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헤더 로즈 지음, 황가한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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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 로즈의 장편소설인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이 잘 된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에 자잘한 인물들을 많이 배치한다. 예술에 대한 것을 나타내고자 수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등장시킨다.

 

"수란이 익기를 기다리는 소년, 공원에서 음악을 듣거나 빗속을 걷는 사람들과 센강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벽 앞의 사내들을 겨냥한 총살형 집행대의 총, 활짝 핀 수련과 비통한 절규, 누구 마음속에나 있는 빨간 사각형, 밀밭을 가로지르는 색채의 리듬,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는 별들."

(조르주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데스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2차원 농민 여성의 회화적 사실주의' 속칭 '빨간 사각형',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 연작과 '별이 빛나는 밤' -옮긴이 주) -p378

 

이 책에는 저렇게 나열된 문장들이 많다. 책의 뒷편에 책에 등장한 예술가들의 목록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물론 번역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앞뒤 맥락이 연결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굉장히 흥미롭다. 여기에는 두가지 중요한 플롯이 있다. 이 두 개가 스토리를 이어가는 기둥이 된다.

 

첫번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2010년 MoM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아트리움에서  '예술가와 마주하다' 또는 '예술가가 여기있다' 라는 제목으로 마리나는 3월 9일 부터 75일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한 의자에는 마리나가 앉아있다. 빨간 색 드레스를 입고 하루종일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아주 꼿꼿이 앉아 있다. 마리나의 맞은편 의자에는 관객중 누구나 앉을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 시간제약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내면을 세상 사람들이 보거나 듣거나 비판하게끔 확대해서 보여줄 리 만무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핵심일지도 몰랐다. '이리 와서 당신 자신이 돼라' 는 초대가. 의자에 앉아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도전적이고, 낯선 일인지를 알게 됐다.-p242 〕

 

우리는 매일 매번 누군가를 바라보지만 사실 눈을 끝까지 맞추는게 쉽지 않다. 둘이서 계속 눈을 마주보며 바라본다면 사람마다의 반응은 다 다를 것이다. 마리나와 마주 앉은 사람들은 그녀의 눈을 보며 점점 그 너머를 보게 된다. 환각을 보기도 하고 지금 당면한 사실을 깊이 새겨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을 때의 울림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 같다.

 

두번째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아키 레빈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레빈은 영화 음악 작곡가이다. 그녀의 아내 리디아는 잘 나가는 건축가인데 선천적인 유전병으로 인해 병약한 사람이다. 그런 리디아가 얼마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사람을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그런 그녀는 요양원으로 가고 법적으로 남편인 레빈이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조치를 한다. 많이 아프기 전에 미리 그런 법적인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레빈은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여러가지 고민에 빠진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누구나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레빈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술가인 레빈은 자유가 중요하다. 병든 아내를 돌보면서 창작을 해나간다는 건 사실상 어렵다. 그렇다고 아내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일만을 한다면 도덕적인 책임에 직면한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서약을 한 부부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

 

리디아의 입장도 있다. 그러한 조치가 남편을 사랑하기에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의미도 있겠지만, 어쩌면 푹 꺼진듯한 자신의 육체와 초점잃은 눈빛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싫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그 모습은 슬프다.

 

이 소설에서 또한 작가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창작은 자유와 고립의 상태에서 일상적인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제거해야만 가능한가?

 

레빈은 그러한 고민을 거듭하며, 계속해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보러 아트리움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제인은 "칼과 저는, 우리는 28년 동안 같이 살았어요. 하지만 이제 칼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생전에 못 한 말을 할 기회가 다시는 없어요. 제 생각엔, 오지랖 넓게 충고를 한다면-남자들이 항상 싫어하는 건 알지만-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셔야 해요. 저는 그냥 사랑이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해준다.

 

마리나가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작품을  끝내기 하루 전에 드디어 레빈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그는 그녀의 눈을 통해 리디아를 본다. 그리고 마리나가 말하는 듯한 소리도 듣는다.

 

중요한 건 편안함이 아니예요.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치 그녀가 그의 머릿속에 직접 단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편리함이 아니에요.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예요. 중요한 건 기억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헌신이에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겁내선 안 돼요.-p371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75일 716시간 30분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고 1500명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85만명이 그 장면을 관람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은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허구이다.

