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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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박완서의 노란집이 있는 구리 아치울 마을에 간 건 201410월이었다. 딸아이가 중학생 이었을 때, 다니는 학교에서 주관한 학부모 독서 모임에서 만난 우리는 그 해 봄부터 계속해서 박완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있었고, 선생이 사신 곳에서 박완서 읽기마무리를 하고자 간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온통 단풍과 낙엽으로 둘러싸여 가을 그 자체였던 그곳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미 선생은 계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란집주위를 몇 바퀴 돌고 낙엽이 깔린 벤치에 앉아 박완서 집중 읽기의 소감을 나누었다.

 

박완서의 작품 중 몇 권을 필독서로 선정해 열심히 책은 읽었지만, 정작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독서 모임 때는 책에 대한 감상을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그때 우리 모두에게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갑작스런 이유 없는 반항에 뒤통수를 맞은 상태에서 내 존재마저도 부정당한 것 같은 슬픔과 암담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가 생소해 보이기까지 한 시기였다.

 

독서 모임 날, 시작은 선생의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을 가볍게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물꼬를 트고, 우리는 거기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에게 그 달의 필독서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서 모임은 독서보다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을 더 많이 해주었다.

 

불쑥 찾아와 나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 사춘기 아이만은 아닐 것이다. 20대부터 계속해서 박완서의 소설을 거의 읽어 왔지만 내 인생을 침범하는 종류도 다양한 많은 것들과 싸우느라 선생의 소설에 온전히 빠져들 여유가 없었다. 그의 문장에서 매번 느껴지는 차가운 도도함도 싫었다. 세상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가차 없이 날리는 그의 펀치가 조금 불편했다. 내가 바깥에서 선생과 함께 안을 바라보든, 아니면 안쪽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든 상관없이 작가의 글을 읽는 순간 몸으로 바로 체득되는 서늘한 날카로움에 어떤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써낸 글을 바로 또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단순한 것이 될 수 없다. 작가의 문장과 함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과 온갖 말들, 생각들이 합쳐져 내 속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똑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은 박완서의 나목은 한 번도 박완서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처럼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나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같이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주는 무거움과 거기에서 우왕좌왕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아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분투(奮鬪)하는 한 여자가 보였다. 노오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융단 같은 낙엽더미에 누운 채로 발버둥 치며 살아있고, 살아내고 있으며,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경(李炅)이 있었다.

 

이경에게도 불쑥 혼란스러운 것들이 찾아온다. 전쟁, 오빠들의 죽음, 뿌연 회색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미군 PX에서의 근무.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나간음산한 집에서 엄마와 같이 견디며 정을 나누고 살고 싶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내부에서 무엇인가 자꾸 균형을 잃으려 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심술궂게도, 꾀바르게도 살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지울 수는 없다. 자기 때문에 오빠들이 죽었다는 죄책감과 죽은 영혼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애증에 이경은 견디며 버틸 방법을 찾는다.

 

남들과는 다른 우직한 옥희도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을 보상받는다. 이경 역시 옥희도의 결핍을 상쇄시켜준다. 미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한다고 대놓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평범하고도 뻔뻔한 젊은 황태수는 이경에게 현실을 보여준다. 황태수는 자꾸만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신을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줄 사람이기에 이경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결혼한다. 사랑이 아닐지는 몰라도 이경이 지켜야 할 어느 한 쪽만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황태수는 준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댈 수 있는 것, 그것도 일종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완전히 허의 세계에 빠져있는이경의 어머니는 그녀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준다. 시금털털한 멀건 김칫국이나 김치뿐인 밥상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매번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행위이다. 이경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 놓았다는 어머니의 말에 분노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억울함에 부연 회색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밥상을 차려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끝내 알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나와 조금 울었다. 눈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목격한 어머니가 꾸역꾸역 밥상을 차려내는 그것이 숭고하기도, 신산스럽기도 했다. 이경이 옥희도의 집에서 자고 온 날 밤 내내 어머니는 이경을 기다렸을 것이다. 표현할 힘이 없을 정도로 허의 세계에 빠져버렸지만, 이경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어머니는 그 날 밤 마지막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목전체에 깔려있는 선명한 색깔의 묘사는 이경의 생각을 드러낸다. 노오란, 뽀오얀, 비췻빛, 부연 회색, ‘순백의 홑청에 붉게 물들인 처참한 핏빛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온전히 느꼈다. 고가를 해체하면서도 후원의 은행나무만은 그대로 두어 자신의 존재만은 지키려 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옥희도 유작전에서 이경에게 한발 속의 고목(枯木)’이 나목(裸木)으로 변하고, 그 앙상함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것은 그녀의 완벽한 살아냄 때문이었다. 과거를 털어내 버리지 않고 그것을 잘 간수 할 수 있는 힘이 이경에게 남아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비비언 고닉이 끝나지 않은 일에서 다시 읽기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도 좋지만, 한편으로 지금 헤쳐 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년 째 와상환자로 누워있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경과 똑같이 1932년에 태어난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이경이 지나온 길에 나의 엄마를 데려 간다. 그 길에 닿는 순간 내 엄마는 활기차게 걸어 다니며 즐겁게 웃고, 당신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긴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 속에서 엄마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 병약한 남편과 자식 네 명을 온 몸을 다해 보살핀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치매를 앓으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딸의 아침 출근을 위해 밥을 하고 계란을 부쳐 밥상을 차려줄 수 있는 정신 줄만은 놓지 않는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의 부연 눈을 들여다본다. 그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해 내는 엄마에게도 이경과 같은 젊음과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독서 모임엔 5명만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모임을 떠나고 남은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고자 열심히 책을 읽고 또 다른 아치울 마을에 간다. 우리에게 이젠 사춘기 아이들이 없다. 다 자란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삶은 조금 편해졌지만 우리에게는 나목과 같은 앙상함과 황량한 늙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경의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끝나리라.”고 한 심술궂은 말이 떠오른다. 전쟁이란 말 대신에 인생을 넣어본다.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슬픔과 기쁨, 앙상함을 얻을 것이다. 매번 광적이고 앙칼진 열망과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살지라도 여태껏 살아낸 것만으로, 그것이 쌓아 올린 융단 같은 노오란 낙엽더미가 어디엔가 있다고 믿는다. 나도, 독서 모임의 사람들도, 내 엄마도 감긴 태엽이 풀어질 즈음이면 언제든지 가서 뒹굴 수 있는 그 희망적이고도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노오란 것들 말이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376] 


