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마음의 습속'과도 연관이 있지만, 사실 파머의 책을 접하고 나서 떠오른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였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로 출발점을 끊는 보드리야르의 그 무심한 문체, 사막을 통해 현대사회의 침잠된 정치적 상태와 미국 민주주의의 우울을 풍경과 엮는 인트로는 책을 읽는 당시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파트인 「권력의 종언?」에는 '제4세계'라는 표현과 '역설적 신뢰'라는 용어가 울림을 준다. 해방과 팽창, 더 이상의 적대란 없는 시기에 외려 나타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배제는 '깨끗하고 완벽하게'란 구호 아래 더 견고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해 잊힌 사람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밀어붙이는 강박적인 행복증 전파, 정말 사람들이 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협박조로 구성하는 권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런 권력의 망에 있는 이 사람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지도에서도 잊힌 사람들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의 언어에 묶인 사람들이다. 보드리야르는 지워질 운명과 소멸의 통계 곡선에 있는 좀비들을 양산하는 이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그 좀비들을 '제4세계'라고 명명한다. 여기서의 제4세계란 제3세계의 추락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 권력의 통치술이 낳은 비극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챕터에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꺼낸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인들이 정치의 실재에 대해선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합의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권력이 정부가 적절히 관리해주기만 한다면, 정치인들을 향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길 좋아하는 게 미국인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신뢰에 대한 개념은 '역설적 신뢰'다. '이상하다. 저 정치인은 내가 보기에 갈수록 형편없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고 빨아주는거야?' 보드리야르의 역설적 신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설적 신뢰는 점점 더 실패하고 점점 더 자질이 없는 이를 위해 부여되는 지지의 감정이다. '자 이제 천년왕국의 그날이 왔소'라는 예언이 실패되어도 그 예언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거를 믿는 종교인들의 비유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레이건 정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비판한다. 역설적 신뢰가 무서운 것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패의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감각의 개입을 실천한다. 출판사에서 잘 만든 부제처럼 '희망도 매력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이 미국 문명 여행기에서 보드리야르가 경계하는 것은 '어 저곳 나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건데, 직접 보니 신기하다' 같은 확인의 자세였으며, 이 "갱년기"와도 같은 미국 사회가 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분위기였다. 

"여행은 끝났다"라는 말이 책의 말미가 아니라 거의 책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커 파머가 어떻게든 이 모난 자식들을 보듬으면서 착한 장남으로서 민주주의의 상태를 복원해보려 한다면, 보드리야르의 이 미국 기행은 늘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둘째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정서가 다분히 느껴진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상태의 사회는 아니다'라는 공통의 정신은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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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시대의 어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사실 찾기도 하지만 이는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의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라는 발언이 담긴 인터뷰를 비롯해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런 움직임의 의도가 보이는 서적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기획 작업은 아니다. 최근의 분위기가 갖는 차별점에 대해 '인문적-'이라는 성격 부여를 꼽고 싶지만 이는 그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기우는 것 같다. 


2

외려 마음이 가는 쪽은 '꼰대포비아'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만났다는 것 아닐까 싶다. 꼰대라는 적대적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동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꼰대라고 예상했던 쪽이라면 그 확인 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은 좀 더 클 것이다. 여기에 '늙음'이 주는 잔잔함과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존경이라는 정서는 보다 굳건해진다.

하지만 황현산 이후 시도되었던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그 성공의 여부를 평가하자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정일의 최근 책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을 통해 해석의 열림보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에 더 가닿은 듯하고,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이 책을 만든 자들의 지나친 고개숙임이 페이지 내내 느껴져 부담스럽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 인문학의 기념비적 사유라는 호칭을 두른 건 책 내용을 읽어보건대 김우창의 지난 공로를 생각하더라도 과한 호평이라고 생각한다. 


