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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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다.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장편 <리나>가 너무나도 좋은 평을 받아서 선택했다. 왜 <리나>가 아니고 이 작품이냐고? 그것은 바로 글쓰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서평을 올리기 시작한지 몇 년이 되었지만 최근에 정체감을 많이 느낀다. 처음엔 단순히 읽은 책을 정리하는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일처럼 되었다. 읽으면서 도저히 서평 쓸 수 있는 감을 잡지 못해 미뤄둔 책도 있고, 억지로 서평을 쓰면서 다시 그 책의 가치를 발견한 적도 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글쓰기는 하나의 공부이기도 하다. 멈출 수 없기에 계속 쓸 것이고, 좋은 문장과 책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의 이런 글쓰기에 비해 소설 속 김 작가와 나는 전문가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뭐 그렇다고 그들이 큰 성공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따라가면 글쓰기의 어려움과 함께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단순히 쓴다는 것을 넘어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고, 그 문장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여줘야 한다. 화려한 수식어보다 사실에 충실해야 하고, 간결한 문장 속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 그것은 소설 속 ‘나’가 성장하는 속에서 천천히 깨닫게 된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이다.

여고생 ‘나’가 중요한 것은 의지가 아니라 테크닉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나가 테크닉을 이야기한 것은 글쓰기 때문이 아니라 연애 때문이다. 강렬한 의지로 좋아하는 남자에게 들이대는 그녀를 어떤 남자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아름다웠다면 다르겠지만 그녀는 70킬로그램의 거구다. 그래서 연애 상대를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다. 처음 선택한 R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지만 미친년 취급을 당한 후 그녀에게 오히려 연애편지를 보내는 K가 나타난다. 이 편지를 보면서 그녀가 쓴 글이 얼마나 조악했는지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 글도 나중에 좋은 글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그 사실을 모르고 연애에 목말라하던 그녀는 K와 사귄다.

이렇게 시작부터 그녀의 연애는 비일상적이다. 성 정체성 때문에 여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없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물론 뒤에 남자와 동거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으로 분명히 성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녀의 연애가 보통이 아닌 것처럼 집안 내력도 평범하지 않다.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것이나 아버지를 모르는 것은 두 번째로 해도 김 작가 불리는 엄마가 도통 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동네에서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필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어떤 잡지사에 에세이 하나가 실리지만 단지 책 팔아먹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녀 주변에 몰려드는 수많은 시인이나 작가라는 사람들 중 한 명도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등단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책을 내지 못했다고 작가가 아니라거나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테크닉의 숙지로 남을 가르치는 정도 뿐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 배우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그 빛을 발하는 것은 개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달렸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나와 김 작가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면서 나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주변 환경처럼 결코 쉽지 않고, 다양한 인생 역정은 훌륭한 글쓰기 소재가 된다. 하지만 그녀가 쓴 수많은 글들은 쓰레기라 불리고 버려진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도 그녀는 결코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태어날 때 유전자 속에 심어져 있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먼 미국에서 핵켄색 라이팅클럽을 결성했는지 모른다.

한 소녀의 성장을 글쓰기가 겹치면서 풀어낸다. 그 성장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어려움과 경험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다. 그리고 여자로서 엄마와 딸의 관계를 함께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무심한 엄마라도 그 속에 담긴 애정은 잔잔히 살아있다. 딸도 엄마의 병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것을 보면 혈연의 질김을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 ‘나’가 배우고 실천한 글쓰기에 대한 것은 사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나 에세이에서 한두 번 정도 본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쓴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아주 재미난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흠뻑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성공한 자들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변두리 삶속에 품어져 있는 열정과 사랑은 대단하다. 전문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서 체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또 다른 직업인의 실체를 보여준다. 가독성이 좋고,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간결하고 분명한 문장이다. 글쓰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기보다 작가 강영숙의 이름을 더 기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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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핀 - 당신은 꼭 필요한 사람인가?
세스 고딘 지음, 윤영삼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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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표지를 보았을 때 판타지 소설인줄 알았다. 슈퍼맨 같은 모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스 고딘이란 낯익은 이름은 그 착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데 차분히 저자와 목차 등을 검색하니 자기계발서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텐데 왠지 모르게 표지와 “당신은 꼭 필요한 사람인가?”라는 물음이 시선을 멈추게 만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잠시 동안 품고 있었던 선입견은 사라지고 저자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회사 생활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얕은 나의 영어 실력은 린치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마차나 자동차의 두 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기를 고정하는 핀과 핵심, 구심점, 요체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존재, 조직의 핵심인재를 뜻한다. 표지에 나오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린치핀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선배가 말했고, 지금 나 자신도 후배 등에게 하는 말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은 조직의 힘에 대한 것으로 내가 없어도 조직은 굴러간다는 것이다.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일을 많이 경험했다. 갑자기 선배들이 모두 나가면서 힘들게 고생한 적도 있지만 무사히 잘 마무리 했고, 나 자신이 나간 후에 후배들이 더 잘 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것이 바로 조직의 힘이라고 배웠고 경험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 린치핀이 되라고 말한다. 살짝 의문을 가지고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우리는 천재다’라고 말한다. 이때 천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청난 지적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천재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세상을 지리멸렬하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5쪽)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시스템에 끼워 맞추도록 기만당하고 세뇌되었고, 교육제도는 순응하는 사람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산업혁명 후 공장을 예로 든다. 최근에 대학들이 기업맞춤 인력을 양산하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순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린치핀의 중요성과 예술가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예술가는 “일에 대한 새로운 해답, 새로운 관계,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바로 당신”(20쪽)이라고 지적한다. 

