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나온 《월간 잉여》16호에 「'평일 낮'이라는 감정문화」라는 이야길 써봤다.

'평일 낮'을 누린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죄책감, 자기-과해석, 노동에 대한 시선 등 이런저런 것들의 소묘를 담았다.


아래는 내용 일부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거짓이다. 그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느낌일 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오늘날 시간만큼 잉여를 애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없으리라. 간혹 섬세한 잉여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말들의 저의를 시간에 초점을 맞춰 짐작한다. ‘오후 세시’에 걸려온 전화,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를 시작하면 “어……쉬고 있는데 미안해요” 같은 배려에는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 팔자 좋구나’ 같은 꿍꿍이가 있진 않을까란 의구심이 스며드는 것이다. 잉여가 될수록 시간은 점점 하나하나의 느낌으로 정리된다. 내게 다가올 (대부분 따가운) 반응이 예상되고 혼자만의 대화는 늘어간다. 행동은 정작 일어나지 않았는데 공상은 풍부해진다.


그렇다고 위에서 인용한『불안의 서』속 페소아의 시선 때문에 우리에게 24시간-표준시의 현실을 마련한 샌포드 플레밍의 노고를 간과하진 말자. 어찌 보면 시간이 하나의 느낌인 건 천차만별이었던 곳곳의 시時로 구성된 세계를 24개의 표준면 안에 집어넣길 원했던 그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4개의 면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행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며 행동한 나와 행동하지 않는 너, (더 노골적으로) 노동한 나와 노동하지 않는 너를 짐작해보기도 한다. 실은 플레밍의 노고 가운데 잉여에게 상처를 덜 주는 형태란 “지금 거기는 몇 시니? 잘 시간인가?” 하는 질문을 비교적 안정되게 해볼 수 있는 정도다. 내가 있는 나라와 당신이 있는 나라의 시차를 헤아려보는 것 안에서 잉여의 스트레스인 “이 시간에 넌 뭐 하니?”가 끼어들 경우는 그리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의 분석을 길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잉여를 진하게 규정하는 특성인 ‘비-쓸모’를 둘러싼 시차는 직장이란 물리적·심리적 공간으로 인해 분명해진다. 이를 더욱 부추기는 시간은 바로 ‘평일 낮’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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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1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김샥샥이 얼그레이효과님인가요? ㅎ
저도 월간 잉여에 한 편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ㅋㅋㅋㅋ
이미 썼던 글이긴 하지만 푸하하하
저도 월간 잉여 애독자입니다. ㅎ

얼그레이효과 2014-07-18 11: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루쉰님:)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1967)를 읽다가 '연락 없음'의 시대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이 소설이 나온 시절만 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나 000야"로 시작되는 말이 친숙했을 것이다(이 소설의 시작처럼). 성과 이름을 큰 목소리로 다 꺼내고, 상대방이 "누구....?"라고 하면 허허 하며 혀를 끌끌 차고 가슴을 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때 연락 없음을 명증하는 인사란 '환골탈태'나 '금의환향'의 서사에 가닿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고추장사하던 박씨네 코흘리개 아들 흥수가 저렇게 말끔해져서 돌아왔네라는 반응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러다가 흥수의 성공기가 흥수의 옛 친구를 통해 흘러나오게 되고 거기엔 학벌이나 재력, 땅 이야기가 포함될 것이다. 


요즘은 조금 시들해진 것 같지만 한때 많은 이를 휘감았던 연락 없음의 시대성은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이름의 서사였던 것 같다(『오늘의 거짓말』에 나온 어느 구절처럼). 허한 말들의 과다와 자극에 지친 이들을 씁쓸한 맛으로 위무하는 이 서사는 도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서 연유하는 가녀린 위악에 맞닿아 있었다. 이 가녀린 위악은 서로가 어차피 이 약속의 달성 유무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속으론 알고 있지 않냐는 룰을 '암묵적'으로 숙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에서 출발했다.


"잘 지내지?"라는 인트로도 없이 거두절미한 용건 제시가 도착했을 때, 인연의 길이와 넓이를 가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죄송하지만, 제가 폰을 새로 해서요"라는 인사법은 사실과 과해석의 저울질로 구성된다. 과해석에는 간소한 인연을 추구하겠다는 자기 선언의 합리화 혹은 상대방이 행여나 기분 나쁘지 않을까라는 지나친 염려가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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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과가 독해로 이어지는 작품들이 있다. 은희경의 「짐작과는 다른 일들」도 그랬던 것 같다. 제대 뒤 처음 샀던 소설집인 『타인에게 말 걸기』에 수록된 이 작품이 나는 묘하게 끌렸다. 문장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포획한 데서 온 포만감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삶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거야' 하는 자기위로로 문장들을 읽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예는 결국 내가 지금 이 작품을(그리고 이 소설집 전체를) 읽는 게 아니라 '훑고 있었구나'란 직시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10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와 대박' 이나 '쩔어' 같이 취향의 젊고 명쾌한 반응 대신 그래도 나이가 한두살 먹어간다고 뭔가 속이 먹먹해졌다. 작품 속 이 여인의 삶을 알 것 같다는 느낌 앞에 '나두'라는 말을 자연스레 넣는 게 좋다가도 좀 그러했다. 소설은 제목을 충실히 따른다. 어느 한 여성에게 그리고 그 여성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나타난다. 결혼, 이혼, 죽음, 섹스, 아이, 직장. 삶의 한 단계라면 단계인 것들이 너무 빼곡하지 않게 압축적으로 잘 담겨 있다. 