3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우리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우리 편이네?' 하는 시선을 주는 흔적의 모음이다. 이 흔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요즘 인기 있는 구호와 잘 맞물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볼지에 대한 고뇌의 영역은 주지 않는다. 속은 시원하지만 이 시원함을 넘어선 찝찝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4

이런 찝찝함의 영역을 고민하게 된 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면서였다. 사이드는 일찍이 말년성lateness을 고민했던 아도르노의 작업을 해부하면서 말년성이 오늘날 사회에 던지는 가치를 모색한다.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조금 소화해보면, 말년성이란 인간이 시간을 통해 맞춰갈 수밖에 없는 신체-정신-건강의 영역이 문학-예술과 결부되었을 때 전자의 영역이 슬그머니 협상하는 인간의 한계에 맞선 '화해불가능'의 예술적 태도를 말한다. 더 나아가 '화해불가능성'이란 사람들이 뻔히 예상하는 처음과 끝이 선명한 통일된 큰 그림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없는 예술 작품 속 단절의 상태를 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를 초월해 뭔가 극도의 숙성된 느낌을 보여주리라 예상된 노령의 솜씨에 "야 이거 내가 한번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격한 반응이 동반된 아마추어리즘이 발표된다면 우리는 이를  그냥 "이 사람 이제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라고 쉬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해석에 탄복하면서 그를 범상치 않은 말년의 사상가로 위치짓고 싶은 건 바로 이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의 해석은 그런 말년성을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을 갖고 이 감각을 곧이곧대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조금 비틀어버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포장해버리는 단계는 말년성의 아름다움이었다. 


5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주창했던 말년성을 실천했던 이들은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쾌 대신 불쾌를 택했다. 그럼으로써 주변에 머물렀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택한 불쾌의 전략은 오늘날 그들을 계승하려는 후예들이 고스란히 학습해 써먹고 있기에 그들이 마냥 외롭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로 뭔가 움츠렸던 울분의 해소 정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비판의 복잡다단한 결이 윤리의 호소로 환원되었으며, 이런 형식은 기껏해야 온화함 속에 묻어난 단호함 혹은 김구라 같은 직설/독설이란 형식을 빌려 빚어내는 통쾌함의 도모일 뿐이다.


6

 나는 더 찝찝한 어른이 보고 싶다. 그가 대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하고 싶은 인문적 아포리즘 따위가 아닌 살면서 부대낀 그 나름의 경험담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골계로 표현되었음도 싶다. 이를 위해선 '꼰대'라는 표현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한 평어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피아를 식별하는 격분의 언어로 전락하진 않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랏 이 정도면 나 이 사람이 준 의외의 면에 감동받아 이 사회 그래도 아직 살만해'라는 정서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근데 이 사람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아 이 이야긴 왜 꺼내? 사람 불편하게'의 정서를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서의 형식성을 고뇌 끝에 이미 내놓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는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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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란 이론적 전장이 우리에게 끼치는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새삼 고전 사회이론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란 학자들의 진부한 고백을 넘어 이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매혹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담은 관련 논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2. 사회적인 것을 오늘날 사회의 종언이란 조금은 섣부른 비평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자들이 외치는 평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학술적 쟁투는 계속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쟁투의 형태는 사회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경험적인 것-실천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논리 게임의 도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평의 기능을 탑재한 채, 사회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재정리하고 공적/사적 영역의 공간에 속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의 목표'를 끌어내는 기획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 후자의 측면에서 먼저 우리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묘한 유사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견지한 상황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해보았다.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김홍중의 견해에 따르자면,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서 연상되는 행위신학의 귀결은 메시아로서의 '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란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체할 무한한 가능성의 주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 희미한 주체의 상정 속에서 기적을 바란다. 아렌트에겐 이 기적이 이뤄지기 위해선 기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가 아닌, 단지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행위능력만을 가진 '나'의 불완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는 아렌트가 강조하는 '말들의 사회'에서 참여하는 공적 주체로 나아간다. 


4. 아렌트가 고안한 메시아로서의 나는 사르트르가 사회적 집합들의 세 요소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조절적 제3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사르트르의 논의가 좀 더 사회학적인 향취가 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적 제3자란 "우두머리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지시와 지침을 통해서 타인들을 위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각자다." 