세상이 변하면서 게임의 규칙이 바뀌고, 안정 지향적으로 되면서 얻게 되는 실패를 말한다. 무엇이 예술가로서의 내 재능을 망치는지 이야기하고, 내 안에 잠든 린치핀을 깨워라고 말한다. 그리고 열정과 예술이 결합할 때 린치핀이 탄생한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예술”이고,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관계를 맺는 것이 선물”(139쪽)이라면서 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끝낼 줄 안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과 “창조성은 생산하고자 하는 본능”(15쪽)이란 시인 브루스 아리오의 말을 인용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조건을 말한다. 그러면서 변화와 도전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품고 있는 도마뱀뇌의 예를 든다.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 섬뜩했다.

선물과 리더십과 마케팅을 연결한 부분에서 새로운 변화를 조금은 깨닫게 된다. 성공의 지도를 그리는 법과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다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라고 말할 때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은 “미래에 대한 향수 때문”(297쪽)이고, “자신이 그려놓은 결과와 사랑에 빠진 것”이라는 통찰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단순히 이 책이 자기계발서를 넘어 세상에 대한 통찰과 변화에 대한 인식과 고민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 속에 린치핀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는 사람이나 자신을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가볍게 시작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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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2010-10-2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보았습니다^^
 
네코지마 하우스의 소동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9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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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키 시리즈 3권 중 마지막 권이다. 이번에는 내륙이 아닌 섬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하자키 마을 앞에 있는 네코지마란 섬이 무대다. 이 섬은 특이하다. 가로 질러도 500미터가 되지 않는 조그마한 섬인데 고양이 때문에 유명해졌다. 인구는 30명 정도인데 고양이는 백 여 마리가 있다. 고양이 천국으로 불리는데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너무 많은 번식을 염려한 탓인지 중성화 수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 탓인지 이 섬에 고양이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섬사람들은 섬으로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막지만 몰래 들여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조그마한 섬에 놀랍고 신기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다시 등장한 고지마 반장은 반갑다.

첫 번째 사건은 고등학생 고테쓰가 여자를 꼬시려고 데리고 간 해변에서 발생한다. 그들이 발견한 시체와 칼이 처음부터 살인사건이 발생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시체는 고양이 박제품이다. 약간 김이 빠지는데 아내와 섬에 놀러온 고지마 반장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네코지마 임시파출소에 근무하는 순경 나나세와 함께 단서를 찾아 섬을 돌아다닌다. 그가 들쑤시고 다니는 와중에 섬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나오고, 그들의 삶이 조금씩 밝혀진다. 이런 전개를 통해 각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잘 드러나고, 조그마한 단서가 하나씩 나오게 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이 웃었다. 소소한 이야기가 흘러가는 도중에 나오는 나나세의 행동과 상황들이 웃게 만든다. 시리즈를 읽으면서 두 번째 작품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부터 등장인물의 개성이 주는 재미를 많이 느꼈는데 이번에는 아주 크게 느꼈다. 수학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쿄코와 고테쓰, 은행을 그만두고 섬으로 온 데쓰야와 그의 아내이자 신관의 손녀 미사,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신관과 곤타, 포르노소설 번역가이자 고양이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시케코와 슬로우 라이프를 외치며 민박집을 손수 고치는 아카네, 누구보다 활약이 두드러진 나나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으로 미스터리를 만들고, 예상하지 못한 살인 등으로 충격을 받지만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만든다.

첫 번째 사건이 고양이 박제 때문에 생긴 소동이라면 거기에 숨겨진 사건은 다르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고지마 반장이 가진 또 다른 알레르기가 빛을 발한다. 그것은 마약 알레르기다. 보통 때 같으면 고양이 박제 사건을 무시하고 지나갔겠지만 마약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 섬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네코지마 하우스 민박집 할머니의 시동생 고지로와 관련된 18년 전 3억 엔 강탈 사건이다. 범인들이 타고 있던 차가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폭파하여 돈이 모두 타버렸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 섬 어딘가에 남은 돈을 숨겨두었을 것이란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다. 미사의 남편 데쓰야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둔다.

