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하루키 소설을 읽은게 언제였더라?
지금의 큰아이 나이도 되기 전, 도서관에서 시험이나 과제물 준비를 하는 대신 소설책을 읽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그 땐 도서관에서 작은 서랍에 든 도서카드들을 일일이 찾아서 대출 신청을 했더랬다. 그런거 알아요? 젊은 양반들?) 상경한 과 친구의 자취방에 몇몇이 모여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나만 집에 가는 게 억울했던 시절이었다. 학보의 글은 난해하고 전공서적 문장에선 군내가 났다. 데모나 파업으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엔 삼청동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하루 종일 자막 없는 프랑스 영화를 봤다. 노르웨이는 너무 멀었지만 나도 어떤 '상실'을 안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이 흘러 얼마전에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었다. 그의 소설작법 책 <소설가의 일>을 읽고 나서 그의 노동관(?)이랄까, 소설 쓰기에 대한 생각에 '일부' 공감했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 편협한 소재의 이야기/경험 전달이 너무나 어색하고 징그럽다. 하루키에게 입이나 몸으로만 이용되는 인물들이 측은할 지경이다. 이들은 (대개 여성인데) 용도가 다하면 사라지거나 죽어버린다. 방황하는 "천재" 젊은이 역시 소재로 쓰이고 죽거나 떠난다. 왜이리 소설가나 인물들은 ㅅㅅ 에 집착하고 늘어놓을까, 이십대 초반엔 입과 성기만 뜨거운걸까. 그렇지 않을텐데. 20대 초반의 아이들은 떠벌이고 성행위를 강박적으로 한다. 그러고 그 다음 쪽에선 주인공/화자가 시침 뚝 떼고 덤덤하게 헷세를 읽고 토마스 만을 읽고 조금 눈물을 흘린다. (청소도 빨래도 한다)
무엇보다 삼십대 후반 남자의 인생 다 알겠다는 감상주의로 이 모든 걸 깔끔한 척 포장하는 게 더 미웠다. 차라리 다시 읽지 말걸. 오십 넘어 이 책을 다시 읽는 내 눈이 이렇게 다른 것을 읽을줄은 몰랐다. 그냥 그렇게 내 젊은날의 독서 목록에 남겨 둘걸 그랬지.
무엇보다 중학생 여자 아이의 '발칙한 거짓말'사건 부분이 제일 읽기 힘들었다. 아무리 사악하게 거짓말을 해서 상대 레이코를 공격했다지만 결국 30살 성인 여자가 십대 여자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한 이야기다. 아이가 유혹했으니 어른은 억울하게 당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아이에게 모든 비난이 가야하는 이유는 상대가 성인 남성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여성이라서이다. 하지만, 중학생이라고!!!! 이 남자 작가야. 결국 이 여성은 그녀 나름대로의 '성적 치유 의식'을 주인공과 벌인다. 이걸 원했던 걸까, 하루키상은.
나이든 여성 독자에겐 징그러운 이 과거의 소설이 작가(장강명)에겐 특별한 책이기도 하다는 걸 단발님 포스팅으로 알았다. 성행위가 성장이나 속죄 등의 통과의례로 사용된다는 점에선 이 책이 클래식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아.... 아부지 장례치르고 와서 하는 딸의 '온 몸으로 하는 대화'라는 것이 그 '클래식함'에 어떤 것을 더하는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아, 두 번째는 아니 읽었어야 좋았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드는 생각이다. 우린 너무 자주 만나는군요. 이제 그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