 

마지막에 레빈은 리디아를 찾아간다.

 

이 책을 다 읽고, 유튜브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와 마주하다' 영상을 찾아 보았다. 그녀의 작품 시작 첫날에 울라이가 찾아와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울라이는 수 년 동안 마리나의 연인이었고 같이 공동 퍼포먼스를 한 작가였다. 그녀는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에게 손을 내민다. 둘이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고 난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울고 말았다.

 

이 소설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라는 장치를 사용한 건 탁월했다. 그것이 너무 강렬해 작품속의 허구들을 조금 작게 만드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중심에 그것을 놓고 펼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사랑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의 이야기가 많아 천천히 다시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겠다.

 

모든 프로젝트에는 일곱 단계가 있다:

인식, 저항, 굴복, 작업, 숙고, 용기, 선물

이 책의 순서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수렴'이라는 단어에 넣는다.

 

우연은, 내가 듣기론, 하느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하지만 수렴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미지의 결과를 가져올 무언가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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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3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이작품은 읽으면서 조루주 쇠라부터 모네 고야 고흐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활동중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까지 20세기 부터 21세기 예술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것 같아요. 제목만으로는 오르한 파묵에 순수 박물관을 떠올렸는데 ㅎㅎ

페넬로페 2021-01-03 21:42   좋아요 1 | URL
네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나와요~~
제가 모르는 작가들도 많이 나오구요^^
와 정말 알고 있어야할것들이 너무 많아요^^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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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결혼과 죽음】이 있다. 거기엔 각자 나름의 사연들과 이유가 있고 그 결과들도 다 다를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인 '에밀 졸라'는 그 다양한 결혼과 죽음을 계층별(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그리고 농부)로 분류하고, 거기에 세태를 반영해 놓았다.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돈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시기의 결혼과 죽음을 작가는 사실적이면서도 간략하게 말해주고 있다.

소설이지만 실제로는 각 계층에서 샘플링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난다.

 

〈결혼이란 얼마나 야릇한 제도인가. 인류를 두 진영으로 나누어 한쪽엔 남자. 다른 한쪽엔 여자를 배치해서 각 진영을 무장시키고는 이제 그들을 합류시키며 "평화롭게 살아보라니!" 〉

〈여기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자료를 특정화시켜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겠다. 대신 몇가지 예를 보여주련다.〉

-p14~15 ,서문에서

 

서문에서 밝힌 작가의 말대로 여기에서의 결혼은 각 계층별로 철저히 일반화된다. 귀족과 부르주아는 한치의 양보가 없는 서로간의 거래로 계약서를 교환하고 결혼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 결과는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이다. 그들은 얼마되지 않아 결혼이라는 허울만 유지할 뿐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제일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하는 연인은 서민인 스물 다섯살의 발랑탕과 열 여섯살의 클레망스이다. 돈이 없어 성당에서 결혼식도 못 올리지만 그들은 행복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된 클레망스는 그동안 아이 세 명을 기르느라 금발 머리는 누렇게 변했고 얼굴도 많이 상했다. 아이들은 울어대고 부부싸움이 나고 남편을 찾으러 술집에 가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한다?????????

 

이 소란하고도 구차한 생활 속에서 어떤 땐 데울 불도 먹을 빵도 없지만, 낡고 뜯어진 커튼 아래 놓인 침대에서는 밤이면 사랑의 애무가 날갰짓이라도 하듯 파닥거렸다. - p61

 

모든 것이 많이 변했지만 19세기 프랑스, 결혼의  세태를 반영한 그들의 일반화에 지금 우리를 넣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삼포세대를 넘어 완포세대라는 말까지 생기는 요즘, 결혼은 자유의지에 의한 거부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한 삭제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포기하고 제외시키는 삶은 젊은 세대의 것만은 아니다. 이미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결혼의 위기는 만만치 않다. 

 

19세기 프랑스의 결혼식에서는 계급의 차이를 불문하고 시청에서의 예식 후에 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이 행해진다.

그들의 그 행위와 정서가 참 좋다.

 

죽음 역시 계층별로 일반화되지만 결혼보다는 다양하다.

 

각자 속으로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며 생활하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관계의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드 베르트백작은 품위있는 죽음울 원한다.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아내의 간병도 원하지 않는다.

