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가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후의 파장과 언론 및 정당의 입장이 그의 죽음을 어떻게 끌고 가고 싶은지 어떻게 대처하려 들지도 사실 눈에 빤히 보인다(아니, 보는 만큼 누구나 빤히 알 수 있는 정황으로 추동되고 있다).  

그러나 빤히 보인다고 해서 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추모에 스스로 도취된 측면도 분명 있으나 그보다 정서적으로 편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만 봐도 냉정한 척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 냉정해진다. 민중으로 부르던, 대중으로 부르던 우리들은 냉정하다. 정당 지지도에서 민주당이 지난 몇 년만에 처음으로 거의 전연령대(60대를 제외하고)에서 한나라당을 앞섰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여전히 30%대를 굳건히 사수하고 있다. 대중의 이중적인 잣대가 엿보이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의 이 분위기에 억눌려 자신의 정당지지도를 정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속내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우리들 대부분은 사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는 기회주의자예요.'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집권여당은 조변석개하는 대중의 정치감정이 가라앉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고, 야당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지지도를 유지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계속해서 고조된 상태로 지속되는 추모 분위기에는 애도 이상의 서러움이 배어난다. 마치 부모가 반대한 결혼에 사랑 하나만 믿고, 없는 집으로 시집갔다가 호된 시집살이 겪던 막내딸이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한바탕 초혼이라도 벌이는 분위기다. 문제는 제 아무리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하더라도 7일장이고, 삼우제, 사십구제가 지나면 영혼은 저승으로 보내드려야 한다는 거다.  

딸도 결국 시집으로 돌아가야 하듯 추모분위기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산은 어떻게 분배할 것이며,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누가 보살필 것인가? MB취임 100일 즈음에 벌어졌던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조금만 냉정해지면 보이지만 노제가 펼쳐지는 거리, 봉하마을에서 전해지는 분위기에 취하면 볼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 이 분위기에 취하고, 보수언론들까지 MB정권의 몰락을 점친다고 해서 그 분위기에 섣부르게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탄핵정국에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자기 목소리를 숨긴 사람들은 정동영의 한 마디에 거머리처럼 달려들어 판세를 순식간에 역전시켰다. 지금 노무현의 죽음으로 그동안 말 못하고, 벙어리 심정으로 지내왔던 서러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노무현의 추모분위기 이후에 올 반동에 대비하라! 솔직히 나는 MB정부가 정치를 좀더 잘해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참에 오합지졸 진보가 좀더 단단해지고, 그동안의 자신들을 좀더 성찰해볼 기회가 될 텐데 말이다. 진보는 참 못났다. 그런데 문제는 보수가 더더욱 못난 바람에 어설픈 진보가 그나마 나아보이는 상황은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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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9-06-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북풍 한 방이면 추모정국은 날아가겠지요.
못난 보수지만 그 단단함이란....

바람구두 2009-06-01 15:21   좋아요 0 | URL
그게, 제2차 핵실험까지 했다는데 추모정국에 묻혀버리는 것 보면서 좀 놀라긴 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엔 괜찮은 보수들이 상당히 많지요. 한홍구, 홍윤기 선생 같은... 사실, 따지고보면 요즘엔 제 자신도 '보수'같아요. ^^

2009-06-0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6-01 15:19   좋아요 0 | URL
난처하긴요.
아직 국정원에서 오란 말은 하지 않던데요. ^^

2009-06-01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6-01 15:22   좋아요 0 | URL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의 삶에도 역사에도 생략은 없다고...
다 그만한 댓가를 지불하고 건널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추천은 땡스!

2009-06-01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2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2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치 2009-06-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당이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지지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거. 전 이제 얄팍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발 제대로 편승해줬음 좋겠어요. 그게 바로 정치 아닌가요.
주변 사람들, 이러다가 말겠지... 하는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좀 진보요, 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잊혀지지 않게 나부터 잘살 것인가, 그런 얘기를 하고 그렇게 살았음 좋겠어요. 어쨌거나 전 달라질 거예요. 나는 저쪽 진보랑은 달라, 걔가 무슨 진보야, 이러면서 자꾸 나를 다른 편과 구분짓고 그게 멋있는 건 줄 알고 살았던 세월, 처절하게 반성하고 있어요.

