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향신문과 중앙일보가 '감정사회학'에 대한 언급을 연이어 하길래 기사를 읽었다. 아무래도 저널의 특성상 학문적 '추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 부분보다는 한국 사회와의 접점을 통해 '왜 이게 뜨는가' 같은 내용이 주였던 것 같다.

2. 엄밀히 말하자면, 감정사회학의 이로움은 '새' 학문이라는 특성이 아니라, 고전사회학을 재해석할 공간으로 작용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이 사람이랬었어? 하는.

3. 다만 그랬을 때 연구자와 이런 연구자들을 주시하는 책 만드는 이 그리고 독자들이 따져볼 점은 감정사회학이 다분히 '클래시컬'한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전을 해보면 '지루한 느낌'을 견뎌야 하는 과정이 꽤 있는 것 같다. 

4. 우리로서야 수사로든 어쨌든 그나마 '요즘 센스'가 있는 '에바 일루즈' 혹은 주제 선정과 그 결과물이 한국 사회와 잘 들어맞았던 '앨리 혹실드'가 감정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에 대한 홍보 효과가 되면서 고쪽의 재미를 계속 기대하지만, 진퉁으로 돌파해야 할 영역은 박형신 교수가 번역해놓은 저술과 그 경로들이긴 하다. 

5. 그런 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파고들어야 할 부분은 과거 '큰 사회학'에서 맡을 수 있던 사회심리학적 향취를 되돌아보는 작업 그리고 개선해볼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는 작업일 거라 본다. (후자의 작업이 중요할 것 같다)

6. 어제는 미국사회학회 감정사회학회분과 사이트에 들어가 우수대학원생논문명단을 비롯해 우수논문과 저술을 행한 학자 명단, 공로상 명단을 쭉 봤다. 그리고 논문 주제와 초록들, 저술 관련 출판사 소개글 등을 조금씩 정리해보고 있는 중이다.
우수대학원생 논문명단에는 한국 사람도 있었다. 지금 멀리서든 여기서든 공부하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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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베커는 의료인류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챙겨두어야 할 학자다. 그는 의료인류학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요소를 분석의 시선으로 끌어온 의료인류학계의 첫 세대였다. 
평생 주제는 노화와 만성질병, 불임과 리프로덕티브 헬스(성과 생식의 건강 권리로,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 개발회의에서 제창된 개념이라고 한다. 특히 여성의 건강과 성생활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견해)였다. 

그녀의 삶은 연구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자신의 아픔은 곧 연구 주제이기도 했다. 그녀가 만성질병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평생 천식을 앓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가 불임 연구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그녀의 남편이자 교수 로저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 로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는 걸 조심했다. 사람들의 선의에서 나온 염려를 자신이 과하게 받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매우 어렸을 때 이혼했다. 그녀가 어렸을 당시엔 결혼 실패가 쉬이 받아들여질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그녀가 관심을 갖게 된 테마는 ‘타인에게 낙인을 찍힌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정의를 위해, 가난한 자와 사회적 낙인이 찍힌 자를 대변하기 위해 연구 활동으로 실천을 해온 학자로 베커는 평가받고 있다. 이주민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고, 특히 보험 대상이 되지 못한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도 앞장섰다. 
남편과 함께 자주 산에 올랐던 베커는 네팔에서 트레킹 도중 앓고 있던 폐색전증이 심해지면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대표작인 Disrupted Lives: How People Create Meaning in a Chaotic World는 의료인류학의 필독서로 꼽힌다. 이 책은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현대인들이 병, 불임, 가까운 이의 죽음 등 갑작스러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겪는 사회적 고통을 다룬 연구서다. 의료인류학에 큰 기여를 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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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4년 1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40분

+ 장소: 광화문 씨네큐브

(*스포일러 있음)

 

#1

 

"으이구 뇬석아. 오냐오냐 자랐더니 그런 것두 못 하구. 생활점수가 빵점이야, 빵점" 고레에타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나서 이 익숙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게 이 영화는 평소 생활점수가 왜 이리 낮냐고 지적당하며, 그것에 압박받는 이들을 위한 치료제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건축가이자 아버지 료타가 아버지로서 '원래 아들' 류세이에게 정을 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 중 텐트 치는 법을 골똘히 보는 그 순간을 기억해보자. 생전 쳐보지 못한 텐트를 잘 치려면 설명서, 즉 매뉴얼을 보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활점수가 낮다/없다고 지적받을 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집안일을 했을 때 거치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둘러싼 기대와 실망이 있다. 여기엔 '야무지게'라는 결과에 대한 진득한 수사도 등장한다.

