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향한 팬레터 모음집. 나도 어서 프루스트를 더 읽어 완독하고 싶어진다. 길혜연 역자의 인용문 번역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민음, 펭귄 보다 낫다) 독자의 가슴이 벅차 오른다. 심지어 이 책은 읽기에 어렵지 않다. 프루스트의 미학과 철학을 다루지만 지루하지도 애매하지도 않고 가독력이 그저 좋다요?!! 역자후기도 아주 좋다. 단점이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최고 스포일러인데다 지금 절판인 책이다. (feat. 팔스타프님)
나는 내 고국 불가리아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선생님께서 중요한 텍스트들을 읽어보라고 권유할 만큼 내 프랑스어 실력이 좋아졌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을 통해 처음으로 프루스트를 접했다. "화집은 일종의 외국어로 쓴 것이다"와 "작가의 의무와 노력은 번역가의 그것과도 같다"가 바로 그것이다. 내게 이 말들은 이상하게도, 세계에서 유일한 행사인 우리나라의 알파벳 축제와 더불어큰 울림을 준다. 매년 5월 24일이면 학생들뿐 아니라 지식인들, 교수들, 작가들이 글자 하나를 내걸고 행렬에 참가한다. 나는 내 블라우스 위에, 내 몸 위에, 내 몸 속에 핀으로 글자를 꽂고 있었기에 하나의 글자가 되었다. 말은 살이 되었고 살은 단어들이 되었다. 나는 이 군중의 노래, 향기, 환희 속에 녹아들었다. 나는 프루스트의 이 글들을 읽으며 그것이 나 자신이 이미 경험한 무엇인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또 다른 책으로 번역하고, 읽히고, 나누기 위해 암호로 쓴, 살로 된 한 권의 책과도 같은 나 자신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후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은 나의 직업이 된다. 나는 그 작업을 말라르메, 셀린, 그리고 다른 작가들에게 적용해보려 했고, 그중엔 물론 프루스트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 P176
프루스트를 읽고 나서, 글쓰기는 적어도 두려운 것이 되었다. 나는 밤에 글을 쓴다. 특히 소설들을 쓰는데 가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책장들을 들추어, 그것을 음미하고, 이해하고, 뒤섞는다. 이런 약간의 환각 상태에서, 이제는 세심하고도 민감한 나의 언어가 된 제2의 모국어 프랑스어 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훈련 그이상이다. 프루스트를 읽는 것은 진정한 체험이고, 작가가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경험에 열려 있어야만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어린 마르셀‘이 내는 길이다. - P1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단지 어떤 과거에 대한 탐구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글쓰기는 과거의 재창조, 포이에시스의 표명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내면에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상세히 검토한다. 그는 인생의 의미가 외부에 있지 않고 주도적인 상상력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단어들을 만들어내고 감각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의 고유한 방식 속에 인생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 P184
모친이 유대인이었던 프루스트는 드레퓌스 사건 때 그로서는 드물게 열의를 보였었다. 비록 부친의 가톨릭 신앙에 의거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동생과 함께 드레퓌스의 유죄판결에 항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 재심 청원에 대한 서명운동을벌였고, 서명자 수는 금세 3천 명을 넘어섰다. 후일 프루스트는그 시절의 끔찍한 악감정을 기억하고, 자신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berche du temps perdu』(1913-1927)의 제3권 『게르망트 쪽 Le Cote de Guerrmantes』(1920-1921)에서 그것을 묘사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파리 사교계 최상층의 다양한 인물들을 꿰며, 그들이 이 사회적·정치적 지각변동에 대해 보이는 분노와 다양한 정도의 편견, 그리고 혼돈을 그려냈다. - P59
공감가지 않는 부의 묘사와 느긋함, 한심한 성인지 감수성에 뜨악하기도 하지만 그 촘촘하고 아름다운 (또다른 변태성;;;) 묘사, 그의 문학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 나이에 거울 앞에 돌아와 읽으니 조금은 알것도 같고요.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와제겐 엄청난 비염 알러지라재채기와 콧물로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보자기 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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