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언제나 생산자 쪽이 움직여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여겨왔는데, 생산자들은 대개 치열한 경쟁 상황에 있어 원래 하던 방식을 내려놓는 데 거부감이 큰것 같다. 소비자의 선택이 모이면 더 큰 영향력이 있을수 있겠다는 생각을 위의 경험으로 하게 되었다. ‘사은품 선택하지 않음‘에 함께 체크하고, 이미 소장한 책의리커버는 눈으로만 즐기고 패스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반갑다. 독서가와 장서가가 갈리는 지점이 분명하다. 좋아하는 책의 모든 판본을 모으는 장서가 분들께는 요새의 흐름이 죄송스러울 뿐이다. - P24
여행 겸 강연을 위해 방문한 곳이었던 구미의 책방 ‘책봄‘이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따라 독자 분들과의 대화가 유난히 물 흐르듯이 편안했고, 마지막으로 가져오신 책들에 서명을 하는 동안 보통은 자신의 책에 사인을 받으면 자리를 뜨시기 마련인 독자 분들이 모두 남아 계셨다. 왜 남아 계시나, 뒤에 다른 행사가 있나싶었는데 내가 떠날 때 다 같이 환송해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런 환송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화장실에 들르고 싶었지만 극히 다정한 환송이라 감격하여 그대로 나왔다. 독립 출판물도 출판하시고, 친환경 마켓도여시고, 장기적인 테마의 독서 모임도 꾸리시고 여러모로 탁월한 공간이라 서점이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덕분에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갔 - P60
던 대구의 ‘책방 이층‘에서의 기억도 뜻깊은데, 대화의흐름이 좋았던 공간은 오래 마음에 남는 듯하다. 가을저녁에 들렀던 청주의 ‘휘게 문고‘도 환하게 머릿속에남아 있고, 풍성한 시집 코너가 최고인 경주의 ‘어서어서‘도 인상 깊었다. 속초의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도 여러 번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속초에 관한 책들을 속초의 서점에서 만나는 경험은 완전히 달랐다. 수원의 ‘탐조책방‘은 탐조인이라면 꼭 한번 가보실 만한다. 방문한서점마다 핀을 꽂아 전국 지도를 가득 채우고 싶어진다. - P61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인문360>의 <이달의 인문 쟁점 - 질문과 답변> 코너의 질문 쪽을 쓰게되어, 나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들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답은 표정훈 선생님이 해주셨는데 헌법 관련 조항에서부터 국내외의 사례를 망라하며 함께 고민해주셨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면 좋을 글이다. 결론은 "시민들의 건전한 판단력"과 "문화 자정 능력"을신뢰하며 "안전한 통제"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하자는 것이어서 알고 있었던 답이었지만 신중한 문장들을읽으며 마음은 다소 편안해졌다. 시민사회가 지금보다 성숙한다면, 끔찍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범죄에 닿은 책들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시민들의 외면을 철저히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서 삼키기 어려운 괴로움을 소화해내고 싶다. - P78
김동신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형태, 종이 여러 장을 겹쳐서 한쪽 변을 묶고 표지로 감싸는 코덱스(Codex) 형식은 역사상책이 취했던 여러 형태 가운데 한 가지이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랜 세월 사람 가까이에 자리했기 때문일까. 책의 세부를 일컫는 명칭을 살펴보면 신체 부위를 뜻하는 말에서 가져온것이 많다. 책머리, 머리띠, 책배, 책발………… 앞표지는 자주 ‘책의 얼굴‘로 비유되며, 표지 종이를 판형 폭보다 길게 내어 안쪽으로 접어 넣은 부분은 ‘날개‘라고 부른다. 디자인 저술가 엘런 럽튼(Ellen Lupton)은 「책의 몸」이라는 글에서 책과 타이포그래피 관련 용어에 몸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글쓰기가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이 볼 수 없는 영역을 카메라를 통해 보고 발로 갈 수 없는 거 - P110
리를 자동차로 쉽게 도달하듯이 글은 생각을 그 소유자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해준다. 글이 생각의 몸이라면 책은 글의 몸이다. 신체와 관련된 책의 세부 명칭 가운데 가장 절묘하다고생각하는 것은 책등이다. 등에는 인체를 지탱하는 기둥인 척추가 있기 때문이다. 코덱스의 구조적 정수가 종이를 엮었다는 점인 만큼 엮인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진 면을 등이라고 일컫는 것이 퍽 적절하게 들린다. 영어권에서는 직접적으로 spine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노출 바인딩으로 제작한 책에서 표지를 입히지 않은 책등을 보면 종이 묶음을실로 엮은 모습이 뼈마디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 P111
로고를 미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실행은 내가 만든 형태, 내가 고른 색깔, 내가 선택한 글자가 내가 세운 질서에 따라비어 있던 지면을 채우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미지를 있도록 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가운데 모종의 전능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로고는 디자이너의 개입 이전에 이 책에 태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들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이 조그만 아이콘은 디자이너의 얄팍한 뿌듯함에 쉽게 균열을 냈다. 로고가 표지 안으로 들어오면 요소들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맥없이 풀리면서 아까까지는 썩 괜찮았던 표지가순식간에 진부하게 바뀌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본이 자신에 기반하여 만들어진사물에 지울 수 없는 인을 찍어 넣는 것이 로고의 본질이니까. 이 위력에 반항해보겠다며 이런저런 시도를 했던 몇 년이 있었다. - P119
