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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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읽으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읽고 난 뒤에도 책의 내용에서 받은 복잡한 감정과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연수>, <미라와 라라>는 내가 경험한 것과 추구하는 것이 들어있어 생각할 것이 많았고, <라이딩 크루>는 하도 기가 차 소리 내어 웃었으며, <동계올림픽>에선 방송사 인턴인 선진이 너무 짠해 눈물이 나왔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데도 우리는 늘 다른 사람에 비해 뒤쳐져있다고 느낀다. 죽을 만큼 노력하는데도 타고난 머리와 눈부신 외모를 가진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언제나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살지만, 남들은 비싼 호텔 빙수가 만만한 듯 너도나도 먹어봤다는 사진을 올린다. 순간적 기지와 말발로 넌지시 남을 누르며 자신을 부각시키는 얄미운 사람이 승진도, 결혼도 잘한다. 세상은 용납될 수 없는 불평등과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으로 가득 차 있어 한번쯤은 망하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잘만 돌아간다. 분명 좋은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꼬이고 질투가 생기고, 상처투성이로 변해간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 연수에 실린 6개의 단편은 적나라한 삶의 현장에서 힘들게, 인내하며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을 하게 되는 취준생인 딸아이도 그 현장에 있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 어떤 장면에선 딸아이가 앞으로 가게 될 세상이 시베리아 벌판 같아 기분이 서늘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표제작인 <연수>는 처음에 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제목 연수밑에 한자 硏修가 있어 어떤 연수인지 궁금했는데 자동차 운전 연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운전은 머리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도 같이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또 올림픽 경기처럼 내가 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도로위의 변수에 시시각각 빠르게 대응을 잘 해야만 한다. 운전을 무서워하는 빅 폄의 구년 차 회계사인 주연은 자가 운전의 필요에 의해 외제차를 사고, 운전 연수를 신청한다.

 

주연은 유능한 강사의 실용적인 매뉴얼에 따라 차근차근 운전을 배우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없다. 강사는 주연이 운전을 잘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연은 강사에게 추가 연수를 신청하지만 강사는 거절한다. 운전은 결국 혼자 하는 것이라고, 연수만 받을 수는 없다고 한다. 운전이든 다른 것이든 연수(硏修)라는 말 아래 놓여 진 것들은 모두 혼자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그래서 최소한의 응원과 가르침이 필요하다.

 

 

<공모>에서의 모든 것은 모호하다. 김 부장이 천사장이 운영하는 호프집인 천의 얼굴만 회식 장소로 고집하는 것도, 천사장의 클리비지의 역할도, 현수영이 천사장과 천의 얼굴을 불편해 하는 이유도 딱히 명확하지 않다. 현수영은 마음에 들지 않은 회사를 다니며 어쩌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여기며 나름 정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또 다른 모호함을 가져오며 이것 역시 아닐 수도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무엇이 옳은지, 내가 보는 것이 정확한지, 나의 판단이 모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항상 흔들린다. <공모>의 마지막 장면인 천사장과 김 상무(예전 김 부장)의 포옹까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수영이 천사장의 딸인 세원에게 갖는 희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어느 날, 호되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

 

 

<라이딩 크루>는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인 뭣이 중한디?’가 생각나게 했다. 무엇이 중요한가? 어느 순간 목적과 객관성이 사라지고 맹목적인 것에 홀려 거기에 말려들 때가 있다. 감정에 치우쳐 내가 잃어버릴 것을 미처 보지 못한다. 나중엔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고 그냥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회한만이 남는다. 질투와 불신, 꼬임과 자존심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내가 나를 그르치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한밤중, 두 남자가 알몸으로 자전거 경주를 하고 그것을 옆에서 인정하는 또 한 사람의 바보를 보며 정말 많이 웃었다. 웃으면서 혹시 내가 두 남자 중의 한사람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했다. 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런 준비도 해주지 않고 무조건 가서 성과를 내라는 명령, 그 결과로 인턴 사원에서 정식사원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협박, 자식이 힘들게 번 첫 월급을 봉투째 받아 기분이 좋은 부모, 두 번째 월급에서 핸드폰과 발렌타인 삼십년을 사달라는 부모.<동계올림픽>에서의 어른들은 이렇게 선진의 어깨를 짓누른다. 한파가 닥친 날에도 변변한 패딩하나 없이 청카바 하나만 입고 다니는 선진의 현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선진은 꿈속에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 한다. 잠깐 좋은 어른들도 만난다. 그들에게 따뜻한 보살핌과 패딩을 얻어 입고 나온 선진은 여전히 추운 바깥에 서 있다. 선진이 만난 잠시 동안의 온정이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에게 그나마 힘이 되었을까?

