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왜 읽지를 않나 모르겠어요. 내가요.
대형서점에서 책 고를 땐, 그 멀미나는 방향제 냄새랑 과한 난방, 북적대는 어린이들과 데이트하는 젊은이들에 떠밀려서 평소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책들은 다 까먹고 그저 멋진 표지나 제목에 맘이 동하는 책을 딱 두 권만 골라들었는데. 이 책도 그렇게 만났어요. 집에 데려와선 책꽂이에 얹어두었고요.

트위터에서 이 책이 너무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어제 첫 챕터를 읽었는데 논픽션 엣세이에요. 미국책은 강렬한 장면으로 소설 같이 시작하네요. 경찰이 들이닥쳤대요. 화자/저자가 친구랑 통화중 자살할 거라고 하고 전화기를 꺼놨더니 걱정이 된 친구랑 언니가 경찰에 신고를 한거죠.

저자 제시 크리스핀은 (처음 뵙겠습니다) 자살 충동, 삶이 바닥을 여러번 치고 나서 자신과 영혼으로 공명한 ‘이미 죽은‘ 철학자들의 장소를 찾아 유럽으로 가요. 그 먼 곳, 하지만 저승은 아닌곳에서 자신을 그나마 이해해서 ‘죽지않을‘ 이유를 들려줄 ‘이미 죽은‘ 사람들을, 그들의 기록과 기억들을 찾아볼거래요. 그런데 전... 실은 이런 책인줄 몰랐고요. 표지의 강렬한 복싱 그림이랑 자유로운 여자들의 밝은 웃음이 이미 죽은 ‘숙녀‘들이지만 (아, 그렇구나요. 숙녀 라는 단어가 수상했어요. 요새도 쓰나요? 이 말? 숙.녀.? 목마 타던 시절에나 어울릴 단어 같은데....) 그들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지난한 세월을 말하는줄 알았어요. 그런데 첫 챕터는 베를린에서 만나는 (그곳에서 바닥을 치고 살아남았던) 미국인 철학가 윌리엄 제임스. 자살과 우울증에 대한 실질적 조언과 덜 현학적 글을 남겨서 많은 독자를 뒀다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난 그의 동생 헨리 제임스만 반가웠어요.

딱 한 챕터 읽고 뭘 판단하겠냐마는.... 아, 세상은 진짜 넓고, 철학가 우울증 환자도 넘치는구나, 싶어요. 오늘 배운건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자유의지’가 사람을 살린다! 이렇게 우울하고 또 힘 나는,하지만 말랑거리는 대신 권투 글러브로 때려주는 (아! 철학!) 책을 쓴 저자와 죽은 숙녀, 신사분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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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2-2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의 리뷰를 읽다보면 막 다 읽고 싶어진다는!

유부만두 2018-02-22 09:31   좋아요 0 | URL
이 책 괜찮아요. 예측과 달라서 당황했지만 모르는걸 많이 만나고 배우고 있어요. 예전에 읽었던 ‘외로운 도시‘라는 책과 비슷한 느낌도 들고요.

어렵고 쿨해서 주눅이 들지만....뭔가 얻는 게 있다는? ^^
 

'한여름 밤의 꿈' 대신 '리처드 3세'를 먼저 읽었다. 어젯밤 공연의 감동을 안고 희곡을 읽는 내내 배우 황정민의 강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희곡의 리차드는 황 배우 보다는 더 주저하고 더 간교하며 더 겁을 먹고 있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죽인 영국판 수양대군, 리차드 3세. 그는 형 에드워드 4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장미전쟁 중 열심히 싸웠지만 자신의 불편한 몸 (곱추에 뒤틀린 팔과 다리)에 세상에 적의를 품고 있다.

 

공연에서 그의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고 앤 공주는 더 강렬한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붙잡으려 애쓰는데 엘리자베스 왕비와 앤 앞에서는 간교하게 말하다가 사람이 돌아서자 마자 입술을 비틀며 웃어대는 리차드는 세상에 둘도 없을, 둘이나 있다면 무서워서 큰일날 악인이다.

