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증여라는 환상과 괴로움에 대해선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소개했던 시가 나오야의 「어린 사환의 신」을 최고로 쳤는데, 오늘 전상국의 단편 「달평씨의 두 번째 죽음」을 읽으면서 나오야의 작품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전상국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을 입체적으로 다루면서 볼프강 슈미트바우어가 연구했던 '조력중독증'의 세계를 블랙 유머로 다루고 있었다. 아울러 '미담의 사회학'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에피소드를 통해 미담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에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도 아닌 인간이 전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순수증여를 '흉내'내는 경우, 그것은 종종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타인의 상찬을 받곤 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린 사환의 신」은 초밥을 먹고 싶은 가난한 저울 가게 소년 센키치를 본 국회의원 A가 센키치 몰래 돈을 내고 도망가 센키치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초밥을 먹게 해준다. A는 그날 이후 마음병이 걸린다. 그냥 도우면 될 걸 왜 내가 계속 타인에게 내가 도운 사람이라 인정을 받으려 하는 거지? 내가 행여 신이나 부처에게 내 선행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건 아닐까?라는 괴로움에 휩싸인다. 결국 그는 답답한 마음에 아내에게 신도 아닌 소심한 내가 괜히 그런 짓을 한 것 같다며 자책한다. 센키치에게 A는 '어떤 정체 모를 고마운 사람'이며 이 고마운 의혹은 A가 혹시 신이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상국의 작품은 조력 중독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이들의 영역을 황폐화시키는지 보여준다. 곰국으로 유명한 보은식당(상호도 보은이다)의 사장 달평씨는 속사정을 모르는 바깥 사람들이 보기엔 천사이지만, 이런 선행을 지탱해주는 그의 안 사람들은 서서히 버거워한다. 식당을 관리하다가 은근슬쩍 사라지는 달평씨는 선행이라는 테마의 여행을 떠나는데, 주변 사람들과 그를 평소 존경하던 아들딸도 달평씨의 행적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고3딸은 심지어 아버지가 구렁이과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를 향한 아들딸의 존경이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 해석될 수 없는 건 아버지의 행적과 실제 삶에 대해 아들딸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곤 아버지의 선행을 실은 신문기사와 묵묵한 어머니의 단조로운 답변뿐이기 때문이다.

달평씨가 원치 않게 미담 기사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보은식당은 이 미담 기사를 읽고 저 사람이 날 몰래 도와준 사람이구나라고 느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게가 더 잘 되어야 정상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찾아올수록 식당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덕분에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라는 감사인사를 받고 예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하는 말로 돌려보낼 순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선행의 금고 역할이었던 아내는 달평씨의 마음을 알고 슬그머니 돈봉투를 쥐어준다. 달평씨는 점점 이상해졌다. 미담 기사가 나간 이후 그는 처음엔 예전처럼 자기겸양을 표하다가 달평씨의 선행을 듣고 싶은 각종 공공기관에서의 강연 등을 통해 '편집된 미담' '부풀려진 미담'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어갔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신조는 무너졌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제 어린 시절 가난이라는 불행이라는 테마를 그는 나름 계발하기 시작한다. 작품 말미. 이미 제정신이 아닌 달평씨는 혼란스러워하는 가족을 향해 털어놓을 게 있다며 주변 사람을 가슴 졸이게 한다.
그리곤 말한다. 아들딸아 실은 너희들 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보은식당은 멘붕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유일하게 이 식당에서 냉정했던 한 사람이자 늘 묵묵하게 남편의 선행을 도왔던 아내가 한마디한다
"여보, 이젠 당신 자식들까지 팔아먹을 작정이에요?"

 마지막이 씁쓸하고 웃프다.