2009-06-01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6-01 16:58   좋아요 0 | URL
죄송한데 또치님의 처절한 반성과 무관하게 전 여전히 좀더 나은 진보를 고민해야할 듯 싶어요. 게다가 전 이 분위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야당의 '그게 바로 정치'라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데 어쩌죠? ^^;;; 다만, 난 이제 달라질 거라는 또치님의 선언은 실천의 의지라 생각해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전 또치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님에 대해 좀 아는데요. ^^

2009-06-02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2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속보로 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정확하지는 않다지만)

순간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충격 끝에 갑자기 온갖 생각들이 밀려든다. 

MB에겐 정치적으로 커다란 압력이 될 듯 하다. 

한 편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정으로 보아  

마지막 가는 길까지 그 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현재까지 밝혀진 사건의 정황으로 보면 

재판이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연루가 사실인 듯 싶다. 

술자리에서나 나눌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또한 현실적인 감각이라 할 때 일국의 대통령이 

50억을 임기 말에 받았다는 것은 비리라 하더라도 

차라리 생계형 비리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를 그토록 궁지로 내 몰았어야만 했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기원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겠지만 

이 파장이 부디 나쁜 쪽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실망했던 사람이었으나 

그의 죽음 앞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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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5-2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늘 만우절??????
바람구두님 진짜에요????????????

바람구두 2009-05-23 10:10   좋아요 0 | URL
오늘이 만우절도 아니지만
만우절 농담으로 남의 죽음을 말하긴 좀 그렇지요.
사실이라고 하는군요. 키티님도 믿기지 않으시는 거죠.
저도 그랬어요. ㅠ.ㅜ

Mephistopheles 2009-05-2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추측성 보도가 뜨더니만..이젠 자살의혹으로
풀어내는 사망확인 기사가 뜨는군요...
휴..

바람구두 2009-05-23 10:11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탓이겠지만
자살이란 표현은 현재 언론보도에서는 삼가하고 있더군요.
그러게요, 정말... 에효~ 입니다.

마노아 2009-05-2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보고서 바로 컴퓨터를 켰는데, 뜻밖에도 메인에 그 기사가 한 개도 안 뜨는 겁니다. 화살표를 몇 번 클릭하니 하나 둘 나타나더라구요.
아침부터 머리가 띵 했어요.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ㅠ.ㅠ

바람구두 2009-05-23 10:48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농담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뇌출혈이라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나중에 그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로쟈 2009-05-2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슨 뜬금없는 만우절 뉴스인가 했어요. 권력무상에, 인생무상입니다...

바람구두 2009-05-23 10:51   좋아요 0 | URL
자살 세계 1위인 나라이긴 하지만
정치인의 자살은 참으로 드문 사건인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검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으니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겠지요.
저도 산에 다니지만 대통령이 미리부터
죽을 자리를 봐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의 산은 토산이 많고, 나무가 많기 때문에
미리부터 살펴두지 않았다면 경호원을 따돌리고 몸을 날려
죽음에 이르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마늘빵 2009-05-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두환, 노태우 같은 놈들도 살아있는데... 아 기사보는 순간 멍하더군요.

바람구두 2009-05-23 10:51   좋아요 0 | URL
원래 그런 거겠지요.
세상 일이란 것이 참...

꼬마요정 2009-05-2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충격이었어요...
순간 입 벌리고 멍하게..
동생들도 오싹하다고 무섭다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네요..

바람구두 2009-05-23 10:56   좋아요 0 | URL
저희 직원들도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고 하네요.

paviana 2009-05-2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재판으로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노무현대통령을 상상했었는데, 저리 허망하게 가시다니....그저 무언가 가슴에 불덩어리가 하나 생긴거같아요.

바람구두 2009-05-23 12:52   좋아요 0 | URL
파비님 말씀이 "가슴에 불덩어리"...
그런 마음이겠지요. 국민들의 가슴에...