5. 사실 사르트르에게 조절적 제3자란 개념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가능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획어일지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사유의 윤리』에서 잘 정리해놓았듯이 기본적으로 사르트르의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에는 인간의 수동성/능동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은밀한 집착이 담겨 있다. 그 집착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수동성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 사회성의 평균적인 형태는 분리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이 집착이 사회적 집합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매력적인 기술을 뒷받침하면서도 사르트르가 갖는 대중을 향한 일관된 원칙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에 대한 과신을 낳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대중에게 할 수 있다를 더 주입시키려는 계몽적 기획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 바디우의 깔끔한 정리를 참고해 짧게 재정리해보면, 사르트르는 집합적인 수동성 100의 형태를 계열이라 보았고, 이 계열의 수동성을 깰 집합 형태가 '융합'이라 보았다. 그리고 조직은 정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서 여기서 조직이란 융합이란 집합형태가 제도로 구축되는 형태다. 사르트르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맹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이란 집합 형태에 있는 개인은 맹세를 통해 배신이란 감정을 체화화게 되고 이러한 배신을 극복하는 것은 맹세 아래 만들어진 형제애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애는 늘 공포와 동반된다. 이 지점에서 조직에 깃든 제도는 능동성이 발휘되었던 융합 상태에 있던 개인을 다시 계열 상태로 돌려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제도의 위치에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7.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에 대한 비유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동일한 이유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선다는 행위가 바로 이 줄 서기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게 무관심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와 너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인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수동적인 종합' '무력함의 통일성'이라 보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로 명명했다. 허나 융합 형태에 오면 사르트르는 "다 같이 항의하러 갑시다"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바로 이 인간의 존재가 '조절적 제3자'이며. 이 존재는 '여느 인간'이다. 이 여느 인간인 조절적 제3자의 말 걸기를 통해 상호성이 구축되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가 갖고 있는 수동성, 무기력은 녹아내린다. 


8. 근데 바디우의 문제제기가 재미있다. 상식적이라 더 재미있다. 

'아니, 사르트르. 당신 인간을 그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다며? 근데 어떻게 인간이 무슨 계기로 그렇게 서로를 인식하며 뭔가를 바꿔보려는 능동적인 통일성의 존재가 된단 말이야?' 사르트르는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려와 이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사르트르에게 종말론적 순간은 곧 인간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분리된 상태를 극복할 사건인 듯하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종말론적 순간은 곧 계열이 용해된 융합의 순간이다. (이 부분부터 바디우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것 같다)


9. 바디우가 파고드는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허점은 계열이 용해된 융합 단계로 접어드는 대중의 상태가 늘 '반란'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르트르의 경직된 도식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의 문제는 대중을 능동성/수동성의 차원으로 정리하려는 사르트르의 감정적 개입이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지나친 차가움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민의 능동성이 반드시 수동성으로 회귀하는가란 의문을 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수동적이고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 심취해 있었다.


10. 허나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은 아렌트와 더불어 '사회적인 것'의 실천성을 두텁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의 논의에 유익한 나름의 중요한 도해라고 여겨진다.사회 속 개인을 무기력, 수동성/능동성이란 정서적 차원에서 보려고 한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은 감정사회학적 해석의 중요한 영역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합리성-합당성-합정성 모델에 기초하여, 우리는 개인의 수동성-능동성에 선/악의 가치를 덧씌우지 않은 채 좀 더 입체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중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도해를 참조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베버처럼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짐멜처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뒤르켐처럼 행위 규칙과 도덕적 규범이란 요소를 통해, 루만처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논의로 전개되어왔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사회적 집합들의 계열-융합-조직의 단계를 앞선 '사회적인 것'의 네 요인과 결합해 해석해본다면, 이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두터움을 도모하는 데 나름의 유익함이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유익함이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매혹일 수 있다. 물론 이 매혹은 우리가 서 있는 세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제47집 5호, 2013,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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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월적 사유의 섬세함을 더 이상 되찾을 수는 없지만, 모든 질병을 세심하게 예방하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노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셸 푸코의 국가 박사학위부논문 서설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설」(문지에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로 출간되었다)을 읽다가 일흔대 칸트의 당시 상태를 짐작해보는 푸코의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노년의 역사'류의 책에서 어느 역사학자나 한번쯤은 언급할 진부한 문장 같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이 끌린 이유는 몇 페이지 뒤 나오는 '소원들의 등록부'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 "철학은 자신의 총체성 안에 건강과 질병의 관계를 포함시키면서, 자신의 절대적인 지평을 형성한다. 확실히 [철학의] 이러한 우위성은 인간이 가진 소원의긴급한 성격에 의해 은폐된다. 우리가 오래 살거나 건강하기를 희망할 때, [이 두 가지 소원 중에] 오직 첫번째 소원만이 절대적인 것이며, 죽음을 통한 해방을 원하던 병자는 [정작]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언제나 [죽음의] 유예를 소원한다. 그러나 소원들의 등록부에서 절대적인 것이 삶의 차원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푸코는 이 표현이 나오기까지 칸트의 『인간학』출판과 관련된 사정들을 다 뒤지고 개연성을 만들어나간다. 이는 단지 자신만의 칸트 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칸트가 묻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 푸코 자신이 관심 있었던 철학과 의학의 관계를 전자와 엮는 것을 넘어 생명 자체에 대한 탐문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 푸코의 추적 과정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학자들'에게 노령 혹은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봤다. 출판인들은 가급적 학자들의 총명함에 치우쳐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혹은 그 총명함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비판하고 과한 훈계도 보탠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후추보다 소금이 많은(이는 나이듦에 대한 오에 겐자부로의 비유다) 나이를 맞이하는 학자들이 갖는 어떤 좌절감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흔히 안타까움이란 표현으로) 미화되어왔다. 혹은 출판인들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류의 시선으로 뒤늦게 '학문적 비아그라'를 복용한 이들의 성과와 흔적을 찾아 노령과 거기에 얽힌 지성을 예찬한다.

