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내의 갈등과 분열…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며 독립운 동가들이 선택한 이 명제는 아마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일 것이다. 3•1운동의 배경 중 하나가 고종 황제 사망임 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후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지난 100년간 단 한 번도 의심되거나 부인된 적이 없고, 여러 번의 개헌과 군사 쿠데타도 이 명제는 바꾸지 못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1870년까지 80년 동안 프랑스가 공 화국이었던 기간이 단 16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 P50

1919년 3월 레닌은 코민테른을 조직하면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연계하는 정책을 발표하게 된다. 코민테른 (Comintern)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자다. 한인사회당을 만든 이동휘는 박진순 등 3인을 코민테른에 파견하는 동시에, 심복 김립을 데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국무총리를 맡게 된다.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박진순 일행은 내전 중인 시베리아를 120여 일에 걸쳐 목숨 걸고 통과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해, 코민테른에 가입한 후 레닌에게 선전비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한인사회당의 활동은 중국공산당이나 일본공산당보다 앞선 것이었고, 후에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창립 과정을 한인사회당이 지원했다. - P53

이 무렵, 하와이 교포 출신 20대 초반의 황진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안창호를 모시고 여운형 과 함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황진남의 상관은 외무 차장을 맡았던 현순 목사였다.1 1921년 5월 황진 남은 현순 목사와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모임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임시정부의 분 열은 극에 달했고, 그는 미국에 가려고 유럽을 경유하던 중 독일에 남아 베를린대학에서 중단된 학업을 이어가기로 한다. - P55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에 분노한 이동휘와 박진순은 언어 천재 이극로를 데리고 내전 중인 시베리아를 피해 인도양, 수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3개월에 걸친 여정 끝 에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다. 할 말이 없게 된 레닌은 11월 코민테른 한국 위원회를 만들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코민테른에서 상해파의 권위가 회복되었지만, 두 파의 계속되는 대립을 중재하던 레닌은 결국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에 해산을 명령하고 남은 금화 140만 루블의 지원을 중지 한다. 역사는 이를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 P57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 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a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 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학생 신분이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어 강좌의 정식 강사로 보수를 받기 위해 당국을 설득했는데, 그 문서도 발견되었다. 여기서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이 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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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라기에는 과학 얘기는 아직 별로 없고 독립운동가들의 흥미로운 뒷얘기.
책에 언급된 하와이 이민과 인하대의 관계는 몇 년 전 월미도 여행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알게 됨.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상투 를 붙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일단 싸움부터 말리고 사연을 물었더니, 인삼을 팔던 한국 상인들 사이의 구역 다툼이 었다.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부가 아니라 즉각적인 의식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학을 포 l기하고 대대적인 계몽 활동과 한인촌 건설에 앞장서고 신문 을 발행하며 교포들의 단합을 이끌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한인 공동체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 P34

행복하게 지내던 서재필에게 충격을 준 사건 역시 3•1운동이었다. 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모두 한국 민중이 덜 깨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1 운동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의지에 감동했다. 서재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30년 전에 내가 인천항을 떠날 때에 한인들이 내 뒤를 받드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으로 알았었 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한인이 죽지 않고 산 백성으로 꼭 믿었습니다. 언제든지 그런 백성이 자유 독립하고야 말 줄로 참말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연설도 하며 선전 사업에 활동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 P43

서재필은 사재를 털어 필라델피아에 교포들을 모아 독립 행사를 열고, 다시 한국 문제에 앞장선다.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은 일제의 압박과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둘째 딸 뮤리엘은 서재필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적극 도왔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결과, 한때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는 결국 60세가 되던 1924년에 파산한다. 이런 와중에 서재필은 62세에 다시 의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심지어 64세 때는 집을 저당 잡혀가며 의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조선에 전염병이 자주 일어남을 걱 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연구하며 학술지에 몇 편의 논문도 출판했다.
192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동업하던 유일한 박사가 귀국한다.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미술을 전공한 뮤리엘은 유일 한의 성 버들 유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조각해 선물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 조각에 새겨진 모양을 상표로 한국에서 의약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유한양행이다. - P44

