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_ 통속의 매혹은 우연한 문화적 접촉이 단번에 내 이야기인 느낌을 줄 때가 아닐까. 저 슬픈 노래의 가사, 저 황당한 영화의 결말, 저 담담한 산문의 고백이. 

2.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21살 입영통지서를 받은 김연수의 기분. 군대에 간다는 것은 막막하다. 입대란 것 자체가 막막한 게 아니라 그 무력한 기다림 때문에. 그의 말마따나 군대에 간다고 해서 총검술을 미리 배운다거나 군복을 미리 받아 다림질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현실이란 없다. 무얼 계획해서 그걸 븨자 체크해가는 정돈된 시간 채우긴 이별 뒤 친구와 나눈 대화 속 조언에 "고맙다. 잘 추스려볼게"란 빈말로 지금 네 이야기도 안 들어온단 태도 같은 것에 자릴 내주고 마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

3. 우연에 맡기고 즉흥에 기대고 싶은 시간. 김연수도 글에서 누구나처럼 음주와 연애와 여행의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썩 멋지게 의미를 다듬어보지 않아도 흐트러지고 느슨해도 그걸 했단 것만으로도 뿌듯한 시간. 일어나면 돌아오면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허한 잔고에 허기지지만 하는 동안이라도 '될 때로 되라지'란 마음을 품어봤단 용기에 자족하는 시간.

4. 정처없이 떠도는 김연수가 일본만화 풍선마크 윤문 알바를 할 때 몸을 뉘이러 찾은 만화방. 김연수가 하는 작업을 신기해하며 그를 대단한 만화가 여기듯 묻고 보던 할아버지는 운동권 학생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왜 만화방 을 이 시간까지 여냐며 혼난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저는 아르바이트입니다" "할아버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수치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뇌까렸다" "저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만 일하는 아르바이트라구요"

5. 김연수는 자기야 입영통지서를 받았다지만 이 할아버지의 삶은 무언가 싶어 멍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우릴 이렇게 가게 한 삶을 향해. 짐작은 가능하지만 그게 정 말 맞다고 확인/확언하기 두려운 게 삶 아닐까 김연수는 여행스케치 2집 속 노래를 떠올린다.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

6.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김연수의 글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거요?"란 질문이 미리 감지되어 거짓 계획안을 준비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이럴 때 실컷 방황해" 하는 말들은 내게 성의가 없는 듯해 서운하기도 했다. 이 변덕의 오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실했다.

7. 햇빛 좋은 어느 날. 아직도 날 일꾼으로 기억해주는 두 분에게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선언보단 매우 미지근하고 결심보단 조금 단단하게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말은 하지 않은 채 눈빛으로 보낸 메시지가 이런 거란 걸 간만에 느꼈다.
돌아오는 내내 입에서 네 앞날 응원한다고 꺼내지 않아준 선배가 고마웠다. 내 선언과 결심 사이의 혼란을 눈치채고 자신의 제안을 거두어준 채 시시콜콜한 요즘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 O양에게 나는 빚 하나를 진 것 같았다. 그들 덕분에 종점에서도 곤히 자는 할매들의 어깨를 살짝 만지며 저 할머니 다 왔는데요 연한 오지랖을 떨 수 있었다. 나도 내릴 곳을 지났지만 간만에 단잠 잤네라며 마음에 달달한 풍선껌을 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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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이자 문학에도 욕심이 많아 소설가 데뷔 경험도 있던 랜들 콜린스는 정서적 에너지라는 개념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음을 다루는 책들이 근래 엄청나게 출간되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데 겹치는 용어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서적 에너지 혹은 정신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쓰는 말에서 의미를 간접적으로 헤아려도 큰 무리는 없다. "아 더 토론하고 싶은데 에너지가 없어서 이제 그만.." "아 평소엔 안 그랬는데 너랑 있으면 에너지가 팍팍 줄어들어" 랜들 콜린스는 정서적 에너지의 누적과 소모에 있어 사람들이 어느 쪽에 에너지를 더 쓰고 싶어하는지 연구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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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평상심은 고요한 지층 아래 숨겨진 용암이었다. 지루하고 진부하고 '그냥 그거 늘 이렇게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되잖아?'란 말로 설명되는 게 일상 아니요?라는 시선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뭐 에너지가 들겠소? 싶지만 콜린스는 늘 새롭고 일탈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그런 새롭고 자극적인 일상을 향한 갈구가 외려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에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사회학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는 한 명인(명예의 전당은 내 표현이다) 해럴드 가핑클의 위반실험이 사람들이 얼마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려 하는지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회학적 연구방식이라고 분석한다. 가핑클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습득해왔고 그리하여 미리 예상해 준비해두고 있는 일상의 틀을 조금 비틀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을 보고팠던 개구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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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에 관한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소설가는 W.G. 제발트다. 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엄청난 폭격을 당한 독일의 한 지역 속 사람들의 정서를 추적하면서 그들의 평상심 안에 든 어떤 그릇된 오만함을 본다. '공격당했다고? 괜찮아. 다시 세우면 된다고. 이럴수록 당황해선 안 돼. 그냥 있던 그대로 행동하자구'의 마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가 아무 의미도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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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학술지 《문화와 사회》(2013년 14호 수록)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1984/2004) 중 「언어시장」을 읽고 


