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오랑주리 미술관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날에 지베르니를 갔었지만, 비가 내려 빛이 있는 모네의 정원과 연못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쉬움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수련 연작 8작품은 이상했다. 그림이 너무 어두워 세부적인 형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색깔들도 거의 비슷하게 보여 모네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나 생각될 정도였다. 화가가 말년에 백내장을 앓아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영향 탓인가도 생각되었다. 미술관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몸을 돌려가며 그림들을 감상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미술관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수련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천장에 있는 채광창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모네의 수련은 그 빛을 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갈 때의 흐린 날씨 때문에 수련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고 날씨가 개기 시작하자 햇빛이 채광창으로 들어와 밝은 색깔이 채색된 모네의 수련이 그제야 제대로 보인 것이었다. 나와 딸아이는 다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련을 감상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전체의 모습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만약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면 빛에 따라 민감하게 변하는 수련의 색채를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 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중에서]

 

미술관에서 나와 튈르리 정원의 조그만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었다. 스쳐가듯 잠깐인 찰나적 순간에 느낀 것들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이지만 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살아가는 허세와 자기만족이 우습기도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실이 모네의 요청으로 자연광에 의해 수련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을 더 믿기에 그 날 만약 날씨가 계속 흐렸다면 나에게 어두운 색채의 수련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발자크는 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노인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자신의 예술론을 펼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 말들이 감동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작가의 그러한 표현과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세세하게 느끼기보다 그저 말문이 닫힌 채로 한순간에 정복당하고 만다. 예술 작품이 주는 압도적 아우라는 말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서의 페트릭 브링리의 말처럼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말보다는 내 속에 있는 감정에 그냥 저장되어 버린다.

 

철저하고 자신만만한 예술적 신념으로 프렌호프는 완벽한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프렌호프의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완벽했지만 그것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관람자가 없었거나, 예술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너무 앞서 가 시대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예술가는 좌절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가의 숙명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개성, 열정, 자아의 도취로 완성되어진 예술은 자신에게만 머물 수 없고 누군가가 봐주어야 한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돈을 원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실패했고, 빚을 갚고자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써댔다. 사업과 문학이 통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를 마시며 집중적으로 글을 쓴 그의 뚝심만은 인정하고 싶다. 인상파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인상파로 끝낸 모네의 뚝심 역시 대단하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완성한 작품을 남에게 평가받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고 그것으로 좌절하고 고통 받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열정으로 계속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술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열정.-p.71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미지의 걸작’,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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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4-06-19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름다워요..!😍 잘 읽고 갑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4-06-19 16:25   좋아요 1 | URL
등대지기 님,
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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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영생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인상파의 화풍같은 문장으로 서술했으며, 이 두 주제는 연결된다. 인간(예술가)은 묘약과 절대적 걸작으로 완벽을 꿈꾸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각각의 세부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 상태에서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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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6-18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페님의 100자평도 한 편의 걸작입니다.(ㅡ>새파랑님이 딱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야 하는데 요즘 안보이셔서 제가 대신^^) 녹색광선의 요 시리즈 책 만듦새도 예뻐서 하나씩 사두었는데 이 책은 있는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산다‘는 말이 섬뜩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페넬로페 2024-06-18 12:53   좋아요 1 | URL
아니, 새파랑님은 요즘 뭐하시길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건지~~
열정적으로 연애 하시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다 좋은데,
발자크가 ‘미지의 걸작‘에서 갑자기 끝을 내버린 느낌이 들어 고민하다 별 넷을 줬어요.
괴테의 파우스트 생각도 나고
프루스트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미미님 책장 어딘가에 이 책이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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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처음 부분의 작가노트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었다. ‘날 때부터 책을 읽어온 느낌이란 문장이 반가웠고, 주변의 배경보다 책에 더 많이 빠져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그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라는 단어만으로 고닉과 내가 서로 공감하며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내가 읽어 온 책에서 얻은 교훈이 바로 내 인격이 되지 않는 모순이 고닉에게도 있어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작은 아씨들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본문에서 고닉이 언급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에게 고닉의 말들은 어려웠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긴 줄거리의 나열은 지루하기도 했다. 설사 내가 그 책들을 읽었다 해도 고닉이 들여다보는 책 속의 삶과 내가 보는 것들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고닉이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하며 치열하게 책이 말하려는 것을 찾는 열정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세월이 흘렀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생략되고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가 그냥 여기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내 정체성이나 성향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바쁘고 , 어수선하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언제쯤 고닉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도 80세쯤 되면 그처럼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출발하거나 거쳐 간 작은 아씨들로부터 나름의,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펼쳐 지금까지 자신의 의미를 첨삭해 오고 있다는 것.고닉이 말한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고 체감하며 사는 내가 어느 자리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책은 다 그렇다. 그 무엇도 책에는 비길 수 없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위대한 안톤 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을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뉘앙스를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음미하고 재고를 환영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비교적 상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뉘앙스 없는 자유는 절대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문명인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뉘앙스다. 뉘앙스를 없애버리면 동물의 삶만 남는다. 바꿔 말해, 전쟁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훌륭한 문학의 풍요함은, 우리 삶의 풍요함으로 다시 긍정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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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6-13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은 어릴 때부터 책을 보셨군요 저는 어릴 때는 책을 안 봐서 늘 왜 안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자신을 돌아보기 쉽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잘 못 읽지만, 예전엔 책을 더 못 읽기도 했네요 잘 읽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한번 하는군요 책을 만난 게 일찍은 아니었다 해도 앞으로도 볼 테니, 그건 괜찮겠지요