 

백작은 성가시게 고통을 끌면서 요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조용히 혼자 떠나려는 쓰디쓴 이기심을 오히려 음미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아무도 귀찮게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고 떠났다고 세상이 말해줄 남자로

깔끔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p68

 

귀족의 죽음답게 성당에서의 장례식은 웅장하고, 성당 밖을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은 길다.

 

상류 부르주아에 속한 게라르 부인은 망나니같은 세 아들들을 믿을 수 없어 죽기 직전까지 돈 걱정을 하며 

장롱 열쇠를 움켜쥐고 있다.

 

어머니가 사망하면 다시 부자가 된다는 것을 그들도 아는 만큼 아무 일도 안 할 이유는 충분했다.-p80

게라르 부인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 고민거리를 사서 만들었고 의구심 때문에 속이 타들어갔다. -p81

죽어가면서도 그녀가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집안의 소비를 관리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p82

자식들이 자신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끔찍한 생각을 품고 숨을 거두었다.-p86

돈을 뺏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구두쇠 기질의 망자 성향이 그들에게서 깨어난 것이다. 돈이 죽음을 오염시키고 나면

죽음에서 뿜어나오는 것은 분노뿐이다. 그래서 관을 앞에 두고도 서로 싸워댔다.-p90

 

항상 기침을 달고 사는 병약한 아델은 남편 루소와 함께 문방구를 운영한다.

아프지만 가겠세를 내며 이익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쉬지를 못한다.

 

장사라는 게 그렇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이 그 안에 파묻혀 죽어간다.-p92

그에게 아델은 아내일 뿐만 아니라 일을 할 줄 아는, 그것도 영리하게 할 줄 아는 동업자이기도 했다. 그녀를 잃으면 애정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장사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힘을 내야 했다. 슬픔에 잠겨 가게문을 걸어 잠글 수는 없는 일이니까. 눈물 그득한 눈으로 아델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렇게 일상은 또 계속되었다.-p93

루소 씨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우는 그를 아델이 되레 위로하며 여러 가지 조언까지 보탰다. 혼자 되어 외로우면 결혼도 하라고. 대신 젊은 여자 말고 좀 나이 든 여자를 선택하라고. 젊은 여자가 홀아비와 결혼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니까.-p98

루소 씨는 무겁디무거운 슬픔에 눌려 목이 메어왔다.

머리가 멍하고 사지까지 얼얼한 상태에서 더 열이 빠지 이유는 주중에 가게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p103

 

일도 없고 빵도 없고 집을 데울 불도 없는 가난한 모리소 가족의 열 살 난 아들 샤를로는 아프다. 돈이 없어 아이에게 치료를 해줄 수가 없다. 빈민 구제소에 등록하러 구청에 가봤지만 신청자가 너무 많아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만 듣는다. 그렇게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샤를로는 죽고 그때 빈민 구제소에서 구호품을 가져온다. 아이 옆에서 굶는다고 아이가 되살아날 것도 아니라며 이웃이 권하는 음식을 모리소부부는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들은 샤를로를 허연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넓고 황량한 땅에 묻는다.

 

빈민 구제소는 항상 기차가 떠나버려야 도착한다면서 모리소는 허탈하게웃었다.- p111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이 흐뭇할 지경이었다. 그 옆으로 어둠 속에서 백지장 같은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엄마의 두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커다란 눈물방울이 빵 위로 뚝뚝 떨어졌다. -p112

비참함과 초상으로 덮인 들판,

파리 외곽의 추위와 배고픔으로 가득 찬 시체들 때문에 힘겹게 땀 흘리고 질질 끌리며 황량해진 들판.-p114

 

농부인 장 루이 라꾸르의 죽음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아주 힘들게 곡괭이질을 열심히 해야만 끼니를 이을 수 있는 형편이다.

농사일은 다 때가 있기 때문에 자식들을 추수하러 보내고 그는 혼자서 덤덤히 죽음을 맞이한다.

 

일하러 나가는 수밖에. 거기 남아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지금 더 돌봐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밭이었다.

만일 아버지가 숨을 거둔다면 그건 결국 아버지와 하느님의 일 아니겠는가. 대신 추수를 망치면 가족 모두가 힘들어진다.