"저기요 부르디외 선생. 근데 모든 걸 사회학적으로 생각해야 되나요?"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회학적으로 보지 않으면 부르디외가 관을 뚫고 나와 삐질 것 같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2002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강렬한 투쟁적 사고, 특히 자신이 속한 학문적 위치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던 태도는 여느 지성인처럼 많은 지적 선물/산물을 안겨다준 게 사실이다. 특히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오늘날 사회(과)학도들에게 영원한 히어로이며,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층에겐 '고전적 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완전무결한 학자는 아니었다. 나는 부르디외의 그 완전무결함을 깼던 비판적 목소리 중 하나, '총체적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정신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편이다. 사실 부르디외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가 그런 사고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런 현상을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로 바라보지 못하느냐 더 나아가 하나의 현상을 해석하고 개념화한 A라는 학문이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에 비해 빠져 있는 게 많았느냐 비교해보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고민해볼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부르디외가 이게 좀 과했고 그리하여 과녁을 잘못 겨냥했다는 점이다. 이를 잘 짚어낸 국내 논문 한 편이 있다. 


국내에서 일급 부르디외 전문가로 평가받는 이상길 교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사회학적-'이라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언어관과 관련된 학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언어학이다. 부르디외는 언어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쉬르와 촘스키의 논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지향했던 언어에 대한 태도를 가져와서 '당신들 왜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보지 못하냐'고 깐다.  

부르디외는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언어를 둘러싼 '나'와 '너'의 관계를 순수하게 바라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언어 공산주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언어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맺는 언어를 둘러싼 관계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의 하비투스를 감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소쉬르와 촘스키는 순수하고 순진하게 이 세계의 언어를 고찰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 논지에는 자연스레 사회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넘은 사회학적 오만이 들어 있으며, 이 '사회학적-'을 강조하기 위해 비교대상에는 전혀 '사회학적-'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 상황 설정이 발생한다. 허나 이상길 교수의 훌륭한 지적에 따르면, 소쉬르의 언어학이 '순수'언어학이라 불리울 만큼 진공 상태에 있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소쉬르는 그 나름대로 언어의 사회성을 고안하기 위한 주장들을 펼쳐왔다. 다만 그 초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상길의 논문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개인적인 파롤’ 대 ‘사회적인 랑그’라는 이분법 위에서 랑그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다만 이 때 소쉬르가 중시하는 특성은 부르디외의 관심사와는 사뭇 다르다. 소쉬르에 따르면, “랑그는 개인 외부에 있는, 언어의 사회적인 부분으로 개인 혼자서는 그것을 창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일종의 과거의 계약 덕분에만 존재”하고 “어느 누구의 뇌 속에서도 완전하지 않으며, 대중 안에서만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Saussure, 1972: 30-31).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와 같은 개념화는 발화 주체들 외부에서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부과되는 규범체계라는 언어의 속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124쪽~125쪽).


그다음 촘스키는 아예 부르디외와 언어를 보는 관심사와 태도가 달랐다. 고로 부르디외가 취하는 '사회학적 그물망'에 촘스키가 과하게 끌려온 점이 있다. 촘스키는 부르디외가 바라보는 사회 현실 내 언어의 경험적 다양성보다는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언어능력이 갖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이상길은 촘스키가 취한 연구적 관심사에 대해 부르디외가 비판하려는 그 시선이 촘스키의 시선을 대체하거나 무효화할 꺼리인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이 논문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외적 관심사에 대한 과잉'이다. 부르디외는 언어가 갖는 메시지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이 메시지를 만들어낸 사람의 '상황' 혹은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쉽게 말해 알맹이는 대충 보고 껍데기에만 집착했다. 껍데기가 갖는 중요성에 과하게 천착했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계급을 비롯해 사회적 조건이 평등하지 않은 조건에 있다면, 부르디외의 레이더는 자연스레 A라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봤을 시 A의 경제적 수준, 교양 상태에 따른 말투와 복식/격식 등을 따지려 든다. 허나 과연 메시지를 둘러싼 하비투스가 부르디외가 기대했던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로 부르디외가 늘 강조했던 하비투스라는 이 개인의 실천을 좌우하는 행동의 성향 체계는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 강제된다. 부르디외는 닫혀 있지도 않으면서 열려 있지도 않은 하비투스라는 개념에 대해선 유난히 자신이 강조하는 '성찰성'에 연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설명했던 '언어 시장' 속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관계'를 어떻게 사회학으로 분석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침이다. 그는 언어하비투스, 언어시장, 가격형성의 법칙 같은 경제 용어를 동원해 언어 구사에 내재된 '불평등한' 상호작용에 딴지를 걸고 있으며, 이 딴지는 어느 정도 속이 시원하다. 다만 부르디외가 꿈꾸는 사회학의 세계는 이 사회가 사회학으로 그려지지 않았을 경우, '숨 쉴 틈'을 주는가에 조금 미심쩍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통렬한 어퍼컷이 간혹 상대를 잘못 조준했을 경우에 대해 부르디외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부르디외 당신, '사회학적-'이 아니라면 삐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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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타이슨과 조이스 캐롤 오츠. 노벨문학상에 자주 거론되는 대작가와 한때 그 누구도 무섭지 않았고 끝없는 막장인생까지 가보았던 권투선수가 왜 사진을 함께 찍었을까. 아버지를 따라 권투 보는 것을 즐겼던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87년『권투에 대하여』라는 인상적인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샌프란시스코대출판부에서 나온 이 에세이집은 '달콤한 과학'이라 불리는 권투의 세계를 오츠라는 여성의 눈에서 재구성한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알게 된 뒤, 본문 일부가 공개되어 있어 조금씩 읽고 있는데 묘사가 생생해서 꾸준하게 더 읽고 싶어졌다.

