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어는 자선 학교 학생이긴 했지만 구빈원 고아는 아니었다. 또한 사생아도 아니었으니, 혈통과 출생의 근원을 분명하게 확인할 부모가 바로 근처에 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세탁부였고, 아버지는 주정뱅이 퇴역 군인으로 한쪽 다리가 나무 의족이었으며 하루당 2.5펜스에 개미 눈곱만큼을 더한 금액을 연금으로 받았다. 동네 가게 점원 아이들은 오래전부터길거리에서 노어를 만나면 ‘가죽 바지‘ 또는 ‘자선 학교‘ 같은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그를 일컫는 습관이 있었는데, 노어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걸 견뎌 왔다. 하지만 이제 운명의 여신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조차도 손가락질하며 경멸할 수 있는 이름 없는 고아 하나를 그의 앞에 던져 주었으니, 그는 자기가 받은 모욕을 이자까지 얹어서 이 고아에게 앙갚음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흥미로운 사색거리를제공한다. 즉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온화하기 그지없는 심성이 높디높으신 귀족 나리와 천하디 천한 - P76

자선 학교 학생에게서 얼마나 똑같이 공평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 P77

"그래, 올리버." 함께 집으로 걸어가며 싸워베리가 말했다.
"오늘 일을 본 소감이 어떠냐?"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주인님, 감사합니다." 올리버는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주 좋지는 않지만요, 주인님."
"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다, 올리버." 싸워베리는 말했다. "일단 익숙해지기만 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올리버는 마음속으로 싸워베리 씨가 이 일에 익숙해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어땠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는 게 좋겠다 생각했고, 그래서 그냥 가게로 돌아가면서 그날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 P88

"세상에 이런!" 싸워베리 부인은 부엌 천장을 경건하게 올려다보며 외치듯 말했다. "이게 다 너그럽게 잘 대해 줘서 생긴 일이라니!"
싸워베리 부인이 올리버에게 베풀었다는 너그러운 대접이란 곧 아무도 먹지 않을 온갖 더러운 음식물 찌꺼기들을 아낌없이 던져 준 것뿐이었다. 따라서 부인이 범블 씨의 엄중한 비난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엄청난 자기희생과온순함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인이 억울하지 않도록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을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피버 - P104

이날 이후로 올리버는 혼자 남는 경우가 거의 없이 거의 항상 다른 두 소년들을 상대하며 그들과 어울려 지내야 했는데, 이들 두 소년은 전에 유태인과 하던 놀이를 매일 반복했다. 이게 그들의 솜씨를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올리버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는지는 페이긴만이 알 일이었다. 유태인 영감은 간혹 자기가 젊은 시절에 저지른 강도질 이야기를아이들에게 해 주었는데,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어찌나 많은지 올리버는 그러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요컨대 교활한 유태인 영감은 올리버를 올가미에다 걸어둔 것이었다. 아이를 외롭고 우울한 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황량한 그곳에서 혼자 슬픈 생각들을 벗하며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사람이든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만든 다음, 이제 아이의 영혼에 시커먼 독을 서서히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영혼을 영원히 시커멓게 물들여 놓을 심산인 것이다. - P267

돌이 깔린 길바닥은 진흙탕이고 거리는 시커먼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차갑고 끈적끈적했다. 유태인 영감 같은 존재가 돌아다니기에 딱알맞은 밤 같았다. 건물들의 담벼락이나 현관의 그늘진 곳에몸을 숨겨 가며 은밀하게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이 가증스러운 영감은 흡사 자신이 지나는 그 진흙탕과 어둠에서 태어난어떤 흉측한 파충류 같았다. 그래서 밤에 끼닛거리로 영양가높은 고기 찌꺼기 따위를 뒤지러 기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 P269