그는 피로로 쓰러지고 나서 한구석에 죽도록 방치해둔 늙은 말과 비슷했다. 장 루이는 육십 년 동안 일해왔다.

그러니 이제 떠나도 된다. 삐걱대는 나무나 마찬자기인데 자르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있겠는가?-P139

젊은이들은 앞서간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은 채 서서히 늙어가고 각자의 차례를 기다린다.

햇볕을 잔뜩 받는 평화로운 죽음, 시골의 고요함 속에 자리하는 영원한 숙면이다.-p127

 

죽음은 그 무엇이라도 슬프다.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지만 자신이 살아 온 삶과 철저히 연결되어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 의 테마곡인 'one fine spring day' 의 음률처럼 인생의 화려한  한 부분이 지나가면 누구나 그저 쓸쓸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생이,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죽음 역시 우리와 비슷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우리보다 자연적이고 조용하다. 그 이유가 어쩌면 의학의 발달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는 몸의 어딘가가 아프면 그때부터 병원을 계속 다녀야하며,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치매에 걸리고 요양원으로 가야한다.  우리의 죽음은 번잡하고 점점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

 

에밀 졸라의 '결혼, 죽음' 은 책의 크기가 작고 분량도 전체 153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9개의 단편들은 1875년 러시아 잡지 '유럽의 메신저'에 실린 것이다. 마지막 편인 '어떤 사랑'은 1866년에 발표되었고, 그 후 '테레즈 라캥'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출간된다. 이 짧은 소설은 잘 읽힌다. 그러나 휘리릭 읽으면 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삶의 중요한 두 개의 축일 수도 있는 '결혼과 죽음'이 지나치게 일반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한번씩 이런 대표성으로 나타내어진 것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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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2-26 2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혼과 죽음, 그 두 가지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삶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시대도 계층도 다르지만 인용하신 글 속의 삶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9개 단편에 153페이지라니 의외로 얇군요.

페넬로페 2020-12-26 21:35   좋아요 3 | URL
마지막 짧은 단편까지
총 10개가 실려있는데
버릴 문장이 없을 정도로 작가가
압축적으로 잘 썼더라구요~~
저도 이 책 읽으며 먹먹했어요^^

scott 2020-12-26 2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기침을 달고 사는 병약한 아델은 남편 루소와 함께 문방구를 운영한다. 아프지만 가겠세를 내며 이익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쉬지를 못한다. 장사라는 게 그렇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이 그 안에 파묻혀 죽어간다.] 이구절 참 슬퍼요 ㅜ.ㅜ

2020-12-27 0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0-12-27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결혼과 죽음을 계층별로 분류했다니 흥미가 확 생기네요~ 에밀졸라는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나봐요~ 읽고 싶은 책장에 넣었습니다. 제 뉴스피드에 페넬로페님의 후기가 추천으로 떠서 서재 구경 왔는데 매번 엄청난 독서량과 정성스런 페이퍼에 감동 받고 계속 받아보고자 친구신청도 살포시 누르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0-12-27 11:5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붕붕툐툐님!
이름이 너무 귀여워요~~
결혼과 죽음은 분량이 아주 적은데도
사회의 모습을 세밀하게 잘 표현한 소설인것 같아요~~
아마 작가의 힘이 아닌가해요^^
붕붕툐툐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냥 열심히 쓰려구만 하고 있어요
독서량은 이곳에서는 전
하수에 속하구요**

2020-12-27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7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7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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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年年歲歲)

파묘(破墓)
하고 싶은 말
무명(無名)
다가오는 것들

황정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는
한세진, 한영진, 이순일, 세 모녀가 화자가 되어
사람 사이에 완벽한 공감과 이해는 어려우며
가족일지라도 각자의 입장과 느낌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가족이지만 어떤 말로 인해 상처도 받고,
결국 하지 못할 말도 있으며
언짢고 불편한 것도 많다.
그러나 또한 가족이기에
남들이 해주지 못하는 것을 서로 해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작가의 말‘ 에서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처음엔 가족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연년세세‘ 를 읽어 갈수록
구절구절마다 나자신과 내가 아는 사람들의 삶이 겹쳐져
그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소설은 그저 배경이 되었다.
신산스럽고 위태로운 각자의 삶속에서
연년세세되는것은 다 다르고
그것이 관계속에서 이해되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한다.
억지스럽고 불필요한 것들이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본시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쁘게 행동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것이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완벽하고 절대적인 관계는 없다.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하려하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