 

 

그 길로 가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꼭 가야하는 사람이 있다. 능력이 안 되지만, 그것을 해야만 행복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라와 라라>에서 미라는 소설을 쓰고 싶어 32세의 나이에 국문과에 다시 들어온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이과형 인간이 소설을 쓰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아예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미라는 이과형 세계에서 이미 성공도 했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녀는 미라보다는 소설을 창작하는 라라 로 살기를 원한다. <펀펀 페스티벌>는 원하는 세명 그룹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다른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과 원하는 대로 가지 못해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똑같이 좌절과 힘듦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 내 쪼대로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에서 장류진은 글을 쓰는 동안의 자신의 여러 어깨 모습을 얘기했다. 그만큼 이 글들이 고통 속에서 힘들게 나왔다는 말일 거다. 힘들게 나온 만큼 여기에 실린 소설들이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희망을 절망으로 오독했는지는 모르지만 읽고 난 후에도 여운이 많이 남아있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읽다가 말았다. 그가 쓴 문장이 너무 깍쟁이 같아 정이 들지 않았다. 꺼내 다시 읽어야겠다.

 

[어쩌면 당연했다. 너무도 오래전 일이었다. 한 사람의 입맛이 변할 정도로 오래된 시간, 내 기억이 실제를 왜곡했거나 아니면 과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뒤이어 그게 아니라 내 모든 기억이 사실이라고 해도....그게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고작 그 음영 하나에 시시덕거리고 십수년간을 들락날락하며 법인카드 갖다 바친 놈들이 한심한 놈들일 뿐. 애초에 거기까지만 싫어했으면 될 일이었다.

-p.153, ‘공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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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8-29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 제목이 마음에 꼭 듭니다!!! 어차피 인생 마이웨이......이제 곧 팔월도 끝이네요 좋은 밤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8-29 21:4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인생은 마이웨이인거죠~~
날씨가 그나마 쬐금 시원해져서 다행이네요^^

클로드 2024-08-2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생각나네요.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우리 모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8-29 23:18   좋아요 0 | URL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대사가 정말 뭉클하네요.
시와 미, 낭만, 사랑~~
이 단어들 잊지 않고 살아야겠어요.
그래도 여기 알라딘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우리들은 그나마 삶이라는 걸 느끼며 살고 있다며 위로해 봅니다^^

희선 2024-08-30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게 가장 좋기는 하죠 그게 쉽지 않다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더 멋지게 보일 듯합니다 <미라와 라라>는 한사람인가 봅니다 미라가 라라가 되는... 이과라고 해서 소설을 못 쓰는 건 아닐 텐데, 이과여도 소설 잘 쓰는 사람 있는 듯합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를... 이런 무책임한 말을... 저도 못 쓰는데 말이죠


희선

페넬로페 2024-08-30 08:53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적으려 해도 그게 쉽지 않은데 소설을 쓰려면 얼마나 힘들지요.
그래서 미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고 이름 바꾸기를 원했다고 생각해요. 본래 자신이 가진 아아덴티티로는 글이 잘 안 나오니까요.
이과 출신도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 많지만 아무래도 통계적으로는 문과쪽이 많을 듯 해요.
일단 뇌의 구조가 좀 달라요 ㅎㅎ

페크pek0501 2024-08-3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류진 작가의『일의 기쁨과 슬픔』만 읽었는데 괜찮았어요. 작가치고 문학적이지 않다고 느꼈으나 그것대로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4-08-30 15:12   좋아요 1 | URL
‘일의 기쁨과 슬픔‘ 책이 집에 있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4-09-02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되었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라이딩 크루>였답니다.

이런 미ㅊㄴㄷ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답니다.

