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는 은근 코믹한 장면이 많은데 그중 한 장면, 여자에 달뜬 화자가 허겁지겁 다가갔을 때 당황스럽게 나이든 (더해서 평소에는 혐오나 두려움마저 느끼는) 여성을 마주하는 장면도 있다. 예전에 읽었던 한창훈 작가의 소설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으로 발베크에 갔던 시절부터 몇 해가 지난 후 나는 아버지 친구분과 함께 마차로 파리를 달리고 있었는데, 밤의 어둠 속에서 빠르게 걸어가는 한 여인을 보고,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내 행복의 몫을 예의범절 같은 걸로 놓치는 건 무분별한 짓이라고 생각되어,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 미지의 여인을 쫓아간 적이 있었다. 여인은 두 갈래 길에서 사라졌다가 세 번째 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내가 숨을 헐떡이며 가로등 밑에서 본 사람은 내가 그토록 피해 왔던 베르뒤랭 부인이었다. 부인은 반갑고 놀란 마음에 "어머나! 내게 인사하려고 달려오다니 고마워요!" 하고 소리쳤다. (126)





이틀 뒤 또 꽃무늬 보자기 너머에서 물 끼얹는 소리가 났다. 나는즐거우면서 괴로웠다. 의지는 책을 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똘똘 뭉쳐 수돗가 쪽으로 나아갔다.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은 열일곱 살짜리 남자애가 담담하게 볼 수 있는 게 못 되었다.

조금 있으면 보자기가 열리면서 아름다운 젖가슴이 드러날 것이다. 가지런한 등줄기도 보일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때처럼 아랫도리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욕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비누칠하고 밀고 닦고 물 끼얹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저 소리라면 지금쯤 어디를 닦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더욱 확대되고 분명해지고 강렬해졌다. [...] 몸으로 사랑을 한다면 이런 기분이리라. 나는 괴로우면서즐거웠다. 그러다 저 속의 것이 폭발되었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보자기를 걷으며 주인 할머니가 걸어나왔다.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 할머니 덕분이었다. 수돗가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쳐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9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나‘와 레베카의 현실과 현재는 상상과 과거와 뒤섞이고 푸른 수염, 제인 에어, 프루스트 까지 가세한다. 평범한 전반부를 견디면 폭주하는 후반부에 독서의 쾌감이 기다린다. 이 재미있는 걸 왜 묵혀놓았지, 과거의 ‘나‘야???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1-07-19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해서 세라 워터스 <리틀 스트레인저>도 생각났다. 연상작용으로 보관함에 콜린스 <흰 옷 입는 여인>을 담았다.

psyche 2021-07-29 13:42   좋아요 1 | URL
리틀 스트레인저 재미있어?

유부만두 2021-08-02 07:30   좋아요 0 | URL
긴장감 조성과 인물 묘사는 멋졌어요. 그런데 결말이 ....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 , 이 서스펜스는 어쩔거냐고 저자에게 따지고 싶은...ㅋㅋㅋ
아무리 그래도 <레베카>가 일뜽이에요.

2021-07-19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1-07-19 0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더운 여름에 폭주하며 읽으려고 아껴두신 거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7-19 16:44   좋아요 1 | URL
그런가봐요! 덥고 찜찜한 이런 날씨와 어울리는 소설이네요.

Falstaff 2021-07-19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막판에 뒤통수 한 방 얻어터지고 속이 후련해지는 사이코 적 만족감을 느끼는 게 <레베카>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7-19 16:45   좋아요 1 | URL
레베카 정말 정 안가는 인물이다 싶었다가 마지막 한 방에 백점 만점이에요.
 

빌르빠리지 부인이 (자신과) 그녀의 “가문이 [작가들]과 맺었던 사적이고 각별한 관계를 내세워, 그들에 대한 평가가, [화자]처럼 그들과 교류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내리는 평가보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며 “그[작가]들의 가치를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의 말을 믿으라고 한다. (397-8)

소설을 소설 텍스트만 볼 것인지, 작가와 출판 당시의 사회도 함께 다룰 것인지, 작가의 사생활까지 볼 것인지 고민은 지금도 (나는) 진행중.

더해서, 소설이나 다른 문학/예술 작품이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갖는 의미도 따져봐야한다. 그래서 프루스트 ㄱㅅㄲ 같고 그르타.