"가속으로 무너져내려 더 어찌할 길 없는 남편의 그 두 번째 죽음의 순간에 이처럼 거연히 부르짖고 일어선 그네의 외침은 우리의 달평씨를 다시 한번 살려낼 오직 한 가닥의 빛이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말과활》4호에서 인상 깊게 본 글은 사진비평가이자 출판인인 김현호의 <언젠가 우리는 모두 CCTV가 될 거야>였다. 간혹 CCTV라는 기계-기능의 주시, 그 시각성이 과한 의인화에 기대어져 전형적인 파놉티콘의 논리로 가는 어떤 한계에 늘 아쉬웠는데. 필자는 여기서 CCTV의 감시 기능과 그 공포만을 열거해 뻔한 경각심을 도모하는 한계를 극복한다. 필자는 '식별'이라는 시각적인 행위- 아직까진 인간이 필요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분별할 수 있는 카메라, 해석의 가능성이 도입되는 카메라가 가져올 우울을 진단하고, 안전이라는 가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납부'하는(그냥 제공이 아니라 납부라고 표현하고 싶은 게 아무래도 필자가 우려하는 자발적 정보 제공자로서의 시민과 그 구조에 대한 우려를 잘 드러내주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사회 현실을 우려한다.

필자의 글을 보고 번뜩 연관짓고 싶었던 책은 라깡 연구자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였다. 거기 2장에 '빅 브라더라는 신화'라는 챕터. 리더는 오스트리아 예술가 아니타 비텍의 작업을 소개하는데, 비텍은 집에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그녀의 동선을 다양한 CCTV 카메라로 기록했다. 리더가 비텍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부탁하는 것은 이런 장면을 보고 바로 빅브라더라는 측면으로 해석하진 말자는 것이다. 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라는 측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리더가 보기엔 "카메라들은 그것들이 기록하는 대상들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를 보는 것이 항상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카메라에게 본다는 기능을 되돌려주는 비텍이라는 인간이었다.

CCTV를 둘러싼 안일한 논의에는 인간이 배제된 채 CCTV에 인간성을 부여하여 외려 인간미의 존속을 예찬하는 이야기가 있다.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면 "우리 괜히 사람 의심하고 그러지 말죠"라는 겉으로 볼 때에는 우리 인간이잖아, 우리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유지해야지라는 말을 잘 지켜줄 신뢰의 도구로 CCTV를 자연스레 선택한다. 허나 이는 '나'가 곤란하기 싫다는 것일 뿐 나와 너의 상호성이 성립되는 단계로 나아가진 않는다. 즉 CCTV는 관계의 불편을 예방하는 단계에서 그 기능을 멈출 뿐 실제론 과오를 잡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는 기기일지 모른다. 어쩌면 CCTV에 대한 인간의 기대 또한 그럴 것이다.
CCTV를 통해 사건의 해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해소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재발되었을 때 CCTV는 걱정과 불안이라는 정서, 나와 관계된 이들과와 안전한 관계 추구와 동반된 묘한 쾌락을 동반한다. 물론 이를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심연은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기꺼이 CCTV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그 심연을 남들과 함께 확인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리안 리더의 말처럼 "CCTV 카메라들은 보지 않는다." 정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르디외의 국가론 강의가 국내 계약되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의 국가론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이 책의 4장 「국가의 정신들: 관료 장의 생성과 구조」를 읽다보면 부르디외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정리해볼 수 있다. 지적 자극을 우선시하는 이에겐 외형적으로 푸코의 생정치보다 그 전개 과정이 심심할 수 있다. 허나 "낱말은 사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부르디외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조금은 상식적인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권력의 형성과 분배 과정 안에 깃든 실천의 이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또다른 지적인 자극과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가령 부르디외는 국가 권력에서 '임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왕과 영주 사이의 법적 관계를 보면 영주는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법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왕을 중심으로 한 법 권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보편'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왕의 이름을 대신하는 '법률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영주의 법적 권한은 소멸된다. 이 시기에 왕에게 '임명'이라는 절차가 강조된다. 임명은 곧 국가가 부여하는 상징을 배분하는 실천이다. 명예와 평판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관료들은 받게 되며, 국가는 이런 관료들의 마음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세금과 군사 등 '보편'이라고 하는 국가의 상징을 유지할 사회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관료 장의 역동성을 기대한다. 내부의 다양한 권력자들이 갖고 있던 물리적 권력은 이제 왕과 관료 장이라는 형태로 일원화된다. 