황당한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것은 마린바이크를 타던 중에 섬에서 떨어진 사람과 충돌하여 죽은 사건이다. 떨어진 인물은 마약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구와하라 모헤이다. 그는 전직 마약 거래상이었고,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 네코지마에 온 것부터 수상하다. 네코지마의 인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3억 엔 강탈사건이 연결되면 다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조그마한 소동에서 시작하여 황당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엔 살인사건으로 연결된다. 이 연결이 자연스럽고, 그 사이사이 고지마와 나나세 콤비가 펼치는 활약은 웃음과 함께 사건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게 만든다. 

불과 얼마 전에 이 시리즈 두 권을 읽었는데 세부적인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나의 이 암울한 기억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반가운 인물들이 한 명씩 나온다. 직접 연관성을 가지고 등장하지 않고 카메오처럼 나오지만 반갑고 재미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짧은 기간을 다룬 것이 아니라 상당히 긴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또한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 중 하나다. 또 섬에 사는 고양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느긋하지만 고지마의 알레르기와 결합하면서 더 큰 웃음을 유발한다. 전작처럼 고지마 반장이 모든 사실을 다 밝히지 못하고 반전 같은 비밀이 변함없이 흘러나온다. 일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이 미스터리 시리즈가 마음에 든다. 이번으로 끝이라니 정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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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치조지의 아사히나 군
나카타 에이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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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음에 드는 단편집이다.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마음에 든다. 다섯 가지의 사랑이야기가 주는 재미는 대단하다. 기발하고, 반전이 돋보이고, 구성이 재미나고, 사랑과 우정 사이를 생각하게 되고, 고개를 갸웃해본다. 각각 다른 분위기와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의 평범한 우리들의 행동과 심리를 잘 그려내었다. 어쩌면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단숨에 읽었고, 벌써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대한다.

<교환일기를 시작했습니다!>는 기발하다. 처음엔 단순한 고등학생의 교환일기로 생각했다. 서로 사귀는 두 사람이 일상에 서로의 감정을 담아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중반부터 다른 사람이 둘 사이에 끼워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교환일기가 여행을 떠나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부분에선 그 기발함에 놀라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 속에 펼쳐지는 사랑과 성장은 대단히 재미있다. 

표제작 <기치조지의 아사히나 군>은 반전이 돋보인다. 프리터 아사히니 군이 카페 직원인 마야를 우연히 헌혈 룸에서 만난다. 그녀에게 마음이 있던 중에 이 우연한 만남은 반가운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전 카페에서 남녀 한 쌍이 소동을 벌이고, 화난 여자가 던진 의자에 아사히나 군이 코피를 쏟았다. 헌혈 후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데 결혼반지를 보여준다. 거기에 아이까지 있다. 나이는 아사히나보다 한 살 많다. 하지만 둘은 계속해서 만난다. 어떤 날은 아이까지 데리고 말이다. 불륜의 흐름이 이어질 듯한 분위기 속에 아슬아슬한 만남은 계속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한 편의 서술트릭을 읽는 기분이 들고, 마지막은 슬픔과 불안이 잔잔히 흐른다.

<낙서를 둘러싼 모험>은 구성이 재미있다. 마지막 장을 가장 앞에 둔 후 첫 장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낡은 CD를 찾다가 발견한 유성 마커가 사쿠라이의 첫 사랑을 떠올려준다. 이 유성 마커는 학창시절 반 전체 책상에 낙서를 한 전력이 있다. 첫 사랑 도야마와 함께 말이다. 도야마와 교환한 번호로 5년 만에 첫 전화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받는다. 잘못 입력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도야마의 연락처를 친구들에게 묻는다. 이 사이사이에 낙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소동과 이유가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숨겨진 사실이 밝혀지는데 재미있고 흥미롭고 유쾌하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고민하는 남녀들이 나오는 단편이 <삼각형은 허물지 않고 둔다>다. 와시즈 렌타로, 시라토리 쓰토무, 오사나이 고토미가 바로 삼각형의 각 꼭지점이다. 와시즈와 시라토리는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친구다. 시라토리는 미소년으로 여학생들의 동경 대상이다. 그런 그가 같은 반 오사나이에게 반한 것이다. 시라토리에게 고백하라고 말하지만 감기라며 거부한다. 그런데 전개되는 분위기가 삼각관계로 흘러간다. 사랑과 우정이 충돌하고, 감정은 뒤로 감추고, 아픔은 가슴 한 곳에 묻어둔다. 이 미묘한 관계를 조용히 그려내면서 다른 작품처럼 마지막에 살짝 비밀 하나를 흘린다. 뒷이야기가 궁금한 작품이다.