『권투에 대하여』에는 특별히 마이크 타이슨이라는 인물이 조망되어 있고 한 챕터를 차지한다. 80년대이니 이땐 마이크 타이슨의 막장 말년보다는 아무래도 권투라는 스포츠를 싱싱하게 볼 수 있는 역경의 드라마, 어떤 남성성에 비롯된 권투 예찬의 가능성을 짚어볼 흔적들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말년의 마이크 타이슨은 어느 막장인생을 살아간 남자들의 전형적인(?) 회개 과정을 겪고 있는 듯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마이크 타이슨은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탐독하고 있으며, 니체의 책이 좋더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한 '얌전이'로 바뀌어 있다.
몬스터짐에서 소개한 기사를 찾아보니, 홀리필드와의 '귀 물어뜯기 사건' 이후 시간이 지나 타이슨은 홀리필드에게 직접 사과했고, 홀리필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타이슨은 양념 소스 사업을 하고 있는 홀리필드의 광고에 출연해 
"이 소스와 함께라면 홀리필드의 귀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단다.

여전히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인생은 이래서 재미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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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록해두는 인물은 스위스 출신의 문학연구자 장 스타로뱅스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에서 가장 먼저 그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세넷의 이 책 중 장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이 인용된 「상처를 주는 동정」편을 보면, 왜 세넷이 스타로뱅스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넷이 참조하고 있는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은 스타로뱅스키가 쓴 에세이 『후한 부조Largesse』에 기인한다. 이브가 아담에게 건네는 독사과를 담은 코리지오의 그림에서 출발한 스타로뱅스키의 사유는 '돕는다는 것'의 폭넓은 의미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도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했던 살로메의 시도 등도 포함되어 있다.-성경에서 헤롯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하는 살로메의 간청은 단순히 사도 요한이라고 하는 개인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선물'이란 의미에서 나타나는 그릇된 권력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의 '저주의 몫'과도 걸쳐 있는 부분이 있을 듯하다)

스타로뱅스키는 기부라는 사회적 실천을 비롯해 이처럼 도움에 대한 다양함을 고찰함으로써 세넷이 바라보는 '현대
적 감정으로서의 동정'에 영향을 끼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마음씨를 쓰는 것일 수 있지만, 권력의 시혜라는 비판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건 사실 누구나 아는 지점이기도 하나 그냥 시선의 통쾌함만으로 가두기엔 무거운 주제이고 계속 다뤄야 할 주제다.

+

스타로뱅스키는 장 자크 루소에 대한 탁월한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아카넷에서 나온 『투명성과 장애물』은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무척 읽고 싶은 내용이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형식으로서 투명성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싶었던 루소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에 마주하면서(장애물) 자기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스타로뱅스키는 이 두 가지 관점을 주요 포인트로 해서 루소의 삶과 사상을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루소의 책 내부 분석을 통해 파고들어 보려 했다고 한다. 

* 물론 이러한 투명성과 장애물이란 구도는 내가 '택해서 보려는' 관점에서, 루소가 취하는 표현 방식으로서의 투명성과 이에 대한 역반응이지만, 책은 사실 문명과 자연, 인간이란 삼각 구도에서 루소가 그리는 큰 그림으로서 투명성과 장애물을 더 보려는 듯하다. 

최근 '투명사회'가 뜨면서 '투명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데(나는 개인적으로 이 논의는 국내 사회과학자들도 충분히 진지하게 잘 다뤄온 테마라고 생각하고 관련된 좋은 기존의 연구물도 꽤 있다고 본다)
장 스타로뱅스키가 바라보려는 투명성의 전개 과정은 조금 특이해 보여서 마음속으로 도그지어를 해본다.

+덧붙임) 장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은 parti pris, 우리말로 하면 '편견'이라고 하는 루브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이 프로그램의 첫번째 큐레이터는 자크 데리다와 영화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였다. 스타로뱅스키는 이 프로그램의 세 번째 큐레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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