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는 사람 얘기. 요즘 산이의 <아는 사람 얘기>를 자주 듣는다. SNS시대의 대표적인 미묘한 감정싸움 테마 중 하나는 자의식(1인칭이란 감정의 과잉)일진대,
나는 뭔가 오프라인 정서, 혹은 인터넷 게시판 문화 정서에 가까운 '아는 사람 얘기'란 이야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2. "이 얘기 내 친구에게 들은 얘기인데" "이 얘기 아는 사람한테 실제 있었던 일인데"에서 시작되는 섹스 경험담, 황당한 연애담, 직장일 등등. 

3. 아는 사람 얘기란 결국 나를 '나'로 전환시키는 작업. 나 한 사람이 꺼낸 다른 누군가에 대해, 청자가 꼭 찝어내지 않아도 되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의 전환.

4. 아는 사람 얘기 효과는 나를 다치치 않고도 남에게 나를 가린 채 남의 의중을 물어볼 수 있다는 거지만. 더 재미있는 건 산이의 노래처럼 이거 아는 사람 얘기다라고 수차례 강조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임을 청자가 알아차리길 원하는 지점. 이때 다가오는 사람의 연약함이 짠하면서도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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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3-2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사람 얘기해 줄께..." 정말 오프라인 정서죠...^^ 노래도 좋고...뮤비는 충격이고...

얼그레이효과 2014-03-28 09:30   좋아요 0 | URL
아 뮤비는 못 봤는데 함 봐야겠군요^^
 

















1. 좌절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_ 열정과 좌절의 거리가 가깝다는 걸 요즘 다시 한번 느낀다. "뭘 어쩌겠어요"라는 말이 이야기의 귀결이 아니라 아예 처음이 된 사람들. 이어 나오는,

2.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서울을 떠나 살고 싶었지만"이란 옛 소망들. 이 소망들을 마치 헐리우드 영화 속 어린 소년이 다락방으로 올라가 먼지 가득 낀 상자를 열어 챙겨보는 야구카드처럼 아련하게 대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잔이 허전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3. 사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선한 얼굴 속을 어슬렁거리는 위태위태한 울분을 마주할 때면 인상을 찌푸리며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은 저 울분의 기운에 행여나 스스로에게 안타까운 짓은 하지 않으려나 싶어 주변에 있는 뾰족한 것들의 유무를 눈짓으로 쳐다본다. 

4. "기술이라두 배워놓을 걸" "장사나 해볼까나"가 어느새 삶의 클리셰로 인식되는 순간, '아 또 이 이야기야'란 징그러운 깐깐함을 마음에 품을 때도 있지만, 선함과 울분이 섞인 저 고요한 얼굴들이 겪었을 마음감기에 이내 필요한 침잠함을 안으로 받아들인다.

5. 아주 예전에 책이 나왔다며 만나자고 한 편집자 A가 기억난다. 책은 사실 뒷전이었고 울분데이였다. 엉엉엉 우는 와중에 미안했는지 책을 바삐 만들어 오자가 많아 미안하다고 화제를 돌린다.
그땐 건방지게 그 사람의 엉엉엉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어서 억지로 그 친구의 통곡을 다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훈계를 했던 것 같다.

6. A에게 내가 우선 해줘야 했던 말은 "오자여도 괜찮아"였다는 걸 이제서야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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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생님'에 대해. 누군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일이 한국 사회엔 참 많은 것 같다. 이유도 다양하다. 대학 때는 "우리를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 부르게" 같은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중한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던 듯한데 지금은 그때 왜 그렇게 불렀어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지금은 그만두었다),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은 의례였고, 임기응변의 기술이기도 했다. 연차가 쌓여도 직장에선 늘 막내여서 전화받을 일이 많았다. 약주를 드시고 책의 무엇무엇을 따진 분부터, 해외에 있는데 책을 사려고 하는데 자식 녀석들이 직장에 가서 온라인서점을 이용할 줄 모른다며 방법을 좀 가르쳐줄 수 있냐는 어르신의 상담, 혹은 누구나 겪지만 업무 협조 요청을 받을 때 그 다양한 사람들을 어색하지 않게 쉽게 부르고 때울 수 있는 건 '선생님'이었다.

3. 선생님을 둘러싼 묘한 뉘앙스는 책을 쓰는 이와 책을 만드는 이 사이에서 발생한다. 선생님은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인에게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한 가장 일상적인 소통 수단이다. 좋고 겸양된 감정의 바탕 안에서 선생님은 연극성을 발휘해야 하는 어떤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4. 사실 여기까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근데 책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편해서 잘 꺼내기 싫어하는 구도가 있는 듯하다. 그건 편집자가 편집자를 '선생님'이라 불러야 할 위치가 올 가능성이다. 가령 누군가가 편집자를 그만두고 글을 좀 써보려고 한다 치자. 그러면 누군가는 빈말+진심을 담아 "와 그럼 이제 ㅇㅇ씨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네가? 저자가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혹은 나도 너 같은 꿈이 있었다는 아련한 부러움일일지도). 