 

이런 매뉴얼을 제대로 익힌 아이는 자라서 그  '야무짐'을 인정받는다. 이 인정/불인정의 시선은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의외로 섬세하다. "야 너 손톱 발톱 둥글게 제대로 깎을 줄 아는구나" "못질 하는 거 봐라 이거" "너 매듭 만들 줄 모르는구나?"

"야 바람막이 테이프로 고정시키려면 이렇게 삐뚤어지게 붙이면 어떡하니?" blah, blah.

 

#2

생활점수와 매뉴얼. 고레에타 히로카즈는 여기서 매뉴얼의 의미 전환에 성공한다. 생활점수가 낮다는 타인의 시선이 늘 걱정스러운 이른바 '오냐오냐' 어른들에게 매뉴얼은 '공부를 해서라도' 터득하고 싶은 일종의 부담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매뉴얼은 아버지 료타 스스로가 타인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감정의 장치'로 활용된다. '그렇게~된다'라는 성장의 맥락이 가득한 제목처럼 료타는 아버지로 '성장'하기 위해 매뉴얼을 '겪어나간다' 일상에서 가족을 대하는 실질적인 혹은 정서의 메뉴얼을.

 

#3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료타가 가족의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데에는 자신이 가장 먼저 나서기보단 매개자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아내인 미도리 그리고 바뀐 아들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해줄' 변호사 친구, 심지어 자신의 원래 아들을 데리고 살았던 전파상 유다이도 자신의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는 매개자들이었다.

아들과 함께 욕조에서 함께 목욕하는 것도 '거리감'으로 정리되던 료타의 과거를 보여준 영화 속 시선에서 료타는 가족의 문제를 '거리감'이 아닌, 가장 밀착된 일상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그 온기를 채워나간다.

 

#4

사실 자식이 바뀌고, 부성과 모성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서사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허나 이 영화는 분명 많은 이의 속에서 '틈새'와 '틈입'을 잘 나타낸 듯하다. '틈새'는 일종의 영화적 전략이다. 영화는 익숙한 서사 가운데 '디테일'이라는 틈새를 잘 그렸다. 두 아버지 료타와 유다의 대비된 구도를 비롯해, 영화는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공감의 장면을 세세하게 포착했다. '틈입'은 이런 디테일로 대변되는 '틈새'가 몰고 온 감정선이다.

 

이 영화가 두 번째로 성공적으로 그려낸 것은 '핏줄'보단 '돌봄'이란 틀 안에서 이전의 '대안가족'이란 유형으로 흘러가지 않았단 점이다. 이 영화는 그 어떤 인연이 없던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핏줄보다 중요한 정서적 공동체라는 이름의 대안가족보단, 가족의 제자리를 지키면서 다시 우리 사회 가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했을 때, 료타가 변해가는 과정, 그 어떤 매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부딪치고' '겪어보려는' 매뉴얼 연습은 이른바 '오냐오냐' 자란 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고 있는 정서 환경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한다.

 

"당신의 생활점수는 몇 점인가요?"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가가려는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채점을 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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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가제놀이.

