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에서나 한라산 기슭에서나




서로의 뒤를 봐주느라 그 일생이 다 간다.  (13)








그리움의 방식






꿀벌의 침은 내장과 연결되어 있다



목숨을 거는 일이라 함부로 쓰지 않는다



당신을 지켜야 할 때

딱 한 번 쓸 뿐이다.  (50)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에서














살다 보면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라는 일이, 어느 정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말이라 생각 든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어떡하든 한 끼를 먹는 일이 언덕 하나를 넘는 일이 돼 듯, 그게 인생이라 여겨지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라는 어느 시집의 구절과, 그 '순한' 두부를 시 제목으로 지은 詩가 너무 멋지고 광활하게 씌어 나의 빈곤한 문해력에 난감하다가, 마지막 연의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100쪽)"'라는 뭔가 알 듯 말 듯 해, 서둘러 다행히 냉장고에 잠자고 있던 두부로 '두부김치'를 만들어 소주나 마시고, 또 밤새 밥벌이를 해야겠다.

두부는 어느 계절에나, 어느 시간에나 구울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밤. 결코 어느 시집을 부정하는 마음은 아니다. 세상은 시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각자의 소회이고 느낌인, 백인백색의 세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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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하기 전에도, 이 비상하게 아름다운 사진집을 보고 나서도, 쉽게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요동과 기쁨과 슬픔을 도무지 100자평 만으로는 전할 수 없어서 페이퍼의 한 쪽을 빌리고 있다. 


20대 초반, 한대수의 <멀고 먼 길>을 옆구리에 끼고 명륜동에서 길음동을 거쳐 수유리 집까지 하염없이 걸어온 어느 날이 있었다. 그때 집에는 놀러 온 이모가 가져온 길쭉한 서양배들이 식탁에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고. 내내 기억나는 인생의 풍경이다. 그리고 한대수의 전작주의자가 되었다.


2023년 만 75세가 된 한대수 님이, 1960년에서 1974년에 찍은 필름 카메라의 미인화된 필름들을 다시 인화해 세상에 내놓은 이 사진집은 전대미문의 아티스트이자 코스모폴리탄 한대수 님 인생의 거의 '에필로그' 같은 작품집이라 느껴진다.

프롤로그, 1부 내 인생의 봄: 1960년대 뉴욕, 서울, 2부 길위의 고독: 뉴욕에서 몽골까지, 3부 끝까지, 평화 : 히피의 고독, 에필로그로 구성된 사진집 어느 하나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침묵의 사진들로, 행간의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전해 주는 책이다.


사진은 찰나의 섬광으로 시간의 퇴화 속에서도 영원의 기록으로 남아 침묵의 무화(無化)할 수 없는 메세지가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사진과 글들에 사진의 장소마다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다. 과장 없는 즉문즉답이라 가슴을 매 순간 흔들어 놓는다. 시대와 시간과 삶의 압화지. 가슴을 후비고 뒤흔들어 놓은 아름다운 '삶이라는 고통'의 사진집을 보고 읽으며 인생의 진리를 만나며, 순리처럼 휘몰아치며 어쩔 줄 몰랐던 冊.

그리고 예의 그 애독자로서 이 책을 함께 하고픈 내 애독자들에게도 한시 빨리 이 충만함을 나누고 싶어 조급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깊고 기쁜 책이었다.


'서울, 1969'에는 특히 그냥 보기만 해도 꽂히는 사진들이 많았다. 여름 사람 하나 없는, 반이 그늘인 골목길에서 흰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양지쪽으로 걸어가는 노파의 사진. "그것은 고대의/ 여름 산들 바람을 찍은 사진/ 인생은 신기루".(127)

"기억의 지속이 우리를 만든다"(85)

"아직도 그대를 생각해/ 달이 스러지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때" (152)


"오직 당신 자신만을 돌본다면/ 당신은 홀로 남을 것이다" (231)


"나한테 음악은 신과의 대화다. 시간적으로는 제한 되어 있지만 영혼에게는 무한하다." "음악가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기쁨을 느낄 뿐이다." (186)


"더 이상 화내지도 말고, 남의 말을 하지도, 잘난척 하지도 말고, 똑바로 살아라." (200)


'에필로그'에 한대수 님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다 들어있다. 