마냐 2009-05-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 답슴다. 맘이 안좋슴다. 향후 정국에 관심많은 1인으로서, 그 결단이 또하나의 밑거름이 되기만을 바란다는게..또 맘이 안 좋구요. 명복을 빕니다.

바람구두 2009-05-23 12:53   좋아요 0 | URL
저랑 생각이 같으시네요.

2009-05-2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5-25 09:09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의 뻔뻔하지 못함, 대통령 답지 않았던
한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이었겠지요.
어쩌면 본인 자신의 말처럼 정치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요즘 제 자신을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연꽃언덕 2009-05-24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옷 갈아입으니 속 시원하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답다는 생각도 들었죠. 참 밉다.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간 그와의 세월이 애증의 세월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가, 정말 죽을 자리 정확하게 봐두고, 맑은 정신으로 떠났다.는 생각.
뒤척이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잠이 오질 않네요..

바람구두 2009-05-25 09:10   좋아요 0 | URL
지금은 그저 고인을 애도할 밖에요.
애증의 세월조차 이제 흘려보내야겠지요.

Kir 2009-05-24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무지 먹지도, 자지도 못하겠어요... 끔찍한 악몽일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가, 사람들이 너무 무섭네요.

바람구두 2009-05-25 09:10   좋아요 0 | URL
기운내세요. 저는 인간이란 그런 것이겠지 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서 국밥 한 그릇을 먹는 것 그것이 삶인 게죠.
 

개인적으로 받은 메일이나 쪽지에는 응답하지 않으면서도 왜 알라딘이나 홈페이지에는 글을 남기는지 묻거나 따지는 분들이 있다. 대체로 내 응답이 성의없게 들린 탓이리라 생각한다. 

내 대답은 대체로 마감 중이었다거나 바빴다는 식일 때가 많다.
그 대답은 대체로 거짓은 아니다. 

다만 그 대답은 한두 가지 진실을 감추고 있다. 하나는 당신의 메일이나 쪽지가 내게 어떤 응답을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서 답하는 내용을 글로 쓰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에 올리는 나의 글은 그저 내 상념대로 아니면 그 순간 생각난 어떤 느낌들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짤막한 글 하나 올리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지만 누군가 보내온 글을 읽고 그에 대해 답장을 쓰는 것은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응대해야 한다. 글의 하중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실 작년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하루에 수십 차례씩 이렇게 다른 이의 감정과 생각을 더듬어 일일이 대응하는 일을 했었다. 홈페이지를 연지 조금 있으면 만 9년이 된다. 그 중 거의 7년을 매일매일 사람들의 글에 일일이 응대하면서 보냈다. 커뮤니티를 분리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좀 자유롭게 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토록 무거운 감정과 사고의 노동을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신기할 지경이다. 홈페이지(커뮤니티)를 벗어난 까닭도 내가 더이상 그와 같은 중노동을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나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고 그것을 즐기는 기분이다. 리뷰를 올리지 않는 까닭도 사실은 거기에 있다. 그 이외에도 공적으로 주어진 임무들로 숨이 턱까지 찰 지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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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5-13 10:15   좋아요 0 | URL
맞아...
중노동이었어. ^^

L.SHIN 2009-05-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고 그걸 즐기는 것, 찬성입니다.
저도 요즘은 그렇거든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요즘 들어 매일 알라딘에서 살 수
있지만.^^; 가끔은 대답을 못하거나 안할 수도 있는거죠.
꼭 뭔가를 기대하고 쓴다는 것은 상대에게 은연중에 압박을 주는 것이죠.
그건 정말 싫은겁니다. 자유롭게 오고가는 그런 커뮤니티, 그게 좋아요.^^

바람구두 2009-05-15 11: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
 

흠.... 

내 인생은 마감으로 점철되나보다. 

이거 마감하면 저거 마감해줘야 하고, 

저거 마감하면 뒤이어 마감이 닥친다. 

마감질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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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5-0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시라고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건강은 꼭 챙기면서 일하세요~

바람구두 2009-05-09 08:28   좋아요 0 | URL
히히... 고맙습니다.
 