+물론 저자들도 '선생님'이란 호칭에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다. 

5.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게 아니라, 이런 구도를 만들어버린 출판계 내/외부의 아쉬운 감정 영역과 그 요인들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선생님으로 부를 수 있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었다고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것 같다. 헌데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 호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쌓인 게 솔직한 마음이다. 물론 호칭 하나의 문제를 단순히 건드리고자 그런 건 아니다. 이 호칭 하나를 둘러싼 '출판이란 감정의 다발'이 그리 건강하진 않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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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03-17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 님:
1. '선생님'에 대해. 누군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일이 한국 사회엔 참 많은 것 같다. 이유도 다양하다. 대학 때는 "우리를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 부르게" 같은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중한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던 듯한데 지금은 그때 왜 그렇게 불렀어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교수님들께서 그렇게 자청하셨는가요?

제 판단엔 학생들 쪽에서 먼저 자진해서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교수님”을 교수님이라 부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 쪽에서 그렇게 불러달라고 (은연중) 말씀하신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왜 교수님을 교수님으로 불러주지 않지, 너희들 이상하구나’ 하는 묘한 ‘섭한’ 눈빛 같은 게 당시에 떠돌았던 것 같고요... 아니 교수님들은 그 호칭에 대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담담한 입장이셨던 같네요. 주로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 쪽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많이/즐겨 썼을 거예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친근감 때문일 겁니다. 교수님 하면 뭔가 권위적이어서 입에 올리기에도 뭔가 거부감이 들었더랬죠. 의례적인 상황일 때만 의례적으로 교수님 호칭을 썼지, 그 밖에는 거의 모두 선생님 호칭을 썼던 것 같네요. 근데 또 교수님과 일대일 대면할 때는 그 권위에 눌려 “교수님”이라는 의례적 호칭을 쓰게 되더라는...


얼그레이효과 2014-03-17 12:58   좋아요 0 | URL
이런 표현이 그렇지만, 다니던 학교가 '진보적인 색채'가 있던 곳이라(근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런 학풍과의 연관성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구요) 교수님들이 다들 겸양된 태도를 지닌 분들이라서 혹 교수님, 교수님 했던 친구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러달라고 한 그런 풍경들이 기억에 남네요. 제도상으로나 그런 강권은 아니었구요:)

1111 2014-09-0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대학생일 때에도, 교수님들은 '선생님'으로 호칭되길 바라셨어요.
"너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를 첨언으로 두고.
 



독일계 미국인 심리학자 헤르베르트 프로이덴베르거. '소진burn-out'을 하나의 학적 용어로 처음 만들었던 인물이다(이때가 1970년대). 

흥미로운 부분은 프로이덴베르거는 '소진'이란 용어를 만들었을 때, 평범한 일반 시민(자기 소모를 기꺼이 응하는)을 연구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남을 돕는 의사나 간호사 등 '조력자'가 직업인 이들의 심리를 연구하다 나왔다는 점(물론 연관성은 있겠지만, 그 당시의 어떤 맥락을 더 파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진과 조금 다른 해석 혹은 추가된 해석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

이와 별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에는 번아웃 신드롬이 일상 속 개인에게 끼치는 난제가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209~211쪽 내용은 소진된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일상 자체가 쉼이 아니라 또 다른 지옥임을 고백한 인터뷰 내용이 나와 있다.

"이제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건만, 집에서의 생활도 평범한 이들의 것처럼 순조롭지는 않았다. 매일매일 하는 일들이 너무도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손쉽게 해치웠던 아주 사소한 행동들마저 이제는 일일이 선택과 결정을 거쳐야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한 여성은 샤워하고 머리 감는 데만도 하루 종일 걸릴 정도였어요라면서 몇 시간 동안 화분 하나만 노려봤던 때가 생각나네요. 물을 줄지 말지 결정하기가 그렇게나 어렵더라고요 하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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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은 말의 덧없음, 소위 침묵예찬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자 같은 조언에 반감이 생긴다.


2. 침묵예찬이 '어떤 침묵'이어야 하는지 고민되지 않고, 마치 애서가나 인문주의자들의 감흥에서 비롯된 무형의 선한 감정으로만 떠도는 것 같은 형태에 대한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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