나의 친구 K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늙어 병들고 치매를 앓으시는 노모를 혼자 모시고 있다.
어머니는 거동을 못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계신다.
음식을 해서(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정성스러운) 그것을
믹서기로 갈아 어머니에게 떠먹인다.
하루에 음식을 떠먹이는 일이 무려 4시간이나 걸린다,
K의 나머지 가족들은 거의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한번씩 K가 불만을 터뜨려야 조금 돈을 보내준다.
밤에도 몇 번 잠에서 깨어 누워있는 어머니의
자세를 바꾸어준다.
그런 K에게 내가 너무 고생한다, 힘들겠다, 라고 말하면
K는
힘들지만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고
엄마가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면
˝당신은 나에게 충분히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고 한다.
K의 말에 울컥했고
나는 그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다가오는 것들‘ 은 이 책에 실린 4번째 작품이기도 하고
동명의 프랑스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해 짤막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궁금해져 영화를 봤다.
프랑스 영화답게, 사람답게
주인공 나탈리는 그야말로 쿨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인 그녀는
성실하고 화도 잘내지 않는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가도
나탈리가 집필한 책이 더이상 수익을 낼것같지 않아
출판사가 포기할 때도,
자신을 따르던 제자, 파비앵에게 가치관에 대해
비판받을 때도 그녀는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한번씩 혼자서 꺼이꺼이 우는 정도이다.
그저 바쁘게 걸으며 성실히 살아간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을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나를 생각했다.

황정은의 문장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천천히 음미하듯 읽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이 조금은 평범했지만 나에게
뭔가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함과 의미를
주어서 좋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ㅡ 뒷표지에~~

[밑줄긋기 ]

누나가 수고했다, 수고가 많다고 말했다.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히지는 않았다.ㅡp43~44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 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ㅡp70

망실된 그들의 이름은 이순일의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전한 망(亡)이 될 것이다.이순일이 그 문서를 닫은 사람이었다. 이순일은 거기 적힌 이름들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로든 기록으로든 사람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길 수 있고, 남기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그것을 내가 다시 생각하며 말해야 하는가. 이순일은 아이들이,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가 그 일을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 ㅡ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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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15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여자들은 나이를 먹어도 멋져요. 연하남이랑 연애도 하고 ㅋㅋ셔츠 니트 늘어진거 걸쳐도 멋짐 . 가족이든 타인이든 완벽하고 절대적인 관계는 없다.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하려하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동감합니다

페넬로페 2020-12-15 22:39   좋아요 1 | URL
네, 그냥 아무거나 걸치는데 멋지더라구요~~
주인공이 철학교사인데 책을 많이 보거든요^^
그것도 멋지고~~
저 위의 영화포스터는 한국에서 상영할때의 포스터인데 연년세세에서 비판을 해요^^
나탈리와 파비앵이 사제지간인데 연애는 하지 않거든요**

서니데이 2020-12-23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제 서재에서 소소한 이벤트를 합니다.
시간되시면 구경오세요.^^

scott 2020-12-23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하여 트리나무 한그루 심어드려요 ㅋㅋ

┼..:..:..:..:..:..:..:..:..:..:..:..:..:..:..:..:..:..┼
│*** Merry ☆ Christmas! ** ★
│Merry..........:+☆+:............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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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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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ry ..:+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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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페넬로페 2020-12-23 23:55   좋아요 1 | URL
와! 너무 감사합니다^^
scott님의 크리스마스 트리로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맞이하게 되었어요**

페크pek0501 2020-12-23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페넬로페 2020-12-24 00:0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페크님!
건강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서니데이 2020-12-25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메리크리스마스.
성탄의 기쁨을 나누며
즐거운 크리스마스 연휴 되세요.^^

페넬로페 2020-12-25 18: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서니데이님**
 
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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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한 개인을 향해 농담을 던진다. 그 농담이 받아들여지든, 아니면 예상치도 않게 그것이 악의로 해석되어 그 사람에게 내팽겨쳐지든 그것만으로 끝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라고 마르케타 개인에게 보낸 루드비크의 농담은 그렇게 끝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열정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그것을 위하여 몸바친 어떤 사상과 주의를 바탕으로 조직된 단체에 의해 문제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배반당하고 축출된다.