<시끄러운 배>는 처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냐고? 제목 그대로 여고생 다카야마의 배가 엄청나게 크고 다양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배가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소녀의 고민이 주는 재미와 함께 놀라운 청력을 가진 동급생 가스가이가 등장한다. 시끄러운 배를 가진 소녀와 소머즈를 능가하는 귀를 가진 소년의 만남이라니 재미있다. 음악을 위해 가스가이가 다카야마의 배 소리를 녹음하겠다고 할 때 뭐 이런 황당한 놈이 있나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은 둘의 미래를 살짝 예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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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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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이야기란 말에 끌렸다. 물론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란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읽으면서 미스터리 느낌보다 소녀들의 섬세한 감정과 외로움이 가슴에 더 와 닿았다. 연작단편처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첫 편과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래서 처음엔 어! 하고 살짝 당황한다. 그렇지만 곧 그들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각각의 가슴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누가 열일곱 살 안도 마이코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로 말이다.

첫 장면부터 위험해 보인다. 한 소녀가 걷고 있고, 칼을 던 남자가 위협한다. 소녀는 달아난다. 그리고 바뀐 장면에서 안도 마이코의 죽음이 나온다. 당연히 앞에 나온 소녀가 안도 마이코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아니다. 앞에 나온 소녀는 같은 반 노마 나오코다. 이런 설정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것이 비록 끝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말이다. 첫 장 <유리기린>은 이렇게 조그마한 착각으로 시작한다. 감정의 혼란과 죄책감과 공포가 뒤섞이고,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 마이코가 쓴 동화 <유리기린>을 중간 중간 흘려보내 그 소녀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어지는<3월 토끼>는 마이코의 담인 오바타 선생이 관찰자다. 나이든 선생들이 요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대목에서 역시 예전 선생들의 말이 생각났다. 안도 마이코의 학교생활과 그녀가 학교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말한다. 반 친구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안타까워한다는 사실은 너무 날카로운 사실이다. 학년말 반 분위기와 서로 엇갈린 감정과 대화부족은 오해를 불러온다. 여기서부터 진노 양호선생이 보여주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추리와 분석은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화자가 바뀐 <닥스훈트의 우울>은 고입을 앞둔 다카시 이야기다. 그는 소꼽친구 미야를 좋아한다. 그를 깨우기 위해 엄마가 미야가 전화했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다. 그런데 진짜 전화가 온다. 그녀가 주워 키운 고양이 미아가 다쳤다고 말이다. 동물병원 의사에게 최근에 다친 동물들이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특별히 주의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동물들의 상처가 결코 범상하지 않다. 이때 집에 놀러온 나오코를 통해 진노 선생의 추리가 빛을 발한다. 범상치 않은 여탐정이 등장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긴다.

<거울나라의 펭귄>은 학교로 돌아온다. 마이코의 친구 중 한 명을 둘러싸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진노 선생을 통해 여학생들의 외로움과 절박함을 말한다. 아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이렇게 섬세하고 아슬아슬하게 그려낸 작가가 있을까 할 정도다. 안도 마이코 유령 이야기로 시작하여 눈에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두려움을 그려낸다. 혼자 있는 순간 그 두려움은 뼈 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리고 드러나는 반전은 다시금 진노 선생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앞의 이야기들이 현재를 그려낸다면 <어둠의 까마귀>는 과거 속으로 우릴 데리고 간다. 그것은 졸업생 유리에를 통해서다. 이번 이야기의 화자는 야마우치 신야, 그녀의 남자친구다. 그는 유리에에게 청혼을 한다. 그녀의 대답은 ‘예스’도 ‘노’도 아닌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이때부터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고, 악의가 드러나고, 새로운 어둠이 하나씩 밝혀진다. 사람들의 조그마한 말 한 마디, 의식하지 못한 집단의 장난 등이 불길한 현실과 섞이면서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에겐 진노 선생이 있다. 분명하게 사실이 드러날수록 그 어둠은 조금씩 물러난다.

<마지막 네메케토사우루스>는 마이코가 쓰던 동화 제목이다.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모든 것을 가진 듯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장이다보니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누가 범인인지 밝힌다. 약간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다.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고, 말이 저주의 주술로 사람을 가두는 그 순간 과거는 다시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가장 냉철하고 탁월한 추리능력을 가졌던 진노 선생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너무나도 그녀들과 닮았던 그녀 말이다. 미래의 밝은 면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현재의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은 과거가 된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또 어떤 현재가 만들어질지 모른다. 뒤끝이 앞의 어둠을 지우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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