 

리차드의 광기 혹은 폭력은 신하 헤이즈팅스를 망치로 때려죽이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렇게 희곡에 없는 끔찍한 행위를 넣어서 황 배우의 리차드는 세익스피어의 손을 떠나 그만의 것이 된다. 그에 질세라 일인이역 하신 정웅인 배우 (에드워드4세, 스탠리경)는 계백장군 처럼 스탠리 경의 아들 조지를 칼로 벤다. 희곡에선 스탠리는 족보에 발이 묶여서 (현부인의 전남편 소생 아들 리치먼드가 리차드 왕과 싸우게 됨) 이쪽 저쪽에 반씩 충성할 뿐이고 나중엔 편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조지를 만나러 간다.

 

리차드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과감히 생략해서 워낙 많은 출연과 대사 분량이 더더욱 황 배우에게 집중되었다. 공연 100분 중 황 배우의 대사가 70분을 넘었을테고 그의 굽은 등과 비틀린 손과 발에도 점점 그 존재감이 커져서 리차드, 아니 황 배우가 스러지고 뿌연 김이 무대를 덮어도 이게 끝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몰입해서 본 황정민의 리차드 3세, 유명 배우 공연이라 어느정도 가볍겠거니 했던 마음이 미안했다. 악인에게 이토록 눈과 귀,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고 나니 지쳤고, 늦잠도 잤지만 희곡은 읽었다. 그리고 .... 검색해보니 컴버배치의 리차드 3세가 있다고....디비디로 나와있다고....가격은 ....


 

https://youtu.be/wt7xxO0geAM

 

 

https://youtu.be/BiPwhLLWYvM

연극 보러 가기전에 '장미전쟁'과 '리처드 3세' 를 급하게 공부하고 갔는데, 정말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퍼스트 네임들 에드워드, 헨리, 리차드 들이 자주 나와서 많이 헷갈렸다. 자상한 설명으론 디킨스의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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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2-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유부만두 님표 페이퍼를 애정해요 ~~~~!!!
저는 오늘 게리 올드맨이 나온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배우 황정민 생각을 했는데 여기서 똬악 만나네요!!! 흠칫

유부만두 2018-02-19 21:34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전 황정민의 착한 사람 연기만 봤기에 이번 연극에서 그 악랄한 에너지에 놀랐어요.
 

음식 준비하면서 볼 영화는 아닌데, 은근 웃기고 재밌게 봤다. 작년 겨울에 개봉됐을 때 친구들이 '유부녀가 보기엔 열받을 거'라 해서 넘겼다가 라디오 방송 (난 라디오 책 영화 소개에 잘 낚이는 편) 영화 소개를 듣고 너무 궁금해져서 바로 다운로드 받았다. 영화 보기는 정말 편해졌네. 예전엔 비디오대여점에 가서 거꾸로 세워진 빈 박스에 좌절하기도 여러번, 반납일 넘겨서 벌금에 핀잔도 여러번인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거 모르겠지.

 

영화는 웃기고, 캐릭터 욕도 좀 아니 많이 하고, 이게 뭐야, 하다가 피식 다시 웃게 된다. 뻔한 사람들, 저런 인간들 봤는데 하면서 배우들의 맛깔스런 연기에 박수도 쳤다.

뉴욕 대학에서 예술경영쪽 강사로 일하는 매기, 위스콘신 출신에 퀘이커 교도인 그녀는 매우 참해 보이는 인상이나 행동은 꽤나 예술적(?)이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학과장을 맡을 만큼 능력자를 부인으로 둔, 게다가 같은 분야 인류학을 연구하는 낭만파라 흘리고 다니는 존. 매정하고 굴고 따따따따 말을 쏟아내며 은근 매력적인 대니쉬 액센트의 (핑크 목도리와 페이크 퍼 조끼가 똥머리와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랑꾼 죠젯. 이들이 벌이는 러브 트라이엥글, 그리고 중요한듯 조연인듯 하지만 마지막 한 방을 먹이는 걸로 보이는 피클맨, 가이.

 

 

 

 

이 영화는 '한여름 밤의 꿈'의 틀을 이용하는데 그럼 읽어줘야지, 나도.

 

 

그렇담 미스터 폭스도 만나줘야하고. 아우, 바뻐. 명절 직전에.