 

1. 영화 시작하기 10분 전에 들어가서 미리 앉아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당신.하지만 오늘은 같이 볼 친구가 늦어 광고타임도 지나고 본 상영분도 7분 이상 지나 들어가게 되었군요. 인기 많은 작품인지라 사람은 많고 어두워서 내가 예매한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구요. 사람들이 뭐라 할까봐 아무 빈자리에 앉았는데. 아뿔싸 당신 같은 이가 나타나 "저 여기 제 자린데요"란 말을 듣고 땀 삐직. 그런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2. 오랜만에 혼자 분위기를 내고파 커피빈에 왔는데 푹신한 소파 세 개와 둥근 테이블 하나가 보이는군요. 오늘의 커피를 시키고 책도 보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데, 막 들어오는 분들 '좋은 자리 앉기 컴플렉스'에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푹신한 소파에 앉...은 저놈은 동행한 사람이 있나? 아 짜증, 야 자리 없다 가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구요. 편지 좀 예쁘게 쓰려했더니 그런 반응들이 신경 쓰여 글씨가 점점 날리고, 딱딱한 의자 두 개만 있는 테이블로 옮겨야 하나 걱정하는 소심한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3. KTX를 타고 간만에 자식놈 보러가는데 '이기 내가 끊은 기 맞는기가 6호차 역방향 4c 역무원이 맞다케도 불안하네' 하신다구요. 그 표 이왕 보관할 거 깔끔하게 접어놓으면 될 걸 나중에 딴 사람이 "혹시 제가 그자리인 것 같은데 맞으세요"란 상황 일어날까봐 손에 꽉 쥐고 계신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4. 진부하지만 영원한 도시인의 숙제. 지하철 자리 앉기. 천선영이란 사회학자는 실제로 이 테마로 연구논문을 쓰기도 했다죠. 책 보는 척하며 절대 고개 들지 않기, 일부러 자는 척하기 말고 좀 더 심화된 매뉴얼은 없을까요 자 그런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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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울리friuli. 일산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유명한 역사학자와 예술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인류학자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1 역사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가 바라본 프리울리




카를로 진즈부르그를 알린 두 권의 책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치즈와 구더기』는 익히 알 것이다(두 권 다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두 권 모두 이태리 북동쪽에 위치한 프리울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다루었다.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157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프리울리 지방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주민이 마법을 행한 혐의로 피소된 이단 재판 기록에 근거한 미시사 연구다. '베난단티Ben-andanti ' 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농촌 지역인 프리울리에서만 통용되던 방언이었다. 베난단티로 여겨지던 이를 심문하던 펠리체 신부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이 어떤 마법적 제의를 겪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내용인즉슨, 

베난단티는 한 해 네 번, 목요일 밤마다 실신 상태가 되고 이 순간 영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경험한다. 그리고 이때 들고양이나 들토끼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들의 회합 장소로 날아가 마녀들과 전투를 치른다. 베난단티는 마녀에 대적하고자 회향풀이나 가막살나무 줄기를 무기로, 마녀는 사탕수수 줄기 혹은 화덕을 청소하는 나무막대기를 무기로 삼았다. 전투의 결과 베난단티가 이기면 풍년을, 마녀가 이기면 흉년을 맞이해야 한다. 



진즈부르그가 파고든 것은 베난단테의 이 신비스러운 행위라기보다는, 행위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그들이 어떤 위치로 해석될 수 있는가였다.  합리와 이성을 내세운다고 하는 엘리트 계층의 '의 눈에서는 이 행위가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베난단티는 곧 악마적인 행위를 하는 무리였을 뿐이다. 악마라는 규정은 곧 종교 질서 안에서 '이단의 확정'으로 이어진다. 설득하거나, (혹은 처형하거나)


베난단티와 이단 심문관 간의 '밀당'이 시작된다. 그리고 심문관의 압력 속에 베난단티의 진술은 심문관이 원하는 바와 일치되어간다. 진즈부르그는 베난단티가 기독교의 도래 이전 존재해온 고대의 다산 신앙 혹은 풍농제의 흔적이라 보았다. 역사학자 곽차섭의 주장에 따르면,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마녀 신앙의 민중적 기원을 새롭게 보여준 연구서이자, 이단 심문관과 분명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피의자 신분의 베난단티가 낸 목소리를 처음으로 규명한 책이다. 물론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보물은 '민중 문화'다.