"어떻게 하든 상관 마시오!" 싸익스가 대답했다. "그저 꼬마나 구해 오시오. 덩치가 큰 놈은 안 되오. 젠장!" 싸익스 씨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굴뚝 청소부 네드의 그 꼬맹이 아들놈이면 딱 좋은데! 네드는 일부러 그 애를 못 자라게 만들어서 건당 얼마씩 받고 빌려줬지. 하지만 네드가 어쩌다 체포된뒤에 비행 청소년 선도 협회란 게 끼어들더니 그 돈 잘 버는일을 애가 못 하게 해 버렸소. 그러곤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서는 얼마 후 도제로 들어가게 한 거요. 게다가 그들의 그런 행태는 계속되고 있소." 싸익스 씨는 자신이 당한 손해를생각하고 분노가 치밀어 말했다. "그들의 그런 행태가 계속되고 있단 말이오. 그들이 자금만 충분하면 (다행히 하늘의 섭리로 충분하지 않지만) 일이 년 안에 우리 업계에는 일할 애가 여섯명도 남지 않을 거요." - P276

"난 이불을 걷어찼어." 자일스 씨는 식탁보를 휙 내던지고 요리사와 하녀를 매우 심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곤 침대에서 살며시 나와 벗어 놓은......."
"숙녀들 앞이오, 자일스 씨." 땜장이가 중얼거렸다.
"......신발을 신은 거요, 선생." 자일스 씨는 땜장이를 돌아보고 신발이라는 단어를 아주 크게 강조하면서 말했다. "그러곤 언제나 식기 바구니와 함께 내 방으로 들고 올라가는 장전된 권총을 집어 든 다음, 살금살금 걸어 브리틀스의 방으로 갔지. 그리고 그를 깨운 뒤에 이렇게 말했지. ‘브리틀스, 놀라지 말게!" - P4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1년 도쿄.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려는 움직임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고, 그중 단연 주목받은 것은 스포츠였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 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 P148

당시 조선체육회의 가장 큰 이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조선인의 선발이었다. 이때 일장기를 달고 나가야 할지 망설이던 손기정은 여운형에게 조언을 구했고, 여운형은 반드시 참가하라고 격려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처분을 받고 여러 직원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은 뒤 겨우 속간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은 올림픽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조선체육회는 결국 강제 해산되었다. - P150

손정도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김형직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손 목사는 부부가 사망하자 그들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일성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손 목사의 자녀인 손원일, 손원태, 손인실을 만나게 된다. 특히 또래인 손원태, 손인실과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해방 후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에게 맞섰다. 친일파로 공격받아 해방 정국에 힘든 삶을 살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을 거두어준 사람도 손원일 제독이다.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해 정전 협정문을 한글 타자기로 작성하게 만든 사람 역시 손 제독이다.
나중에 김일성은 1970년대 적십자회담에서 남한 대표단에 손인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인실, 원태 두 사람의 소식을 찾던 김일성은 마침내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 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상중임에도 한 달 뒤 8월, 아버지를 대신해 손원태의 80회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열었다. 같은 해,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 사장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 P1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비노동
우유홍수작전
신국제노동분업
섹스관광산업

4장 가정주부화의 국제화: 여성과 새로운 국제노동분업

신국제노동분업의 전략은 두 가지 전제조건이 만족되어야 실행될 수 있다. 1. 공장과 농업비즈니스와 수출위주 기업의 이주는 생산비용을 가능한 낮출 수 있도록 저개발 국가에서 가장 값싸고, 가장 순하 - P251

고, 가장 다루기 쉬운 노동자를 찾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2. 이기업들은 제3세계에서 생산된 모든 품목들을 구매할 소비자를 부유한 국가에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전략 모두에서 가장중요한 역할은 여성을 동원하는 것이다. - P252

이는 오늘날 제3세계의 노동력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성의 노동을 (예를 들어 ‘비공식 부문까지) 모두 포괄하는 수치를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오늘날 전세계 노동력의 2/3가 여성이라고 하는 증거는 충분히 갖고 있다(UN Conference on Women, Copenhagen 1980).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자유생산지대에서, 노동력의 70%가 여성이다. 프레벨과 그의 동료들이 찾아낸 것처럼, 여성 대다수는 젊은 여성(14~24세)이다. 이들은 조립라인의 실제 생산과정에서 일하며, 이 산업에 고용된 소수 남성은 대부분 관리자이다(Fröbel et al, 1977:529~30).
자유생산지대의 젊은 여성 숫자에 수출용 기업농, 비공식부문, 가정과 가내공업에서 일하는 여성을 모두 합치면 제3세계 여성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부유한 국가의 시장용 상품 생산에 관여하고 있음을보게 된다. 우리는 이 숫자에 아프리카, 아시아 농업에서 생계를 위해, 때로는 환금작물 생산을 위해, 그리고 또 대농장에서 허리가 끊어질 정도의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수억 명의 여성도 포함해야 한다. - P256