 

https://youtu.be/rAOJJ15hHhk

 

 

 

 

 

 

 

 

 

 

 

 

 

 

 

 

그러니까, 난 명절 직전에 영화 보고 책 빌리고 전도 몇 접시나  부치면서 어린이 입맛을 무시하지 못해서 함바그도 고기 두 근이어치나 빚고, (달달하고 맛있구먼. 역시 케쳡이 짱) 나물을 하다 보니 내년 설까지 먹을 것만 같은데...아 모르겠음, 바리 바리 싸들고 멋진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서 시댁에 갔더니 쫘쫜. 나를 기다리던 2부, 만두, 두둥.

지금 난 양 팔이 다 아프지만, 그래도 컴백홈 했기에 뻗어있다. 시댁에서 싸온 음식을 계속 먹으면서. 다이어트가 뭔가요? 먹는건가요? 책은 그리 급하게 빌리곤 왜 안읽는거냐고 물으신다면 ... 팔이 아파서 두꺼운 책은 못들겠다고 하려니 지금 나는 타자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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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2-18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명절 음식 준비하면서 센스8을 봤다는... 이거야 말로 음식 준비하면서 볼 드라마는 아닌 듯. 보다 민망한 장면들이 많아서 혼자인데도 막 주변을 살펴봤다는...
암튼 명절 지내느라 수고 많았어. 오늘까지 계속 게으름 피우면서 푹 쉬어

유부만두 2018-02-18 07:37   좋아요 0 | URL
그건 시리즈 물이죠? 애아빤 시즌1 보다 말더라구요. 배두나 땜에 저도 궁금하긴해요.

책읽는나무 2018-02-1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집에 도착하셨군요?^^
뒤늦게 읽었네요ㅋㅋ
아~~싸가지고 온 음식들 부러워요.....며칠 장 안봐도 든든하겠습니다.
수제 햄버거도 맛나겠습니다
쓰읍~~~~^^

유부만두 2018-02-18 08:15   좋아요 0 | URL
ㅋㅋ 저건 제가 시댁으로 들고 간 음식이고요;;;; 갖고온건 쇼핑백 하나에요.

단발머리 2018-02-18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제햄버거라~~~ 아하~~~ 케찹을 찍어서는 우라차차차차차차~~~
한 입에 쏘옥~~ 앗, 맛있겠다!!!!

유부만두 2018-02-19 12:19   좋아요 0 | URL
함바그, 라고 불러줘야 해요. 채소랑 케쳡이 마니 들어갔거등요. ㅎㅎ

라로 2018-02-1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기스 플랜 봐야겠어요!! 미스터 폭스 얘기가 나온다구요?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환데 말이죠!! 이번에 그 감독이 만든 영화 또 개봉할 거에요!! 이번엔 인간과 개가 주인공이에요.
암튼 유부만두 님의 이런 종합 선물 같은 페이퍼 짱이에요!!!

유부만두 2018-02-19 12:19   좋아요 0 | URL
미스터 폭스 영화 사진을 곁들인 책으로만 읽었어요. 트레일러를 보니 여간 얄미운 여우가 아니네요. ㅎㅎ
인간과 개를 주제로 한 영화라니 기대해 볼게요.

북극곰 2018-02-18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가시나요?! 저도 사실 그냥 맘편히 제가 해서 들고가서 시댁에선 일 안하고 얘기나하고 쉬었음 좋겠어요. 아무리 많이 준비해가도 그럴 일은 없겠지요? 만두같은 것이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으니 -,,- 저는 오늘 오후에야 집에와서 좀 늘어지는 중입니다. 명절 힘들어용.

유부만두 2018-02-19 12: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집에서 다 해가는 편이에요. 어머님 댁 부엌은 아무래도 제가 불편하기도 하고 짬짬이 쉬기 어렵더라구요.
시댁에 오래 계셨다 오셨네요. 월요일이라 더 지치시겠다.... 명절 힘들죠. ㅜ ㅜ
 

시간을 거스르는 편지 전달

나는 매일 훈련소 홈페이지에 전자(위문)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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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2-15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페이지에 위문편지를 쓰면 볼 수 있어? 매일 위문편지를 쓰는 마음이 찡하네

유부만두 2018-02-15 08:17   좋아요 1 | URL
홈피에 편지를 쓰면 관리자만 볼 수 있고요, 거의 매일 담당자가 프린트해서 훈련병들에게 나눠준대요. 애 아빠랑 저랑 매일 편지 쓰는데 어쩐지 편지 아니라 일기 쓰는 기분이 들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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