1919년 응우옌은 파리에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rem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 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하고 베트남 독립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8년, 호치민의 파리강화회의 활동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 l거로 삼는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당시 프랑스 경찰은 기록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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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칼럼의 필자는 최규남. 1932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문교부 차관이었고, 새롭게 시작한 대한민국의 학제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거쳐 문교부 장관이 되어 대한민국의 초기 이공계 교육에 이바지했다. 그의 기록을 찾다가 놀랍게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주요 국가에서 주목받던 1920년대 바로 그 시점에, 우리나라에도 상대성이론이 전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회강연이 열렸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들은 연이어 새로운 과학의 탄생을 지면에 올렸다. 심지어 당시로는 최신 이론이었던 양자역학도 다루었다. 놀랍게도 이미 100년 전의 일이다. - P11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한편,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 미국과 유럽은 자전거 대유행의 시대였다. 그는 조선으로 귀국할 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가져왔다. 서재필이 서울 도심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고, 윤치호는 그에게 자전거를 배운 뒤 미국에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자전거를 탔는데, 나중에 보부상 무리와 대립할 때 그들이 몰고 다니던 자전거가 상대편에게 큰 위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이 만난 서양 과학 문명은 이렇게 자전거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로 자동차를 최초로 운전한 조선인은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다. - P15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교 경전을 외던 선비는 이처럼 10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서양 과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그는 워싱턴 명망가 집안의 딸 뮤리엘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사촌으로, 철 도우편국장이던 워싱턴의 거물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실릴 만큼 미국에서도 화젯거리였다.
이처럼 갖은 시련 끝에 겨우 미국에 정착한 그가 다시 조선으로 온 것이다. 임신 중이던 뮤리엘은 오직 남편 서재필만 믿고서 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 - P18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 사설에 한글 사용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드러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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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죽음 이후의 신체 활용에 대한 다양한 - 때론 엽기적이고 때론 감동적인 - 이야기를 위트있게 풀어낸 책. 생태적 관점에서 사체 퇴비화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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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불길 밖으로, 퇴비통 안으로 - 최후를 장식할 새로운 방법

한 가지 우스운 사실은, 미국에서 화장을 처음 도입할 때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장점이 매장에 비해 공해가 덜하다는 점이었다. 1800 년대 중반에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그릇된 믿음이 하나 있었다. 시체가 매장되어 부패하면 유독가스가 생겨나며, 이게 지하수를 통해 흙 속으로 스며들면 그곳의 땅에 치명적인 독기가 피어올 라 공기가 오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병든다는 것이다. 화장은 깨끗하고 위생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고, 미국 최초의 화장 광고행사가 그렇게나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 P293

그녀는 삽으로 퍼올린 퇴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한다.
"퇴비를 지저분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죠. 사랑스러워야 해요. 낭만적이어야 하고요." 그녀는 죽은 시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 한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죠. 신체가 뭔가 다른 걸로 바뀌죠. 나는 그 다른 걸 최대한 긍정적인 걸로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자들을 정원폐기물 수준으로 낮췄다고 비난해왔다고 한다. 그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내 말은 정원폐기물을 인체 수준으로 높이자는 거죠." 그녀가 말하려는 뜻은 유기물은 뭐든 폐기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두 재활용해야 한다. - P299

누가 냉동건조 과정이 왜 필요한지 묻는다. 위마사크는 수분을 제거하지 않으면 땅에 묻기도 전에 작은 조각들이 부패하기 시작하여 냄새가 날 거라고 대답한다. 질문한 사람은 인체의 70퍼센트가 물이기 때문에 물을 제거하면 안된다고 되받는다. 위마사크는 우리 모두의 몸속에 있는 물은 날마다 바뀐다고 설명한다. 빌려온 것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내 몸에서 나온 물 분자가 다른 사람들의 물 분자와 섞인다. 그녀는 질문한 남자의 커피잔을 가리킨다.
"당신이 마시고 있는 커피는 당신 이웃 사람의 오줌이었어요."
기업을 상대로 발표회를 하면서 중역들에게 ‘오줌‘이라는 말을 내던질 수 있는 여자에게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P313