말레이시아에 있는 미국 반도체 회사인 인텔의 인사담당관은 이렇게말한다. ‘우리가 소녀들을 고용하는 것은 이들이 에너지가 좀 덜 들고,
좀 더 규율이 있으며, 다루기 쉽기 때문이다‘(Grossman, 1979; 2). 제3세계투자의 아이티 지부는 독일 투자자를 유인하기 위해 아름다운아이티 여성을 보여주는 홍보물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넣었다. ‘당신의 독일 마르크를 불려줄 더 많은 노동력이 여기 있다. 미화1달러만 있으면, 여성은 당신을 위해 8시간 동안 즐겁게 일할 것이다.
그녀의 수백 명의 친구도 그렇게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Fröbel et al, 1977:528, 영어번역은 저자).
이 광고에는 성차별주의가 분명하게 깔려 있다. 정부가 포주처럼 젊은 여성을 외국 투자자에게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성매매는 관광산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제3세계 국가에서 기업운영계획의 일부이기도 하다. - P257

이런 연구는 제3세계의 여성, 특히 농촌 여성이 근대화 속에서 점점 더, 말 그대로 부양자와 가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현실이 그들의 존재에 대한 법적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규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여전히 여성은 의존적인 가정주부로, 그들의 남편은 부양자이자 가장으로 규정되었다. 반대로, 고전적 자본주의 커플인 ‘자유로운‘ 임금노동자 혹은 ‘자유로운 생산수단 소유자와그에게 의존하는 가정주부가 등장할만한 물질적 기반이 제3세계 국가에서 약화될수록, 실제적 현실은 위의 모델이 선전되고 보편화되는가운데 왜곡되었다. 개발 프로그램과 계획이 세워진 것은 사실 구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중심부였다. 이 유명한 커플에서 전형적으로 표현된 자본주의적 성별노동분업은 전략적 원리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소득유발활동을 하는 여성은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면서도 임금노동자로 규정되지 못하고 제대로 온전한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다. 또한 토지개혁 과정에서 여성은 토지에 대해 독립적이고 정당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생산적인 재산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다.
협동조합에서도 남성 멤버에 부가된 존재로 여겨졌고, 독립적인 멤버가 될 수 없었다(v. Werlhof, 1983). - P261

제3세계 대다수 여성이 ‘진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을수록, 가정주부 이미지를 ‘근대적이고 선진적인‘ 여성, ‘좋은‘ 여성이라고 보편화하는 것이 모든 미디어를 통해 널리 선전되면서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오늘날 더욱 커지고 있다. - P262

우리는 세계 여성을 노동자와 가정주부로 나누는 이런 모순적인 전략이 여성의 해방에 기여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전략은 제3세계 여성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서구 여성/가정주부에게는 값싼 소비재를 제공한다고 주장되곤 한다. 그렇다면 양쪽 모두 만족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이 전략의 결과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른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쪽에서는 한 세트의 여성이 노예화되고 착취당하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른 쪽에서는 또 한 세트의 여성이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노예화를 경험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결과이자 조건이 된다. - P264

토지없고 가난한 인도 여성의 노동과 우유가 빨려 나가가는 이런 과정, 오웰식의 신어 전통에서 (‘흥건하게 되는‘ 것은 도시이고, ‘진액이 빨려나가는 것‘은 촌락과 여성이다) ‘우유홍수작전‘이라고 불리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인도에서 자본주의 우유 생산에 연루되어 있는 가난한 여성에 대한 극도의 착취와 유럽 공공시장에서 우유의 과대생산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짧게라도 살펴보아야 온전한 분석이 될수 있을 것이다. 수백 가지의 치즈, 요구르트, 우유제품, 크림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 혹은 프랑스 가정주부가 아바마와 같은 여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인 서구 소비자-가정주부는 ‘우유홍수작전‘ 이전에는 인도의 마을에서 생산된 우유가 그 마을에서도 소비되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이제 인도산 우유가 도시로 수출된다. 서구의 소비자-가정주부는 아바마에 대한 착취가 유럽 공공시장에서 바다처럼 널려 있는 우유와 산처럼 쌓여 있는 버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유홍수작전‘이 시작된 이유이다. - P285