4. 그런데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학자들의 일반적인 궤적을 이야기한 것을 고스란히 따르자면, 이런 예찬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자신의 왕성했던 문헌 소화 및 탐독 능력을 떠올리며 한때의 별이었음을 추억한다. 이를 감내하고 무리하지 않은 채 여느 직장인처럼 살아갈 뿐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디 지식의 최적화된 상태를 담아내는 게 상식이지만, 총명함을 향수로만 품고 살수 밖에 없었던 학자들의 삶을 제대로 다루진 않았다. 총기를 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건 사람 몇 없는 조용한 학회에서 늙은 고단함에 하품을 몰아 쉬거나, 심지어 코를 골거나, 자신의 질문 차례에서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5. 오랜만에 쓴 논문은 으르렁거릴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 학자들이 보기엔 헛다리 짚기 일쑤고, 진부한 개념어 일색이다. 아이러니는 그 논문의 결과는 결국 지금 그 늙어가는 학자가 쓸 수 있는 최상급이라는 것이며, 이런 간극을 자기만 모를 때 생기는 잡음은 그 늙어가는 학자들이 떠안고 가는 짠한 운명일 수도 있다.

6. 요즘 독서라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거기서 앎의 최상급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각각의 책이라는 사물을 보면서 나는 여기에 투여된 총명함이라는 것 말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발휘할 수 없는 학자들의 사회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히 그들이 오랫동안 학자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관행적인 트리뷰트는 물론 아니다. '어쩌다'로 시작하든 '반드시'로 시작하든 학자라는 굴레 안에서 자신의 지적 감퇴를 인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학은 푸코가 말한 다음의 당연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령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때이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배한다." 

7. 자신의 지적 황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남몰래 감추어 작성했던 소원들의 등록부를 찾아 들추어볼 때다. 여기엔 예상 외의 흥미와 깨달음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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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가?_ 오에 겐자부로의 《'나의 나무' 아래서》가운데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람을 보았던 눈에는 옳은 부분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틀린 부분도 확실히 있었는데 그것은 '저 사람은 안 된다'라는 식의 어른들의 말투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과 더불어 그 생각을 취소합니다. 어른들이 '저 사람들은 훌륭해'라고 하는 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항상 그것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책에선 겐자부로의 워너비 두 사람이 소개된다. 한 명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사환 아저씨다. 아저씨는 야생의 사나움을 고스란히 공포로 뿜어내는 들개가 학교로 내려오자 이에 맞서 벌벌 떠는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의 나이는 겐자부로의 귀여운 비유처럼 후추보다 소금이 많았다. 

















3. 다른 한 사람은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이를 체험했던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학생들을 도피시키고 책임을 지려했던 교장선생님의 행동과 최후(교장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열쇠를 손에 쥐고 숨을 거두었다)를 자신의 눈과 생각대로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했다. 이 학생은 커서 학자가 되었는데 겐자부로는 이 학자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학자의 위엄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진 당시 그 학생의 이름은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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