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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으로 느릿느릿 더디기만 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잖아, 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생각했다. 가축들이 그러하듯, 시간 또한 인간의 엄격한 감독 없이는 꿈쩍도 않는다. 시간은 말이나 양처럼 어른의 호령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웅덩이 속에서 교착 상태에 있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갇혀 있는 것만큼 힘겹고 초조하고 뻣속까지 피로감에 찌들게 하는 일은 없다. (100)

 

그들은 우리에게 발치에서 날아오르는 새 같은 공포를 일으켰으나 아직은 골짜기 저편, 바리케이드 뒤로 엽총을 그러안고 우리를 거부하는 어른들, 외부의 비열한 어른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가까웠다. 밤이 와도 누구 하나 우리를 부르러 죽음의 거리에서 달려 나오는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참으로 오랫동안 흙을 계속 밟아 다졌다. (115)

 

 

"알아? 너 같은 놈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 (228)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 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231)

 

 

그러나 나는 흉포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밤의 숲을 내달려 나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미친듯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그것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 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나뭇가지 사이,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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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중국인 지주네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중이다. 외출하고 돌아온 지주에게서 여인은 아들의 처형 장면 소식을 들었다. 지주는 자기의 아이까지 밴 여인과의 관계에 혐오를 느끼며 여인을 내쫓아 버린다. 지주가 본 공산주의자 처형 장면은 이 아주 공들여 묘사되고 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지주, 그리고 그 묘사를 읽는 나, 를 생각하다가 수전 손택을 떠올렸다.

 

친구와 교외에 나갔다가 공산당을 죽인다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들여다보니 벌써 십여 명의 공산당을 죽이고 꼭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좀더 빨리 왔더라면 하고 후회하면서 사람들의 틈을 삐개고 들어갔다. 마침 경비대에게 끌리어 한가운데로 나앉은 공산당은 봉식이가 아니었느냐!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눈을 비빈 후에 보았으나 똑똑한 봉식이었다. 전보다 얼굴이 검어지고 거칠게 보이나마 봉식이었다. 그는 기침을 칵 하며 봉식이가 들으리만큼 욕을 하였다. 그리고 행여 봉식이가 돈을 벌어가지고 어미를 찾아오면 자기의 생색도 나고 다소 생각함이 있으리라고 하였던 것이 절망이 되었다. 

누런 군복을 입은 경비대원 한 사람은 시퍼런 칼날에 물을 드르르 부었다. 그러니 물방울이 진주같이 흐른 후에 칼날은 무서우리만큼 빛났다. 경비대원은 칼날을 들여다보며 슴벅 웃는다. 그리고 봉식이를 바라보았다. 봉식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도 기운 있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입 모습에는 비웃음을 가득히 띠고 있다. 팡둥은 그 웃음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공산당에게 위협을 당하던 그 순간을 얼핏 연상하며 봉식이가 확실히 공산당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날이 번쩍할 때 봉식이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느새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선혈이 솨 하고 공중으로 뻗칠 때 사람들은 냉수를 잔등에 느기며 흠칫 물러섰다. (334-335)

 

책을 읽다가 끔찍한 처형 장면에 책장을 덮고, 한참을 찜찜해 한 적은 역시 최근의 위화의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중국의 그 유명한 처벌을 내리고 있었다. 아, 기억만 떠올려도 손가락이 저릿하게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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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12)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122)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문학은 자유이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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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라는 단어는 `자궁의 병`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리코스`에서 유래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궁이 여자의 몸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폐를 비롯한 내부 장기들을 압박하여 호흡 곤란이나 흉부 통증 같은 신체적 증상을 유발한다고 믿었으며, 이 믿음이 그리스와 유럽 전체로 이어졌다. 1880년대 여자들은 순결과 순진성을 상징하는 코르셋으로 몸을 압박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이에 따라 히스테리 환자도 증가 추세에 있었다. (167)

1950년대의 번쩍번쩍한 잡지 광고에 그려진 `행복한 주부`가 프리단이 말한 유령이었다면 1980년대에 등장한 `슈퍼맘`은 우리를 괴롭히다 그 힘을 소진하고 구겨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또 다른 유령이었다. (256)

나는 여기서 소개한 책들에 비평가나 학자로서가 아니라 `일반 독자`로서 접근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반 독자란 "무엇보다도 ... 어떤 가능성이나 결말에 맞닥뜨리든 스스로의 본능에 인도받아 일종의 완전체, 한 여자의 초상, 한 시기의 윤곽, 문장작법의 이론을 창조하는 ... 사람".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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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러시아. 5월 5일에 눈이 내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꼭 1년 전 오늘이네. 이리나, 바로 너의 명명일, 5월 5일에 말이야. 그땐 몹시 추웠고 눈까지 내렸어" _ [세 자매] 제 1막

"지금 기온이 영하 3도에 서리까지 내렸는데 벚나무에는 꽃이 만발하네요. 우리나라 기후는 납득할 수가 없어요."_ [벚나무 동산] 제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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