 

체코의 1948년 2월혁명 후, 젊은이들에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그 모습은 경직되고 심각했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여러 학습 모임들이 조직되어 빈번한 모임을 가지고 모든 조직원들에 대하여 공개적 비판과 자아비판이 행해졌다. 가벼운 행동과 미소마저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끼?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러 모임에서 나는 진지하고 열성적이며 확신에 찬 사람이었고,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는 제멋대로에다 짖궃었으며, 마르케타하고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냉소적이고 궤변적이었다. 그리고 혼자일 때면,(마르케타를 생각할 때면) 나는 겸허했고 중학생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p55~56

 

여러 얼굴을 가진, 누구나가 다 그럴 수 있는 평범한 루드비크는 마르케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농담을 적은 편지를 보낸다. 문제는, 마르케타가 어떤 것의 저 너머를 보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직 사물 자체만을 볼 수 있는 여자였다는데 있다. 결국 그 농담으로 루드비크는 당에서 축출되고 학업의 지속을 금지당하고, 최악에 속하는 검정표지를 받아 광부로서 군복무를 하게 된다.

 

루드비크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던진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면 그것이 굉장히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

그래서 루드비크는 그것을 농담이라고 했고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 그 조직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단단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줄 안 것이다. 거기서부터 루드비크의 불행은 시작된다. 그 불행은 루드비크의 모든 것을 빼았았다. 예상도 하지 못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해 뒷통수를 맞은 인간은 나락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상당히 삶이 억울할 것이며 그 분노로 인해 쉽게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며 루드비크의 루치에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본다.

 

'잊혔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유배당한 루드비크의 삶에 구원처럼 나타난 루치에를 루드비크는 사랑한다고 믿었고 자신의 욕망과 행위가 '사랑'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이라서 당연한 그 행위가 루치에에게는 왜 당연하지 않은지 루드비크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질문해보지도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루드비크는 결국은 권력을 갈망했으며 자신의 여자는 성녀처럼 순결하며 구원을 가져다주어야한다는 그렇고 그런 이기적인 남자에 불과했다.

 

루치에는 코스트카에게 루드비크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루드비크를 만났고 묘지에 있는 꽃을 훔쳐다 그에게 준다. 남녀간의 흔한 사랑은 아니라도 분명 루치에는 루드비크라는 한 인간을 불쌍히 여겼고, 어긋났지만 사랑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돌고돌아 먼 훗날 루드비크는 깨닫는다.

코스트카가

'즉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 쪽으로 향하고, 나에게 와 닿는 쪽에서만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그녀 자체의 모습, 그녀 혼자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을 해냈지만 자신은 그렇게 히지 못했다고 깨닫고, 마지막에 속죄를 함으로써 분명 루치에는 루드비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다양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첫 장편소설 '농담'은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라프, 코스트카가 화자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루드비크와 연관이 있다. 작가 개인의 삶이 이 작품에 많이 투영되어 있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 그런지 문장 군데군데에 괄호로 부연설명이 많이 되어 있다. 초보자가 행할 수 있는 무수한 설명인지 아니면 무척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나 살면서 삶을 살아가는 당위와 이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포장하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코스트카에게는 종교가, 헬레나에게는 자신의 신념이. 야로슬라프에게는 전통이 그런 것이다. 그 선택들은 지극히 각자의 것이지만 다만 그것들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변명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을 잃어 나락으로 빠진 루드비크는 억울함과 패배감으로 삶을 살아가고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친구 야로슬라프를 찾아간다. 농담이 놈담이 될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행이며 치욕적이다.  

 

언젠가부터 난 누군가로부터 오해받고 상처받기 싫어 농담을 안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고 비겁한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오히려 누군가를 위한답시고 훅 들어가 그 사람의 약함과 치부를 보고 당황하며 돌아서기 보다 그냥 그 언저리에서 머물며 기다려주는 것이 어쩌면 더 괜찮은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멋진 농담을 준비해놓고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들떠 올라서 내려버릴 수 없는 나의 정신에 차분함을 주었다. 이 소설로 가을의 느낌을 만끽했고 현재의 가을과 함께 했다. 고맙다.