부르디외는 세금이란 무엇인가도 묻는다. "반대 급부 없는 징수" 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세금 징수와 납부라는 실천은 곧 국가의 비인격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논리로 구성되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한 납부라는 저항을 막기 위해 나타난 큰 이유는 군대와 영토의 보존이었으며, 부르디외는 여기에 영토 방위에 따른 민족주의라는 연원을 끌어들인다. 군주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란 동의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여기엔 국가 외부 세력에 대한 안전과 더불어 국가 내부의 치안을 위해 세금 납부와 징수가 상식이 되는 역사적 과정 기술은 빠져 있다). 이러한 세금 징수를 통해 국가가 애를 쓴 것은 자연스레 통계와 조사였으며, 통계와 조사라는 실천은 곧 법률적, 언어적, 계량적 규범의 통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문서'라는 사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이 틀에서 보론으로 실린 '가족 정신'이라는 부르디외의 글에서는 가족은 국가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1970~80년대 가족 관련한 국내 정부의 백서를 연구 자료로 찾아 읽고 어떤 해석틀을 마련하는 데 푸코뿐만 아니라 부르디외의 가족론도 큰 활용도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디외는 가족이란 "잘 확립된 허구"라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 인기 있는 신자유주의의 '-테크론'을 들먹이며 '기획된-'을 주장하는 가족론이 아니다. 어찌보면 좀 더 푸코적인 '국가와 호적'이라는 문서적/인구적 차원의 가족이 어떻게 오늘날 그 존재를 인증받고 있는가를 부르디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국가의 관료장은 문서화라는 형식을 통해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구성한다. 부르디외에게 그래서 호적이란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특히 가족 정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족 특유의 따뜻하고 은밀/긴밀/친밀한 정서가 그냥 주어진 소여의 상태가 아니라 국가에서 비롯된 공적 활동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에게 가족이라고 하는 프라이버시는 곧 공적 기관이 부과하는 기능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결을 정리해보면, 부르디외는 '보편'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행사하는 국가를 향한 의심을 던지기 위해 어떻게 우리는 국가를 상식적으로 따르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작업을 선보인다. 부르디외에게 상징 폭력이란 그 폭력을 당한 당사자가 정작 그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상태 혹은 그 폭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보편'이란 상징적 자본은 의혹을 위한 제1항이었던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들의 호기심


                           김신식


올해가 벌써인 사람들과 올해는 아직인 사람들이 만나 벌이는 유일한 위안은
결국 세상사와 주변일이었다
할머니의 손주름이 아니더라도
달력이 된 손가락은 시절과 세월을 
탓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은 김씨, 이씨, 박씨, 최씨들의 시시콜콜함에
끼어들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뾰족한 한 녀석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성자 타령이냐며 그 선한 음흉함을 벗어던지게
라고 십자가를 보이면
자네 이 성경구절을 아는가 하며 들킨 마음을
숨겼다

누군가의 아이고, 만 들어도 또 누가 떠나는가보다 싶어 대신 말을 이어주면 탄식한 친구는 

그런 게 있다네로 날 아이 취급하지만 이내 소주로 입을 이리저리 헹군 뒤 

그게 말일세로 운을 띄운다
나는 본디 청개구리라 막상 말이 시작되니
이미 딸딸이를 친 기분이네 농을 던지니
어허 사람 참 하는 삿대질이 싫지 않았다

탄 마늘만 씹어먹던 윤씨가 고백의 제왕인 줄
진즉 알았더라면 젓가락 짝이라도 맞춰줄걸
속으로 곱씹었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문양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입담에 아직 반 이상 남은 술잔을 보는 