"Peace &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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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47)






묵화





물 먹는 소 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48)


* 작품 출처: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민음사(1974)





/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오늘의 시인 총서 엔솔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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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

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

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 당신을 부릅니다 단

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 킥킥거리며 세

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

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

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 그러나 킥킥 당신

(65)





              시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73)






            

            이 지상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이 있고 해변 모래밭에는

아린 마늘잎이 돋아 흰 꽃은 우수수 바다를 건넌다



  환幻을 기꺼워하는 마음은 수치를 껴안고 수천 개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오오 나의 그리움은 이제 자연사

할 것이다

(125)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

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들어가는 꿈

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

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 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

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

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164)






           농담 한 송이






한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257)











농염한 과일들이 이제 때를 지나 흐물흐물해져 가고 과육의 즙이 땀을 흘리는 연휴 마무리에, 오체투지, 하듯 자신의 한 생애를 살과 피와 씨앗으로 써 내려간 허수경 詩人(1964~2018)의 <허수경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를 읽었다.


허수경 시인의 여섯 권의 詩集들 속의 詩들을, 56 명의 시인들이 고르고 저마다의 단상을 적은 이 시선집의 시들을 읽는 시간은, 생전의 시인이 그의 삶과 영육과 詩들로 차려준 '잘 차려진 밥상'을 받고 차가워진 숭늉까지 받아 마시니 배가 부르고 마음이 든든해지고 문득, 허방 같은 삶이 제법, 눈 밑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매달려만 있는 눈물같이 어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다리로 남은 길을 걸어 나갈 힘이 생긴다.


허수경 시인의 시들을 읽는 동안, 풍성했고 서러웠고 절절했고, 어느 정갈한 영혼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듯했다.

'현재라는 책장 속에 저마다의 묘옥을 지은 우리, 다시 자라기에는 미리 늙은 아가들'.

'알아볼 수 있어서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허수경 시인이 가 있을 '먼 곳'을 向 해 가을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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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상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슬픔은 KTX를 타고

횡성 상가에 간다

코로나에 걸릴까 사람들은

마스크 쓰고 숙연하게 문상을 하는데

고인의 영정은 코로나 별거냐는 듯

마스크 없이 내내 웃는다

상주와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는다

죽음을 모를 것 같은 기쁨은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다

고인이 베푸는 육개장과 머릿고기를

먹기 위해 슬픔은 마스크를 벗는다

기쁨은 말을 걸며 소주를 권한다

건배는 눈치가 보이므로

슬픔은 요령껏 자작을 한다

슬픈 표정을 짓지 못하는

기쁨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슬픔은 아직 이승에 있을 이유를 생각하며

어찌 보면 영정의 표정 같은

기쁨에게 술 한 잔을 따른다

밥과 술이 차니

슬픔은 죽음을 비우고

기쁨 몰래 마스크를 쓰고 일어나

상주에게 인사를 한다

어느새 기쁨도 같이 가자고

슬픔을 따라나선다  (83)


-  강준모 시집, <슬픔의 단어들은 죽는다>-










지난 5월 사랑하는 제자가, 지난밤 술자리에서 내년의 빛나는 계획을 발표하고 환히 웃었는데

다음날 아침 갑작스러운 부고를 들었다. 한동안 인터넷질도 못하다 가까스로 어떡하든 살기 위해 다시 이 허방이라도 문을 열었다.

그는 83년 생이었고,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살 때에도, 키가 작은 여자 알바생이 인기 상품의 바닥을 긁기 위해 반신을 구부리는 모습을 보고 가장 편하게 아이스크림을 뜰 수 있는 인기 없는 종목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많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그 재능을 재화로 바꾸기 보다 곤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싼 페이를 마다해서 업계의 염려와 원성을 받았다.

날마다 단톡방에 글 몇 편을 올렸는데, 글도 없고 카톡 응답도 없어 지인들이 연락을 했더니,

그의 아이폰이 비번이 걸려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파트너를 통한 사무실 그의 컴에 존재한 사람들에게 부음이 전해져 발인 전 날, 새벽까지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서로 다정한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000은 40년 동안 자기가 할 일을 다하고 떠났으리라 생각합니다."라는 거룩한 장례미사의 강론이 모두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카톨릭에서는 사람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 '선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무리 하다'라는 말의 준말이라 한다.

라틴어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세례명의 너를, 이밤도 우리 모두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안녕, 꼭 다시 만나자.

Adio Que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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