희선

페넬로페 2024-06-13 07:33   좋아요 1 | URL
책을 읽기는 읽는데 다시 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새로운 책이 보고 싶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만 하는것 같아요. 희선님께서는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시는군요.
그러한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미 2024-06-1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작은 아씨들>도 읽지 않았어요ㅜ.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책 목록이 나오면 강박적으로 ‘꼭 읽어내야지‘ 하는 편인데 고닉의 목록, 걱정됩니다.ㅎㅎㅎ

사람이 죽을 때 지난 세월들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스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아득하면서도 찰나같은 삶을 살면서도 ‘소설‘로 타자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을 다른 시각에서 볼 기회인 것 같아요. 오늘도 한 토막, 생각꺼리를 던져주신 페페님!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6-18 12:48   좋아요 1 | URL
고닉의 목록은 한국에 번역 안된 것도 있어 다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고요.
고닉의 의도가 분명 전부가 아닐텐데 저한테는 서양 작가들의 정념이 조금 버거워 더 접근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ㅎㅎ
요즘 ‘찰나‘라는 단어가 많이 와 닿아요. 지금 쓰고 있는 페이퍼에서도 그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지금 현재에 몰입하며 잘 살아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들 중에 책이 성찰할 기회를 주어 너무 좋아요.
날씨가 더워요
직장인, 미미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늘 오후도 화이팅 하시길요^^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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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날이 있을까? 지적인 작가, 보통은 ‘불안‘에 대해 다양하고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조금 고전적이다. 그렇다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상큼하고도 현대적인 방법 또한 딱히 없다. 다시 보통의 책을 들여다보며 그가 제시한 방법을 인정하며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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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스킵과 로퍼 x 카페테일 - 12g, 5개입 스킵과 로퍼 공식 굿즈 12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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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 주말에 12일로 졸업 작품을 찍기 위한 촬영장에 다녀온 딸아이가 장염이 동반된 심한 몸살을 앓았다. 밤새 빗속에서 촬영을 한 탓인지 그곳에서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병원에 가서 링거까지 맞았지만 며칠 학교를 못 갈 정도로 많이 아팠었다. 딸아이는 몸이 회복되지 않아 그 다음 주 촬영엔 후배에게 대신 가 달라고 부탁하고는 현장에 나가지 못했다.

 

지난주에 다시 촬영장에 가야하는 딸아이가 걱정이 되어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주었다. 밥에 약간의 간을 해 주먹밥을 만들고 진미채, 그리고 형님이 가져다주신 열무얼갈이 김치, 도시락 김을 함께 담아 주었다. 따뜻한 커피도 내려 텀블러에 넣었다.

 

간편하고 너무나 부실한 도시락을 싸고, 커피를 내리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내가 고3이었을 때 엄마는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셨고, 보온병에 꼭 커피를 담아주셨다. 김치를 잘 먹지 않는 나였기에 엄마는 매번 김치대신에 다른 반찬을 하나씩 더 넣어야만 했다. 아침마다 식구들 아침 준비하고 내 도시락까지 싸려면 엄마는 얼마나 일찍 일어나야 하셨을까? 그나마 내가 막내였기에 그땐 학교 다니는 사람이 나 하나였지만, 언니, 오빠가 한꺼번에 학교를 다니고, 언제나 시골에 사는 친척들이 기숙하는, 군식구가 딸렸을 땐 엄마가 싼 도시락의 수는 엄청 많았을 것이다.

 

마침 알라딘의 드립백, 스킵과 로퍼 × 카페테일의 포장지의 교복을 입은 학생 그림을 보고 고 3때가 더 생각난 것 같다. 커피, 프림, 설탕의 2,2,3의 배합으로 엄마가 정성스레 타준 커피를 마시며, 내가 다닌 여고의 모든 것이 싫어 그저 그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 대학에 가야된다는 생각만 그때 했었다.

 

예쁘고, 잘 생긴, 멋진 교복을 입은 스킵과 로퍼(만화 주인공의 이름은 따로 있는데 애칭인가?)와는 생김새부터 다르고, 드립으로 커피의 향만을 느끼며 마시는 것과 다른 ‘2,2,3’의 촌스러움이 있었지만 그때의, 내게 해주었던 엄마의 정성이, 도시락과 커피에 담긴 따뜻함이, 지금 내가 힘들 때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자 내가 딸아이에게 군말 없이 해 줄 수 있는 내리사랑의 원초적인 근거가 된 것은 확실하다.

 

‘2,2,3’에서 콜롬비아 아스무까에스 툴리마, 포도의 산미, 캐러멜의 단맛, 카카오의 바디감으로 기능과 취향은 분명 변화되었지만, <커피>라는 정체성과 거기에 들어있는 사람 사이의 추억, 따뜻함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엄마가 타 준 정성스런 커피에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던 내 고3 시절의 미안함도 있고.


