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부인은 놀랍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문득 생각난 듯이 잠시 후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애 이름을 지어 준 거지요?"
하급 관리는 몸을 반듯이 세우며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ㅍ말했다. "내가 지어줬소."
"당신이라고요, 범블 씨!"
"그렇소, 맨 부인. 우린 주워 온 아이들에게 알파벳 순서대로 이름을 지어 주오. 이 애 직전 아이가 자라서 스워블이라고 이름을 지었소. 그러니 다음은 T자, 따라서 트위스트라고그 애 이름을 지어 준 거요. 다음에 오는 아이는 U자인 언원이되고, 그다음은 V자인 빌킨스가 될 거요. 이런 식으로 난 알파벳 끝까지 이름을 다 준비해 놓았다오. 그러다가 Z까지 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요."
"어머나, 당신은 정말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신 분이군요, 범블 씨!" 맨 부인은 말했다. - P31

이 말은 올리버에게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버는 어린 나이임에도 떠나가는 것이 몹시 섭섭하다는 시늉을 할 만큼은 눈치가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이게 만드는 것은 이 아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울고 싶을 경우 방금 전까지 당한 학대와 굶주림은 훌륭한 도우미가 되는 법, 올리버는 실로 아주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맨 부인은 올리버를 수백 번 안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올리버에게 포옹보다 훨씬 더 필요한 것, 즉 버터 바른 빵까지한 조각 안겨 주었으니 구빈원에 도착했을 때 너무 배고픈 모습을 보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뒤 올리버는 한 손에 빵조각을 들고 머리엔 갈색 천으로 된 조그만 교구 모자를 쓴 채 범블 씨에게 이끌려, 암울한 유년기를 밝혀 주는 친절한 말이나 시선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 비참한 집을 떠나갔다. 하지만 보육원 문이 등 뒤로 닫혔을 때 올리버는 어린애다운 복받치는 슬픔을 터뜨리고 말았다. 뒤에 남겨 두고 가는 비참한 어린 친구들은 비록 불쌍하기 그지없는 가련한 아이들이었지만 이제껏 그가 알았던 유일한 벗들이었다. 광막한 세상에 이제 나 혼자뿐이라는 고독감이 아이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 P33

다음 날 아침 흰 조끼를 입은 신사가 구빈원 대문을 두드리다가 공고문을 읽으며 말했다. "저놈이 교수형을 당하게 될 거라는 믿음보다 더한 확신은 내 평생 결코 없었다고."
이 흰 조끼 신사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보여 줄 작정이니, 올리버 트위스트의 인생이 그런 끔찍한 파국을 맞을지 어떨지에 대한 암시를 필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려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이야기의 재미(재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지만)를 훼손하는 노릇이 되고 말 것이다. - P43

음식물이 배 속에서 쓰디쓴 독으로 바뀌고 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심장은 쇳덩어리인 어떤 살찐 철학자님께서 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이 산해진미 요리를 올리버 트위스트가 허겁지겁 집어삼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굶주림의 화신처럼 사납게 달려들어 음식 쪼가리를 정신없이 뜯어 먹는올리버의 이 끔찍한 식욕을 그 철학자님이 직접 눈으로 볼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철학자님이 이와 똑같은 종류의 식사를 올리버와 똑같이 맛있게 먹어 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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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내의 갈등과 분열…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며 독립운 동가들이 선택한 이 명제는 아마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일 것이다. 3•1운동의 배경 중 하나가 고종 황제 사망임 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후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지난 100년간 단 한 번도 의심되거나 부인된 적이 없고, 여러 번의 개헌과 군사 쿠데타도 이 명제는 바꾸지 못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1870년까지 80년 동안 프랑스가 공 화국이었던 기간이 단 16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 P50

