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주의+상업성' 어린이책 모범
출판기획자라면 누구나 베스트셀러를 내는 꿈을 꾸겠지만,그 맛도 몇번 보고나면 기획의 참맛은 스테디셀러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단계에서 한국출판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지적하면, 베스트셀러가 안나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생존주기가 너무 짧아졌다는 데 있다.
한 책이 매장에서 살아남는 시간이 극단적으로는 1주일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결국 한국 출판의 활로는 스테디셀러를 만들고 이를 꾸준히 유통시키는 구조를 확립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책 전문출판사 ‘재미마주’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1996년부터 출판을 시작했으니 이제 5년 남짓 출판을 했으며, 그간 낸 책이라고는 고작 15종에 이른다. 책 1종 제작하는데 적어도 1년은 걸린다. 그렇게 만드니 한해에 3종 내면 많이 낸다. 그러고도 이 출판사의 경영구조는 탄탄하다.
“일년에 3권 낸다니까 무척 한가할 것 같죠. 실제로는 정말 바빠요. 책 1권 내려면 작가나 출판사나 한 숨 돌리면서 고치는 여유가 필요해요. 하나하나 됨됨이를 고쳐가다보면 시간이 후딱 가버리죠. 그렇게 천천히 고쳐가는 것이 책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널리 알려진 재미마주 대표 이호백(39)씨를 북리뷰가 주목하는 이유는 ▲작가가 출판사 대표가 되어 작가주의 정신에 입각한 책 제작방식을 정착시킬 수 있었던 점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는 소규모 출판으로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경영모델을 선보인 점 ▲어린이책 분야가 ‘작가주의 정신+상업적 성공’이란 두가지 모델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 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간간이 내리는 지난 월요일 오전, 서울 마포 우편물 취급소 2층에 있는 재미마주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출판경영과 작가주의 정신이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내내 강조했다. 도리어 작가주의 정신에 가장 투철한 책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상업적이라고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간 한국 아동 도서 출판은 어린이책을 사업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자본으로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있는 출판사에 자신의 언어를 팔았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젠 작가 자신이 제작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언어를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런 작가주의 정신을 반영한 책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어린이책이란 데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출판에 뛰어들게 된 경험과도 일치한다.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 81학번인 이씨가 어린이책과 만나게 된 건 1987년. 김민기씨가 만든 어린이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의 책 제작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이씨는 파리의 서점가에서 그가 대학에서 단편적으로 만났던 유명 일러스트레이션이 모두 어린이책의 삽화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린이책이야말로 완성도 높은 그림을 실어야 한다’는 데 대해 확신하게 된다. 이후 삼성출판사·길벗 등에서 일했던 그는 1996년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 재미마주를 출범시킨다.
재미마주의 책은 지금까지 이른바 ‘죽은 책’이 없다. 모든 책이 끊임없이 재판을 찍는다. 이것이 이 출판사가 일년에 3종만 내고도 탄탄할 수 있는 이유다. 어린이책은 1년에 3000부가 나가기도 어렵다는 현실에서 재미마주의 모든 책은 1년에 평균 1만부는 나가는 스테디셀러다. 이중 ‘세상에서 제일 힘 센 수탉’(이호백 글·이억배 그림), ‘내 짝궁 최영대’(채인선 글·정순희 그림) 등은 재미마주의 간판작품.
“저도 굉장히 상업적이에요. 모두 한 길로 갈 때, 다른 길로 가면 성공한다고 봐요. 그런 것이 가장 상업적인 거죠.” 작가로서 혼신의 힘을 기울인 그림을 내놓으면, 그런 그림을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이씨의 확신은 최근 과열현상까지 보이고 있는 어린이책 출판계에서 한번쯤 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거기에다 ‘장사까지 된다’고 하니, 이씨가 보여주는 제작이념과 경영방침이 어린이책 기획의 긍정적인 모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배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