페넬로페 2024-09-02 16:22   좋아요 1 | URL
<라이딩 크루> 읽으면서 웃지 않은 사람 없을 거예요.
마가 끼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 인물들의 경우가 아닐까 했어요^^

젤소민아 2024-09-07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소설집을 한번에 완독하긴 쉽지 않은데 말이죠. 하나 끝나면 쉬거나 일단 접게 되죠. ㅎㅎ
장류진작가 소설을 제가 읽지를 않았네요~. 이참에 카트에 넣습니다~

페넬로페 2024-09-07 11:01   좋아요 0 | URL
네, 장편소 설에 비해 단편은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데,
한국 작가의 단편은 다 좋더라고요.
이 책은 요즘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글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스물다섯살 때의 일이었다. 무언가 해내고 싶은 마음, 되고 싶은 모습이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습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몰랐다.
그러니까 운전대를 잡기 전까지는.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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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03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알고 지내던 교회 후배 이름과 같아서 관심이 갔습니다. 일이 아니었으면 친해지지 않았을텐데 또 일 때문에 멀어진 친구였죠. 지금도 잘 사나 궁금하긴 합니다. 이책 언제고 읽게 되겠죠.ㅋ

페넬로페 2024-09-03 13:54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는 사람 이름인줄 알았어요. 제가 아는 사람의 이름도 연수인데 좀 별로 였습니다. ㅎㅎ
이 책 나름 괜찮더라고요. 스텔라님 감상 기다릴께요^^

젤소민아 2024-09-0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바로 와닿네요. ㅎㅎ 이럴 때 정말 괴롭죠~

페넬로페 2024-09-07 10:58   좋아요 0 | URL
매번 저 느낌을 달고 사는 것 같아요. 이제는 그저 받아들이려고 해요^^
 
잃어버린 환상 - 개정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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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옮기려는 발자크의 집요한 의지는 이 소설의 모든 문장을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만든 병폐, 특히 금융자본과 저널리즘에 대한 서술은 지금 모습 그대로여서 섬뜩하다. 이루지 못할 환상을 좇는, 마리오네트같은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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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22 0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꼭 읽어야지하고 찜해둔 책이에요. 그러고보니 발자크 소설은 헛된 환상, 욕망을 좇는 사람이 늘 주인공인 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4-08-22 07:03   좋아요 2 | URL
이 책의 주인공 뤼시앙 덕분에 안그래도 더운 이번 여름이 더 더웠습니다.
왜 저렇게 살까 한심했지만, 시대가 또 저런 사람을 만드는게 아닌가도 생각 되더라고요^^

초록비 2024-08-22 0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두고 못읽었는데, 이 리뷰를 보니 다시 호기심이 불타오르네요!

페넬로페 2024-08-22 07:06   좋아요 2 | URL
분량도 많고 워낙 밀도 있는 문장이라 넘 힘들게 읽었어요.
발자크의 장황함이 이 책을 좋게도, 질리게도 해 별점 매기는 데에 고민했어요^^

Falstaff 2024-08-22 07: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발자크...라고 생각합니다. 분량과 문장 등 읽기가 쉽지 않았었습니다. 페넬로페 님 수고하셨네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4-08-22 07:17   좋아요 5 | URL
폴스타프님 리뷰 보면 읽는데 꼬박 4일 걸렸다고 하셨는데
저는 1주일 넘게 걸렸어요.
이 책 완독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 같습니다 ㅎㅎ
자화자찬이지만 그래도~~ 발자크라 한 문장도 버릴게 없었어요^^

stella.K 2024-09-03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금 아까 폴님 서재에 드렸다 오는 길인데 그로스만의 소설은 좀 자신이 없고 이책은 왠지 저한테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ㅋ

페넬로페 2024-09-03 13:50   좋아요 1 | URL
너무 장황해서 탈이지만 읽을 때 많이 힘들지는 않아요. 다만 고구마 서너 개를 한꺼번에 먹는 듯한 가슴 막힘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ㅎㅎ
 