126) 프루스트가 『쌩뜨 뵈브 논박』 등 많은 논설문에서 소위 실증주의적 평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거듭 가한 비판의 핵심이다. 한 문인의 작품 자체보다는 그의 사생활 혹은 사회적 행태에 관심을 집중하는, 즉 ‘문인의 내밀한 자아‘를 포착하려 하는 대신 가시적 현상들에만 매달리는 평론 관행에 대한 그의 격렬한 비판(오스카 와일드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들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옮긴이 주석> - P7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걸이 안에 초상화가 아니라 초상화 안에 그려진 목걸이

300년 이전 화가의 그림이니 증조모 보다는 더 이전 조상 

집 밖에 (혼자) 안 나간 것은 티치아노 화가가 아니라 초상화 

그래서 진품인 것은 초상화 


그녀의 드레스 위로 늘어져 있는 목걸이가 예쁘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시자 그녀는 매우 만족스러워 하였다. 그 목걸이는 띠치아노가 그린 그녀의 먼 선조 할머니의 초상화 속에 보이는 바로 그것이며, 그 초상화가 단 한 번도 가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그림이 진품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395)










부인은 그녀가 한 목걸이가 옷 위로 나온 걸 보고 할머니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 흡족해 했다. 거기에는 가족들이 아니면 누구하고도 집 밖에 나가 본 적이 없는 티치아노가 그린 부인의 증조모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진품임이 확인되었다. (118)












Elle fut contente que magrand-mère aimât un collier qu'elle portait et qui dépassaitde sa robe. Il était dans le portrait d'une bisaïeule à elle, par Titien, et qui n'était jamais sorti de la famille. Comme cela on était sûr que c'était un vrai. (2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년, 중학교 2학년인 은유는 '느리게 가는 편지' 를 쓰라는 아빠의 강요에 억지로 1년 후 자신에게 도착할 편지를 쓴다. 그런데 이 편지는 1982년 '국민'학교에 다니는 같은 이름의 다른 은유라는 어린이에게 배달된다. 놀랍게도 82년의 은유는 미래의(??) 은유에게 답장을 하는데 편지들이 오가는 사이에 과거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르고, 미래의 은유에게는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 두 은유는 힘을 합쳐 두 사람의 시간이 겹치는/만나는 순간까지 미래 은유네 부모의 비밀 혹은 정체, 아니라면 사연을 밝히려 한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거슨 드라마 '시그널'과 영화 '프리퀀시'의 편지 버전입니다. 



자, 과거의 은유가 지금, 미래에 어떤 사람인지가 핵심인데 (개명을 할 수도 있고)...


이야기는 아주 고전적, 혹은 클리셰 모음집인데 (신파도 빠질 수 없고) 책은 빨리 재미있게 읽었다. 이것도 작가의 힘이라고 할까. 출생의 비밀, 불치병, 아이를 위한 희생, 차별을 겪는 아이 등. 은유(들)의 정체 보다도 두 시대, 특히 과거의 은유가 '빠르게 감기'FWD로 시대를 묘사하는 것, 미래에는 얼마나 바뀌었을지 생각하는 점이 재미있었다. 또 그 많은 사건 사고들도. 다행인지 의도인지 과거의 은유는 '민주화 운동' 세대가 아니라 몸소 겪는 사회 문제는 IMF이다. 이것도 슬쩍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데, 지나고 보면 다 살 만 했던 것인가, 아닌가, 싶었다.  


요즘 중학생 독자들에게 부모 세대 이야기를 응칠,응사, 응팔 시리즈 식으로 (깔끔하고 착하게) 들려주며 부모와 대화를 유도할 수도 있겠다. 우리집에서는 그 것이 안되드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혜윰 2021-07-12 0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타임슬립 청소년 버전이군요^^

유부만두 2021-07-12 07:22   좋아요 3 | URL
네. 과거의 어린이/청소년/어른 (계속 빠르게 자라거든요)과 시간을 넘어 소통하는 이야기에요. 과거가 현재를 이룬다, 랄까요. 뻔한 이야기인데도 아이와 재미있게 (따로 따로 ㅜ ㅜ) 읽었어요.

그렇게혜윰 2021-07-12 07:24   좋아요 1 | URL
제가 중드를 자주 보는데 중드에 진짜 많거든요ㅋ 근데 청소년소설에선 첨보는 것 같아서 신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