위마사크는 퇴비화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폐기물처리 차원이 아니라 정중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한편, 품위 있는 마지막에 대한 유족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품위는 어느 정도 포장에 달려 있다. 근본으로 깊이 내려가면 품위 있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부패든 소각이든 해부든 조직분해든 퇴비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들 모두 궁극적 으로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 잘 포장된 완곡한 표현을 세심하게 적용시켜야만 - 매장, 화장, 해부학기증, 수분환원, 생 태학적 장례식 등과 같이 -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온다. - P316

12장 저자의 유해 - 그녀는 어쩔 생각일까?

진열대 위의 장기가 되는 길은 단 한 가지, 합성수지 보존체가 되 는 방법뿐이다. 플라스티네이션이라 부르는 이 방법은 예컨대 장미꽃 봉오리나 인간의 머리 같은 유기조직에 함유되어 있는 수분을 액화 실리콘 폴리머로 바꾸어 유기체를 영구히 보존한다. 플라스티 네이션은 군터 폰 하겐스라는 독일인 해부학자가 개발했다. 합성수지 보존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하겐스 역시 해부학 프로그램을 위한 교육용 인체를 만든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것은 논란의 대상이 된 합성수지 전신보존 전시작품 ‘쾨르페르벨텐Korperwelten 때문이다. ‘인체의 세계’라는 뜻인 이 전시회는 지난 5년 동안 유럽을 순회하면서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동시에 짭짤한 수입도 올렸다(현재까지 8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서울과 부산에서도 ‘인체의 신비 한국 순회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2002년 4월부터 2003년 9월까지 1년 6개월에 걸친 전시회 동안 서울에서는 200만 명, 부산에서는 1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대한매일〉 2002년 7월 9일자 에서는 전시기획자인 독일 관계자들이 한국 전시를 두고 "전시품‘에 대한 한국인의 거부반응이 제일 적은 게 커다란 특징"이라 말했다고 한다. (옮긴이 주) - P326

대부분의 경우 폰 하겐스에게 기증된 인체는 중국의 플라스티네 이션 시티라는 곳에서 보존처리된다. 200명의 중국인 근로자들이 그에게 저임금으로 고용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법은 극도로 노동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놀랄 것도 없다. 한 명을 처리하는 데에 1년 이상이 걸린다(폰 하겐스의 특허가 만료된 뒤 미국의 다우코닝이 개선한 기법에서는 처리시간이 10분의 1로 줄었다). - P327

만일 내가 나의 신체를 과학에 기증한다면 내 남편 에드는 내가 해부실습실에 누워 있는 장면뿐 아니라 거기서 내가 겪을 모든 일까지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지만, 내 남편은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인체에 대해 까다로운 성격이다. 눈에 손을 대야 한다는 이유로 콘택트렌즈를 끼지 않겠다는 사람이니까. 수술채널도 남편이 출장가고 없는 날에만 보아야 했다. 2년 전 내가 하버드 두뇌은행에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 했을 때 남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난 골 은행에는 반대라우."
남편이 나를 어떻게 하고 싶건 그건 남편 뜻대로 될 것이다(장기 기증만은 예외이다. 내가 만일 쓸 만한 장기를 지닌 뇌사자가 된다면 누군가는 그걸 활용해야 한다. 남편 성격이 까다롭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만일 에드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렇다면 나는 시신기증 양식을 작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나를 해부할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약력을 첨부할 것이다(신체기증자는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학생들은 못 쓰게 된 내 껍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야, 이것 좀 봐, 이 여잔 사체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대." 그리고 어떻게든 가능하다면 내 사체가 윙크하는 모습이 되게 할 것이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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