쓰러진 야로슬라프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루드비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을 환하게 밝힌 구급차이다. 그 빨간 불빛속으로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돌아 본 나의 삶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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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10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농담리뷰 당선 축!카 ㅋㅋ

쿤데라 ‘불멸‘ 읽고 있었는데 흠,

프랑스로 망명하기전에 작품들 체코어로 쓰인 농담-참을수 없는 존재들-불멸들이 최고작들인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0-12-10 23: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쿤데라의 작품들을 다 읽고 싶은데 왜이리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scott님의 ‘불멸‘ 후기 기대할께요^^

페크pek0501 2020-12-23 14: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당선 축하드립니다. ^^

서니데이 2020-12-23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가정간편식 - 귀찮지만 집밥이 먹고 싶어서
이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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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요리책을 들여다본다. tv만 틀면 맛있게 먹어되는 먹방이 난무하고, 요리앱이나 유튜브에서는 레시피가 가득하다. 그러나 막상 끼니마다 뭘 해먹으려면 오늘은 도대체 뭘 만들어 먹을까를 고민한다.

 

요리에 관심도 재주도 없는 나는 그 무슨 베짱인지는 모르지만 밖에 나가서 사먹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식당을 갈지 선택하는 것도 귀찮고 막상 가도 그 맛이 그 맛이다. 그래서 대부분 집에서 요리를 한다. 한 번 요리를 하면 몇시간 싱크대 앞에서  노동을 하고 그것을 며칠씩 울궈먹는다. 우려먹다, 울궈먹다라는 말이 요리에서 시작된 것이라, 이럴때 참 절묘하다. 딸아이는 이런 나의 습관에 질색하지만 시간에 쫓기며 사는 나에게는 어쩔수없는 선택이다.

 

귀찮지만 집밥이 먹고 싶어서 '가정 간편식'은 요리 재료에 대한 기본 상식, 재료별 요리 레시피, 한그릇 요리, 간식등이 소개되어 있다. 라이프스타일이 많이 변화되었고 세상살이가 간편해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건강과 먹거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 책은 집에서 부담없이 간편하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재료준비가 간단하고, 먼저 양념을 배합해 놓고 그것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요리를 만든다. 책의 한 페이지에 요리 하나씩이 소개되어 있어 굉장히 쉽게 보인다.

 

간편하고 쉽게 보여도 음식이란 것을 만들려면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재료 준비도 힘들고 양념도 고루 갖춰 있어야 한다.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것의 성과는 적다. 먹어버리면 없어지고 다음 끼니가 또 들이닥치니 참 허무하다. 그래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 우리들은 또 요리책을 들여다보고 끙끙대며 앞치마를 두른다.

 

'가정 간편식'은 요리를 많이 해본 사람이 보기에는 좀 부족하고, 요리 초보자에게 적당할 수 있겠다. 요리에 대해 하루하루 발전하고 이것 저것 해먹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많이 멋부리지 않고. 소박하고 적당한 요리가 있어 부담이 없다.

 

한번씩 시청하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큰 그릇에다 맛있는 재료를 넣고 쓱쓱 버무려 찰지고 맛깔나는 음식을 뚝딱 해내시는 대한민국의 여인들이 경이롭고 부럽다. 이 생에서 나에게 그런 재주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그나마 요리책이라도 보며 힘겹게 살포시 만들어내는 나의 요리가 그래도 대견하다. 간편하고 쉽게 한그릇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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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8-18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식을 못해서 요리 잘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저 혼자의 입만 건사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만든 밥은 뭔가 맛이 없더라구요....

페넬로페 2020-08-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이버님!
정말 그렇다니까요~~
저도 제가 한게 맛이 없어요 ㅎㅎ
그래도 더운 여름에 입맛 떨어지면 안되니
혼자라도 잘 해드세요^^

서니데이 2020-08-20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텔레비전에서 한국인의 밥상이 나오고 있어요.
음식 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일 같아요.
먹을 때는 잘 모르지만, 할일이 너무 많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0-08-20 23:5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에 건강 조심하시고
우리 코로나 위기를 잘 견디자구요!


페크pek0501 2020-08-21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밥이 최고죠. ^^

페넬로페 2020-08-22 00:16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런거 같아요~~
가족들과 같이 먹어서 그런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