사실 짐작이라는 말 자체가 어느 정도 다가올 일들의 예견을 감지하고 있다. 사람은 그래서 선택을 두려워하고 짐작이란 자신이 좀 더 현명했었을 수도 있었다는 과거의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작을 감추어놓는 건 내 앞에 다가올 삶에 대한 수긍이 출처 없는 행복일지라도 행여나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먹은 마음이 미련이 될지, 현명한 선택이 될지, 오랜 회한이 될지 매번 정하라고 한다. 


작품은 겉과 속의 천지 차이를 대조하며 짐작과는 다른 일들에 대한 충격을 계속해서 주입시키기보단, 이것이 어느새 삶인가라는 체념의 기운으로 조용히 초대한다. 이 작품 안에서 누군가에게 덧씌우고픈 '가면'이란 용어는 짐작과는 다르게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선함과 애씀에 반한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룸이 결국 가면의 확인이었다는 전형적인 서사의 기운을 넘나들며 조금씩 그 기운과 결별하는 이 작품은 누군가를 향한 기대, 누군가를 향한 실망의 경계에서 벗어나 초탈해지려는 사람들이 갖는 세속의 창백한 우울을 풍긴다. 이 우울은 결국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짐작과 가늠의 수준을 넘어서는 유일한 문구인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장자)라는 말의 운명에 가닿아 있다. 


소설을 덮으면서 한때는 짐작이란 것이 주는 예상치와 현실치의 간극, 그 충격에 집착했다면, 이젠 그 충격으로 인해 점점 쌓이는 예비된 짐작의 다발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짐작의 인해전술'은 수많은 말풍선을 만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의 빈번함으로 사람들은 짐작과 같은 일들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삶에서 짐작은 무수히 많은 화살을 쏘아본 다음에 나온 '골드텐'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도, 어려운 스릴러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복잡해하는 한 장면을 이런저런 논리로 정리해 인정받는 것과도 같은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단언은 자기자신이 만들어놓은 짐작의 항목을 자신 있게 입밖으로 꺼내놓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가운데   '어머 웬 일이니?' 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그것 가지고 뭘'로 대변되는 인간을 부러워했던 내가 점점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은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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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온라인 공간에 <김신식의 외서통신>이란 코너를 연재하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가끔 들려주시길..


1회는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의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이란 책 소개.



누가 행복을 책임지는가. 국가는 무너지고 남은 것은 시민의 힘!이런 익숙한 구도 가운데 상향 권력의 한계를 짚어보는 책들은 단순히 ‘비평을 위한 비평’ ‘연구를 위한 연구’라는 명목을 넘어선다.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Making Volunteers: Civic Life after Welfare’s End』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참여, 행동, 헌신이란 가치가 넘실대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꼬집었던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는 한 중소 규모 도시에서 일어난 자원봉사의 물결에 의문을 표한다.

익히 알다시피,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창한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담론은 국가가 행해야 할 복지를 시민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의문 대 사회적 기업 등을 위시해 시민의 자치 영역을 공고히 하는 상향 권력에 대한 인정이라는 구도로 양분되어왔다. 이 책은 이런 거시적인 입장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자원봉사라고 하는 실천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해부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엘리어소프는 도시 내 공동체 활동에서 자주 강조되는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개념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5년간의 참여관찰을 통해 빚어진 예리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원래 역량강화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여성학 쪽에서 자주 쓰였다. 시민들의 권리 확장, 노동조합의 설치, 흑인 투표에 대한 보장, 성해방에 대한 인식 확산 등에서 주창된 이 개념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 일어설 능력을 부여하는 실천을 지칭했다. 그러다가 이 개념은 현대 사회복지학을 설명하는 근간이 되었고, 경영 이론에서도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한 이론적 매뉴얼로 전유되어왔다.

전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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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산문을 가끔 읽을 때 매체를 멀리한다는 유형의 서사가 등장해 싱겁다. 가령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이런 고백은 내 엄마 세대의 작가들이 공유하려는 연한 계몽 혹은 삶의 지혜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물론 영민하고 묵묵하게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매체의 유별난 예찬을 글로 표하는 것보단 나을지 모른다. 허나 뭔가 다른 시선을 찾고 싶은 게 독자의 마음. 작가들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벤야민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전화기에 대한 복잡미묘한 생각을 회술했던 정도까진 바라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가 「가정의 행복」에서 수수하게 표해준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어떨까(물론 이 산문은 라디오보단 공무원의 히죽거림에 대한 오사무의 분노가 더 포인트이긴 하지만).


허나 조금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우리가 신기해하던 이 매체들에 대한 서사를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 후손들이 읽었을 때 그만큼의 정감을 얻어갈 수 있을진 의문이 들긴 한다.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류의 헛소리를 미리 예방하는 정도까진 이제 우리가 생활감각으로 익혔겠지만, 여전히 떠도는 언어에 대한 자극을 둘러싸곤 반응이 갈린다. 한 편에서는 특유의 침묵주의가 흐르지만, 이는 뻔한 아포리즘 같다. 다른 한쪽은 영민하게 쓰면 괜찮다고 하지만 뭔가 자기 도취에 머문단 느낌이다.


실은 사회적, 문화적 기억의 문제인데 벤야민이 전화기가 들어왔을 때의 그 일상 속에서 겪은 곤란함과 감탄은 우리가 고수하고 싶었던 사물과 환경의 덕택도 있었을 게다. 고로 우리는 미술관에서 본 유럽의 옛 풍경화에서 느낀 우아함을 하나의 문화적 향수로 공유한 채, 지금은 '쓰이지 않는 단어들' 같은 전화기의 옛 형태를 고스란히 그려본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무덤과 병원에 더 가까이 있을 때쯤(아니 더 걸려야 할까), 지금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같은 서사로 조망하는 글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의 감각은 발전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말들을 모두 기우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의 풍경과는 좀 다른 걸 보고 싶다. 하늘나라에서라도,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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