-2014년, 아치울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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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6-24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014년이면 십년전...며칠 안 남은 이 달 잘 보내시길요 이제 올해의 후반기가 오네요

페넬로페 2024-06-24 09:27   좋아요 1 | URL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더라고요.
그래도 그 날의 느낌이 생생해요 ㅎㅎ
6월부터 덥더니만 이제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요.
서곡님!
남은 6월도 잘 지내시기를 바래요^^

다락방 2024-06-24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페넬로페 님 나목 이벤트 참여하시나요? 이 글 백만원 탈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4-06-24 12:04   좋아요 1 | URL
오!
백만원~~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ㅋㅋ

서니데이 2024-06-29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희집에도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집˝ 책이 있어요.
2014년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되었네요. 그 책을 산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요.^^;
페넬로페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4-06-30 10:10   좋아요 1 | URL
‘노란집‘을 읽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네요.
세월이 정말 후딱 지나갔어요.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젤소민아 2024-07-06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4-07-06 08: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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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을 재독하지 않았다면 시대에 매몰되기를 원치 않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奮鬪)하는 이경(李炅)만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롯이 한 여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그가 느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노오람과 부연 회색에 담긴, 남아 있는 자의 살아냄이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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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오랑주리 미술관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날에 지베르니를 갔었지만, 비가 내려 빛이 있는 모네의 정원과 연못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쉬움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수련 연작 8작품은 이상했다. 그림이 너무 어두워 세부적인 형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색깔들도 거의 비슷하게 보여 모네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나 생각될 정도였다. 화가가 말년에 백내장을 앓아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영향 탓인가도 생각되었다. 미술관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몸을 돌려가며 그림들을 감상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미술관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수련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천장에 있는 채광창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모네의 수련은 그 빛을 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갈 때의 흐린 날씨 때문에 수련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고 날씨가 개기 시작하자 햇빛이 채광창으로 들어와 밝은 색깔이 채색된 모네의 수련이 그제야 제대로 보인 것이었다. 나와 딸아이는 다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련을 감상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전체의 모습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만약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면 빛에 따라 민감하게 변하는 수련의 색채를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 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중에서]

 

미술관에서 나와 튈르리 정원의 조그만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었다. 스쳐가듯 잠깐인 찰나적 순간에 느낀 것들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이지만 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살아가는 허세와 자기만족이 우습기도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실이 모네의 요청으로 자연광에 의해 수련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을 더 믿기에 그 날 만약 날씨가 계속 흐렸다면 나에게 어두운 색채의 수련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발자크는 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노인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자신의 예술론을 펼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 말들이 감동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작가의 그러한 표현과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세세하게 느끼기보다 그저 말문이 닫힌 채로 한순간에 정복당하고 만다. 예술 작품이 주는 압도적 아우라는 말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서의 페트릭 브링리의 말처럼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말보다는 내 속에 있는 감정에 그냥 저장되어 버린다.