책이라는 사물의 차원에서는 작가와 출판 노동자의 관계에서 비슷한 구도가 반복된다. 물론 최근 여성 작가의약진이 눈부시긴 하지만 여전히 저명한 저자의 다수는 남성이고 그와 소통하며 책을 만드는 편집자 역할은 여성이맡는 경우가 많다. 편집자들은 종종 원고 내용이나 제작에관한 업무적 소통을 넘어 저자가 글쓰기를 잘할 수 있도록심리적·생활적 돌봄에 가까운 일까지 떠맡기도 한다. 드물지만 편집자가 작가가 써낸 글을 책이 될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거의 새로 쓰는 것에 가까운 작업을 하는 경우도있다(물론 이런 경우에도 책은 저자의 이름으로 나온다). 백번 양보해서 창작이라는 정신적 노동의 특성 때문에 공과 사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고정된 성역할에서 비롯한 압력, 즉 ‘천사‘의 속삭임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143
디자이너가 늘 수동적인 약자 혹은 피해자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관계가 내일은 달라질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구조에 기꺼이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사실진정한 천사는 후자에 가깝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그렇게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내면의 소리. 눈에 띄지 않기를원하는 마음. 큰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할 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죄책감. 이것의 어디까지가 타고난 성격이고 어디부터가 권력이 내재화된 결과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그래서 천사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했을까. 목을 졸랐다고 한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그 목을. 아마 그래봐야 천사는 다음날 또 살아날 테지만 그때는 다시 목을 조르고, 또 썼을 것이다. - P148
신연선
책의 민망하리만치 소소한 판매부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언젠가 책에 별달리 관심 없는 친구에게 "책이 한 권 나오면 몇 권이나 팔릴 것 같은지" 물은 적이 있다("참고로 인구가 5천만이라는 점을 기억해봐......"). 친구는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한...... 10만 권?" 약간 서러워지는 얘기였다. 그러니 출판계에 있는 친구들과 "이거 어차피 다만든 사람이 사고, 쓴 사람이 사고, 산 사람이 만들고, 쓰는 거 아니냐고!"라면서 자주 눈물 섞인 웃음을 짓는 것이다. - P185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특별히 이 말, 이 개념을 좋아하는 까닭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라, 친절을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RJ 팔라시오 <아름다운 아이>
일터에서 친절은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분명한업무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일터에서 여러번 자리를 바꾸어가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도 변함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불필요한 불안감이나 긴장감,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 없이 수평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나의 긍지를 위해 삼았던 친절과 다정의 태도 덕분이라고 믿는다. 나는 동료들과 친절로 호감을 나누었고, 그 호감은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 즉 책임감으로 돌아와 사회생활의 양분이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일할 때 일의 결과도 좋았다. - P190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 책마다 의미가 다르다는 것도 중요하다.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어떤 삶의 맥락을 가진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전혀달리 읽힌다. 이에 관해 생각할 때 나는 오드리 로드의 "새로운 아이디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이 말은 얼마나 진실인지. 예를 들어 「나의 가련한 지배자」 「작별 일기」「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는 모두 딸이 엄마를 써내려간 책이지만, ‘딸이 엄마를 써내려간‘이라는 수식어를 빼면 도무지 하나로 묶이지 않는, 제각각의 의미가 아주 남다른 책들이다.
오드리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44쪽 - P220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기효능감‘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마음.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확신. 이때 자기효능감은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는 유명하고 커다란 프로젝트를 해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것 같다.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일도 그 일이 필요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행한 뒤 끝내 완수하고 나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자기효능감이다. - P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