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사과





안동 다녀오는 길에 문경에 들러

가을빛 환한 사과밭에 간 적 있었다.



맛보기로 내놓은 두어 조각 맛보고 나서

주인의 턱 허락받고

벌레 먹었나 따로 소쿠리에 담긴

못생긴 사과 둘 가운데 하나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지.

입에 물린 사과,

입꼬리에 쥐가 날 만큼 맛이 진했어.

베어 문 자국을 보며 생각했지.

사과들이 모두 종이옷 입고 매달려 있었는데

이놈은 어떻게 벌레 먹었을까?

주인 쪽을 봤지만

그는 다른 고객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어.

혹시 이 세상에서 진짜 맛 들려면

종이옷 속으로 벌레를 불러들일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제 몸 덜어내고

벌레 먹은 과일 소쿠리로 들어가야 하는가?

초가을 볕이 너무 따가웠다.

상자 하나를 차에 실었다.




_황동규 시집. <봄비를 맞다> 中






시인의 눈은 참 환하다. 히아신스의 開花나, 봉지를 뚫고 들어선 벌레 먹은 단사과의 짜릿한 단맛같이. 1968년 삼인 시집 '평균율' 동인, 황동규 시인, 마종기 시인과 함께 했던 김영태 시인의 표지 컷이 이 詩集을 더욱 다정한 얼굴로 맞이한다.









"나는 나에게 늘 반듯하고 실한 사과를 먼저 꺼내어 깎아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삭, 달큰한 사과 향이 퍼졌다."



사과 한 상자를 열면, 싱싱한 사과, 평균치의 사과, 멍든 사과 等이 섞여있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과는 공장의 제품이 아니라, 제각각의 사정이 발생하고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할머니께서 항상 상한 것을 먼저 드시고 손녀에게는 가장 좋은 사과를 주신 기억을 되살린다.



나같은 경우에는, 우선 상한 사과가 다른 사과까지 상하게 할까봐 먼저 따로 골라 놓고, 사과잼을 하든 아무 생각없이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그 사과맛을 본 뒤에, 만족을 하면 제일 예쁜 사과들을 먼저 골라 예쁜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사과'는 '사과'다. 사과는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사람의 삶도 '사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님이 반갑게 오시는 날, 예산사과와인 추사 40도 500mm를 선물 받아 그냥 반가운 마음에, 사과 이야기를 마니또 친구에게 보내는 쪽지처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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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1일(금)




이곳은 나의 성이다. 착한 물고기들이 조용하게 살고 있고, 작은 식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의 리듬대로 푸른 잎들을

돌돌돌 펼치고 있는 곳. 



























오늘도 성게알 단새우 감태 삼합과 스시를, '처음처럼'을 살짝 연한 설탕물처럼 하염없이 마시는 그저 그런 날.

김미옥 님의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재야의 고수란 명성답게 단단하고 야무진 견과류처럼 가차없이 날리는 땅콩같이 고소하고 유용한 책이고,

'살 것만 같던 마음'은 지독한 生에 對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反語法이며, 강봉희 님의 책은, 우리 모두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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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에서나 한라산 기슭에서나




서로의 뒤를 봐주느라 그 일생이 다 간다.  (13)








그리움의 방식






꿀벌의 침은 내장과 연결되어 있다



목숨을 거는 일이라 함부로 쓰지 않는다



당신을 지켜야 할 때

딱 한 번 쓸 뿐이다.  (50)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에서














살다 보면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라는 일이, 어느 정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말이라 생각 든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어떡하든 한 끼를 먹는 일이 언덕 하나를 넘는 일이 돼 듯, 그게 인생이라 여겨지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라는 어느 시집의 구절과, 그 '순한' 두부를 시 제목으로 지은 詩가 너무 멋지고 광활하게 씌어 나의 빈곤한 문해력에 난감하다가, 마지막 연의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100쪽)"'라는 뭔가 알 듯 말 듯 해, 서둘러 다행히 냉장고에 잠자고 있던 두부로 '두부김치'를 만들어 소주나 마시고, 또 밤새 밥벌이를 해야겠다.

두부는 어느 계절에나, 어느 시간에나 구울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밤. 결코 어느 시집을 부정하는 마음은 아니다. 세상은 시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각자의 소회이고 느낌인, 백인백색의 세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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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하기 전에도, 이 비상하게 아름다운 사진집을 보고 나서도, 쉽게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요동과 기쁨과 슬픔을 도무지 100자평 만으로는 전할 수 없어서 페이퍼의 한 쪽을 빌리고 있다. 


20대 초반, 한대수의 <멀고 먼 길>을 옆구리에 끼고 명륜동에서 길음동을 거쳐 수유리 집까지 하염없이 걸어온 어느 날이 있었다. 그때 집에는 놀러 온 이모가 가져온 길쭉한 서양배들이 식탁에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고. 내내 기억나는 인생의 풍경이다. 그리고 한대수의 전작주의자가 되었다.


2023년 만 75세가 된 한대수 님이, 1960년에서 1974년에 찍은 필름 카메라의 미인화된 필름들을 다시 인화해 세상에 내놓은 이 사진집은 전대미문의 아티스트이자 코스모폴리탄 한대수 님 인생의 거의 '에필로그' 같은 작품집이라 느껴진다.

프롤로그, 1부 내 인생의 봄: 1960년대 뉴욕, 서울, 2부 길위의 고독: 뉴욕에서 몽골까지, 3부 끝까지, 평화 : 히피의 고독, 에필로그로 구성된 사진집 어느 하나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침묵의 사진들로, 행간의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전해 주는 책이다.


사진은 찰나의 섬광으로 시간의 퇴화 속에서도 영원의 기록으로 남아 침묵의 무화(無化)할 수 없는 메세지가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사진과 글들에 사진의 장소마다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다. 과장 없는 즉문즉답이라 가슴을 매 순간 흔들어 놓는다. 시대와 시간과 삶의 압화지. 가슴을 후비고 뒤흔들어 놓은 아름다운 '삶이라는 고통'의 사진집을 보고 읽으며 인생의 진리를 만나며, 순리처럼 휘몰아치며 어쩔 줄 몰랐던 冊.

그리고 예의 그 애독자로서 이 책을 함께 하고픈 내 애독자들에게도 한시 빨리 이 충만함을 나누고 싶어 조급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깊고 기쁜 책이었다.


'서울, 1969'에는 특히 그냥 보기만 해도 꽂히는 사진들이 많았다. 여름 사람 하나 없는, 반이 그늘인 골목길에서 흰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양지쪽으로 걸어가는 노파의 사진. "그것은 고대의/ 여름 산들 바람을 찍은 사진/ 인생은 신기루".(127)

"기억의 지속이 우리를 만든다"(85)

"아직도 그대를 생각해/ 달이 스러지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때" (152)


"오직 당신 자신만을 돌본다면/ 당신은 홀로 남을 것이다" (231)


"나한테 음악은 신과의 대화다. 시간적으로는 제한 되어 있지만 영혼에게는 무한하다." "음악가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기쁨을 느낄 뿐이다." (186)


"더 이상 화내지도 말고, 남의 말을 하지도, 잘난척 하지도 말고, 똑바로 살아라." (200)


'에필로그'에 한대수 님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다 들어있다. 

"Peace &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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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47)






묵화





물 먹는 소 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48)


* 작품 출처: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민음사(1974)





/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오늘의 시인 총서 엔솔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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