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오랑주리 미술관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날에 지베르니를 갔었지만, 비가 내려 빛이 있는 모네의 정원과 연못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쉬움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수련 연작 8작품은 이상했다. 그림이 너무 어두워 세부적인 형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색깔들도 거의 비슷하게 보여 모네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나 생각될 정도였다. 화가가 말년에 백내장을 앓아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영향 탓인가도 생각되었다. 미술관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몸을 돌려가며 그림들을 감상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미술관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수련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천장에 있는 채광창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모네의 수련은 그 빛을 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갈 때의 흐린 날씨 때문에 수련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고 날씨가 개기 시작하자 햇빛이 채광창으로 들어와 밝은 색깔이 채색된 모네의 수련이 그제야 제대로 보인 것이었다. 나와 딸아이는 다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련을 감상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전체의 모습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만약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면 빛에 따라 민감하게 변하는 수련의 색채를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 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중에서]
미술관에서 나와 튈르리 정원의 조그만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었다. 스쳐가듯 잠깐인 찰나적 순간에 느낀 것들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이지만 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살아가는 허세와 자기만족이 우습기도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실이 모네의 요청으로 자연광에 의해 수련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을 더 믿기에 그 날 만약 날씨가 계속 흐렸다면 나에게 어두운 색채의 수련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발자크는 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노인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자신의 예술론을 펼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 말들이 감동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작가의 그러한 표현과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세세하게 느끼기보다 그저 말문이 닫힌 채로 한순간에 정복당하고 만다. 예술 작품이 주는 압도적 아우라는 말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서의 페트릭 브링리의 말처럼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 말보다는 내 속에 있는 감정에 그냥 저장되어 버린다.
철저하고 자신만만한 예술적 신념으로 프렌호프는 완벽한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프렌호프의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완벽했지만 그것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관람자가 없었거나, 예술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너무 앞서가 시대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예술가는 좌절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가의 숙명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개성, 열정, 자아의 도취로 완성되어진 예술은 자신에게만 머물 수 없고 누군가가 봐주어야 한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돈을 원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실패했고, 빚을 갚고자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써댔다. 사업과 문학이 통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를 마시며 집중적으로 글을 쓴 그의 뚝심만은 인정하고 싶다. 인상파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인상파로 끝낸 모네의 뚝심 역시 대단하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완성한 작품을 남에게 평가받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고 그것으로 좌절하고 고통 받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열정으로 계속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술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열정.-p.71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미지의 걸작’, p.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