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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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 전에 집필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끊임없이 원작 그대로, 때론 변형되어 무대에서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잔뜩 기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바로 감동을 느끼기가 힘들고, 왜 그토록 위대한가에 대한 납득이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은 약강 오보격에 맞춰 써진 영어로 된 희곡이라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되기 힘들다. 어떤 번역자는 영어 문장의 운율에 한글을 그대로 들이밀어(물론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문장이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운문을 거의 산문처럼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논리적이지 않은 앞 뒤 맥락이나 급작스런 장면 전환을 연결시키는 것에 애를 먹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소설은 작품 안에 배경이 잘 설명되어진 것이 많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목적으로 쓴 희곡이라 독자가 직접 찾아야 한다.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글을 썼지만, 작품마다 검열을 받아야 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의 눈치도 봐야했던 셰익스피어의 글에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땐 행간을 읽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 읽어도 현실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동시대성이 그의 작품을 가치 있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산 시대의 전근대성을 작가 역시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셰익스피어 x 황광수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스트랫퍼드와 런던, 파리에서 빈에 이르는 중서부 유럽,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중해 지역을 저자가 차례로 직접 여행하며 적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설명서이다. 철학과 여행자의 감상이 공존한 훌륭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이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저자의 여행지)에 맞게 잘 설명되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인용된 희곡 문장들이 모두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발행한 ‘The Oxford Shakespeare’ 시리즈를 통해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번역한 인용문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하는 마력이 들어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저자의 조예가 엄청나다. 오랫동안 음미하고 반복해서 쌓아 온 흔적이 이 책에 가득하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셰익스피어 문학의 일반적 특징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쓴 마지막의 셰익스피어 문학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까지 어디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이미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재독하고,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한다. 작가 셰익스피어의 매력을 계속 피력해 나를 완전 셰익스피어의 광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책 속에 책이 들어있는 책을 읽기 힘든 것은 그 속에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설명이나 감상이 있어서이다. 읽지 않아 그 해석이 지루할 수도 있고, 혹시 다음에 그 책을 읽을 때, 온전한 나의 느낌이 아닌 설명되어진 것의 프레임에 갇힐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황광수의 <셰익스피어>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는 그의 해석을 듣지 않으면 아직 읽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

 

황광수의 해석은 깊이 있고 철학적이며 신랄하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양과 비판이 동시에 있어 셰익스피어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좋았다. 어릴 때 동화로 읽었던 베니스의 상인에서 권선징악적인 면만 봤지만, 나이 들어 다시 읽고 재해석된 베니스의 상인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 느낌을 이 책의 다른 작품에서도 받았다. 셰익스피어를 떠나 단지 여행자가 되어 느끼는 저자의 감상도 공감되었다.


-헨리 4의 배불뚝이 술고래 폴스타프의 동상-P75

 

저자의 폴스타프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셰익스피어는 실제 인물인 로버트 그린을 모델 삼아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빼어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P.73)’를 만들었다. 알라딘 서재의 폴스타프 님덕분에 이 부분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는 추잡한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자이다.

폴스타프의 진면목은 비대한 몸과 재기 발랄한 언어에 있다.

폴스타프의 신체적 과잉과 언어적 방종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최근에 다시 읽은 햄릿, 맥베스, 리어왕에 대한 설명도 좋았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런던 브릿지에는 효수된 머리가 쇠장대 끝에 걸려 있었다. 그 시대엔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많고, 흑사병이나 역병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민중은 여전히 살기 힘들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사극의 특징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셰익스피어는 먼저 역사가 덧씌운 영웅의 허울을 벗겨버렸다.

셰익스피어는 권선징악의 틀을 해체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인물들의 언어를 현실의 토대 위에서 심문했다.

셰익스피어는 왕족들의 역사를 평민들의 삶과 의식에 투사했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원칙으로 희극을 집필했다. 개인적으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많은 갈등과 우여곡절이 극 중간에 있음에도, 또는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이 더 많을 때에도 얼렁뚱땅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에는 법으로의 법에 대한 고찰, 시와 소네트에 대한 설명, 사랑과 셰익스피어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옹호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가진 견고한 편견과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셰익스피어는 기독교 사회의 편견 속에서 끝없는 모욕과 무시에 시달린 샤일록의 내면에서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말에서)두 종류의 언어 층위에 미묘한 차이를 심어놓았다. 하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자의 절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는 자들의 잔인성이다.]

 

저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괴테가 해석한 햄릿을 서술한다. 이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소설의 주인공인 빌헬름은 햄릿을 읽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에 제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감동받았지만, ’햄릿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의 구성상의 느슨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개작에 가까울 만큼 본격적으로 수정한다.(P.163~170)


-햄릿을 연기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P.157)

 

프랑스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여성 배우임에도 남성 햄릿을 연기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초연된 해로부터 약 430년 후인 20247월에, 한국의 여배우 이봉련햄릿왕자가 아닌 햄릿공주를 연기한다. 당연히 오필리어는 남자가 된다. 해군 장교 출신인 공주 햄릿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그녀에게 복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햄릿 공주 또한 왕이 되고 싶은 권력욕도 있다. 무대 가운데에 물이 있는 커다란 공간을 두고 수시로 천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 연극 햄릿의 배우들은 자주 물에 들어가고, 비를 맞아가며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따라 간다.