신국제노동분업이 신가부장적 혹은 성차별적 노동분업과 결합한 것을 가장 뻔뻔하게 보여주는 것이 섹스관광산업이다. 제3세계로, 특히 아시아로의 관광업은 1970년대에 크게 성장했고, 국제적인 구호기구들이 하는 개발전략으로 선전되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사실이 산업을 처음 계획하고 지원한 것은 세계은행, IMF, 그리고 미국 국제개발처였다. 1960~1979년 사이에, 동남아시아에 갔던 관광객은 25배 증가했다. 주로 서구와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이 지역의 국가들은 1979년에 40억 달러 이상의 관광 소득을 올렸다(Wood, South-East Asia Chronicle, no. 78).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는 여행업을 주된 수출산업의 하나로 만들어 왔으며, 다른 제3세계 국가들, 예를 들어 케냐, 튀니지, 멕시코, 카리브제도의 국가들, 스리랑카, 페루 등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 P296

보통의 독일 남성은, 비록 실직자라고 하더라도 카탈로그의 아시아 여성 중 한 명을 주문할 수 있다. 만족하면 계속 옆에 둘 수 있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반송하거나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 등에있는 매음굴로 보낼 수 있다. 함부르크 부근의 한 마을에서 실직한 한석공이 9천마르크를 주고 두 명의 아시아 여성을 주문했다. 그는 이투자로 큰돈을 벌었다. 이 여성들을 강제로 성매매를 시켜서 돈을 번것이다. 루르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한 볼링 클럽에서 아시아 여성을한명 주문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한 명의 남성과 결혼했지만, 실제로는 그 클럽의 남성 모두에게 성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많은 독일남성이 태국 혹은 필리핀에서 직접 결혼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방콕의 독일 대사는 방콕에 관광 온 많은 독일 남성이 태국인 여성과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결혼의 목적이 여성을 독일로 데려가 강제로 성매매를 시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Ohse, 1981). 이 발언에서 놀라운 것은 타이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독일 남성에게 큰 문제를만들어줄 생각이 방콕의 대사에게는 분명히 없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독일 남성과 결혼한 태국 여성이 비자를 받는 것에는 어떤 큰 어려움도 없다. 이는 독일 여성이 정치적 망명을 위해 혹은 일자리를 위해 혹은 독일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독일에 왔을아시아나 터키 혹은 아프리카 남성과 결혼하게 될 때 따라오는 법규와 관행과 크게 대조된다. 일단 이 결혼은 가짜 결혼일 것이라고 간주된다. 이 커플은 오래 동안 조사를 받아야 하고, 남자의 체류증과 비자가 취소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는 독일에서 이국 남자를 노동자로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이국 여성은 서구 국가들에서 성장가도를 달리는 부문 중 하나인 성산업에서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 P30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5-24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엇 벌써 4장 가셨군요.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슝 =3=3=3=3

햇살과함께 2024-05-24 23:38   좋아요 0 | URL
이제 주말이 한번 남았네요 저도 부지런히 읽어야 겠어요!!
 

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 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 P128

1931년 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성악가 채선엽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항공우편이 도착한다. 발신지는 미국 미시간대학.

저는 미시건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이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야구 스타 최규남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P130

최규남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무렵인 1928년, 서울에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카페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현앨리스. 황진남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 활동을 이끌던 현순 목사의 딸인 그녀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 상하이와 서울을 넘나들었다. 현앨리스는 남편과 이혼한 뒤, 영화감독 이경손과 함께 카페 ‘카카듀‘를 열었다. 독일인 마리 앙투아네트 존타크(Matie Antoinete Sontag)가 서울에 ‘손탁 호텔(Sontag Hotel)‘을 세워 커피를 팔기 시작한 이후, ‘카카‘는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카페 였다.
카카듀라는 이름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cler)가 1899년에 쓴 희곡 〈초록 앵무새(Der grine kakadu)》에서 따왔다. 슈니출러는 프랑스 좌파들이 모이던 가 상의 카페 카카듀를 무대로 1789년 바스티유가 무너지던 그 날을 다룬다. 슈니출러의 독일어 희곡을 읽은 이경손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카페 이름을 카카듀라고 지었다. - P135