운동삼아 산행을 시작한지 두 달쯤 되어간다. 몸매관리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허벅지와 장딴지에 근육이 붙는 재미가 느껴져 일주일에 4~5일은 거르지 않고 다닌다. 어제는 비가 와서 산에 오르지 말까 하다가 주말 이틀 정도 동네 뒷산 오르는 일을 하지 않아서 게다가 비도 오고 하니 그 나름 운치있게 싶어 그냥 갔다. 때마침 들고다니던 등산용 스틱이 고장나서 AS맡기고 비브람창이 다소 미끄러운 편이긴 했지만 마침 비도 잠잠해지고 해서 그냥 가볍게 산에 올랐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해서 바로 며칠전만 해도 아직 피어나지 않았던 잎사귀들이 활짝 피어올라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비온 밤 숲속이란 운치있게 여기면 형광빛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싱그러운 잎사귀들, 촉촉하게 젖은 흙길, 밤사이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이 산에 들어서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온 밤 숲속 길은 한 번 으스스하게 여기면 끝도 없이 으스스한 곳이기도 하다.
 
비록 해발고도 200m 남짓 사람 사는 마을들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이라고 우습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다녀본 결과에 따르면 산은 다 산이고 어느 산이든 사점(dead point)을 넘어서기 전엔 누구나 숨을 헐떡이게 되어 있다. 하여간 비도 오고 해서 산속엔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비온 뒤라 가뜩이나 인적 끊긴 산속엔 가끔씩 목줄기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가끔 내 발에 밟혀 부러지는 나무가지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안개가 걷히며 주변 풍경이 한 눈에 드러났지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보니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것이 조금 있으면 금방 산으로 몰려와 다시 안개속을 만들어놓을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산 아래로 향하는데 맞은 편에서 누군가 갑자기 "억"하고 아이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사람 놀래키는 소리를 냈다. 

속으론 깜짝 놀랐지만, 마음속으론 항상 나름의 자신감이 있는 터라 (누구든 이 밤중 산길에서 날 만나면 모르면 몰라도 그 사람이 더 무서울 거란 걸 나는 안다)  짐짓 태연하게 아무 반응도 없이 산길을 내려갔다.  잠시 후 아래로부터 내 나이 또래 되어 보이는 사내가 올라온다. 성질 같아선 밤중에 산길에서 그런 장난 치는 거 예의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인사를 건넸다.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이놈의 등산화가 쭈욱 하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비브람창 자체가 접지력이 다소 떨어지는 데다 내 등산화 밑창이 유난히 밋밋했는데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지에 진흙이 쭈욱하고 묻어나고 말았다. '에휴, 쪽 팔려!' 의연한 척 했는데 속으론 무서웠던 걸까? 하여간 산에선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산에서 귀신 만나는 것보다 비오는 데 산에 갔다고 잔소리 듣는 게 좀 더 무섭긴 하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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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9-04-2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신보다 더 무서운게 잔소리군요.ㅎㅎ
그나저나 연말에 메피님과의 내기는 구두님이 이기실게 확실해지는군요.축하드려요.

바람구두 2009-04-22 09:43   좋아요 0 | URL
사실 관심과 잔소리의 차이는 사소한 느낌의 문제일 텐데...
저는 관심받길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게 잔소리란 느낌이 들면 참지 못하는 편이예요. ^^;;; 참말로 관리하기 어려운 아해죠. ^^


무스탕 2009-04-2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 있는 법이에요. ㅎㅎ
밤길 산행, 특히 비가와서 미끄러운 산은 위험하니 앞으로 어지간하면 감행하지 마세요.
메피님께서 잔뜩 긴장하시겠습니다 ^^

바람구두 2009-04-22 09:46   좋아요 0 | URL
호호호....
메피님과의 경쟁도 한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보단 나이 먹고 차분해지고 싶어서요.
실제로 체중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네요. 들리는 소문엔 이러다가 갑자기 빠진다고 하던데 모르죠. 뭐...
산에 다니면 경쟁할 일이 별로 없어요. ^^

2009-04-21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2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