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배를 받은 지 30년이 다 돼 가면서 사람들은 어느덧 그 사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던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 중에도 친일로 돌아선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임시정부도 역할이나 활약이 지지부진한 채 중국 땅을 떠돌고 있었다. 특히 2천만 조선인들의 우상이며 지도자였던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은 충격과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 P199

"준페이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주인 아가씨냐?"
할머니의 느닷없는 질문에 준페이는 얼굴이 시뻘게져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우리 집 고양이도 알겠던걸.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는 법이라 하지 않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숨길 수 없는 두 가지를 다 가졌네요."
준페이가 한숨을 쉬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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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태양꽃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6
한강 동화,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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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도 답해주지 못하고 나도 답할 수 없는 내 정체성. 태양꽃, 그런 거창한 꽃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풀꽃이어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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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낙천적인 아이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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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주인공의 이름은 원소윤이다. 에세이와 소설의 모호한 공간 속에서 외로움과 그리움과 사랑과 모순을 말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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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을 듣자 하니 윤지는 대학 입학 후, 여러 사람과 다양한 형태의 만남을 가졌다고 했다. 자신에게 그런 만남은 어렵지 않고 단순히 따졌을 때 얻는 것도 많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는 섹스가 되질 않아 섹스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는데 애인은 그걸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다였다. 그래서 혹은 그것과 무관하게 내게는 윤지의 말이 참 아득하게 느껴졌다. - P141

벌러덩 누우니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옷걸이에 걸어 놓은 바나나였다. 냉장고에 두었더니 누군가 훔쳐 먹기에 방으로 모셔 온 것이었다. 바나나를 어딘가에 걸어 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바나나가 착각한다나. ‘나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착각한다나. 그렇게 따지면 마침내 땅에 떨어진 바나나는 진실을 깨닫는다는 건가. 깨닫긴 뭘 깨달아 깨닫는다고 해도 참 별거 아닌내용일 테다. 그저 기가 막혔다. - P152

사실 유람선을 타기 전엔 ‘아, 좀슬플 것 같은데..... 걱정했다.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그의 산문집에서 이렇게 서술한 바 있기에.
"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레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 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 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나는 뛰어내리고 싶지 않았고, 견딜 수 없이 슬프지도 않았다.
일단 ‘선셋크루즈‘는 그렇게 막 호화롭지 않았고 고작 한시간가량 운항했다. 게다가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처럼현대적 실존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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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무섭다 해도 제 자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네. 제 오른눈은용이 되고 왼눈은 호랑이가 되고 혓바닥 밑에는 도끼를 감춰두었고팔목을 굽히면 활이 되네. 처음 생각은 천진난만한 젖먹이 같다가도조금만 비뚤어지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일세. 만약 경계하지 않으면 제가 저를 씹어 먹고 긁어 먹고 찔러 죽이고 쳐 죽일 것일세. 그래서 성인이 제 욕심을 절제해서 예절을 따르게 하고 간사한 생각을 막아서 진실한 마음으로 일관하게 한 것이니, 이렇듯 성인은 스스로를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 P79

옛날 헝가가 밤에 검술을 토론할 적에는 개섭이 골을 내며 눈을 흘겼지만, 고점리가 현악기를 타는 데 이르러서는 사람이 있는 것도 상관없이 서로 붙들고 울었다. 즐거움이 지극하였던 것이나 다시 뒤이어 우는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마음에 감격해서 까닭 없이 슬퍼진 것이다. 비록 본인에게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도 역시 무슨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문장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는 것이야 어찌 칼쓰는 사람의 기교에 견주겠는가?
우상은 그 아니 불우한 사람이었던가? 어째서 그의 말에는 그다지도슬픔이 많은가? - P113

글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놓고 붓을 잡은 다음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고전의 사연을 찾으며, 뜻을 근엄하게 꾸미고, 글자마다 장중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화가를 불러서 초상을 그릴적에 용모를 고치고 나앉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구르지 않고 옷의 주름은 죄다 다려 입어서 보통 때의 모습과 다르다 보니 아무리 훌륭한 화가인들 그의 참모습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 짓는 사람인들 무엇이 다르랴? - P132

복희씨가 글을 보는 데는 우러러 하늘을 고찰하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했는데, 공자가 그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가만히 있을 때면 글을완상한다고 했네. 완상한다는 말이 어찌 눈으로 보아서만 살핀다는뜻이겠는가? 입으로 맛을 보면 맛을 알게 되고, 귀로 들으면 소리를알게 되고, 마음으로 헤아려 보면 정신을 알게 되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 방 안을 한꺼번에 훑어보며 유리알로 빛을 받아서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세나. 그렇다고 해도방과 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리알이 투명하게 비어 있지 않으면 정기를 모을 수 없는 법.
무릇 뜻을 환하게 하는 길은 나를 비워 남을 받아들이고, 마음을맑게 해서 사사로운 생각이 없는 데 있다네. 이것이 바로 완상한다는뜻이겠네." - P170

도로 네 눈을 감아라

자기 본바탕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야 어찌 문장만이겠습니까? 각양각색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서화담이 길에 나갔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우는 아이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너 왜 우느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이 지금 이십 년째입니다. 아침나절에 집을 나왔다가 갑자기 눈이 떠져서 천지 만물을 환하게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라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골목은 여러갈래요 대문도 저마다 비슷비슷해서 우리 집이 어딘지 통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습니다. - P192

"집을 잘 찾아가도록 내 네게 일러 주마.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집으로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아이는 전처럼 눈을 감고 지팡이를 뚜닥거리며 발길 가는 대로 이내 제집을 찾아갔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빛과 형체가 뒤죽박죽되고 슬픔과 기쁨이 혼란스럽게 작용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지팡이를뚜닥거리며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이치요, 집으로 돌아가는 증거입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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