자신이 아플 때 며칠 동안 병간호 해준 나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딸아이가 밥을 해주었다. 약간 국적불명의, 이름도 잘 모르는 음식이지만 맛있었다.

 

맛있게 잘 먹었지만, 그래도 아프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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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30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 리뷰를 이렇게 멋지게 쓰십니까?!
국적 불명의 음식이긴 한데... 맛있어 보여요! ㅋㅋㅋ
토마토&오이는 터키식? 지중해식이라고 합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5-30 18:35   좋아요 0 | URL
어디선가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들긴 하더라고요.
지중해식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ㅎㅎ

blanca 2024-05-30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도 장염으로 난리예요. 요즘 바이러스가 돈다네요. 고생하셨네요. 그런데 따님이 해준 음식 너무 감동인데요. 건강식인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5-30 18:38   좋아요 0 | URL
blanca님께서도 가족들 챙기시느라 고생 많으시겠어요.
일단 한 번 아프면 며칠은 가잖아요. 저와 다르게 딸아이는 손이 야무져 음식도 곧잘 하는데 맛도 괜찮아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얄라알라 2024-05-30 1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웅~~ 사랑이 넘치는,따뜻한 이 한끼 식사...

가지 야채 커팅이 대범함을 나타내는 듯^^ 행복하셨겠어요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4-05-30 19:36   좋아요 2 | URL
얄라님께서는 가지 야채 커팅도 보시는군요.
저는 음식 만드는데 젬병이라서 그냥 만들어 주는대로 먹어요.
제가 맨날 하는 음식이 아니라 딸아이는 색다른 음식을 해주어 그게 좋아요^^

독서괭 2024-05-30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나.. 페넬로페님의 도시락도 따님의 한상도 참 따뜻하고 좋네요~!! 따님 요리 넘나 맛있어 보입니다.. 전 요리똥손이라.. ㅋㅋ

페넬로페 2024-05-30 19:38   좋아요 1 | URL
저는 요리뿐만 아니라 손으로 하는 건 다 재주가 없어요.
오랜만에 도시락 쌌는데 저 간단한 것 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엄마 생각이 났나봐요.
요리는 맛있었어요^^

자목련 2024-05-31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염으로 따님도 페널로페 님도 고생하셨네요. 따님의 요리 모두 맛있어 보여요.
오이, 토마토, 가지는 건강하고 맛난 재료. 쌈은 머위일까요?

페넬로페 2024-05-31 10:53   좋아요 1 | URL
계속 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프니 짠하더라고요.
쌈은 깻잎이예요.
살짝 데쳐서 쌈밥으로 먹으니 맛있더라고요.
저 중에 젤 제 입맛에 맞았어요.
머위나 곰취로 해도 좋을 듯 해요

자목련 2024-05-31 12:19   좋아요 2 | URL
아, 깻잎이군요.
기억했다가 쌈밥으로 먹어봐야겠습니다!

서니데이 2024-06-01 2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커피를 선물로 받았는데, 포장을 열기 아쉬워서 상자 그대로 있어요.
사진 속의 음식들 맛있을 것 같은데요. 바쁠 때에는 평소에 잘 하던 것들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요리하는데 힘들었겠어요.
페넬로페님, 오늘부터 6월 시작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되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4-06-02 01:28   좋아요 2 | URL
포장지의 그림이 너무 산뜻하고 예쁜데, 저만 몰랐지 굉장히 유명한 캐릭터이더군요.

요리가 먹기는 좋은데 그 전에 준비할 것과 먹고 난 뒤 치우기가 만만치 않죠.
인간들의 세 끼 먹기가 힘들어요 ㅎㅎ
벌써 6월이 되었어요.
하루하루가 공평한데 제가 잘 사용하지 못한 날이 많았던 것 같아요.
6월 열심히 보내야겠어요.
서니데이님께도
행복하고 알찬 6월이면 좋겠습니다^^

2024-06-01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2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4-06-02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랜만에 쌈채소를 제 기준 듬뿍 샀답니다 이 달에는 채소를 좀 많이 먹어야겠어요 오늘 일요일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06-03 17:51   좋아요 1 | URL
저도 매번 채소를 많이 먹자고 결심합니다.
저는 요즘 형님께서 텃밭을 가꾸시기에 채소를 자주 갖다주시는데 샐러드를 해 먹으니 좋더라고요.
6월이 되니 꽃보다는 초록이 좋아 보입니다.
서곡님!
6월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요^^

희선 2024-06-04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님이 도시락뿐 아니라 커피도 타주시다니, 그때 좋았겠습니다 그때는 어머님이 지금은 페넬로페 님이 따님을 위해 커피를 내리시는군요 커피로 좋은 기억이 있는 거네요 따님도 페넬로페 님이 싸주신 도시락과 커피 기억하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06-04 14:46   좋아요 1 | URL
엄마가 저에게 해주었던 것의 반의 반도 저는 딸에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커피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새 세월이 많이 흘러버렸어요.
그냥 훌쩍 넘어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