 시는 끝내 밝힌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그래서 황동규 시인이 말했듯이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인 것이다. (13~14쪽)

 

 

부득이한 밤을 맞아 불가피한 업무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만 오늘은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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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2-12 14:49   좋아요 0 | URL
나무 늘보님 너무 멋있는 글귀들이 가득한 페이퍼네요 ^^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밑줄 찌익 ~ ㅋ ~ 감동 받고 갑니다 ㅋ~

appletreeje 2012-12-13 11:10   좋아요 0 | URL
드림님~~ㅎㅎ 반가워요~^^
드림님은 역시, 우등생!!
저야말로 전부터 드림님 글에 감동받곤 하는 것 잘 아시죠~?
날씨가 추워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전 또 감기몸살이 왔어요.
오늘도 힘차고 좋은 날 되세요^^

2012-12-13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3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운, 얼음같이 고요한 오후다.

 저녁에 있을 미팅을 생각하고 그 후의 송년모임을 떠올리며 좀 끄급한 침묵속에 잠긴다.

 뭔지 모를 피로한 얼굴을 하고 좀 눈을 부치다 일어나 머리를 감아야하고.

 주방을 가로지르다, 잘라서 물에 담아 둔 당근의 주황색 몸체에서 연둣빛으로 자라고 있는

작고 여린 이파리들을 보고, 또 거실을 지나다 수족관의 환하디 환한 불빛속에서 여전히 유영을

하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다가 또 주황색 어린 플래티의 눈과 마주친다. 플래티는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게 어느날 혼자 태어나 많은 물고기들 사이에서 저 혼자 그림자처럼 잘 자라고 있다. 어미도 죽고 없는데. 낮인데도 늘 저녁같은 요즘 겨울 날씨들 속, 저 혼자도 환하게 빛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밝아지기 전에'를 막 읽고 난 뒤라 그런지, 노랑 겨울의 오후 어느 시간 주황의 밝음이 새삼 저홀로 빛나고 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고 있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109쪽)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123쪽)

 

 

 

 그렇듯, 가장 적막한 것들은 저홀로 소리없이 살아내고 있다.

 문득, 주황의 환한 빛이 침묵같이 깊은 위로를 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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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08 22:44   좋아요 0 | URL
전 저 인용문을 읽고 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싶었어요.
생생하게 심장이 하얀 뼈 사이에서 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정말 좋은 소설들입니다.

appletreeje 2012-12-09 22:00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반갑습니다!
좋은 소설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 감사드려요^^

2012-12-08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2-09 00:54   좋아요 0 | URL
주황의 밝은 빛이 침묵같은 위로를 하는 시간ᆢ 참 좋으네요.

appletreeje 2012-12-09 22:0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때론 일상의 어느 순간에 위로같은 빛이 오네요.
좋은 밤 되시기를~^^

비로그인 2012-12-11 10:04   좋아요 0 | URL
아름답고 처연하고 어딘가 비장한 느낌마저..역시 한강인가요.

appletreeje 2012-12-11 12:14   좋아요 0 | URL
예~~역시, 한강이에요.. 컨디션님!
요즘 흐득흐득한 진눈깨비같은 날씨에
홀로 방에 앉아 읽으면, 흐릿흐릿하고 뿌연..여명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밝아오는 빛같기도 해요. '겨울'같은 소설.
 

 

 

       겨울날 단장(斷章)

         2

        어두운 겨울날 얼음은
        그 얼음장의 두께만큼 나를 사랑하고
        그사랑은 오랫동안 나를 버려두었다.
        때로 누웠다가 일어나
        겨울저녁 하얀 입김을 날리며 문을 열 때면
        갑자기 내입김 속에 들어오는 조그만 얼굴
        얼굴을 가리는 조그만 두 손.
        나는 알겠다. 언제부터인가
        육체의 쓴맛이 머리칼을 곱게 빗고 흙내음을 맡으며
        얼마나 오랜 나날을 닫힌 문 속에 있었는가를.
        나는 여기 있다, 미친듯이 혼자 서서 웃으며
        내 여기 있다, 네 조그만 손등에 두 눈을 대고
        네 뒤에 내리는 설경(雪景)에
        외로울 만치 두근대는 손을 내민다.


                                    -황동규詩, 겨울날 단장(斷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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