하지만 현앨리스는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다. 미국은 그녀가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교류한다고 추방했고, 북한은 미군이던 그녀와의 친분을 구실로 박헌영을 미국 간첩으로 몰았다.
체코에 남은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은 의사가 되어 체코 여인과 결혼하지만, 공산당의 감시를 견디다 못해 1963년 자살했다. 현순 목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그의 딸 현앨리스의 이야기는 정병준 교수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2015년)에서야 다시 조명된다. 현순 목사의 아들이자 현앨리스의 동생이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출가로 활동하던 현피터의 이야기는 연극 〈에어컨 없는 방> (2017년)에서 다루어졌고, 정웰링턴의 이야기는 최근 정지돈 작가의 《모 든 것은 영원했다》(2020년)로 재현되었다. - P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5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역사에서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당시 조선 언론은 도쿄 교민들의 피해를 취재하기도 하고, 9월 27일 자 (동아일보》에는 상대성이론의 스타였던 도쿄제국대학 유학생 최윤식이 무사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우장춘의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무렵,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산하 농업시험장에 재직 중이던 우장 춘은 일본인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한때 우장춘은 어느 변호사의 아이들 과외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부인이 우장춘의 사람됨을 보고 교사 생활을 하던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한 것이다. 이듬해 26세의 우장춘이 22세의 일본인 고하루와 결혼했다.
아버지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암살되었을 때 우장춘은 다섯 살이었다. 한동안 그는 방황했고, 보육 시설에 맡겨지기도 했다.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1916년 도쿄제국 대학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늘 아버지는 조선 혁명가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본인 어머니에게 자란 그는 혼란스러웠다. - P114

한편,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도쿄가 초토화되었지만 ‘제국 호텔‘만은 멀쩡히 살아남으며, 호텔을 설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명성이 높아진다. 이 호텔 건축을 위해 일본에 방문한 라이트는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의 별채에 초청받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바닥이 따뜻했다. 이 별채는 경복궁의 자선당을 뜯어 가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감명받은 라이트는 한국 전통의 온돌 개념을 제국 호텔에 넣었다. 온돌은 데워진 공기는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 는 가라앉는 중력 법칙을 이용한 것이다. 서양의 라디에이터 와 다른 이 바닥 난방 방식을 그는 ‘Gravity Heat(중력 난방)‘라 고 불렀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좀 더 발전된 개념의 온돌을 연구해 1937년 제이콥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2019년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오쿠라가 뜯어 간 경복궁 자선당은 간토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남아 있던 기단은 정원석 등으로 쓰이다가 여러 사람의 반환 노력으로 1995년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다. - P119

박문사 건축을 위해 역대 임금의 어진이 모셔진 경복궁의 선원전이 뜯겨 오고, 광화문을 해체한 석재들이 쓰이고, 원구단 일부가 뜯겨 왔다. 박문사의 정문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뜯겨 왔다. 이 공사는 경복궁 자선당을 일본으로 뜯어 간 오쿠라쿠미토목이 맡았다.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를 참배하고 여기서 이토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죄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준생은 각종 친일 행사에 대대적으로 동원된다. 안중근의 딸 안현생도 1941년 박문사를 참배하고 각종 친일 행사에 동원되었다. 격분한 김구는 안준생의 암살 명령을 내렸다. - P120

그는 더 나아가 한국어를 표현하는 한글이 왜 과학적인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한다. 한글의 원리는 자음-모음-받침으 로 이어지는 체계가 하나의 ‘실러(syllable, 음절)‘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결국 한글 과학화의 완성이 이를 체계화하는 맞춤법 통일이라는 점으로 이어갔다. 영어를 배워야 했던 미주 동포들은 영어 표기에서 실러블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극로는 ‘실러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근본적으로 음절 구조로 되어 있는 한글 표기가 얼마나 과학적인지 설명한 것이고, 동포들은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기에 그의 강연에 열광했다. - P124

그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로, 영화 초반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다.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