 

철저하고 자신만만한 예술적 신념으로 프렌호프는 완벽한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프렌호프의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완벽했지만 그것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관람자가 없었거나, 예술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너무 앞서가 시대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예술가는 좌절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가의 숙명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개성, 열정, 자아의 도취로 완성되어진 예술은 자신에게만 머물 수 없고 누군가가 봐주어야 한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돈을 원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실패했고, 빚을 갚고자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써댔다. 사업과 문학이 통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를 마시며 집중적으로 글을 쓴 그의 뚝심만은 인정하고 싶다. 인상파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인상파로 끝낸 모네의 뚝심 역시 대단하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완성한 작품을 남에게 평가받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고 그것으로 좌절하고 고통 받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열정으로 계속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술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열정.-p.71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미지의 걸작’,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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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4-06-19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름다워요..!😍 잘 읽고 갑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4-06-19 16:25   좋아요 1 | URL
등대지기 님,
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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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영생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인상파의 화풍같은 문장으로 서술했으며, 이 두 주제는 연결된다. 인간(예술가)은 묘약과 절대적 걸작으로 완벽을 꿈꾸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각각의 세부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 상태에서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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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6-18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페님의 100자평도 한 편의 걸작입니다.(ㅡ>새파랑님이 딱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야 하는데 요즘 안보이셔서 제가 대신^^) 녹색광선의 요 시리즈 책 만듦새도 예뻐서 하나씩 사두었는데 이 책은 있는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산다‘는 말이 섬뜩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페넬로페 2024-06-18 12:53   좋아요 1 | URL
아니, 새파랑님은 요즘 뭐하시길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건지~~
열정적으로 연애 하시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다 좋은데,
발자크가 ‘미지의 걸작‘에서 갑자기 끝을 내버린 느낌이 들어 고민하다 별 넷을 줬어요.
괴테의 파우스트 생각도 나고
프루스트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미미님 책장 어딘가에 이 책이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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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처음 부분의 작가노트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었다. ‘날 때부터 책을 읽어온 느낌이란 문장이 반가웠고, 주변의 배경보다 책에 더 많이 빠져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그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라는 단어만으로 고닉과 내가 서로 공감하며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내가 읽어 온 책에서 얻은 교훈이 바로 내 인격이 되지 않는 모순이 고닉에게도 있어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작은 아씨들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본문에서 고닉이 언급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에게 고닉의 말들은 어려웠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긴 줄거리의 나열은 지루하기도 했다. 설사 내가 그 책들을 읽었다 해도 고닉이 들여다보는 책 속의 삶과 내가 보는 것들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고닉이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하며 치열하게 책이 말하려는 것을 찾는 열정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세월이 흘렀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생략되고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가 그냥 여기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내 정체성이나 성향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바쁘고 , 어수선하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언제쯤 고닉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도 80세쯤 되면 그처럼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출발하거나 거쳐 간 작은 아씨들로부터 나름의,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펼쳐 지금까지 자신의 의미를 첨삭해 오고 있다는 것.고닉이 말한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고 체감하며 사는 내가 어느 자리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책은 다 그렇다. 그 무엇도 책에는 비길 수 없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위대한 안톤 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을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뉘앙스를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음미하고 재고를 환영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비교적 상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뉘앙스 없는 자유는 절대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문명인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뉘앙스다. 뉘앙스를 없애버리면 동물의 삶만 남는다. 바꿔 말해, 전쟁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훌륭한 문학의 풍요함은, 우리 삶의 풍요함으로 다시 긍정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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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6-13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은 어릴 때부터 책을 보셨군요 저는 어릴 때는 책을 안 봐서 늘 왜 안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자신을 돌아보기 쉽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잘 못 읽지만, 예전엔 책을 더 못 읽기도 했네요 잘 읽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한번 하는군요 책을 만난 게 일찍은 아니었다 해도 앞으로도 볼 테니, 그건 괜찮겠지요


희선

페넬로페 2024-06-13 07:33   좋아요 2 | URL
책을 읽기는 읽는데 다시 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새로운 책이 보고 싶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만 하는것 같아요. 희선님께서는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시는군요.
그러한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청아 2024-06-1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작은 아씨들>도 읽지 않았어요ㅜ.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책 목록이 나오면 강박적으로 ‘꼭 읽어내야지‘ 하는 편인데 고닉의 목록, 걱정됩니다.ㅎㅎㅎ

사람이 죽을 때 지난 세월들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스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아득하면서도 찰나같은 삶을 살면서도 ‘소설‘로 타자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을 다른 시각에서 볼 기회인 것 같아요. 오늘도 한 토막, 생각꺼리를 던져주신 페페님!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6-18 12:48   좋아요 1 | URL
고닉의 목록은 한국에 번역 안된 것도 있어 다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고요.
고닉의 의도가 분명 전부가 아닐텐데 저한테는 서양 작가들의 정념이 조금 버거워 더 접근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ㅎㅎ
요즘 ‘찰나‘라는 단어가 많이 와 닿아요. 지금 쓰고 있는 페이퍼에서도 그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지금 현재에 몰입하며 잘 살아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들 중에 책이 성찰할 기회를 주어 너무 좋아요.
날씨가 더워요
직장인, 미미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늘 오후도 화이팅 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