『치즈와 구더기』는 익히 알다시피 긴 설명이 필요없는 미시사의 고전이다. 우리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메노키오'가 겪은 황당무게한 일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16세기 프리울리 지방, 한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는 그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명인이었다. 메노키오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이 담대한 세계관은 놀랍기 그지없다. 세계관의 때깔이 좋다고 할까. 16세기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맹신에 대한 저항 속에서 '다른 종교' '다른 세계'에 대한 고백을 시도한 그는 소위 구리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다. 메노키오를 '시대를 깨운 인간'으로 보이게 한 요소에는 진즈부르그의 해석에 따르면 책도 무시할 수 없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파와 접촉을 했던 적은 있으나 메노키오는 이 모든 세계관은 자신의 머릿속에 나온 것이라 외친다. 물론 책 읽기가 모두 메노키오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진즈부르그가 주창한 '창조적 오독'이란 개념이 나온다. '구어'로 된 이탈리아의 민중 문화가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영향을 받은 문헌 문화와 섞이면서 메노키오는 어쨌든 '제대로 된 해석'은 아닐지라도, 그 해석을 시도한 결과 자체가 자신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2 예술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바라본 프리울리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우리에겐 소설보다도 〈살롬, 소돔의 120일〉이란 영화 연출로 더 유명한 인물.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잔혹성과 선정성이 그를 다 보여주는 건 아니다. 1950년대 이탈리아 지식인을 각성시킨 문학 잡지 《오피치나officina》의 편집자였던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세계를 도식화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거부했다. 





늘 이탈리아의 주변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파졸리니에게 '소수의 언어'였던 프리울리 방언은 눈에 띄었다. 그는 1942년 프리울리 지방 농민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첫 시집 『카사르사의 노래』를 발표해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당시 이 시는 프리울리 방언이 구사되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민중의 언어 사용에도 횡포를 가하던 파시즘 정권하에서 프리울리 방언은 '야만어'의 범주에 속했다. 파졸리니는 해독 불가능한 프리울리 방언의 감성적이면서도 열성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용이한 형태를 좋아했다. 물론 프리울리 방언을 선택한 것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파졸리니에게 프리울리 방언은 정부가 획일화시킨 언어 정책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언어이자 예술적 언어였다. 


3 프리울리를 다시 찾은 인류학자 더글러스 홈즈






뉴욕주립대 빙햄턴 인류학과 교수인 더글러스 홈즈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유명하게 만든 저서 중 

『Cultural Disenchantments: Worker Peasantries in Northeast Italy』(1989)란 책이 있다. 이 책의 학술적 의의를 정리하자면, 진즈부르그의 연구 이후 인류학 연구로는 처음으로 프리울리 지방을 다루었다. 홈즈는 프리울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숙지한 채, 마을로 들어가 이태리 시민과 농민이라는 정체성이 교차된 '역사적 순간'을 목도한다.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Disenchantments of world'라는 이론에 착안한 홈즈는 프리울리 지방이 역사적으로 지켜온 관습과 체계적인 변화의 바람 속에서 이 지방민들이 자기 나름의 생활방식과 정치 의식, 경제적 가치를 긴장 상태에 두고 있음에 주목한다.


1980년대 초반에 연구를 수행했던 홈즈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프리울리 지방민의 감정을 살핀다. 이들은 희망을 노래하며, 자신들의 낙천성을 표출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제2차 대전 이후 나타난 정립된 '이태리 시민' 자본주의체제의 발현 속에서 혜택으로 다가온 듯한 현대적인 삶의 모델들. 프리울리 지방민들도 이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프리울리 지방의 인류학 연구를 통해 홈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소작농 노동자Worker Peasantries가  맞이한 변화와 이런 변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그들 고유의 문화와 감정 또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와 감정이었다. peasantry가 소작농을 뜻한다면, peasanty는 그 어떤 제도의 압박을 받지 않고 단순하게 전통적 삶을 고수하는 사람을 뜻한다.  두 단어의 의미가 언뜻 겹쳐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알았다는 기분을 들고 프리울리 레스토랑에 가보는 게 좀 더 나은 시도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앎 자체'를

더 알고 싶을 뿐이다..


* 각 책들, 곽차섭 교수의 「까를로 진즈부르그와 미시사의 도전」, 한성철 교수의 「파솔리니의 빈민-지방문학 연구」

위키피디아, 아마존, 프린스턴대출판부 홈페이지, 뉴욕주립대 빙힘턴 더글러스 홈즈 교수 소개란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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