계획맨 임씨는 마음을 놓은 채 여기가 명당일세라며 엉뚱한 추임새를 넣었다

작별들의 호기심이 새어나올라 치면 윤씨가 고맙게도 땡초를 먹어주니 

풋고추라 속인 아주머니의 분주함에 박수를 보탰건만
윤씨의 뚝심은 분발에 분발을 더하거늘
오이를 먹던 성씨가 아이 매워를 깡마르게
외치니 그 시끄럽던 고깃집의 말들이 
물구나무를 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한때'라는 때이른 표현을 내걸고 어떤 결혼상이 있었다. 헐리우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자주 나오는 한 장면 같은. 아내에게 연말이고 하니 회사 동료 부부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자는 제안. 정갈한 식탁보, 앤티크한 촛대, 혹시 동료 부부가 사올지 모르는 와인을 따를 와인잔까지. 아내가 손수 요리를 하고 디저트까지 만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에이 시켜서 그냥 접시에 얹자'라고 하는 이해심까지 구상해보았던 터였다. 







2. 교회명이 달린 십자가를 문앞에 붙이는 것보단 동료와 그의 아내가 식탁을 꽉 채운 요리를 보고선 '우와 이 많은 요릴 다 하셨어요?'란 진부한 감탄을 연발한 뒤 같이 기도를 하는 장면도 구상에 있었다. 각자 두 손을 모을까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을까 주기도문을 외울까 주기도문이 기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는 굶주린 생명들이...'로 시작하는 기도를 할까도 미리 깔아놓은.

3. 때론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말 시상식을 아내와 보면서 저 배우 혼자 타야 되는데 왜 공동수상이야란 불만을 서로 나누기. 그러다가 당신만 네일아트 하냐 나도 귤로 네일아트 한다며 개그를 치면 '아 짜증나' 하며 아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기도 있었다.

4. 혹은 애써 예약한 연극이었는데 같이 관람한 어린 대학생들의 타이밍 안 맞는 환호에 기분을 잡친 아내의 투덜거림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싸우다 서로 어색하게 대문을 열고 누구든 먼저 '나 먼저 씻을게' 하며 회피하는 것을 겪어보기도 있었다.

5.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와 이 소설에 모티브가 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더 어울릴 듯한 카버의 <깃털들>을 연달아 읽고선 그렇게 '한때의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았다. 그러곤 물었다. 내가 갖고팠던 기분은 뭐였을까.

6. 후덥지근한 날의 연속인데 12월 말이 왔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될 걸 알기에 어르신들이 잘 하는 '아이고 시간 자아알 간다. 이제 몇 달 남았노?'란 말이 음성지원되어 시계와 달력을 재촉했으면 좋겠다. 그리 큰 대박은 아닐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자족하며 버텼다, 보냈다, 지나간다에 박수를 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익명의 초대손님과 실컷 귤을 까 먹으며 티비를 보며 '자들은 멘트 연습 좀 하지. 맨날 상 받으몬 떨린다 열심히 하겠다 그른 말밖에 할 줄 모르노' 하는 돌직구 손님의 말에 다 같이 깔깔 웃어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7. 그러곤 어느 채널이든 잠시 고정시켜놓고 카운트 열부터 뜻을 모아 아홉,여덟, 일곱...잘 가다가 하나 반에 반 하는 장난꾸러기 친구의 소리에 티비와 일치되지 않은 '땡!'을 모두 크게 외치는. 
각자가 새해 문자를 보낼 때 카톡 숨김 버튼으로 감추어놓았던 흑역사의 목록을 봉인해제하고 '잘 지내지? 새해 복 많이 받기를..^^' 아니 건조하게 가자. '새해 복 많이 받으렴'의 그늘진 장면들도 덤으로. 그러곤 1이 사라질까 계속 있을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가기 버튼을 누른 채 '야 재미있는 것 좀 틀어봐'라고 말하는 그날의 기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그 기분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