 

사라 베르나르이봉련도 연극의 마지막에 레어티즈와 결투를 하며 죽는다. 그녀들이 연기한 햄릿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는 분명 다른 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와 연결된다.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완벽한 변용은 있을 수 없을 만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대단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언어는 끊임없이 재인용되고 있다.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멋진 신세계’, ‘소리와 분노’, ‘Petious spectacle!’스펙터클등 수없이 많다. ‘광대무변한 텍스트의 세계(p.318)’를 바탕으로 한 연극 또한 계속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황광수 저자는 이것의 원인을 셰익스피어가 빚어내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 ‘동시대성’, ‘현대성에 두고 있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오랜만에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책 속의 책을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론이 자신이 서술한 작가를 부각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듯, 황광수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 자신과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충분히 공부했고, 저자의 지성에 감탄했다. 몇 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을 때 이 책을 사두었지만 이제야 읽은 것이 후회된다. 그때 읽었더라면 셰익스피어 읽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이고, 연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었을 것 같다. 뒤늦게 찾아 본 황광수 저자의 이력에 그가 2021년 암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진귀하고 신기한 것으로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서 2014년에 스트랫퍼드 주민들은 그를 ‘450년 젊은 셰익스피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그의 문학의 영원성을 꿰뚫어 본 이는 그 자신도, 스트랫퍼드 주민도 아니었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벤 존슨이었다.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불멸성에 관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알지 못한다. -p.321]


-작자 미상, <셰익스피어> (161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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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11 0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쓱으쓱!

페넬로페 2024-08-11 08:57   좋아요 2 | URL
시간되시면 알라딘의 폴스타프 스토리도 한 번 들려주세요.

독서괭 2024-08-11 1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찜해둡니다~~ 책으로 읽을 때 그 맛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재미를 느꼈는데 깊이있는 해설을 곁들이면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겠죠! 페넬로페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8-11 15:33   좋아요 2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천천히 읽어야 하는데 저도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네, 해설을 곁들이면 그 의미를 더 잘 알게 되어 확실히 도움이 많이 돼요^^

희선 2024-08-12 0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읽히는 건 지금 읽어도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아서겠습니다 그 시대 배경을 알면 셰익스피어 희곡을 잘 이해하기도 하겠네요 희곡 조금 보기는 했는데, 그저 읽기만 한 듯합니다 페넬로페 님은 이 책을 보시고 다시 보신 셰익스피어 희곡이 더 좋으셨나 봅니다 다른 희곡도 곧 만나시겠네요

이 책 2018년에 나왔는데, 저자는 세상을 떠났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4-08-12 14:21   좋아요 2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희곡 또한 읽기가 쉽지는 않은 듯 해요.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이 다 바쁘다 보니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운가봐요.

저자의 글이 좋아 이력을 찾아봤더니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8-13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르떼 시리즈를 기다리게 된 첫번째 책! 이죠.
다시 봐야해요^^

페넬로페 2024-08-13 17:26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아르테 시리즈 처음 이더라고요.
제가 읽은 아르테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아직 읽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읽고 싶어졌어요~~

서니데이 2024-08-13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소개를 조금 더 읽으려고 보니, 아르테에서 나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는 좋은 책이 많은 것 같은데요. 셰익스피어는 너무 유명해서 연구자도 많고 나온 책도 많겠지만, 시대별 재해석과 새로운 시도도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4-08-13 17:30   좋아요 2 | URL
저자가 셰익스피어에 작품에 대한 조예가 깊어 넘 좋게 읽었어요.
작품을 따라 간 곳도 많았어요.
시리즈 중 첫 번째라 그런지 심혈을 많이 기울였더라고요.
날씨가 계속 더워요.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셔요^^

젤소민아 2024-08-2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관심 급땡깁니다~~소개 감사해요~~

페넬로페 2024-08-20 13:09   좋아요 2 | URL
제가 좋았던 만큼 젤소민아님께도 감동이 되기를요^^
 
햄닛
매기 오패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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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에 죽은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닛이 4년 후 비극 <햄릿>으로 탄생한 것을 모티프로, 셰익스피어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잘 버무렸다. 특히 그의 아내 앤 해서웨이를 전면에 내세워 작가적 상상력이 풍부한 문장으로 잘 묘사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너무 지루한 소설이 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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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1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읭, 앤 해서웨이가 셰익스피어의 아내 이름이었나요? 전 영화 배우 이름인 줄 알았는데. ㅋㅋ 근데 무려 오백 페이지! 좀 부담스럽긴 하네요.

페넬로페 2024-08-15 23:34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배우 ‘앤 해서웨이‘가 자꾸 오버랩 돼요 ㅎㅎ
이 소설이 시도는 좋았는데
읽기 약간 지루하다는 것이 단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