1919년 3월 레닌은 코민테른을 조직하면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연계하는 정책을 발표하게 된다. 코민테른 (Comintern)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자다. 한인사회당을 만든 이동휘는 박진순 등 3인을 코민테른에 파견하는 동시에, 심복 김립을 데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국무총리를 맡게 된다.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박진순 일행은 내전 중인 시베리아를 120여 일에 걸쳐 목숨 걸고 통과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해, 코민테른에 가입한 후 레닌에게 선전비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한인사회당의 활동은 중국공산당이나 일본공산당보다 앞선 것이었고, 후에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창립 과정을 한인사회당이 지원했다. - P53

이 무렵, 하와이 교포 출신 20대 초반의 황진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안창호를 모시고 여운형 과 함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황진남의 상관은 외무 차장을 맡았던 현순 목사였다.1 1921년 5월 황진 남은 현순 목사와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모임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임시정부의 분 열은 극에 달했고, 그는 미국에 가려고 유럽을 경유하던 중 독일에 남아 베를린대학에서 중단된 학업을 이어가기로 한다. - P55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에 분노한 이동휘와 박진순은 언어 천재 이극로를 데리고 내전 중인 시베리아를 피해 인도양, 수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3개월에 걸친 여정 끝 에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다. 할 말이 없게 된 레닌은 11월 코민테른 한국 위원회를 만들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코민테른에서 상해파의 권위가 회복되었지만, 두 파의 계속되는 대립을 중재하던 레닌은 결국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에 해산을 명령하고 남은 금화 140만 루블의 지원을 중지 한다. 역사는 이를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 P57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 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a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 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학생 신분이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어 강좌의 정식 강사로 보수를 받기 위해 당국을 설득했는데, 그 문서도 발견되었다. 여기서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이 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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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못했지?
곽재구 지음, 펀그린 그림 / 보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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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시인의 다정다감한 동시와 펀그린 작가의 알록달록한 그림이 잘 어우러져 마치 아이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 즐거운 웃음이 나는 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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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라기에는 과학 얘기는 아직 별로 없고 독립운동가들의 흥미로운 뒷얘기.
책에 언급된 하와이 이민과 인하대의 관계는 몇 년 전 월미도 여행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알게 됨.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상투 를 붙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일단 싸움부터 말리고 사연을 물었더니, 인삼을 팔던 한국 상인들 사이의 구역 다툼이 었다.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부가 아니라 즉각적인 의식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학을 포 l기하고 대대적인 계몽 활동과 한인촌 건설에 앞장서고 신문 을 발행하며 교포들의 단합을 이끌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한인 공동체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 P34

행복하게 지내던 서재필에게 충격을 준 사건 역시 3•1운동이었다. 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모두 한국 민중이 덜 깨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1 운동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의지에 감동했다. 서재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30년 전에 내가 인천항을 떠날 때에 한인들이 내 뒤를 받드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으로 알았었 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한인이 죽지 않고 산 백성으로 꼭 믿었습니다. 언제든지 그런 백성이 자유 독립하고야 말 줄로 참말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연설도 하며 선전 사업에 활동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 P43

서재필은 사재를 털어 필라델피아에 교포들을 모아 독립 행사를 열고, 다시 한국 문제에 앞장선다.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은 일제의 압박과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둘째 딸 뮤리엘은 서재필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적극 도왔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결과, 한때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는 결국 60세가 되던 1924년에 파산한다. 이런 와중에 서재필은 62세에 다시 의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심지어 64세 때는 집을 저당 잡혀가며 의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조선에 전염병이 자주 일어남을 걱 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연구하며 학술지에 몇 편의 논문도 출판했다.
192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동업하던 유일한 박사가 귀국한다.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미술을 전공한 뮤리엘은 유일 한의 성 버들 유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조각해 선물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 조각에 새겨진 모양을 상표로 한국에서 의약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유한양행이다. - P44

1919년 응우옌은 파리에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rem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 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하고 베트남 독립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8년, 호치민의 파리강화회의 활동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 l거로 삼는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당시 프랑스 경찰은 기록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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